청산도의 연애바탕길은 길이 좀 길다. 권덕리에서 바닷가를 따라 산허리로 흘러가는 낭길을 걷다 그 길이 구장리 해변에서 끝나면 그곳에서 시작하여 화랑포로 내려가는 분기점까지 계속되는 바닷가 산허리의 길을 연애바탕길이라고 부르는 듯하다. 청산도로 들어온 첫날 나는 화랑포 분기점에서 시작하여 그 길을 절반 정도 걷다가 당리로 빠져나갔었다. 오늘은 나머지 절반을 구장리에서 반대 방향으로 걷는다.
구장리의 해변 풍경이다. 청산도에선 당리, 읍리, 구장리, 권덕리 등등으로 불리는 마을과 마을의 사이로 산맥이 등줄기를 세우고 있다. 마을에서 마을로 가려면 그래서 작은 산을 넘어가야 한다. 마을은 바닷가에 자리잡고 있다기 보다 산과 산 사이로 놓인 골짜기의 품에 안겨있었다. 나는 바다를 보겠다고 틈만 나면 바다를 힐끗거렸지만 하루 종일 바다를 몸에 담아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의 마을은 골짜기에서 평온을 구했다.
길이 다시 숲속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가파르지는 않았다. 구정리 바닷가에서 길이 막 시작되는 곳에는 넓은 바위가 약간의 경사를 보이며 바다로 기울어져 있었다. 바위에 몸을 눕히고 시간을 보내며 파도 소리와 한참 동안 함께하고 싶은 곳이었다.
연애바탕길이라고 누가 만든 것인지, 아니면 자연스럽게 생긴 것인지 바위에서 하트처럼 생긴 문양을 만났다. 바위에까지 새겨지는게 사랑이니 사랑의 힘이 참 놀랍기는 하다. 하지만 때로 바위보다 더 굳어서 사랑의 자리를 아무리 구걸해도 자리를 내주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때문에 마음에 사랑을 새기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싶다. 바위는 완력 앞에 굴복하지만 마음은 완력 앞에선 더더욱 자리를 내주지 않기 때문이리라. 새기는게 사랑이 아니라 사실은 스며드는 것이 사랑일 것이다. 바위의 하트 문양도 새겨진 것이 아니라 오래 세월에 걸쳐 바위에 스며든 것인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 함께 살고 있다면 사랑은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스며들었을 것이며, 스며든 사랑은 새겨진 사랑처럼 선명하진 않지만 알고 보면 서로에게 깊이 자리한 것이리라.
오르막이다. 길이 오르막이 되면 은근한 기대를 갖게 된다. 오르막의 끝에서 펼쳐질 풍경 때문이다. 길은 오르막에서 잠시 우리의 눈을 가린다. 그리고는 풍경을 오르막 너머에 예비했다가 짜자잔하고 풀어놓는다. 오르막이 눈을 가리면 그때는 오르막의 끝에서 하늘만 보인다. 눈을 가리고도 푸른 하늘을 우리 눈에 가득 담아 걸음을 이끌 수 있는 것은 오르막밖에 없다.
오르막을 올라가자 아래쪽으로 바다가 펼쳐진다. 아직 오전 시간이라 비스듬히 바닷 물결을 간섭하는 빛 때문에 바다가 온통 빛으로 반짝거린다. 바위에서 햇볕을 쬐고 있던 물새 한 마리가 나의 인기척에 놀라 급하게 바다로 헤엄쳐 나간다.
멀리 바다를 살펴보니 목만 내놓은채 바다를 헤엄치고 있는 물새 두 마리가 보인다. 흔히 새하면 하늘을 나는 것을 연상하게 되는데 물새는 날기도 하고 헤엄을 치기도 한다. 날 때는 날개에 의지하고 헤엄칠 때는 발에 의존할 것이다. 아마 우리 눈에는 유유자적하게 보여도 지금 물속의 발은 열심히 앞뒤로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날고 긴다는 것이 물새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람들이 걷기에 좋게끔 마련해놓은 청산도의 길을 슬로길이라고 부른다. 천천히 걸으라는 길이 아니라 걷다보면 풍경에 취해 저절로 걸음이 느려진다고 해서 슬로길이라고 한다. 가끔 그 길에서 우체통을 만나게 된다. 바람과 바다가 있는 곳에서 생각나는 사람에게 엽서 한 장 쓰는 것도 괜찮은 일이 될 것이다. 그냥 엽서를 펼치면 아마도 지나가던 바람이 그때의 우리들 마음을 대신 엽서에 적어줄지도 모른다. 또 해변을 부드럽게 훑고 있던 파도 소리가 숲을 헤치고 올라와 파도 소리도 그 엽서에 하얗게 새겨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렇게 되면 엽서를 받은 사람은 그것을 들여다보는 순간,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계속 걷고 싶었지만 그녀를 만나기로 한 당리의 주차장으로 가야하는 길목에 이르렀다. 청산도 숙박 하룻만에 마치 청산도를 다 꿴듯한 느낌이다. 섬이 그다지 크질 않아 부담없이 하루나 이틀 정도 종일 걸을 수 있는 듯 싶다. 당리로 나가는 방향에서 밭의 주변으로 돌담을 높이 쌓아놓은 길이 나타났다. 갑자기 바람이 길을 엿보지 못하게 되면서 엄청난 아늑함을 선물했다. 쭈구리고 앉아 사랑 얘기를 속삭이기에 딱 좋아 보였다. 괜히 연애바탕길이라고 이름붙인 것이 아닌가 보다.
나무가 눈에 익다. 어제 걷다가 보았던 나무이다. 어제는 그 앙상함으로 내 눈을 채웠었다. 오늘은 새가 한 마리 찾아와 앉아 있다. 앙상함이 훨씬 덜해 보인다. 우리도 그럴 것 같다. 마음이 스산할 때 그냥 찾아와 곁에 앉아있다 가는 사람만 있다고 해도 마음의 스산함을 크게 덜 수 있을지 모른다. 겨울 가지의 앙상함은 봄까지 기다려 잎이 나고서야 달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날아가다 그 가지에서 날개를 접고 짧은 휴식을 청한 새가 그 앙상한 계절의 스산함을 달래주기도 한다. 나무를 위하여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 있었다. 나무를 오래 배려해주진 못했다.
다시 그녀를 만났다. 이곳은 <봄의 왈츠>라는 드라마를 촬영했던 곳이라고 한다. 그런 드라마가 있었냐고 물은 것이 우리의 반응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사진 한 장을 남겼다.
외국인 두 명이 이 촬영장을 어슬렁거렸다.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한국의 유명 드라마인 <봄의 왈츠>를 촬영한 곳이라고 말해주었고, 여배우의 이름을 물어서 나도 그곳에서 안내를 하는 분에게 물어본 뒤에 한효주라고 말해주었다. 촬영 세트의 내부를 찍어도 되냐고 물어봐서 맘대로 찍으시라고 했다. 외국인들을 뷰티플을 연발했다. 두 사람 모두 영어 선생으로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나보고 뭘하는 사람이냐고 물어서 포토그라퍼라고 했다. 스튜디오도 갖고 있냐고 해서 스튜디오 없는 프리랜서 사진가라고 했다. 나보다 한국 역사에 대해 더 잘 아는 것 같았다.
2 thoughts on “청산도의 연애바탕길, 나머지 절반 – 6일간의 설여행 Day 5-2”
그래서 저 빨간 우체통의 이름이 느림우체국이군요.
수거하러 왔을 때 속에 편지나 엽서가 하나도 없어서 허무할 때도 있을 듯 싶어요.
요 바로 뒤가 갯돌이 구르는 바다인데 내려가보질 못했어요.
섬기행이 상당히 괜찮은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