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6일째이다. 서울로 올라가기로 했다. 그녀는 설을 쇠는데 들어가는 돈을 갈라서 3분의 1은 어머니께 드리고 3분의 2는 우리가 갖고 여행길에 올랐다. 떠날 때의 우리 계획은 가급적 돈을 아껴서 진도를 시작으로 오랫 동안 남쪽 바닷가를 떠도는 것이었다. 그리고 돈이 떨어지면 올라오기로 했었다. 일주일은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하루가 빗나갔다. 원래 완도에서 공짜로 묵기로 한 곳이 있었는데 미리 연락을 주지 못하고 바로 당일날 연락을 하는 바람에 그 날의 여장은 모텔에서 풀어야 했다. 아는 분이 전화까지 걸어주었는데 미리 연락을 못한 것이 조금 미안하기도 했지만 행선지가 어떻게 바뀔지 여행하는 우리도 알 수 없는 처지여서 어쩔 수가 없었다.
여행 6일째의 아침은 어둠에 묻힌 지리 해변을 걸어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민박집을 나와 해변이 눈에 잡히는 거리에 서자 새벽 어둠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검은 윤곽으로 그려내고 있는 바닷가의 방풍림이 눈에 들어온다. 내려가서 나무들 사이로 걸어보았다. 해변을 걸을 때는 파도가 우리의 걸음을 수직으로 곁눈질하고, 소나무 숲을 걸을 때는 푸른 눈을 가늘게뜬 소나무 잎이 우리들을 내려다 본다.
동이 트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뿌옇게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아직은 어둠이 말끔히 걷히질 않아 여기저기 가로등이 불을 밝힌 그대로이다. 논둑길을 걸어 다시 마을로 향했다. 폭이 아주 좁은 논둑길은 균형을 잡아가며 걸어야 하는 길이다. 어릴 적 나는 약간의 불안을 동반하는 그런 길을 잘 걸어다녔다. 균형을 잃으면 불안한 길이었지만 균형을 잘 잡으면 재미나는 길이었다.
경운기 한 대가 일터로 향한다. 이곳에 여행온 사람들은 가끔 길을 걷다가 경운기를 얻어타는 재미도 있는 듯하다. 하긴 저 뒤에 앉아 있으면 여행의 재미가 배가 될 것 같기는 하다. 승용차도 심장을 가졌지만 그 심장을 마음대로 울리며 다니질 못한다. 항상 소리없이 조용하게 심장 소리를 누르며 달려야 하는 것이 승용차이다. 그에 비하면 경운기는 쿵쾅쿵쾅 마음을 요동치는 대로 마음대로 울리며 달린다. 그것이 경운기의 재미이다. 승용차에선 평생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재미이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 재미는 여행 중에 얻어탈 때만 느낄 수가 있다. 일터로 나가는 경운기의 뒤로 경운기의 심장 박동이 탈탈탈탈 울리고 있었다.
우리가 묵었던 지리의 돌담민박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골목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나온다. 이곳의 민박집들은 죄다 남도민박이라는 이름을 또하나 달고 있어 처음에는 그녀가 모든 민박을 남도민박으로 헷갈렸다. 물어봤더니 일종의 연합회 비슷한 것이라고 한다.
해변을 돌아보고 다시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마당에 서면 멀리 해변이 보이는 집이다. 아침에 가볍게 집 뒤의 산에 올라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뒤의 산을 넘어가면 내가 이틀 동안 걸었던 섬 남쪽의 해안으로 갈 수 있다. 산을 넘어 만나는 그 해변의 느낌도 괜찮을 듯 싶다.
어제밤 블로그 개설해 주었다고 미모의 안주인이 내준 전복죽이다. 서울에서 먹는 전복죽은 사실은 전복죽이 아니라 소라죽이라고 했다. 전복이 워낙 비싸서 전복죽으로는 타산을 맞추기 어렵다고 한다. 서울의 전복죽 색깔이 쌀의 흰색이 완연한 것은 그 때문이라고 했다. 원래 전복죽은 내장을 넣어야 하는데 소라는 그렇질 못하다는 것이다. 내장이 들어간 전복죽은 색깔이 달랐다. 전복은 내장 속에 오랫 동안 바다를 머금어 그 색을 내장 속에서 골고루 담아둔다. 그 색이 우러난 전복죽은 그래서 색이 다르다. 다먹고 입맛을 다셨더니 한그릇 더 내준다. 냉큼 받아먹었다. 죽은 속이 금방 꺼지게 마련인데 이 날 하루 종일 속이 든든했다. 전복죽은 죽이었지만 하루를 지탱해주는 힘으로 보면 밥 이상이었다. 그녀가 전복죽을 대접받았으니 서울 올라가면 명함을 예쁘게 디자인해서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우리도 받으면서 내줄 것이 있어 즐거움이 컸다.
민박집 아저씨는 일찌감치 다른 집의 전복 양식장으로 품앗이를 가고 없었다. 부산에서 살다가 아버님이 나이가 들어 힘들어지면서 아버지의 전복 양식을 돕기 위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이제 고향에 돌아온지 3년 정도 되어간다고 했다.
밥먹고 나와 민박집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뒤쪽의 빈 공터에 별채를 지어 독립된 민박을 운영할까 생각 중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요즘 사람들은 놀러와 있는 동안 사생활이 보장되는 독립된 공간을 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추가로 별채를 지으려고 한다는 민박집 뒤쪽은 터가 높아 전망도 훨씬 좋을 듯 보였다. 민박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 함께 시간과 말을 섞는 것이 재미인데 이제는 사람들이 그런 재미보다 저희들끼리 지내는 재미를 더 탐하는가 보다. 우리는 주인 아저씨, 아주머니의 얘기를 듣는 자리가 아주 좋았다.
좋은 아침을 대접받고 서울로 가기 위해 도청항으로 나왔다. 9시 배라고 한다. 항구에 배들이 가지런히 정박되어 있다. 다음에 오면 배를 타고 섬을 한바퀴 돌아보는 색다른 경험도 가졌으면 싶다.
얘기를 들으니 어제 상당히 많은 차가 빠져나가 오늘은 크게 기다리지 않고 배에 차를 실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은 배를 11대까지 운행하지도 않는단다. 정말이지 이번 여행은 번잡함은 잘 피해서 여행한 듯 싶다.
청산도에 한 대밖에 없는 버스가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항구에서 배에서 내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섬을 한 바퀴 도는 듯하니 이 버스를 타고 당리쯤 내려서 바닷가따라 섬을 반정도 걷고 다시 버스를 타고 항구로 돌아와 완도로 나오는 것도 괜찮은 하루 일정이 될 듯 싶다. 하지만 시간이 그렇게 맞을지는 자신할 수가 없다. 청산도는 길이 다양하고 크게 부담이 없었다. 일주일 정도 묵으면서 여기저기의 길을 조합하여 무궁무진하게 걸어볼 수 있는 섬이 청산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배는 항구를 떠나고 작은 배 한 척이 빠른 속도로 우리의 옆을 지나 항구로 들어간다. 우리는 떠나고 너는 남는 구나.
항의 바깥에선 커다란 배 한 척이 우리 배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다. 짙은 녹색의 바다 위에 떠 있는 푸른 배였다. 바다는 산의 녹음을 가지고 싶어했고, 배는 바다의 푸른 빛을 갖고 싶어 했다.
이제 청산도와 작별이다. 며칠 더 묵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의 미련을 섬의 어느 구석엔가 남겨두고 우리는 떠난다. 20여년을 넘게 산 서울을 떠날 때는 아무 마음의 미련없이 훌쩍 떠났으나 단 사흘을 머둔 청산도에선 섬의 어느 구석에 마음의 미련을 남긴다. 해는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어제 저녁 보적산 꼭대기에서 보냈던 해이다. 잘있어라, 바다나 산이나 하늘이나 그 어느 곳에 시선을 두어도 푸른 빛을 우리 눈에 담아주었던 섬이여. 또 언젠가 다시 올날이 있으리라. 헤어짐은 섭섭하지만 그 서운함으로 서로 묶이는 것이 우리의 삶 아니랴.
4 thoughts on “청산도 돌담민박의 전복죽과 섬과의 작별 – 6일간의 설여행 Day 6-1”
정말 돌담민박 이야기,전복죽,올려주셨네요. 재미있게 봤습니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정말 부럽네요. 두분 언젠가 꼭 다시 청산도에 오셔야해요. 4월8일부터30일까지 슬로우걷기축제와 유채꽃축제를 한답니다. 제가 실력이 좋으면 사진 찍어 올려서 보여 드릴 텐데 아쉽네요. 아들이 휴가 나와서 알려줬는데 또 잘 모르겠는거예요. ㅎ ㅎ
두분 건강히 잘 지내세요^&^
요즘도 그 전복죽 얘기 가끔하고 있어요.
컴퓨터는 하나둘 알아가시면 되죠, 뭐.
아마 배워가는 재미가 남다를 거예요.
며칠 전에 혼자 부산 갔다가 왔는데
청산도 생각이 많이 나더라구요.
두 분도 항상 건강하세요.
이상하게도 여행지에서의 새벽 산책은 멋스런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더군다나 청산도 같은 물 좋고 경치 좋고 공기 좋은 여행지라면,
아무리 전날에 노곤한 여정이 있었더라도 더더욱 새벽에 눈이 떠질 것 같습니다.
새벽에 낯선 여행지를 어슬렁거리기. 여행 마지막날의 새벽산책.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셨겠습니다. 제대로 된 전복죽만큼이나요.^^
젊은 날엔 여행할 때 둘이 한적한 곳에서 속닥이고 싶어하고,
좀 나이들어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얘기듣는게 큰 재미인 듯 싶어요.
민박집 주인내외 얘기듣는게 큰 재미였던 것 같아요.
별채로 뚝 떨어진 민박은 그런 재미는 없는 듯.
그렇게 얘기나누다 전복죽도 얻어먹고.
섬에서 새벽 산책은 빼놓을 수 없는 재미죠.
지리만 잘 알았으면 뒤의 산을 올랐을지도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