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갖고 부산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송도에서 하루를 묵었던 우리는 다음 날 남항대교를 건너 산복도로라 불리는 길을 따라 태종대로 갔었다. 길이 산 허리로 흐르고 있었다. 마치 서울의 남산 중턱으로 흐르고 있는 길과 비슷했지만 서울의 남산길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과는 확연하게 다른 풍경을 우리에게 안겨주었다. 그 길을 차를 타고 가면서도 이 길은 차로 가기보다 언젠가 기회되면 천천히 걸어가야할 길처럼 느껴졌다. 이번에 부산 내려가서 그 기회를 얻었다. 남항대교를 건너온 걸음을 산복도로의 아래쪽으로 들여놓았더니 산복도로 아래쪽으로 바다를 따라 오르거니 내리거니 하면서 흘러가는 해변가의 산책로가 있었다. 그 길을 따라 걸었다.
시작하는 곳의 길은 이렇다. 위쪽으로 보이는 집들의 옆으로는 산복도로라 불리는 찻길이 흘러간다.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면 태종대를 만날 수 있다. 태종대까지는 좀 멀다. 볕이 따뜻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나와 걷고 있었다. 연신 파도가 밀려와 부서지고 있었지만 파도 소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사람들의 걸음걸이에 박자를 맞춰주지 않았다. 사람들도 걸음의 박자를 맞추며 걷는 사람은 없었다. 따뜻한 날씨에 시간을 노근하게 주저앉히고 천천히 걷다가 파도 소리가 해변을 손으로 쓸어내며 들려주는 노래 소리에 한참 동안 귀를 내주며 걸을 수 있는 길이었다.
길을 걷다 위를 올려다 보았다. 산복도로 길가의 어느 집에 하늘이 내려와 있었다. 정녕 하늘을 꿈꾼다면 하늘 높이 올라갈 필요가 없다. 다만 하늘의 색을 가져오면 될 뿐이다. 색을 집에 내준 하늘이 색을 내주고도 집의 위로 더욱 짙게 푸르러 있었다.
세상의 이치도 어찌보면 이와 같으리라. 하늘의 세상을 꿈꾼다면 높이 올라가려고 할 일이 아니라 그 하늘의 뜻을 가져올 일이다. 그 하늘의 뜻은 높은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세상의 가장 낮은 데로 내려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냥 그물을 내리고 거두기만 해도 우리에게 풍성하게 먹을 것을 내주는 바다도 마치 하늘이 내려앉은 빛을 하고 있지 않던가.
부산 절영 해안 바닷가에 위로는 하늘이 있었고, 어느 집에 그 하늘의 색이 낮게 내려와 앉아 있었으며, 그 아래로는 하늘빛의 바다가 출렁거리고 있었다.
두 어른이 바닷가에 앉아 있다. 지금 바다 풍경을 즐기고 있는 중이 아니다. 두 분은 지금 놀이에 빠져 계시다. 바로 앞쪽의 바위 위에 돌멩이를 얹어 놓고 작은 돌멩이를 던져 그것을 맞추는 내기가 두 사람의 놀이였다. 바닷가에선 저렇게 놀아도 되겠구나. 담에 친구들하고 바닷가에 놀러가면 요런 놀이로 저녁 내기를 해봐야 겠다. 아니면 바위 하나 정해놓고 가장 그 바위 가까이 돌을 붙이기 같은 놀이를 해도 될 것 같다. 바닷가에선 단순하게 돌을 가지고 놀 수 있는 방법이 많을 듯 보였다. 돌탑 쌓기도 좋은 방법일 듯 싶다.
내가 건너온 남항대교에 눈길 한번 주었다. 지난 번에 내려왔을 때는 건너편 해안을 섭렵했는데 이번에는 그때의 맞은 편 해안을 걷고 있다. 지난 번에 건너편 해안을 걷고 있을 때는 이쪽으로 많은 눈길을 주었다. 이번에는 송도쪽으로 많은 눈길을 주며 길을 걷는다. 한쪽으로 그저 몰려가기만 했던 내 눈길이 오늘에야 비로소 가운데서 만나고 있을 것이다.
이 형형색색의 계단을 일러 피아노 계단이라고 했다. 아무리 밟아도 소리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한발 옮길 때마다 높이는 달라진다. 높이가 달라지니 마치 누르는 건반에 따라 음색이 달라지듯 풍경의 느낌이 달라진다. 그렇다면 피아노 계단이란 것이 괜한 소리가 아니라 여기서 한번 높이로 연주하는 풍경의 노래를 들어보라는 얘기인가? 그렇지만 그렇다면 산은 온산이 다 피아노 산이게.
피아노 계단을 올라가니 넓게 해변 풍경이 펼쳐진다. 물론 눈앞에 보이는 해변으로 다시 내려갔다. 길은 올라갔다 내려갔다는 반복하며 흘러간다. 산복도로로 잠시 걷다가 내려가도 될 듯하다. 하지만 나는 계속 해변을 따라 걸었다.
해변의 곳곳에 의자가 있었다. 슬쩍 밀면 옆으로 쓰러질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한번 슬쩍 밀어보았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거대한 탑 하나를 만났다. 성장과 발전, 균형의 의미를 담아 만들어놓은 돌탑이라고 한다. 어디 산업 단지에 있어야할 탑이 엉뚱한 곳에 자리잡은 느낌이다. 내 눈에는 마치 드릴처럼 보였다. 하늘까지 구멍을 내고 싶은 욕망의 부산물같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자연은 그냥 자연 그대로 두면서 최소한으로 손을 댈 때가 가장 좋은 듯 싶다.
돌들이 길에 꽃을 피워놓고 있었다. 돌들이 모여 원형으로 손을 잡고 춤을 추면 그곳에서 돌꽃이 핀다. 꽃을 밟으며 걸었다. 밟아도 아파하지 않는 꽃, 돌꽃이었다.
바다를 눈에 담으며 천천히 걸을 수 있는 좋은 길이었다. 길은 오르락내리락했지만 올랐을 때는 풍경을 펼쳐주고 내려갔을 때는 밀려드는 파도를 바로 발끝에 둘 수 있어 좋은 길이었다. 아는 사람들은 그 해변에서 해초를 건지기도 했다. 저녁 반찬까지 내주는 해변인 셈이다. 바위가 만들어내는 풍경이 좋아 가끔 걷다가 멈춰서 바위마다 이름을 붙여보기도 했다. 가령 어지렇게 뿌려져 있는 바위 중에서 셋만 골라 3형제 바위라고 묶는 식이었다. 그럼 저 바위는? 걔는 놀러온 이웃집 아이야. 나는 그렇게 이름짓기 놀이도 하면서 절영 해변을 따라 걸었다.
계속 가면 태종대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아무래도 너무 많이 걸은 것 같다. 중리 해변까지만 걸었다. 멀리 보이는 산의 뒤쪽에 태종대가 있다. 절영 해안이라고 하는데 중간쯤부터 중리 해변인 듯하다. 절영 해안이란 이름은 영도의 옛이름인 절영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다음에 오면 중리 해변에서 시작하여 바로 뒤의 감지 해변으로 넘어가고 거기서 다시 태종대로 걸어볼 생각이다.
해가 지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나오다가 일몰 사진을 찍기 위하여 백련사라는 절에서 내렸다. 봉래산에 오를까 했는데 시간이 너무 늦어 산의 정상으로 가기는 어려울 듯 보였다. 산을 조금 올라가다 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절이 상당히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다 전망이 좋아 그냥 백련사에서 찍기로 마음을 먹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데 저녁 시간이 햇볕을 거두어가면서 바람끝이 상당히 쌀쌀해졌다. 주지스님으로 보이는 듯한 분이 날 부른다. 추운데 꿀차 한잔 하라고 했다. 졸지에 꿀차를 한잔 받아들었다. 손에 쥐자 온기가 따뜻했고 입속에서 달콤한 맛으로 퍼졌다. 백련사는 오래 기억될 듯하다. 부산의 해변가를 떠돌다 몰운대에선 안동소주를 한 잔 얻어마셨고, 영도의 백련사에선 따뜻한 꿀차를 얻어마셨다.
송도 저편으로 해가 지고 있다. 붉은 기운보다 노란 기운에 더 많이 느껴지는 일몰이었다. 일몰의 색감마저도 때와 장소에 따라 서로 다른 것 같다. 이렇게 노란 기운이 많이 느껴지는 해넘이 장면은 처음이었다. 부산의 아침은 해운대에서 열고, 부산의 저녁은 영도의 백련사에서 보는 송도의 일몰로 마무리했다. 온전히 하루를 열고 닫은 느낌이었다.
4 thoughts on “절영해안 산책로 – 무박 3일의 부산 여행 6”
다음에 부산에 가시면 ‘아카시아’ 휴게소 꼭 확인해 봐주세요.
만약 ‘아카시아’ 휴게소가 있다면 거기서 꼭 밤바다를 내려 보세요.
호박등불을 내걸고 잠자듯 떠 있는 배가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거에요.
이왕이면 곁에 <침묵 속의 공감>을 느낄 수 있는 ‘그녀’가 있으면 더 좋겠죠?
아 참!
태종대 바닷가로 내려가셔서 차돌을 씻고가는 파도소리도 꼭 듣고 오세요.
정말 낭만적이고 환상적이랍니다. 잊지못할 추억이 될 거에요.
부산을 고향으로 자란 사람이 있으니 말하면 알거 같아요.
태종대 바닷가의 차돌씻기는 소리는 들어봤어요.
아주 오래전 태종대 갔을 때 그 소리에 반해서
오랫동안 그 자갈 해변을 걸었던 적이 있었죠.
그래서 한동안 태종대 바닷가를
부산의 페블비치라고 부르곤 했어요.
다시 부산에 가니 태종대는 잘 기억이 나질 않고
그 태종대 바닷가의 자갈 해변만 기억나더군요.
(사진 6)
그대는 가고
세월도 가고
무심한 파도만 밀려와
옛일을 말해줍니다.
챠르르 챠르르
조약돌 노래 벗삼아
들려주는
우리들의 옛이야기.
* 연인과도 걷고, 친구와도 걸었던 해변길. 파도가 밀려왔다 쓸려갈 때마다 “챠르르 챠르르” 노래하던 태종대의 조약돌 노래가 새삼 그리워집니다. 잊을 수 없는 젊은 날의 한 초상화죠. ‘아카시아 휴게소’는 없던가요?
요기서 조금 더 가면 태종대라고 하더군요.
혼자 내려간 길이라 여행을 이 해변의 끝에서 마감했어요.
아카시아 휴게소가 아마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바다에 눈이 팔려 사실은 다른 것엔 별로 시선을 주질 않았어요.
부산에 좋은 사람이 있어 내려가곤 했었죠.
또 부산에 가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