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보면 사랑은 세 가지로 왔다.
처음에 사랑은 존재의 사랑이었다.
그냥 옆에만 있어도 좋았던 시절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얼굴보며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이 행복이었다.
서로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신을 버리고 상대의 눈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서로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옆에 있기만 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채워졌다.
좋아 죽을 듯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오래 갔으면 아마도 좋아서 죽었을 것이다.
역시 우린 사랑보다 생존 본능이 강하다.
그 다음에 사랑은 상대가 내게 해주는 것으로 왔다.
생각해보니 그녀는 내게 많은 것을 해주고 있었다.
사람들이 말했다.
그녀가 해주는 한끼의 밥에 감사하라고.
사랑은 서서히 감사할 것을 찾는 행위가 되어 갔다.
밥을 먹고 나면 가끔 감사의 보답으로 설거지를 했고,
정말 설거지 하나가
사람을 이렇게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에 깜짝깜짝 놀랐다.
아침마다 그 오랜 세월 그녀가 챙겨준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할 듯 싶었다.
함께 살아가는 일상이 온통 감사가 되는 생활의 사랑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사랑이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행위가 되자
아무 것도 해주지 않고 있을 때는
함께 있으면서도 마치 옆에 없는 듯했다.
그녀가 무엇인가를 해줄 때는
그 옆에서 무릎꿇고 감사 기도라도 올리고 있어야 할 듯했다.
감사는 생활의 사랑을 오랫 동안 지탱시켜 주었지만
가슴을 울리진 못했다.
오랫 동안 함께 할수록
사랑이 점점 더 넓고 높게 쌓인다는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오히려 사랑이 자꾸 빛이 바랜다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시작 때 함께 했던 존재의 사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건 한 존재에게서 딱 한번 가능한 사랑이었다.
자꾸 바깥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 다음에 온 사랑은 나에게 나를 버리라고 했다.
우리에게 있어 사랑은 곧 상처이기도 했다.
우리는 함께 살면서 서로에게 사랑이면서 동시에 상처가 되었다.
상처가 사랑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상처인데도 함께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사랑 때문이었으리라.
그녀는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에서 큰 상처를 입었고,
나는 그녀가 아무 뜻없이 하는 말들에게서 큰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그 상처가 견딜 수 없을 때쯤 서로 크게 싸웠고
그때마다 헤어질 결심을 하곤 했다.
그 헤어질 결심이 반복되다가 이번에는 거의 끝이다 싶은
최악의 순간에 도달했을 즈음,
혹시 우리가 서로를 조금씩 버리는 것이 사랑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를 모두 다 버리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버려도 확연하게 눈에 띌 정도로
우리는 서로 서로를 굳게 지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그날부터 사랑은 내가 나를 버리는 일로 왔다.
버린다고는 했지만 내가 나를 하나도 남겨두지 않을 정도로
나를 모두 버리진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를 조금씩 버리면서 살아 보기로 했다.
이제 사랑은 또 어떻게 올 것인가.
항상 지나고 난 뒤에 그 자취를 돌아볼 수 있는 것이 사랑일 뿐,
그 앞은 전혀 짐작할 수가 없다.
2 thoughts on “사랑의 변천”
주일 아침에 읽는 사랑론, 아니 사랑법! 좋은데요.
존재-생활-버림. 비슷한 세월 사랑 궤적에 충분히 공감하게 됩니다.
버림의 사랑은 비움의 사랑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구요.
근데, 요즘 억대의 모델을 자주 선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ㅋ
버리거나 비우지 못하는게 때로 바로 그게 내가 아닌가 싶어서 그러는 듯 싶기도 해요. 상대가 버력 화를 내는 것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다고 하면 그것에 동의가 되어야 하는데 그게 표현의 양식중 하나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되니까 오랜 세월 같이 살면서도 그걸 버리지 못했나 싶더라구요. 정말 세상살이 한치 앞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 사진은 후배 공방에 놀러가서 후배랑 얘기 나누고 있을 때 한장 찍었죠. 후배집이 계원예술대학 근처라서 그 학교 들어가 차도 한잔했어요. 학교가 아주 좋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