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 하우스는 비닐로 된 집이다.
우리는 두껍게 벽을 쌓아 올리고
지붕을 덮어 집을 만들지만
비닐 하우스는 얇은 비닐 하나로 집을 이룬다.
비닐은 비닐 하우스의 벽과 지붕이 되어주지만
사실은 벽과 지붕이 아니라 비닐 하우스의 피부이다.
피부가 아니라면 그렇게 얇을 리가 없다.
얇은 피부 하나로 몸을 견디는 우리들처럼
비닐 하우스도 얇은 피부 하나로 그 둥근 집을 견딘다.
그 속에서 야채가 자라고, 딸기가 자란다.
비닐 하우스는 문도 비닐이다.
두물머리의 농민이 농사짓던 터에서 쫓겨나면서 그 문이 버려졌다.
그때부터 집을 열고 닫아주던 그 문은 땅에 누워버렸다.
문이 땅에 누웠으니 이제 땅이 열리고 닫혀야 하건만
그때부터 함께 버려진 땅은 굳게 닫혀 버렸다.
그 전까지만 해도
농부가 괭이질로 두드리면 열리던 땅이
이제는 잡초로 가득했다.
잡초도 생명이 분명했지만
두드리면 열리고 그때마다 야채와 딸기를 내주던 농부의 땅에서
잡초는 끈질긴 생명이라기보다 시끄러운 소음이었다.
농부가 쫓겨난 땅에선 시끄러운 소음만 가득했다.
농부가 쫓겨난 땅에선 비닐 하우스가
앙상한 뼈만 남긴채 비닐을 잃었다.
비닐 하우스가 비닐을 잃자 집은 안이 바깥이 되었다.
안에 들어가도 바깥으로 내쫓긴 느낌이었다.
비닐을 잃은 뼈대는 바닥에 그 뼈대를 뉘었다.
뼈대는 서 있을 때는 집을 이루며 땅의 야채와 딸기를 지켜주었지만
땅에 누은 뼈대는 더이상 농부의 땅을 지켜주지 못했다.
뼈대가 눕자 농부의 땅도 함께 무너졌다.
두물머리에선 주말마다
도시에서 온 아이들이 비닐 하우스로 된 딸기 농장을 찾았다.
그 아이들을 맞았던 딸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으나
이제는 생전처음 집바깥으로 쫓겨났다.
뼈대가 눕고 비닐을 잃으면 그 자리에서 있어도 쫓겨난 몸이었다.
집이 버려지자 비닐 하우스 주변의 잡초들이
일제히 문으로 몰려들었다.
이제 문은 그들의 차지였다.
그들이 문을 차지하자 더 이상 그곳을 드나들 수 없었다.
버려진 비닐 하우스의 문을 잡초가 가로막자
입 속 깊숙이 곰팡이가 슨 느낌이 났다.
뼈대만 남은 버려진 비닐 하우스의 옆에서도
잡초들이 일제히 비닐 하우스의 머리끝으로 기어올랐다.
그 질긴 생명감보다 등에 올라타서
비닐 하우스를 파먹고 있다는 느낌이 났다.
쫓겨난 땅에선 잡초가 생명은 가질 수 있을지언정
생명감은 가질 수 없다.
두물머리는 살아있는 것들에게서
살아있다는 느낌을 빼앗아간 땅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네 분의 농부가 그곳을 지키고 있다.
절망의 땅 곳곳에 희망이 있다.
2 thoughts on “두물머리 비닐 하우스”
오늘자 한겨레에서 의정부지원 판결이 이분들께 안 좋은 쪽으로 났단
기사를 읽었어요. 자전거길을 낸다 어쩌구 하더군요.
지난 번 판결은 그렇지 않았다는데, 걱정입니다.
줄곧 지켜봐 오셔서 비닐집들의 변화가 남일 같지 않으시겠습니다.
같은 사안인데도 판사에 따라 많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그나마 지난 번에 유일하게 두물머리가 승소한 것이
하나 있어서 다행이예요.
항소심 비용도 사람들 성금으로 마련했다고 하더라구요.
하나의 정의로운 승소로 모든 부당한 패배를 뒤엎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