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대 시인과 남한산성에 놀러갔다. 성곽을 따라 걷던 시인이 걸음을 멈춘다. 시인의 걸음을 멈춰세운 것은 잠자리였다. 시인이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잠자리의 자리에서 나는 창끝을 보았다. 창끝에선 적의가 보였다. 그래서 나는 창끝에 앉은 잠자리에게서 적의를 무마하는 휴식의 힘을 보았다고 썼다.
남한산성에 다녀오고 나서 며칠 뒤, 아마도 시인은 술집에 갔나 보다. 그것도 창으로 세상이 멀찌감치 내려다보이는 높은 빌딩의 라운지 술집이었나 보다. 시인은 그 술집에서 며칠전 남한산성에서 보았던 잠자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썼다.
“외로운 것들은 좀 높은 데로 간다. 나는 잠자리처럼 이곳에 와서 아래를 내려다 본다. 높다.”
그러니 그날 내가 본 창끝에서 시인은 창끝이 아니라 좀 높은 곳을 본 것이 틀림없다. 잠자리는 창끝에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좀 높은 곳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잠자리가 그렇게 높은 곳으로 올라가 앉은 것은 외롭기 때문이었다. 시인의 생각에 의하면 그렇듯“외로운 것들”은 높은 곳으로 간다. 그리하여 높은 라운지 술집에 간 시인은 그날 남한산성의 잠자리가 된다.
“바지랑대 끝에 앉은 잠자리의 마음을 이제 좀 알 것 같다. 내려다 보면 목숨이 참 장난 같다. 소풍에서 돌아오듯 귀가하는 사람들.”
아마도 라운지 술집에서 내려다본 거리에서 사람들이 귀가하고 있었을 것이다. 시인에겐 그 사람들이 마치 소풍에서 돌아오고 있는 즐거운 사람들처럼 보인다. 며칠전 놀러간 사람들의 하나로 끼어들어 잠자리가 내려다보는 성곽의 아래쪽을 거닐었던 시인은 라운지 술집에 가선 스스로가 잠자리가 되어 세상을 내려다본다. 그가 내려다보는 낮은 세상에서 사람들이 귀가하고 있고 그 사람은 마치 소풍에서 돌아오는 듯 즐거워보이지만 시인에겐 지금 그 세상이 아득하게 멀다.
“딱딱한 눈의 잠자리 놈은 높은 데 앉을 줄만 알지 울 줄을 모른다. 눈이 말랑한 나는 높은 곳에 오면 눈물이 좀 난다. 잠자리 별거 아닌 놈.”
난 시인이 한 얘기, 그러니까 외로운 것들은 높은 곳을 찾는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는 그 말을 높은 곳에 앉으면 외로움이 더욱 확연해진다는 말로 받아들인다. 그러니까 낮은 곳에선 그나마 조금 견딜만 하던 외로움이 높은 곳에선 갑자기 확연해서 견디기가 어려워진다. 그 외로움은 심지어 눈물이 좀 날 정도로 확연해진다. 잠자리가 그나마 높은 곳에서 그토록 오래도록 견디는 것은 눈물이 없기 때문이다. 눈물은 높은 곳을 견디기 어렵게 만든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시인은 눈물의 존재이다.
“목숨의 바닥에서 개처럼 엎드려 울어본 사람은 목숨의 꼭대기에 한번 와볼 일이다. 어디냐고? 라운지 술집.”
외로움은 왜 높은 곳에 앉으면 더 확연해지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높은 곳에선 세상이 더욱 아득하기 때문일 것이다. 비비고 부대낄 때 아무래도 외로움이 덜한 법이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라도 서로 부딪치며 지나갈 때 외로움이 약간 희석되는 측면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들의 낮은 지상에선 그렇게 부딪고 뒤섞이며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외로움이 희석되지만 높은 곳에 앉으면 그 세상이 아득해진다. 외로움이 더 확연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세상에선 너무 외로우면 외로움을 타는 것이 아니라 외로움에 내몰린다. 외로움에 내몰린 사람들은 종종 높은 곳에 올라 잠자리처럼 몸을 날리기도 한다. 높은 곳에 올랐을 때 사무치도록 몸속을 파고드는 외로움을 다시 낮은 곳으로 가져가 달래보려는 몸짓이다. 그래서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 사람들은 잠자리처럼 하늘 높이 날아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낮은 이곳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가슴에 담겨 이 세상에 남곤 한다. 외로운 것들이 높은 곳에 오르려 한다는 것은 시인이 괜히 한 말은 아니다.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은 알고 보면 낮은 곳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이다.
시인이 외로움을 많이 타나보다. 그러고보니 그동안 주로 강이나 호숫가의 낮은 곳으로만 찾아다니며 술을 마시고 다닌 것 같다. 낮은 곳들은 외로움을 희석시키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언젠가 행주산성에 갔을 때도 나는 산의 꼭대기로 가려했으나 김주대 시인은 번번히 중간쯤에서 주저 앉았다. 산성에서도 높은 곳을 올라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외로움이 확연해지지 않도록 앞으로 높은 곳은 피해야 겠다.
이제 계절은 가을로 향하고 있다. 잠자리들이 외로움을 안고 날아오를 이 계절의 하늘은 점점 더 높아질 것이나 우리는 이 가을을 시인과 함께 낮게 흘러다닐 것이다.
**인용된 글은 모두 김주대 시인이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8 thoughts on “시인과 잠자리”
이거 참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저의 술장난(음주트윗) 속에서 생의 비밀을 읽어내시는 거 같기도 하고요
저를 포함한 모든 사물과 존재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 텐데, 타인만이 그걸 읽어낼 수 있군요. 본인들은 모르는 걸…..ㅎ
시인에게서 말이 자라고.. 그 말이 내게로 건너와서 또 자라죠. ㅋㅋ
ㅋ 동원님 죄송한데요.
제가 좀 말못할 사연이 있어서
사진 밑에 날짜를 지워주시면 안될까 해서요.
죄송요. 사연은 나중에…ㅎ
-김주대 드림
그렇게 했어요.
시인과 평론가는 산성에 가서도 생각이 많으시군요.^^
외로운 것들은 높은 곳으로 오른다고 시인이 말하면
저는 왜 외로운 것들은 높은 곳으로 오르는가라고 묻죠.
서로 아무 말없이…
오늘 여기 저기 댕기면서 일뜽합니당
학창시절엔 공부하려면 하늘이 너무 높고 맑더니…온라인 하늘은 파란색여도
댓글 일뜽 아주 좋네요!
와우… 동원님도 풍경님도 이케 감성이…
놀랍네요 그 자리에 함께 걸어 다녔는데…ㅠㅠ
그 이름 모를 새에만 관심이 꽂혀서 뛰어 댕기고요 ㅎ
그러네요 풍경님의 트윗과 동원님의 해석…따뜻하고 공감되요
두 분 품은 만큼 느끼고 토해 내고..아름답습니다…
이상하게 김주대 시인의 감성은 또다른 읽기를 촉발시키는 측면이 있어요. 그게 누군가에 대한 억압이 없는 사람이라 그런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스스로에 대한 누군가의 억압도 무지 싫어하는 사람 같기도 하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김주대를 읽어주고 싶더라구요. 주대 시인 만난 것이 나의 행운 같기도 하고.. 시간나는대로 자주 얼굴 봅시다.
아, 그날 새를 쫓아가던 한미님도 인상적이었어요. 그 소나무 숲 그림도 마찬가지구요. 두 사람 모두 자주 곁에서 함께 하며 하루를 같이 보내고 싶어지는 사람들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