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인간의 조건인가?
—「블레이드 러너」와 「다크 시티」
글: 데보라 나이트, 조지 맥나이트
「블레이드 러너」(감독 리들리 스코트, 1982)와 「다크 시티」(감독 알렉스 프로야스, 1998)는 앞으로 우리의 세계가 될 것으로 여겨지는 미래의 도시들을 무대로 삼고 있으며, 그 도시들은 이상향과는 거리가 멀다.(1) 말그대로, 그리고 비유적 의미에서 이들 도시는 모두 암흑의 도시들이다. 「블레이드 러너」의 무대는 2019년의 로스앤젤레스이다. 영화 속의 도시는 어두우며 끊임없이 비가 내리고 있다. 또한 상업적으로 움직이는 거대도시이며 다민족으로 들끓고 있는 곳이다. 이 도시는 길거리의 노점상과 도심지의 버려진 빌딩, 사회의 가장 강력한 계층이 거주하는 복합 시설물로 채워져 있다. 상류층이 거주하는 이 복합 시설물은 현대적이면서도 마야의 거대한 건축물을 연상시킨다. 전 특수경찰대의 일원이었던 우리의 주인공 릭 데커드(해리슨 포드 분)는 인간과 유사하게 생겼으며 복제인간으로 알려진 네 명의 인조인간을 제거하라는 또 다른 일거리를 강제로 떠맡게 된다. 이들 인조인간들은 우주식민지를 탈출하여 말 그대로 그들의 제작자이자 발명자인 타이렐(조 터켈 분)를 만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다. 로스앤젤레스라는 영화 속 도시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통제하고 있는 듯 보이는 타이렐사는 다른 인공 창조물을 제조하고 있는 동시에 우주식민지의 노예로 활용하기 위해 복제 인간의 유전 공학에 관여하고 있는 회사이다. 도시 위로 높이 솟아있는 타이렐사의 건물에서도 태양빛은 거의 보이지 않으며, 때문에 거리까지는 전혀 빛이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는 자연환경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어 어느 정도 엄청난 재난으로부터 고통받고 있는 듯 보인다. 사실 이제 자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인다. 도시에서 나무나 꽃, 또는 살아있는 동물을 하나도 접할 수가 없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우리가 접하게 되는 유일한 동물은 예를 들어 타이렐사의 올빼미와 같은 정교한 복제품이다. 이 도시에선 갖가지 기업체의 제품을 선전하는 거대한 전기 광고판이 하늘을 밝히고 있으며, 지상과 공중을 모두 오가고 있는 교통 수단들이 이 도시의 혼잡함을 말해준다. 우주 식민지는 새로운 기회와 모험의 땅으로 선전이 되고 있으며, 그러한 선전은 로스앤젤레스를 떠날 수 있을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점을 홍보하고 있다. 이미 그렇게 해보았거나 그렇게 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광고의 대상이다.
「다크 시티」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밤의 어둠에 사로잡혀 있는 거대한 도시를 만나게 된다. 도시는 불규칙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아울러 이 영화에서 우리는 기억이 지워진 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거의 피해망상증 상태에 처해 있는 주인공과 불가사의한 능력으로 도시와 도시의 거주자들을 통제하면서 인간을 싫어하는 외계인 집단을 만나게 된다. 외계인은 영화 속에서 낯선 이방인으로 불린다. 이 영화는 「블레이드 러너」와 마찬가지로 공상과학영화를 누아르 영화와 뒤섞어 놓고 있지만 아울러 여기에 긴박감 넘치는 순수 스릴러의 묘미를 가미해 놓고 있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우리의 주인공인 존 머독(루퍼스 스웰 분)이 자신이 누구인가를 기억해내려고 하는 과정과 그가 경찰이 의심하는 대로 창녀들을 죽인 흉악한 연쇄 살인범인지를 알아내는 과정을 따라가게 된다. 영화 속에서 경찰만 머독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란 점은 금방 드러난다. 수상쩍은 심리분석 전문가 쉬레버 박사(키퍼 서덜랜드 분)는 물론이고 비록 그 목적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외계인들도 마찬가지로 그에게 관심을 갖는다. 이 도시에는 확실히 이상한 특징들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는 밤마다 극단적인 변형이 진행되면서 여기저기서 빌딩이 튀어오르거나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시의 거주자들은 그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자정에는 그들 모두가 사실상 혼수상태의 수면에 빠져들며, 그러는 동안 그들의 정체성과 기억이 변경되기 때문이다. 또다른 이상한 점은 존 머독이 도시의 바로 외곽에 있는 그의 고향, 다시 말하며 쉘비치라 불리는 해변 마을에 대해 물어보지만 그 질문을 받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 장소를 기억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어떻게 그곳에 가는지에 대해선 기억을 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머독으로 하여금 도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깨닫게 해주며, 뉴욕시의 지하철 체계를 연상시킨다는 점을 포함하여 고도로 개발된 수송체계이면서도 외곽으로 나가는 길이 없다는 점에서 정말 매우 이상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2) 머독은 아울러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자정에 시간이 정지되어 다른 거주자들이 잠에 빠져들 때도 그만은 홀로 깨어있어 도시에서 일어나는 변형의 현장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블레이드 러너」와 「다크 시티」는 사이버펑크로 불리는 영화 장르의 한 예이며, 이는 공상과학영화의 하위 장르이다.(3) 사이버펑크는 지구의 가까운 미래에 대한 암울한 전망을 다루며, 영화 속 미래에서 인간은 전자, 정보, 유전자 및 기타 기술의 영향 아래 놓여있다. 아울러 실제와 인공적 복제물 사이의 구별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러한 모호함은 다양한 경우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블레이드 러너」에선 영화 초반부에 타이렐의 비서 레이첼(숀 영 분)과 올빼미와 같은 특정 창조물에 대해 진짜냐는 질문이 나온다. 또 「다크 시티」의 존 머독과 기타 사람들은 물론이고 「블레이드 러너」의 복제 인간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개인의 기억이 진짜인지, 이식된 것인지도 불확실하다. 이들 영화 속에서 진짜와 가짜 사이의 모호함은 이렇듯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 글에선 「블레이드 러너」와 「다크 시티」가 불러 일으키는 주요한 철학적 문제와 함께 공상과학영화의 핵심적 주제와 전통적 양상을 살펴볼 것이며, 그러한 탐구는 무엇이 인간의 조건인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다.(4)
공상과학영화, 누아르 영화를 만나다
두 영화 모두 주제의 양상으로 보면 누아르 영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디스토피아적 도시, 불가사의한 분위기, 형사, 사악한 동기를 가진 다양한 등장 인물들, 낭만적 사랑의 불안, 황량하고 사실상 숙명론적 느낌을 풍기는 색조 등이 그에 해당된다. 「다크 시티」의 완전 시작 부분과 「블레이드 러너」의 중간 부분에서부터 모호함은 이들 영화의 중심 주제가 된다. 영화는 존 머독이 그의 머리 위 천정에서 알전구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가운데 한 호텔의 욕조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존 머독은 그 순간부터 그 자신과 자신의 기억을 의심할만한 이유를 갖게 된다. 그 호텔에는 아울러 이상한 의료 도구와 죽은 여인의 시체가 있었다. 그의 오버코트 주머니 속에는 여러 명의 창녀를 죽인 연쇄 살인 사건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기사를 잘라놓은 신문이 들어있다. 그 모든 것을 고려하여 머독은 그가 분명히 살인자일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가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다는 점에서, 특히 그가 처음에 어떻게 그 호텔방으로 들어간 것인지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에서 머독의 생각과 경험은 첫순간부터 모호함을 가장 큰 특징으로 갖게 된다. 이와 달리 데커드는 처음에는 완전히 독립적 성격을 갖는 인물로 나온다. 말하자면 심지어 타이렐사에 위협이 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경찰을 위해 일을 하면서도 어느 정도 이단자와 같은 인물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는 탈출한 복제인간을 추적하여 잡는 일을 하면서도 자신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 때문에 데커드는 처음에는 그 자신이나 그의 능력,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성격에 대해 어떤 종류의 모호함도 갖고 있지 않으며, 그에 따라 그런 모호함에 시달리지 않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레이드 러너」가 종반부로 진행됨에 따라 데커드는 존 머독만큼이나 그 자신과 그의 기억을 의심할만한 많은 이유를 갖게 된다.
「다크 시티」의 초반부와 「블레이드 러너」의 종반부에서 우리의 주인공들은 도주를 하기로 결론을 내린다. 존 머독의 도주에는 나쁜 뜻이 없다. 그가 저질렀을 것으로 짐작되는 여러가지 살인 사건에 그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5) 전형적으로 결백한 주인공의 도주는 주인공들이 이해할 수 없는 갖가지 상황 속으로 말려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들은 자신들이 비난받고 있는 범죄에 대해 죄가 없지만 자신들이 경찰이나 문제의 범죄를 실제로 범한 진짜 범인에게 쫓기는 신세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존 머독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이 경찰이 믿고 있는 연쇄 살인범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도 없고, 나아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선 그 자신이 일단 도주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의 도주는 정당한 것이다. 「블레이드 러너」의 마지막 부분에서 데커드는 상당 부분 레이첼의 도덕적 지위에 대한 데커드 자신의 심정적 변화와 아마 그 자신도 복제인간일지도 모른다는 그 자신의 의구심으로 인하여 레이첼과 함께 둘이 도주를 하게 된다. 그들은 예를 들어 지구에서 살고 싶어하는 복제인간과 같은 존재를 진짜 범죄자로 간주하는 부당한 제도로부터 탈출하려 하며, 영화는 바로 그러한 부당한 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탈출을 시도할 때 데커드와 머독은 모두 자신들이 발견한 불가해한 사건들에 대한 답을 찾아내려 애쓰는 동시에 체포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입장이 된다. 결백한 도망자의 도주 스릴러에다가 누아르의 영향을 받은 공상과학영화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는 이들 두 영화가 보여주는 놀라운 점은 이들 두 영화 모두 영화 속에 나타나는 문제의 비밀스런 사건들이 특정 사건의 뒤에 놓여있는 진실을 파헤치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 영화는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왜 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데커드와 머독에게 있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불가해한 사건들이 사실은 정체성, 다시 말하여 그들 자신들의 정체성과 관련된 불가해한 사건들이란 것을 밝혀준다.
「블레이드 러너」와 「다크 시티」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이러한 사상은 누아르에서 영향을 받은 공상과학영화에서 흔한 것으로, 이러한 영화에선 사악한 과학자들이 마음대로 인간이나 인간과 유사한 생명체들을 창조하거나 과학적 초능력을 가진 우주인들이 인간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것으로 나온다. 두 영화에서도 우리는 영화의 중심 인물들이나 심지어 주인공을 어느 정도 통제하려고 하는 누아르적 주제의 인물(「블레이드 러너」의 타이렐)이나 집단(「다크 시티」의 외계인)을 발견하게 된다. 복제인간 각각에게는 독특한 인간의 형태가 주어지지만 그들의 설계자로서 타이렐이 추구하는 목표는 그들의 정체성을 그들의 기능에 대한 부차적 위치에 두는 것이다. 넥서스 6이라 불리는 우주식민지를 탈출한 모델에는 로이 배티(룻거 하우어 분)와 레온 코왈스키(브라이언 제임스 분)와 같이 전투를 위해 설계된 인조인간, 우주식민지의 암살대원 중 하나로 설계된 조라(조애나 캐시디 분), 그리고 기본적인 육체적 쾌락 모델로 설계된 프리스(다릴 한나 분)가 포함되어 있다. 복제인간에 대한 추가적인 통제 수단은 경찰과 더불어 타이렐이 정해놓은 법으로, 이 법에 의하면 복제인간들이 우주 식민지의 노예상태를 벗어나 지구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불법으로 정해져 있다. 나아가 타이렐의 막강한 권력과 경찰과의 밀접한 관계 덕택에 경찰 내에서 데커드의 상관인 브라이언트(M 에멧 월시 분)는 데커드를 복제인간을 제거하는 일에 강제로 투입할 수 있다. 데커드가 깨달은 대로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다크 시티」의 외계인들은 창백한 얼굴에 검정색 복장을 특징으로 하는 남성 생물체의 집단이며, 나이대는 다양하다. 이들은 예를 들자면 시간을 멈추고 물리적 공간을 재배치하는 능력과 같이 특별한 초인적 능력을 갖고 있다. 그들은 불길한 악당들이며, 외계인 중에서 가장 어린 인물을 통하여 그런 점을 가장 오싹하게 체험할 수 있다. 지속적으로 존 머독을 위협하는 그 어린 남자 아이는 남의 불행을 즐거워한다.(6) 우리는 결국은 외계인들이 도시에 사는 대부분의 거주자들에게 기억을 이식시켜 왔으며, 그 복잡한 실험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 쉬레버 박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쉬레버라는 인물은 병적 집착과 기이함을 모두 갖춘 훌륭한 집합적 인물이다. 서덜랜드가 연기한 그대로 쉬레버는 항상 숨이 차서 허덕거리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는 또 주기적으로 대중 목욕탕에서 머독에게 발견된다. 외계인들이 물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그곳이 그들로부터 안전하게 그를 지킬 수 있는 장소가 된 것으로 나타난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머독은 외계인들의 계획을 저지해야 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주장하는 쉬레버를 믿을 수 있는가를 알아내야 하는 입장이 된다.
데커드와 머독은 모두 자신들의 존재가 저당잡혀 있는 보다 거대한 체계를 파악해야 하는 입장이다. 머독이 그를 살인자라고 의심하는 경찰에 쫓기는 것이 그런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 한 예이다. 하지만 그를 쫓는 다른 이들은 누구이고, 그들은 왜 또 그를 추적하고 있는가? 데커드도 그가 로이나 기타 다른 넥서스 6 모델과 마찬가지로 그 자신이 수명이 매우 제한적인 복제인간인지를 알아보아야 하는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자신의 정체성을 재검토해보아야 하는 입장이 된다. 이러한 이야기 구조는 누아르 영화의 숙명론적 요소를 변형한 것으로 보여지며, 영화에서 데커드와 머독이 자신의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기 위해 어려움을 겪는 입장이 그러한 측면에 해당된다. 그들이 속한 체계의 구조를 파악할 때까지 그들은 각각 무심코 그 체계의 일부를 이루게 되며, 데커드나 머독 모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또 잠재적으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전혀 알 수가 없다. 오직 이러한 사실들을 이해했을 때만 그들은 그 체계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행동을 취할 수 있다. 동시에 영화에서 데커드와 머독은 모두 그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내야 하는 입장이다. 예를 들어 감독판으로 출시된 「블레이드 러너」를 보면 데커드가 인간이 아니라 다른 복제인간을 제거하도록 만들어진 복제인간이란 점이 강하게 암시되어 있다. 데커드가 그 자신이 인간이라고 믿고 있다면 그는 자신이 복제인간이라고 믿고 있었을 때 하지 않을 선택과 행동을 할 여지가 크다. 이러한 문제는 레이첼에게서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포함하여 데커드가 어쩔 수 없이 말려드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점점 더 집중적인 조명을 받게 된다. 데커드는 레이첼이 복제인간이란 사실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이렐이 전형적으로 그의 복제인간들에게 기억을 이식해왔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것은 곧 데커드가 레이첼에게 그녀가 그는 말할 것도 없고 누구에게도 밝힌 적이 없는 기억을 말해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는 자신이 레이첼에게 점점 더 강하게 빠져듦에 따라 브라이언트가 그에게 부여한 임무, 바로 그녀의 살해라는 임무를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데커드가 인간이나 복제인간으로서 그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내려고 애쓸 때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두 가지의 사건이 일어난다. 첫번째 사건은 데커드가 복제 인간들이 기억 장치로 이용하는 여러 장의 다양한 사진을 검토할 때 발생한다. 복제인간들은 그들의 기억을 보완하기 위하여 이식된 기억과 함께 그들에게 제공되는 가족 사진을 갖고 있다. 데커드는 그 자신의 가족 사진 중 하나가 복제인간 모델인 넥서스 6의 레온이 갖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발견하며 이로 인하여 아마도 그가 인간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두번째 사건은 데커드와 레이첼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의 아파트를 떠날 때 발생한다. 그때 데커드는 종이로 접은 유니콘 모양의 작은 물체를 발견한다. 영화의 이전 부분에서 브라이언트의 부하인 개프(에드워드 제임스 올모스 분)는 데커드가 눈치챌 수 있도록 종이로 접은 암시 물체를 남겨둔 적이 있다. 종이로 접어서 만든 유니콘은 데커드에게는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영화의 초반부에서 그는 흰색 유니콘으로 특징지어지는 꿈을 꾼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니콘이 상징적으로 처녀성을 보호하는 동물이긴 하지만 한편으로 레이첼을 구하려는 데커드의 행동을 돕겠다는 개프의 암시일 수도 있으며, 종이로 접은 개프의 유니콘은 아울러 데커드가 레이첼의 기억이 이식된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프 또한 데커드의 기억이 이식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강력한 암시일 수 있다.(7) 만약 데커드 역시 이식된 기억을 갖고 있다면 간단히 그 또한 복제인간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영화는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지 않지만 데커드가 인간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다크 시티」에서 우리는 결국은 존 머독이 깨어났을 때 호텔 방에서 발견된 무시무시한 의료 도구의 의미를 알게 된다. 이 도구는 쉬레버가 외계인들이 흥미를 갖고 실험하려고 하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기억을 이식할 때 사용하는 것이다. 처음에 이 도구는 머독이 호텔방에서 발견한 죽은 여자를 살해할 때 사용한 무기처럼 나오지만 나중에 우리는 사실 그것이 살해된 창녀와 함께 있던 호텔 방에서 우연히 연쇄 살인범으로 발견되는 기억을 머독의 두뇌 속에 주입하는데 사용하려고 했던 것임을 알게 된다. 외계인들이 그들의 다양한 과학적 실험을 통하여 얻으려고 했던 것은 인간의 과거에 대한 믿음이 인간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었다. 그런 이유로 외계인들은 매일밤 자정에 도시로 잠입하여 그들이 일을 할 때는 시간을 멈추어놓고 거주자들이 살아가고 있는 도시의 풍경과 함께 특정 거주자들의 기억을 재구성하곤 한다. 외계인들은 기억을 인간의 특징이라고 믿고 있으며, 그렇게 때문에 인간의 기억을 마음대로 바꾸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머독은 기억이 인간의 본질적 특징을 알려주는 최선의 선택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생각을 제시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위치에 있다. 그의 기억이 외계인에 의해 완전히 재편성되어 반복된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적 주제
공상과학영화는 아마도 그 어떤 다른 장르보다 더더욱 철학의 중심 영역에 있는 주제와 화제를 다루는 장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이외에도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이 철학적 질문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서부극과 범죄 영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는 무엇인가를 묻는다. 가족 중심의 멜로드라마와 낭만적 코미디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하지만 공상과학영화는 인간의 조건은 무엇인가를 묻는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개인이 갖는 정체성의 조건은 무엇인가? 인간이란 존재에게 있어 이성/욕망/기억의 역할은 무엇인가? 「블레이드 러너」와 「다크 시티」는 이러한 핵심 주제들을 검토하고 있다. 다른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이러한 질문들은 불확실성이 매우 높은 삶을 특징으로 하는 누아르성 공상과학영화의 이야기로부터 자연스럽게 야기되는 질문들이다. 이때 불확실성이란 인간의 정체성과 행동에 대한 모호함, 누구를 믿을 수 있고, 무엇을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한 모호함, 진짜란 무엇이며, 거짓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모호함을 말한다.
무엇이 인간의 조건인가?
그러면 무엇이 인간의 조건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을 해보자. 「블레이드 러너」는 복제인간의 지위를 기준으로 이러한 주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반하여 「다크 시티」에선 외계인들이 그들 자체의 종족이 죽어가고 있다는 이유로 인간만의 유일무이한 특징이 무엇인가를 찾아내기 위하여 복잡한 실험을 하면서 이러한 주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들은 인간만의 독특한 특징이 무엇이든 그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그것을 이용하여 그들 자신을 변형시키고, 그것을 통하여 그들의 존재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블레이드 러너」에선 극단적으로 양분된 권력을 가진, 예를 들자면 타이렐과 비교적 권력이 없는, 예를 들자면 장난감 제조업자인 J. F. 세바스찬(윌리엄 샌더슨 분)이 모두 살아있는 것과 똑같은 생물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생물체 창조주로서 두 사람 사이의 차이는 비록 세바스찬이 만들어낸 생물체들이 인간의 말과 동작을 흉내낼 수는 있지만 세바스찬의 창조물들은 그냥 정말 고도로 정교한 장난감인데 반하여 타이렐의 창조물은 사실상 실제 인간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심지어 데커드와 같이 숙련된 전문가의 경우에도 타이렐의 최신 “실험물”인 레이첼이 복제인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가 매우 어렵다. 「블레이드 러너」는 처음에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인간이 되려면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접근한다. 즉 복제인간의 입장에서, 다시 말하여 인간으로 살고 싶은 누군가의 입장에서 접근을 하며, 그것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로이이다. 복제인간은 감정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인간존재를 그대로 복제한 형태로 설계된다. 복제인간 제조자인 타이렐과 반역을 꾀한 복제인간 모두 그들의 목표는 가능한한 인간처럼 만들고 인간처럼 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이라는 타이렐의 슬로건은 복제인간의 목표를 잘 설명해준다. 타이렐에게 이 말의 뜻은 자율적으로 행동을 하면서 설계된 목적대로 특정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생물체를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몇년 뒤 복제인간들이 그 자신들만의 감정을 갖게 될 것을 두려워한 설계자들은 4년이라는 수명을 안전장치로 마련해둔다. 그 때문에 로이와 같은 복제인간에게 인간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우주식민지의 노예라는 자신의 지위와 미리 설정되어 있는 4년간의 수명을 탈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들이 노예로 취급당하며 그들을 만들어낸 실제 인간을 대신하여 힘겨운 노동과 폭력의 위험이 있는 행동을 강제로 수행해야 하는 것일까. 타이렐을 만나려고 하는 도중에 로이와 레온은 그들의 복제 눈알을 만들어낸 설계자를 방문하게 되며, 로이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만들어준 눈을 통하여 내가 보았던 것을 당신도 볼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로이가 본 것은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너무 끔찍한 사건들이었다. 그러한 점은 로이가 그가 목격한 사건들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반사적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그는 그 사건이 눈의 설계자가 가졌던 경험을 크게 넘어서는 사건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는 로이의 반응이 인식적 차원과 감정적 차원에서 모두 이루어진 것임을 암시한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일반적인 철학적 질문은 어느 지점에서부터 복제인간 넥서스 6와 같이 인간적으로 만들어진 생물체를 인간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될 것이다.
데커드는 처음에는 인간은 인간이고, 복제인간은 단순한 사물이라는 생각을 매우 분명하게 갖고 있었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그가 자신은 인간이며, 탈출한 생물체 넥서스 6는 당연히 인간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때문에 그는 그들을 제거하는 임무를 받아들이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그렇게 단호하게 선을 그을 수 있기 때문에 데커드는 블레이드 러너로서의 자기 역할에 대해 어떤 도덕적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복제인간의 제거는 컴퓨터의 전기선을 뽑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일이다. 그는 레이첼과 만났을 때 그녀에게 “복제인간은 다른 기계들과 똑같다”고 말한다. 레이첼의 지위를 파악하기 위한 테스트를 하면서 그녀가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진 복제인간이란 사실을 발견한 뒤 그는 타이렐에게 “자신이 복제인간이란 것을 모른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묻는다. 비록 복제인간이 겉모습에선 인간과 비슷하고 (이식된) 기억과 인위적으로 개발된 감정, 스스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여기에 더하여 다양한 종류의 완벽한 행동을 수행할 수 있긴 하지만 데커드는 그들에 대해 일말의 감정적 공감을 느끼지 못한다. 때문에 초기에 그는 레이첼을 그것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레이첼이란 등장 인물은「블레이드 러너」에서 요염한 여자로 기능을 하면서 비정한 블레이드 러너의 감정과 욕망을 일깨우게 되고,(8) 시간이 지나면서 데커드는 레이첼과 블레이드 러너로서 자신이 갖고 있는 역할에 대해 그의 마음을 바꾸게 된다. 비록 레온과 조라의 제거는 데커드에게 전혀 심리적 충격을 주지 못했지만 로이 자신의 죽음은 말할 것도 없고 프리스의 죽음과 그녀의 죽음에 대한 로이의 반응은 데커드로 하여금 복제인간에 대한 그의 관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으며, 삶에 대한 그들의 욕망에 대해 이해하도록 만들기 시작한 원인이 되었다. 이미 자신의 제조자인 타이렐을 살해한 로이가 데커드를 살해하는 대신 데커드의 목숨을 구해주는 선택을 했을 때 데커드는 복제인간이 이전에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기억과 정체성
「다크 시티」에서 외계인들이 하는 실험은 인간의 정체성에서 기억이 하는 역할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기억의 주입이 정확히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깨어나서 새롭게 이식된 기억에 맞추어 아무런 문제없이 행동하게 된다. 외계인들이 한 실험 중에서 아주 두드러진 실험으로는 하층계급의 부부를 상류계급의 부부로 전환시키는 것이 있었다. 외계인들은 아울러 훨씬더 웅장한 실내 장식과 의상을 제공하여 그 부부가 살고 있는 무대를 바꾸어 버린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 부부는 잠에서 깨어나자 새로운 기억을 주입하기 전과는 다른 습관과 대화의 양상을 보여준다. 기억의 변화가 개인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바꾼 듯이 보인다. 이와 완전히 반대되는 경우가 머독의 경우로 기억의 주입이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실패로 돌아가면 기억의 파편만이 남게 되어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완전한 감각을 갖출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머독은 자신의 아내 엠마(제니퍼 코넬리 분), 그리고 쉘비치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몇 가지 일들을 기억하지만 그 이상은 전혀 기억해내지 못한다.
인간의 정체성 구축에 있어 기억은 얼마나 중추적 역할을 하는 것일까? 기억이 일관된 행동의 진행에 필수적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내가 누구이고 내가 무엇을 가치있다고 생각하는지 기억할 수 없다면 내가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어떻게 결정할 수 있겠는가? 언급할 필요도 없이 내가 누구인가를 기억할 수 없다면 내가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는 상황에 일시적으로 대응하는 것 이외에 어떤 실질적 결정도 내릴 수 없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머독이 그 자신으로부터 발견한 상황이다. 아울러 이러한 잠재적인 문제가 바로 「블레이드 러너」의 복제인간들이 일정하게 이식된 기억을 갖추게 된 이유라고 암시가 되고 있다. 물론 프리스, 로이, 레이첼을 일종의 어떤 임무를 수행하도록 프로그램된 단순한 기계로 상상해 볼 수도 있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와 같이 대다수의 공상과학영화에서 중심적 특징을 이루면서 프로그램된 어떤 임무를 수행하는 무엇인가로 보는 것이다.(9) 하지만 「블레이드 러너」의 문제는 「터미네이터」의 문제와 동일하지 않다. 이는 우리의 영웅이 순수한 살인 기계를 제거할 것이냐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기계 인간보다 훨씬 더 인간과 비슷한 창조물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이 영화의 문제이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복제인간에게 이식되는 기억은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아마도 가장 분명한 점은 복제인간의 기억이 그들에게 그들 자신에 대한 거짓된 감각을 줄 것이란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상황을 경험했다고 믿게 된다. 예를 들어 전혀 존재하지도 않은 가족과 함께 했었다고 믿게 되며, 그러한 문제의 기억은 타이렐에 의해 날조된 것이다. 이식된 기억으로 인하여 그들은 기술적으로 4살 이하의 나이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그와 반대로 실제보다 훨씬 많은 나이, 즉 20이나 30, 심지어 40세 정도의 사람이 되는 것으로 암시가 되고 있다. 그들의 이식된 기억은 아울러 틀림없이 그들이 살아서 볼 수도 없는 미래의 자신들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며, 그것이 바로 넥서스 6 모델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가 되었다. 복제인간들에게 허구의 기억을 이식한 이유는 그들을 보다 쉽게 통제하기 위해서이며, 4년이라는 그들의 수명은 그들이 보다 복잡한 감정적 반응과 개인적 관계, 예를 들어 우리가 로이와 프리스의 사이에서 볼 수 있었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치 모두가 그들을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었으며, 그리하여 그들을 상당히 통제하기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불러왔다.
그들에게 주어진 이러한 가혹한 상황에서 복제인간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단편적 기억에 의존해야 하며, 그러한 기억이 거짓으로 밝혀졌을 때 더 이상 의지할 수 있는 기억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거의 비밀로 해놓은 레이첼의 기억 중 일부를 데커드가 읊기 시작했을 때 레이첼이 자신에게서 처하게 된 상황이다. 그녀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 다시 말하여 실질적으로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사건이 한번도 일어난 적이 없던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어떻게 그녀가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와 동일한 정체성의 위기가 「다크 시티」의 거주자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그들이 자신들의 기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외계인들이 현재의 상황을 그럴듯하게 납득시키기 위하여 타인의 기억이나 과거에 그들에게 일어난 기억에서 만들어낸 것이란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런 위기가 발생한다. 그러한 위기가 존 머독에게 일어나자 그는 가장 가까운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다가가 그가 이전에 진짜라고 생각했던 기억에 대해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분명한 판단을 할 수 없더라도 반드시 미래로 가야 한다고 설득을 한다. 한 사람은 타이렐사와 외계인의 전략을 모두 분명하게 파악할 수가 있다. 둘은 모두 복잡하면서도 일관된 기억 속의 이야기가 개인의 정체성을 구축한다고 가정하지만 문제는 그 기억 속의 이야기가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이러한 거짓 기억이 효과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 기억 속의 이야기가 거짓이란 것을 인식한 사람들은 아울러 그들이 그런 거짓 기억에 의존할 수가 없는 존재이며, 그에 따라 그들에겐 자신들의 정체성이 절박한 문제로 떠오르게 된다.
감정과 기억
「블레이드 러너」와 「다크 시티」 모두 우리에게 기억이 인간의 삶과 개인의 정체성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다고 전제할 수 있느냐고 묻고 있으며, 이는 불합리한 문제 제기는 아니다. 물론 기억이 여러가지 다른 뜻으로 해석될 여지는 있다. 예를 들어 기억은 이러저러한 사실이나 장소, 사건에 대한 기억으로 볼 수 있다. 기억을 이렇게 보면 기억은 주로 인식적 차원의 용어로 해석이 될 수 있다. 기억을 인식적 차원의 용어로 보면 우편번호나 전화번호, 또는 어제 무사히 수퍼마켓까지 다녀온 일을 기억할 때처럼 느낌이나 감정을 개입시킬 필요가 전혀 없다. 이와 달리 기억은 주로 감정적 차원의 용어로 해석될 수 있다. 존 머독이 쉘비치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나 그가 아내를 사랑했다고 기억하는 경우가 그에 해당된다. 기억을 인식적 차원에서 보면 영화 속에서 진짜인 것은 하나도 없다. 쉘비치는 결국은 있지도 않는 곳이다. 그런 점에서 「다크 시티」는 누군가의 기억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감정적 채색이란 점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엠마가 말한대로이다. “존,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그와 같은 감정은 속일 수가 없어요.”
「블레이드 러너」 또한 인간을 규정지을 수 있는 유일한 특징이 인식적 차원의 기억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적 차원의 기억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타이렐사는 이러한 점이 장기적으로 보면 실질적으로 복제인간들에게서 문제가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으며, 때문에 그들의 수명을 4년으로 제한한다. 자기 삶의 마지막 순간에 로이는 일종의 감정을 보여주며, 이는 데커드를 예를 들자면 수치심으로 몰아넣는다. 수치심은 처음에는 데커드가 복제인간과 관련된 경험에서는 거의 상상할 수 없었던 반응이었다. 그는 로이에 대한 느낌과 같이 죽어가는 복제인간에 대해 개인적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데커드는 조라와 레온을 살해할 때만 해도 아무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러다 프리스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감정을 갖기 시작하더니 로이의 죽음에 대해선 감정적으로 공감을 하기 시작한다. 로이의 죽음이 촬영되고 편집된 방식은 영화의 관객이 데커드와 더불어 감정적으로 로이의 상황에 공감을 하게끔 되어 있다. 로이는 비록 옥상에서 데커드가 떨어지도록 내버려 둠으로써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오히려 그를 구해준다. 데커드는 이리저리 도망을 치게 되며, 로이가 여전히 그를 죽이려 한다는 것에 대해 의심을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때 로이가 자신의 죽음이 곧 닥쳐올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데커드에게 “나는 사람들이 믿지 못할 수많은 것들을 보았지”라고 고백한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이 이제 막 사라지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모든 순간들이 빗속의 눈물처럼 시간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이제 죽을 시간이다.” 로이가 죽을 때 지붕에선 비둘기 한마리가 날아간다. 데커드가 죽은 복제인간을 바라볼 때 우리들이 그의 감정을 생각해보기에 충분할 만큼 데커드의 장면은 길게 유지된다. 이 장면은 천천히 로이의 장면 속으로 겹쳐진다. 이렇게 겹쳐지는 중간에 데커드와 로이의 이미지가 머리와 어깨 부분에서 겹쳐지며, 이는 그들의 공통적 특징에 대한 암시로 보인다.
「블레이드 러너」와 「다크 시티」 모두에서 우리의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게 되며, 궁극적으로 자신들이 자신들에게 제시된 초기의 믿음과 크게 다른 존재란 점을 발견하게 된다. 데커드와 머독 모두 처음에는 그들이 인간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데커드는 그가 복제인간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틀림없이 로이의 죽음이 데커드에게 그와 로이가 비슷하다는 자각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외계인들과 쉬레버 박사 모두에게 실험 대상이었던 머독은 그가 초인간적 능력을 갖고 있으며, 그 능력이 외계인들과 공유하고 있는 능력이란 사실을 발견한다. 그는 외계인들이 도시에서 시간을 멈추고 실험을 하는 동안 여전히 깨어있을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쉬레버의 도움을 얻어 자신이 염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외계인과의 최종 대결에서 머독은 그의 정체성과 세계 모두에 대해 이전에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외계인에 의해 꾸며진 거짓이었다는 앎을 기반으로 행동을 한다. 영화에서 밝혀진 대로 영화 속 도시는 미국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는 대도시로 보였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궁극적으로 머독은 그 도시가 우주 궤도에 인공적으로 구축된 우주 정거장이란 사실을 발견한다. 쉘비치로 가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은 사실 그곳에는 쉘비치가 없기 때문이다. 쉘비치는 그냥 이식된 기억에 불과하다. 지하철이 그곳으로 가지 않는 이유는 거트루드 스타인이 딱 한번 언급했듯이 그곳이 그곳에 없기 때문이다. 머독은 궁극적으로 그 자신이 연쇄살인범인가 아닌가에 대해 걱정하는 것보다 걱정해야할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물리적인 주변 상황에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블레이드 러너」에선 복제인간들이 실제 도시를 배경으로 창조된 생명체의 형태로 행동을 하는데 반하여 「다크 시티」에선 도시 그 자체가 외계인들의 실험실로 창조되어 있다.
두 영화 모두 전형적으로 공상과학영화의 전체적인 이야기 맥락과 철학적 사고의 실험이란 측면에서 제기할 수 있는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데커드와 머독은 처음에는 그들이 인간이라고 믿고 있다가 각각 자신이 인간 이하이거나 인간 이상이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에 이르게 된다. 머독은 데커드에 비해 훨씬 더 복잡한 문제를 갖고 있다. 쉬레버가 새로운 이식 기억을 주입할 때마다 똑같은 몸에서 새로운 개인이 나타난다. 이는 최소한 존 로크로 거슬러 오르는 일련의 유명한 철학적 사고의 실험을 변형한 것이다. 로크는 왕자와 구두 수선공의 두뇌를 서로의 몸에 바꾸어 이식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궁금해 했었다.(10) 그러한 상황에서 과연 한 인간의 개인적 특성은 어디에 위치하게 되는 것일까. 몸에 위치하는 것일까, 아니면 두뇌에 위치하는 것일까?(11) 머독은 이와는 다르지만 이와 관련이 있는 문제를 안고 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최근에 똑같은 몸에 깃들어 있는 일련의 여러 개인들로 존재를 했으며, 비록 엠마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지만 그의 존재가 엠마가 있었던 상황 속에도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된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데커드와 머독 모두가 합리적인 매개자들이란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그들의 기억이 믿을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합리적으로 행동한다. 합리적 매개자로서의 그들은 어떤 목표를 인식하기 위해선 행동을 선택하고 추구해야 하는 입장이 된다. 그들은 그들이 가치있다고 보는 것과 타인들이 그렇지 않다고 보는 행동들 사이에서 결정을 해야 한다. 그들은 모두 어떤 결과가 가능한 선택을 하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을 한다. 두 경우에 이들의 목표는 어떤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욕망과 그 계획을 미래로 밀고 나가는 능력의 조합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데커드의 궁극적 목표는 레이첼을 보호하는 것으로 밝혀진다. 머독은 두 가지의 주요한 목표를 가지며, 이는 그가 외계인들을 무찌른 다음에 나타난다. 그 중 하나는 쉘비치를 실제 상황으로 만드는 것이며, 이를 위해 그는 염력을 긍정적 방향으로 사용하여 대양과 태양을 도입하고, 그것을 통하여 도시에 자연을 다시 불러오는 행동을 취한다. 둘째는 어떤 측면에선 첫번째 목표보다 훨씬 더 복잡한 것으로 엠마의 사랑을 다시 얻는 것이다. 합리적 매개자라는 데커드와 머독의 위치는 모두 미래를 향한 상상의 계획과 관련된 것으로, 그들의 감정, 특히 낭만적 욕망과 관련이 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두 영화의 철학적 주제가 누아르에서 영향을 받은 공상과학영화의 주제 및 일반적 양상과 관련되어 있음을 다시 한번 접하게 된다.
머독은 자신의 염력에도 불구하고 모든 미래의 사건을 결정할 수가 없다. 놀랍게도 그는 쉘비치를 만들고 실제로 그곳으로 갈 수 있는 수단을 만들 수 있지만 그의 가장 큰 욕망인 아내 엠마와의 재결합은 할 수 없는 듯 보인다.(12) 아울러 그는 영화의 끝부분에서 그녀의 기억이 다시 변경되어 이제 그녀가 머독이 전혀 모르는 애나라는 누군가가 되어 버렸는데도 엠마의 기억을 간단하게 복원할 수 없는 듯 보인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또 다시 철학적 주제들이 「다크 시티」의 일반적 이야기 속에서 어느 정도 복잡하게 얽혀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말했을 때 정확한 낭만적 연인으로 이 두 사람을 결합시키려면 탄탄한 이야기 구조와 감정적 설명이 필요해진다. 말하자면 엠마에서 애나로 바뀐 덕택에 애나가 존 머독을 알지 못하는 상태이며, 존 머독은 과거에 애나의 몸에 깃들어 있었지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엠마라는 이름의 여인을 사랑한다는 여러가지 사실들이 완전히 문제가 될 수 있는 그런 상황들이 있다는 얘기이다.
데커드도 비슷한 문제적 상황에 처해 있다. 그는 비록 복제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지위에 대해 매우 강한 의심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불완전한 지식을 바탕으로 행동을 해야 하는 입장이다. 전 블레이드 러너로서 그는 설계자의 의지를 따르지 않고 행동하는 복제인간은 제거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레이첼을 보호하기로 한 그의 결정은 자신의 결정이 둘 모두의 실질적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내린 결정이다. 「블레이드 러너」의 결론은 어두우며, 밀실공포가 지배하는 세상을 암시하고 있다. 자신의 아파트 바깥에 있는 복도에서 종이로 접은 개프의 유니콘을 발견한 데커드와 레이첼은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도시의 탈출을 시도한다. 이 엘리베이터가 감독판의 마지막 장면이다. 원래 이 영화의 극장판에선 데커드와 레이첼이 스피너(아래쪽으로 도로를 보면서 공중으로 날아다니는 작은 이동 수단)를 타고 들판과 초원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훨씬 낙관적인 결론에 이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리들리 스코트의 입장이 아니었다. 「블레이드 러너」의 감독판이 보여주는 결론은 일부러 명확하면서도 모호하게 처리된 경향이 있다.
두 영화의 결론은 처음에는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인다. 존 머독은 자신의 옆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비록 그녀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지만) 바닷가에 서 있으며, 태양이 두 사람을 모두 비춰주고 있다. 이 때문에 그가 향하고 있는 곳은 우리가 이 영화가 끝난 다음의 이야기를 원했다면 분명히 그가 애나의 사랑을 얻었을 것만 같은 긍정적 미래일 것으로 보인다. 이와 달리 데커드와 레이첼은 둘 모두 도망을 치면서 어떤 경찰이나 그들의 정체를 파악한 블레이드 러너에게 살해될 위험에 처한다. 하지만 이들 영화의 얘기는 두 주인공이 모두 합리적 매개자들이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계획하여(애나의 사랑을 얻거나 레이첼을 보호하거나) 미래로 나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들 각각에게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미래를 완벽하게 제어하는 것과 같은 일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합리적 매개자로서의 그들은 최상의 결과를 희망하면서 정해진 답이 없는 미래를 향하여 자신들의 삶을 추구하는 선택을 하며, 그들 자신은 물론이고 중요한 타인들에게 대해서도 처음으로 걱정을 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
「블레이드 러너」의 복제인간들과 「다크 시티」에 사는 대부분의 거주자들은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데 있어 한편으로 보면 기억, 다른 한편으로 보면 감정과 욕망의 역할을 보여주는 동시에 마음과 몸 사이의 복잡한 철학적 문제를 보여준다. 두 영화 모두에서 우리는 인간(혹은 인조인간)의 몸을 갖고 있지만 기억은 만들어진 것이거나 이식된 상태의 인물들을 보게 된다. 두 영화 모두 기억은 믿을 수 없는 것이지만 감정은 좋은 행동의 계기를 제공하거나 오랜 세월에 걸쳐 개인의 정체성을 유지해줄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두 영화에서 접할 수 있는 눈에 띄는 주제는 「블레이드 러너」의 복제 인간과 「다크 시티」에서 실험의 대상이 된 다양한 인간들의 기억을 분명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물리적 증거들에 대한 우려이다. 「블레이드 러너」는 강화된 기억으로 간주할 수 있는 그러한 종류의 증거를 사진으로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심지어 레온은 그에 대해 실시된 보이트-캄프 테스트(일종의 심리 테스트)에서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감정의 표현에 어려움을 겪던 어느 시점에서 그 실험을 하던 블레이드 러너를 살해한 이후에 자신의 아파트에서 가족 사진을 회수하기로 결심한다. 이미 언급한대로 데커드는 자신이 갖고 있는 가족 사진 중 하나가 레온이 소장한 사진 중 하나와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러한 사진들은 복제인간들의 이식된 기억이 그들이 영위했을 것으로 말해지는 삶의 경험을 실제로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물리적 증거로 이용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데커드가 레온과 동일한 사진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히 이들 사진이 진짜라는 사실을 의심할만한 이유가 된다. 하지만 레온과 데커드는 모두 그들의 사진 소장품에 감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레온은 자신의 가장 큰 관심사를 접어두고 사진을 회수하기 위해 아파트에 접근하고 싶어하며, 데커드는 그의 사진을 찾아 쓸쓸하고, 아마도 술에 취한 상태로 저녁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레온은 자신의 사진이 가짜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단계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이와 달리 데커드는 그의 과거에 대한 증거물인 듯했던 이들 사진이 가짜 기억을 꾸미기 위해 제조된 것임을 깨달을 수 있는 좋은 이유를 갖게 된다.
「다크 시티」는 이식된 기억과 가짜 기억의 물리적 증거라는 주제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장치들을 갖추고 있다. 존 머독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들의 사진 뿐만 아니라 그의 삼촌 칼(존 블루달 분)이 머독에게 보여주는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슬라이드도 있다. 그가 처음에 보았을 때는 백지였지만 경찰에서 보았을 때는 자세하게 내용이 채워져 있던 어린 시절의 노트와 함께 사진에는 나와 있지만 현재 그의 몸에는 없는 머독의 상처에 대한 질문도 있다. 아울러 쉘비치로 가는 지하철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노선의 한쪽 끝을 쉘비치로 표기한 지하철 지도가 있었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고 쉘비치를 선전하고 있는 대형의 다양한 공공 광고판도 나온다. 심지어 경찰 수사관이 고인이 된 어머니가 준 아코디언을 얘기하지만 그는 어머니가 그것을 자신에게 준 사실을 기억해 낼 수가 없다. 「다크 시티」는 가짜 기억에 대한 인식이 너무 지체되어 영화의 중심 인물들이 그들 자신을 이해하고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데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를 「블레이드 러너」보다 훨씬 더 크게 강조하여 보여준다. 시간 속에서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몸의 주인인 영화속 행위자들을 이해한다는 것을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도대체 과거에 대한 느낌은 누구의 것을 가장 믿을 수 없고, 누구의 것이 최악의 가짜인가? 마음/몸의 문제는 두뇌를 두 개의 몸에 이식하는 경우에 대한 가정을 통하여 가장 빈번하게 철학적 관심사로 제시되곤 했었다. 이들 두 영화에서 우리는 새로운 두뇌가 하나의 몸에 이식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을 접하게 된다.
결론을 보면 이들 영화의 행위자들에게 연속되는 것의 흔적은 믿을 수 없는 그들의 기억이 아니라 그들의 몸과 타인과의 감정적 관계인 것으로 보인다. 데커드는 인간이 아닐 가능성이 크며, 머독 또한 전적으로 인간으로 보기는 어렵다. 비록 프로그램이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레이첼, 그리고 엠마/애나와 각각 중요하고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낸다. 두 영화 모두 행위와 개인적 특성을 결정짓는데 있어 행동을 자극하는 감정과 욕망이 중요한 것이며, 그에 비하면 기억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암시한다. 「블레이드 러너」는 처음에는 관객들에게 데커드는 인간으로, 복제인간은 인공적으로 제조된 비인간적 존재로 암시하는 입장을 취했다가 결국은 이러한 입장을 반대로 뒤집어 엎고 있으며, 그에 따라 우리는 복제인간이 우리들이 인간이 되는데 필요하다고 믿는 가치들, 즉 감정적 공감과 믿음, 헌신, 사랑과 같은 것을 구현한 존재로 인식하기에 이르게 된다. 「다크 시티」는 우리에게 우리가 연쇄 살인범으로 믿을 수도 있는 주인공을 보여주지만 결국은 머독이 전혀 다른 개별자로 그의 미래가 그의 감정적 공감과 믿음, 헌신, 사랑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타이렐과 외계인들이 구한 것은 그들이 찾을 없는 것이었다. 과학자와 유전자 설계자로서 그들이 갖고 있는 뛰어난 기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로이와 프리스, 데커드와 레이첼, 머독과 엠마/애나가 마침내 발견한 인간의 특성을 갖고 있지 못했다.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몸에 더하여 감정을 갖게 된 우리의 주인공들은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기에 이른다. 이들 영화는 복제인간과 「다크 시티」에 나오는 거주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일종의 이식된 기억으로 대표되는, 말하자면 안정되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환상인 세상으로 영화를 끝내지 않는다. 대신 사랑하는 여자에게 빠져드는 그들의 감정 때문에 우리의 주인공들이 불확실한 미래라는 위험을 감내하게 되는 것으로 영화를 마무리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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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8년판 「다크 시티」는 뉴 라인 프로덕션이 저작권을 갖고 있으며 미국에선 1998년 2월 27일에 처음으로 배포되었지만 이 영화의 프린트(포지티브 필름)는 저작권 년도가 1997년으로 되어 있다. 「블레이드 러너」는 1982년 6월 25일에 미국에서 처음으로 배포되었다. 감독판의 저작권 년도는 1991년이며, 1992년 9월 11일에 배포되었다. 우리는 신뢰도를 높이기 위하여 「블레이드 러너」의 감독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두 사람 모두 「블레이드 러너」의 원래 극장판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극장판은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릭 데커드의 목소리가 나레이션으로 흐르는 가운데 겉으로 보기에 완전한 자연 풍경 속으로 탈출을 하며 끝이 나는, 말하자면 낙관적이고 사실상 낭만적인 장면으로 마무리가 된다. 우리는 리들리 스코트가 원래의 판본을 사실상 없애버렸으며, 이는 극장판의 마지막 장면이 그의 입장을 대표한다기보다 시장성을 가장 크게 고려한 제작자의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는 스코트가 내놓은 것중에서 더욱 암울한 판본, 즉 목소리 해설을 제거하고 도시를 자유롭게 비행하는 장면이 아니라 좀더 크게 절충을 하여 데커드와 레이첼을 각자 자신들의 비행 수단에 남겨놓는 탈출 장면으로 마무리를 짓는 판본을 기본으로 삼았다.
2. 사실 존 머독은 형사 에디 왈렌스키(콜린 프릴스 분)로부터 “당신은 이 도시를 빠져나갈 수 없다”는 얘기를 듣는다. 하지만 왈렌스키는 자신은 그 방법을 찾아냈다고 말하고는 이어 빠른 속도로 달리는 지하철 앞으로 뛰어 들어 죽음을 맞는다.
3. 사이버펑크라는 주제에 대한 가장 훌륭한 소개의 글을 원한다면 위키페디아에 실린 글을 보면 된다. 주소는 http://en.wikipedia.org/wiki/Cyberpunk 이다.
4. 우리의 최근 글은 대다수가 극화되고 예시를 할 수 있는 영화를 통하여 영화(대체로 일반적 의미의 영화)와 철학적 주제 사이의 교차점을 밝히는 작업에 할애되어 왔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이야기의 구조와 일반적으로 영향을 받은 요소(특히 「블레이드 러너」와 「다크 시티」는 누아르 영화에 큰 빚을 지고 있다), 개인의 진정한 정체성의 발견과 같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공통의 요소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는 이들 두 영화와 「매트릭스」(감독 앤디 워쇼스키와 래리 워쇼스키, 1999)와 같이 누와르에서 영향을 받은 기타 공상과학영화를 보면서 낭만적 연인 관계의 문제점을 물론이고 진정한 정체성의 문제를 함께 살펴보았다. 누아르 영화의 철학에 관해선 Mark T. Conard, ed., The Philosophy of Film Noir (Lexington: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06)을 살펴보기 바란다. 「매트릭스」에 관해선 “Real Genre and Virtual Philosophy,”in The Matrix and Philosophy: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 ed. William Irwin(Chicago: Open Court, 2002)를 살펴보기 바란다.
5. 「다크 시티」는 순수한 도주 스릴러의 기준에서 보면 흥미로운 혁신적 이야기 구조를 제공한다. 전통적으로 쫓기는 주인공은 전에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여인을 만나게 되며, 그 여자가 믿음이라는 주제를 전개시켜 나간다. 「다크 시티」에선 믿음이라는 주제가 그의 아내 엠마가 바람을 핀 사건, 즉 엠마가 믿음을 배신한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외계인들은 이러한 믿음의 배신으로 인하여 머독이 그녀를 살해할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머독은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고 그것이 이식된 기억이었음을 깨닫는다. 믿음이란 주제는 아울러 머독과 쉬레버 사이에서도 전개가 되며, 형사인 범스테드(윌리엄 허트 분)가 머독의 이야기를 믿기 시작했을 때 머독에 대한 경험을 통하여 믿음이 점점 증대되는 상황에 의해 믿음이란 주제가 전개되기도 한다.
6. 영화 종반부에서 우리는 외계인들이 단순히 죽은 인간의 몸을 탈취하여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머독에게 설명할 때 외계인들은 “우리는 너희들의 사체를 용기로 사용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외계인의 실제 모습은 전혀 볼 수가 없다.
7. 개프가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와 그와 레이첼의 정확한 관계는 아주 모호하게 되어 있다. 로이의 죽음 뒤, 개프는 옥상에 도착하여 “나는 당신이 끝낼줄 알았어요”라고 말하며 데커드에게 그 사실을 환기시킨다. 이는 데커드와 거의 죽은 상태인 로이 사이의 대칭성을 다시 한번 강화해주는 견해이다. 개프는 아울러 데커드에게 “그녀[레이첼]가 오래 살 수 없다는 건 참 안됐어요. 하지만 누군들 영원히 살겠어요?”라고 외친다. 이러한 장면은 데커드가 자신의 아파트 바깥에서 개프가 남기고 간 종이로 접은 유니콘을 발견하기에 앞서서 나온다.
8. 레이첼이 보여주는 간결한 말투의 대사와 자주 담배를 피우는 행동은 물론이고 레이첼의 복장, 즉 어깨가 각이진 정장과 그녀의 헤어스타일은 모두 1940년대의 고전적인 요부를 암시하고 있다.
9. 이런 영화들이 기계 인간의 제거를 특징으로 하는 공상과학영화의 유일한 예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예를 들자면 복제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 데커드는 「터미네이터」(감독 제임스 카메론, 1984), 「터미네이터 2: 심판의 날」(제임스 카메론, 1991), 「터미네이터 3: 기계들의 반란」(조너선 모스토, 2003)에 나오는 중심 인물들과는 다르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10. 이러한 사고의 실험은 존 로크의 저서 『인간오성론』(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에서 27장에 나오며, 이 책은 현재 다양한 판본이 나와 있다.
11. 이러한 사고의 실험에 의해 예시된 개인 정체성의 일반적 문제에 대해 입문서를 구한다면 다음 두 권의 책이 매우 훌륭하다. 먼저 John Perry, ed., Personal Identity(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5)가 있으며, 이 책은 로크 저서에서 나온다고 한 장을 포함하고 있다. 이와 함께 다른 책으로는 John Perry, Identity, Personal Identity, and the Self (Indianapolis, IN: Hackett, 2002)이 있다.
12. 엠마에게 들이닥칠 이러한 운명은 이 영화에서 외계인이 그녀를 애나라고 부를 때 예상이 된다. 그녀는 자신은 애나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외계인은 “당신은 곧 그 이름에 대해 예라고 답하게 될 것이다”라고 답한다.
**이 글은 다음의 글을 번역한 것이다.
Deborah Knight and George McKnight, “What is it to be human? – Blade Runner and Dark City”(Steven M. Sanders(edited), The philosophy of science fiction film, The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08, pp.2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