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란 무엇인가 – 빌렘 플루서

사진이란 무엇인가

글: 빌렘 플루서

오늘날엔 어디에서나 사진을 접할 수 있다. 사진 앨범은 물론이고 잡지와 책, 상점의 창, 옥외 광고판, 포장지, 상자, 엽서, 음료캔 등등의 어디에서나 사진이 눈에 띈다. 그렇다면 사진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지금까지 이 책에서 전개해온 논지에 따르면 이들 모든 사진 이미지는 어떤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는 개념들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이들 이미지는 마치 사회가 간접적인 마법의 주문 아래서 어떤 행위를 하게끔 프로그램해놓은 것이었다(이런 논지는 이 책에서 앞으로도 계속 검토될 것이다). 하지만 사진을 순진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은 사진을 이와 같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사진은 무엇인가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사진은 사진이란 이름의 이미지 표면에 반영된 어떤 상황들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런 사람들은 우리들이 사진이라는 이미지의 표면에서 자동적으로 그러한 상황에 대한 인상을 얻게 된다고 본다. 그리고 그 상황은 어느 정도 “저 밖에” 있는 세상의 상황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있어 사진은 세계 그 자체를 대신한다. 물론 이러한 순진한 관찰자들도 어떤 상황이 특정한 시각으로 재단되어 사진이란 이름의 이미지 표면에 반영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이를 큰 문제라고 여기진 않는다. 때문에 그들이 보기에 ‘사진 철학’은 완전히 정신적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인 듯 여겨진다.
우리의 순진한 관찰자들은 암묵적으로 자신들이 사진을 통하여 저 밖에 있는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에겐 사진에 담겨있는 세상과 저 밖의 세상이 똑같은 하나이다. 물론 이는 기본적인 사진 철학의 입장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사실일까? 이들 순진한 관찰자들은 사진의 세상에서 컬러, 그리고 흑백의 상황을 마주한다. 하지만 저 밖의 세상에 사진 속 세상의 컬러, 그리고 흑백의 상황에 상응하는 상황이 정말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사진의 세상은 실제의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순진한 관찰자들이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피하려고 했던 바로 그 사진 철학의 문제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된다.
‘저 밖의’ 실제 세상에선 흑백의 상황을 찾을 수가 없다. 흑백은 극단적인 상황이며, 현실적 상황이라고 보기 어려운 매우 ‘이상적 상황’이기 때문이다. 흑은 모든 빛이 완전히 부재하는 상황이다. 백은 모든 빛이 완전히 다 존재하는 상황이다. ‘흑’과 ‘백’은 일종의 개념이며, 예를 들자면 광학 이론에서 규정하고 있는 개념들이다. 그러므로 흑백의 상황은 이론적인 것이며, 때문에 실제 세상에선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거의 어디에서나 흑백 사진을 접할 수 있다. 이때의 흑백 사진은 광학이론에서 규정하고 있는 흑과 백의 개념에 의해 이루어진 이미지이며, 흑백 사진은 이러한 이론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안타깝게도 흑과 백은 저 밖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흑과 백이 존재하여 우리들이 흑백의 세상을 볼 수 있다면 그러한 세상에 대한 논리적 분석이 가능해지게 될 것이다. 그러한 세상에선 모든 것이 흑이거나 백, 아니면 그 둘이 뒤섞여 있는 상태로 나타날 것이다. 세상을 흑백으로 바라보게 되는 그러한 경우의 단점은 물론 이러한 흑백의 혼합 세상이 컬러의 세상이 아니라 회색의 세상이 될 것이란 점이다. 그런데 흑백의 세상엔 흑과 백만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 세상이 회색으로 보인다면 회색은 실제의 색이 아니라 이론상의 색이 된다. 따라서 흑백의 세상을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나면 세상을 사진 속에서 흑백으로 재구성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흑백 사진은 다음과 같은 사실, 즉 흑백 사진의 흑백은 사실은 흑백이 아니라 회색이며, 그런 점에서 흑백 사진은 이론적 이미지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이 발명되기 오래 전에 사람들은 흑백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상상했었다. 사진이 발명되기 이전에 있었던 마니교에서 그러한 경우의 두 가지 예를 찾을 수 있다. 마니교에선 인간의 판단을 ‘참’과 ‘거짓’이라는 이상적 극단으로 양분하여 추상화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이러한 참과 거짓의 추상적 개념을 바탕으로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의 원리를 만들어냈다(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는 몇가지 논리의 원리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동일률이다. 이는 일치의 원리라고도 하는 것으로 이를 사진에 적용해 보면 만약 장미의 사진일 경우 그 사진에는 장미의 이미지가 담겨 있어야 논리적으로 맞다는 것이다. 모순율은 차이의 원리라고도 하는 것으로 개는 동물이다라는 논리가 있을 때 개는 동물이 아닌 다른 것일 수는 없다는 논리이다. 배중률은 동일한 대상에 대하여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할 수는 없다는 논리이다). 어떠한 판단도 완전히 참이거나 완전히 거짓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또 논리 분석의 경우 모든 참의 판단이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과학은 이러한 논리함수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사실 이는 효과적으로 작동이 되고 있다. 다시 마니교의 논지에서 두번째 예를 들어보면 행위의 세계에선 모든 행위가 ‘선’과 ‘악’의 양극단으로 나뉘어 추상화되며, 선과 악이라는 이러한 양극단의 추상적 개념에서 종교와 정치의 이념이 형성되었다. 어떤 행위도 완전히 선이거나 완전히 악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또 어떤 이념이라도 심층적으로 분석해보면 모든 행동이 꼭두각시와 같은 행위로 귀결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체계는 이들을 토대로 구축되어 있으며, 사실 이 또한 효과적으로 작동이 되고 있다.
흑백 사진은 카메라를 사용하여 컬러의 세상을 흑백의 세상으로 추상화시킨다는 점을 제외하면 마니교와 똑같은 형태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백 사진 역시 효과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흑백 사진은 광확 이론을 이미지로 변환시킨 것이며, 이렇게 변환이 될 때 광학 이론은 마법의 주문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흑백 사진은 ‘흑’이나 ‘백’과 같은 이론적 개념을 어떤 상황으로 변환시킨 것이다. 흑백 사진은 일정한 과정을 밟아 어떤 학문 체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광학 이론의 담론을 사진이라는 이미지의 표면으로 변형시켜 놓은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론적 사고의 마법이 이미지의 형태로 구체화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진 특유의 아름다움은 바로 이런 점에서 찾을 수 있으며, 사진의 아름다움은 알고 보면 개념 세계 특유의 아름다움이다. 많은 사진작가들이 아울러 컬러 사진보다 흑백 사진을 선호한다. 그 이유는 사진의 실질적 의미, 즉 개념의 세계를 흑백 사진이 보다 명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초창기의 사진은 흑백이었으며, 이는 흑백 사진이 광학 이론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이론의 출현과 화학 이론 및 기술의 발전 덕택에 마침내 컬러 사진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마치 사진은 처음에는 세상에서 컬러를 추출하여 보관해 두었다가 그 이후의 현상된 사진에서 보관해두었던 컬러를 세계에 되돌려 주고 있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사실은 컬러 사진의 컬러도 최소한 흑백과 마찬가지로 이론적인 컬러이다. 예를 들어 사진으로 찍힌 잔디밭의 녹색은 화학 이론에 의거하여 구현되는(예를 들어 사진의 경우에는 빛으로 색을 구현하는 경우와 달리 혼합하는 방법으로 색을 구현한다) ‘녹색’이라는 개념을 가리키는 이미지이다. 카메라(또는 카메라에 장착하는 필름)는 이러한 개념으로서의 ‘녹색’을 이미지로서의 ‘녹색’으로 옮길 수 있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자연히 사진의 ‘녹색’과 ‘저 밖의’ 잔디밭이 갖고 있는 실제의 녹색 사이에는 거리가 있으며, 둘은 간접적인 관계만 갖고 있을 뿐이다. 화학적 개념으로서의 ‘녹색’은 실제 세계의 일부 이미지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진 것이긴 하다. 하지만 사진의 ‘녹색’과 ‘저 밖에’ 있는 잔디밭의 ‘녹색’ 사이에는 매우 복잡한 일련의 연속적인 변환 과정이 놓여 있으며,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흑백으로 찍혀있는 사진 속에 나타난 잔디밭의 회색과 실제 잔디밭의 녹색이 갖는 연관 관계 때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이루어진다. 그런 점에서 컬러로 나타난 사진 속의 잔디밭은 흑백으로 찍혀있는 사진 속의 잔디밭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추상적 이미지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컬러 사진이 흑백 사진보다 훨씬더 높은 수준의 추상적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흑백 사진이 컬러 사진보다 더 구체적이며, 이런 측면에선 컬러 사진보다 더 ‘참’에 가깝다. 흑백 사진은 실제와는 확연하게 달라서 사진의 이론적 기원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역으로 말한다면 사진의 컬러가 ‘더 실제’에 가까울수록, 그 사진은 더욱 믿을 수 없는 사진이라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사진의 이론적 기원을 더더욱 효과적으로 은폐시키기 때문이다.
사진은 색이 핵심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색을 얻을 수 있다면 사진 이미지의 다른 요소들도 모두 다 얻을 수가 있다. 사진의 구성 요소들은 예외 없이 이미지의 표면에서 자동적으로 ‘저 밖의’ 세상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개념을 반영하고 있는 변환된 개념들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는 우리들이 사진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선 반드시 해독해야할 사진의 거짓된 측면이다. 사진은 실제가 아니라 사실은 실제인 척하고 있는 위장된 이미지이다. 또 알고보면 사진이란 카메라 속에 프로그램되어 있는 개념이다. 아울러 사진은 추상적 개념으로 이루어진 상징의 집합체이다. 또 사진은 상징적 상황으로 변환이 된 담론이기도 하다. 사진이 진정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사진의 이런 측면을 해독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가장 먼저 우리는 ‘해독’하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가 만약 라틴어 문자로 쓰여진 텍스트를 해독하고 있다고 했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문자의 의미를 해독한다는 것이 구어로서의 관례적인 음, 즉 그 문자를 어떻게 읽는가를 해독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들 문자로 이루어진 단어의 뜻을 해독하는 것일까? 또는 이들 단어들로 이루어진 문장의 의미를 해독하는 것일까? 아니면 훨씬 더 깊이 파고들어 문화적 맥락에서 작가의 의도를 탐구하는 것일까? 내가 사진을 해독한다고 했을 때 나는 과연을 무엇을 하게 되는 것일까? 나는 ‘녹색,’ 즉 화학 이론의 담론이 가리키는 관례적인 녹색의 개념을 해독하는 것일까? 아니면 라틴어 텍스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더욱 심도있는 탐구를 통하여 사진작가의 의도와 문화적 맥락을 파악해야 하는 것일까? 메시지를 해독할 때 어느 정도 해독을 해야 나는 만족할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나가다 보면 해독은 전혀 만족스런 해결책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어느 한 차원에서 해독을 하고 나면 또다른 차원의 해독이 기다리게 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나가게 되면 해독이란 끝이 없는 과정이 되어 버린다. 모든 상징은 문화적 합의(cultural consensus)의 대양에 떠 있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어떤 단일 메시지의 완전한 해독에 성공했다고 하면 그것은 곧 한 문화의 전체와 그 문화의 현재는 물론이고 과거 역사까지 모두 밝혀냈다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하여 이 얘기는 한 문화의 전체와 그 문화의 현재 및 과거 역사를 모두 밝혀내기 전에는 단 하나의 메시지도 완전한 해독이 불가능하다는 뜻이 된다. 이를 좀더 ‘근본적’ 입장에서 보면 어떤 단일한 특정 메시지에 대한 비평은 대체로 그 메시지를 만들어낸 문화 자체에 대한 비평이 될 수밖에 없다.
다행히 사진의 경우 해독이 무한대의 늪으로 빠져드는 이러한 위험은 피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진작가/카메라’라고 불리는 복합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암호화된 어떤 의도의 기록물, 바로 사진을 해독하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사진에서 이러한 암호화된 의도를 해독해 냈다면 그 사진 자체가 해독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논지는 우리가 사진작가의 의도와 카메라의 프로그램 사이에서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다고 전제할 때 가능하다. 하지만 이들 두 가지 요소는 상호연결되어 있으며, 분리할 수가 없다. 그러나 비록 이론적이긴 하지만 해독을 위해선 한장의 모든 사진에서 사진작가의 의도와 카메라의 프로그램이라는 그 둘이 분리되어 있다고 간주할 수밖에 없다.
사진작가의 의도를 사진의 핵심적 의미, 또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고 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사진작가의 의도란 세계에 대한 사진작가의 개념을 암호화하여 이들 개념을 이미지로 변환해 놓은 것이다. 둘째, 사진작가는 이러한 자신의 목적을 구현하기 위하여 카메라를 이용한다. 셋째, 사진작가의 목적은 이렇게 만들어낸 이미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이러한 사진들이 다른 사람들의 경험이나 지식, 판단, 행위의 모델로 사용할 수 있게끔 해주는데 있다. 넷째, 사진작가의 목적은 이러한 모델을 가능한한 오랫동안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정리를 하자면 사진작가의 목적은 사진이란 매개체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그 정보가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 영원히 유지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사진작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사진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고려되는 것은 바로 그들의 개념이며(그리고 그러한 개념들이 의미하는 생각), 이러한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 카메라 프로그램이다.
반면 카메라의 프로그램을 사진의 핵심, 또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카메라의 목적은 카메라에 내재하는 가상 현실 구현이라는 성능을 이지미라는 형태로 구체화하는 것이다. 둘째, 카메라는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사진작가를 이용한다. 하지만 인공위성의 카메라처럼 카메라가 완전히 자동으로 작동되는 경우는 예외이다. 셋째, 카메라의 목적은 카메라로 만들어낸 이미지를 널리 배포하여 사회가 카메라라는 장치 자체에 대해 평가를 할 수 있도록 하고, 그러한 평가를 통하여 카메라의 기능을 지속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도록 해주는데 있다. 넷째, 카메라의 목적은 점점 더 좋은 사진을 만들어내는데 있다. 정리를 하자면 카메라의 프로그램은 그 기능을 통하여 가상 현실을 구현해내며, 이 과정에서 사회를 카메라에 대한 평가체계로 이용하여 지속적인 성능 향상을 이룩한다. 이미 전에 언급했듯이 카메라 프로그램의 배경에는 추가적인 프로그램, 즉 사진 산업계의 프로그램, 그보다 더 규모가 큰 복합적 산업체의 프로그램, 사회경제적 프로그램 등등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 프로그램은 전체적으로 한 프로그램이 다른 프로그램의 위에 자리하는 식으로 계층적 형태를 보인다. 그리하여 전체적으로 계층적 형태를 보이는 이들 프로그램은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면서 카메라라는 이들 장치의 지속적 향상에 관심을 갖고 행동하도록 이 사회를 프로그램 해놓고 있다. 전체 프로그램의 이러한 경향은 하나의 사진 각각에서 관찰될 수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반드시 해독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이 완료되었을 때 사진은 비로소 ‘해독’되었다고 간주될 수 있다.
사진작가의 목적과 카메라 프로그램의 목적을 비교해보면 그 둘이 하나로 수렴되는 경우도 있고, 또 그 둘이 서로 갈라서는 경우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작가와 카메라가 협력하여 함께 공동으로 작업을 한다는 점에서 보면 그 둘은 하나로 수렴되고 있으며, 사진작가와 카메라가 서로 충돌하고 갈등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보면 그 둘은 서로 갈라서고 있다. 모든 한장의 사진은 사진작가와 카메라 사이의 협력과 갈등의 동시적 산물이다. 따라서 사진에 대한 해독 작업은 사진작가와 카메라가 어떻게 협력하고, 또 어떻게 갈등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었을 때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사진 비평가들은 사진 비평을 할 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는 자신만의 의도를 살리기 위하여 카메라의 프로그램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이용했으며, 어떻게 카메라를 활용했는가?” 또 반대로 카메라를 기준으로 하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 “이 사진이 찍혀질 때 카메라는 사진작가의 의도를 카메라 프로그램 내의 관심사로 방향을 바꾸는데 있어 어느 정도 성공했으며, 어떻게 사진작가를 활용했는가?” 이러한 입장을 기본적인 기준으로 삼게 되면 자연스럽게 ‘최고’의 사진이란 사진작가가 카메라 프로그램의 한계를 극복하여 카메라의 프로그램을 인간의 의도에 맞게끔 움직인 사진, 즉 인간의 의도를 카메라라는 장치가 충실하게 구현하고 있는 사진이 된다. 그리고 두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정신이 카메라 프로그램의 정해진 한계를 이겨낸 사진이 ‘좋은’ 사진이 된다. 하지만 사진의 세계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양한 카메라 프로그램이 등장하면서 점점 더 인간의 의도는 약화되고 카메라의 기능쪽으로 방향이 바뀌고 있음을 접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보자면 사진 비평의 임무는 인간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카메라라는 기계 장치를 지배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가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카메라라는 기계 장치가 어떻게 인간의 지배 노력에 반하여 인간의 의도를 기능적 관심사로 흡수하려 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또 다른 사진 비평의 임무가 되어야 한다. 사실 대체로 아직 우리는 그와 같이 정교한 사진 비평의 관점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선 추후에 논의할 예정이다.
(이번 장의 제목은 ‘사진이란 무엇인가’였지만 사진이 기계 장치로 만들어낸 다른 종류의 이미지와 어떻게 구별되는가와 같은 사진의 구체적 측면은 다루지 못했다. 이런 측면을 누락한 것에 대해 설명을 덧붙이자면 그것은 이번 장의 목적이 사진에 대한 합리적 해독의 방향을 보여주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장에선 논의의 초점을 좀더 좁히게 될 것이다.)
이제 이번 장의 내용을 요약해보자. 기계 장치가 만들어낸 이미지들이 모두 그렇듯이 사진은 어떤 상황으로 변환될 수 있는 개념이며, 이들 개념은 사진작가의 의도로 나타나기도 하고 동시에 카메라라는 기계 장치의 프로그램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사진 비평의 임무가 각각의 사진에서 사진작가와 카메라의 프로그램이라는 이 두 개의 체계가 서로 어떻게 얽혀있는가를 해독해내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사진 작가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개념을 사진 이미지라는 형태로 양식화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다른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일종의 모델을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은 자신들의 기억 속에 사진작가가 의도하는 것을 영원히 가질 수 있게 된다. 카메라는 카메라에 내장되어 있는 프로그램화된 개념을 통하여 그러한 개념을 사진이란 이미지의 형태로 양식화한다. 이러한 카메라의 프로그램은 사회가 카메라의 성능을 지속적으로 향상시키는데 관심을 갖고 평가 행위를 하게끔 프로그램되어 있다. 사진 비평가가 이들 두 가지 사진의 목적을 밝히는데 성공하게 되면 사진의 메시지가 해독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사진 비평가들이 이러한 임무에 실패하면 사진은 해독되지 않은 상태가 되며, 그때의 사진은 마치 이미지의 표면에 ‘실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시 말하여 저 밖의 세상에 있는 실제 상황을 대신하고 있는 듯이 보이게 된다. 사진을 이런 식으로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되면 그때의 사진은 사진의 원래 임무를 완벽하게 이룰 수 있게 된다. 그 원래의 임무란 바로 사회가 카메라라는 기계 장치의 기능 아래 마치 마법의 주문에 걸린 것처럼 행동하게끔 프로그램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카메라를 이용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카메라를 위하여 움직이는 세상이다.

**이 글은 다음의 글을 번역한 것이다.
Vilém Flusser(Translated by Anthony Mathews), “ The Photograph”(Vilém Flusser, Towards a Philosophy of Photography, Cromwell Press, 2000, pp.41-48)

**번역되어 나온 한글 책자가 있으나 번역서의 한글은 마치 한글의 형태를 빌린 외계어에 가까웠다. 원래의 책자는 독어로 되어 있다. 독어를 모르는 관계로 영어 번역본 두 권을 동시에 비교하면서 번역했다. 이해를 위하여 원문에 없는 구절을 가미하면서 한글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보고 내용을 알 수 있는 수준으로 번역했다. 기존의 한글 번역은 전혀 참고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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