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교란 속에 열리는 또다른 세상 —유병록의 시 다섯 편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16년 1, 2월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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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세상에선 종종 교란이 발생한다. 언어의 교란을 말함이다. 사실 교란이란 말이 가장 흔하게 쓰이는 경우는 자연 생태계를 말할 때이다. 자연 생태계는 안정된 듯 보이는데도 가끔 교란이 발생할 때가 있다. 자연 생태계의 교란은 대개 뜻하지 않은 외래종의 유입으로부터 발생한다. 자연 생태계에 교란이 발생하면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먹이 사슬의 균형이 무너진다. 그러면 일부 종의 개체수가 급격하게 늘어나며 그동안의 안정되었던 생태계에 혼란이 온다. 이런 교란에 대한 사람들의 대응은 외래종을 제거하여 자연 생태계를 예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다.
시의 세상에서 언어 생태계의 교란이 발생했을 때의 대응은 이와는 정반대이다. 교란이 발생하면 시를 읽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겪게 되는 고충은 의미의 혼란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언어가 교란된 세상을 마주하면서도 이를 우리들에게 익숙한 일반적인 언어 체계의 세상으로 바꾸어 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시를 읽는다는 것은 교란된 언어들을 잘 살피고 정리하여 시가 만들어낸 언어 생태계에서 새롭게 유영하고 있는 의미의 종들을 낚아내는 일이다. 자연 생태계에서 교란이 발생하면 느닷없이 유입된 외래종을 제거해야 하지만 시의 세상에선 언어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있는 종을 찾아내 그 종을 새로운 맛으로 요리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자연 생태계의 교란은 기존 생태계의 파괴를 뜻하지만 시의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언어 생태계의 교란은 또다른 세상의 탄생이기도 하다.
물론 새로운 종을 낚아올리는 과정은 쉽지가 않다. 시의 언어 생태계에 나타난 새로운 종, 즉 한 시인의 언어 생계태 안에서만 통하는 새로운 의미가 겉은 기존의 종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유병록의 시 다섯 편을 마주하며 이렇듯 교란된 언어 생태계를 보았다. 그리하여 그 생태계 속에서 언어의 전후 맥락을 살피고 정리하는 것으로 미끼를 내리거나 그물을 쳤으며, 그것으로 새로운 종을 낚아올리는 방식으로 삼아 그의 시를 읽었다.

2
다섯 편의 시 가운데서 「사과」로 시작해본다. 사과는 처음에는 과일로서의 사과로 여겨졌다. 시가 시작되는 자리에서 만나는 ‘사과밭’이란 말과 묶어 이해를 하면 이러한 짐작은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사과밭이란 말만 그렇고 그 말을 첫부분에 내세우며 시작하는 싯구절은 그렇질 못하다. “사과밭에서는 모든 게 휘어진다”는 시의 첫구절은 사과를 과일이려니 생각한 우리의 짐작으로는 그 의미를 곧바로 해독해내기가 쉽지 않다.
사과밭은 도대체 어떤 곳일까. 그 사과가 과일이었다면 그곳은 봄에는 사과꽃이 피고 여름에는 사과가 익어가며 가을은 그 열매를 수확하는 곳이다. 그런데 시 속의 사과밭은 그렇질 못하다. 시 속의 사과밭은 “봄날의 약속이 희미해지고 한여름의 맹세가 식어”가는 곳이며, 가을이 왔을 때는 어떻게 완력으로 버텨보지만 결국에는 “사과밭을 지탱하던 가을의 완력도 무력해”지는 곳이다. 유병록이 말하는 사과가 우리들이 처음에 짐작한 과일로서의 사과가 맞는 것일까. 우리의 머릿속에서 슬그머니 의문이 들자 시인이 이렇게 말한다.

벌레 먹듯이
이제 내가 말하는 사과는 네가 말하는 사과가 아니다
—「사과」, 부분

이 사과는 단순히 과일로서의 사과가 아니다. 이 사과는 과일이면서 동시에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할 때의 그 사과이기도 하다. 그렇게 되면 사과밭은 사과나무가 자라는 곳이 아니라 사과를 해야 하는 사이이거나 사과를 해야 하는 자리가 된다. 과일로서의 사과에 잘못을 빌 때의 사과가 섞여들면 “내가 사과를 건네도 네 손은 비어 있다”는 구절도 잘 이해가 간다. 사과를 했는데도 상대가 받아들이질 못하는 경우가 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런 맥락에 서면 “사과밭에서는 모든 게 휘어진다”는 첫구절은 사과의 태도가 될 수 있다. 사과를 할 때는 강경하게 자기 입장을 고수할 수가 없다. 사과를 요구하는 상대방의 강경한 입장이 내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는 완력으로 작용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금증은 생긴다. 왜 하필 유병록은 과일로서의 사과와 잘못을 빌 때의 사과를 뒤섞어 그 의미를 교란시키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 사과가 미묘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과는 사과를 할 때는 둘 사이를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떨어뜨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사과가 떨어”질 때 “돌이킬 수 없는 거리로 아득해진다”는 구절이 그런 점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런데도 둘의 사이는 그렇게 쉽게 끝이 나질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도 “멀리 가지는 않고/사과나무 발치에서 썩어간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개 사랑하는 사이는 마치 끝장을 낼 듯이 사과를 요구하고 또 버티다가 사과를 하면서 서로 끝을 내진 않고 지루하게 사이를 계속 이어간다. 사랑하는 둘은 그만큼 그 사이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그 둘은 자로 명확하게 잴 수가 없는 사이이다. 때문에 그 둘의 앞에선 “사이를 짐작하다 말을 잃는 자처럼” 되기가 쉬우며, 그 무엇으로도 둘의 사이는 짐작이 어렵다. 그런 사이에서 사과가 갖는 의미와 역학을 나타내기는 쉽지가 않다. 사과라는 하나의 말 속에 과일로서의 사과와 잘못을 빌 때의 사과가 뒤섞인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시가 그렇게 전략적으로 씌여질리는 없다.
때문에 정작 내가 가장 크게 관심을 가진 것은 이 시가 어떻게 쓰여졌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상상했다. 시인에겐 여자가 있다. 아마도 아내나 연인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이에서도 다툼은 발생하고 걸핏하면 사과를 요구하거나 사과를 해야 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것도 생각보다 잦다. 내가 잦다고 생각한 것은 ‘한 광주리’란 말 때문이다. 한 광주리면 많은 사과가 담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느 날 시인은 가을의 사과밭을 지나게 되었다. 사과밭의 사과나무 아래는 사과가 한 무더기 버려져 썩어가고 있었다. 시인은 그 광경을 보며 과일로서의 사과 앞에서 잘못을 빌 때의 사과를 떠올리며 그 둘을 뒤섞는다. 그리고 사랑하는 둘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잦은 사과와 용서도 이 사과밭의 사과와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빠져든다. 그러한 생각이 한편의 시로 엮여지기에 이른다. 이 시가 탄생하게 된 비밀은 나의 상상 속에선 그렇게 짐작이 되었다. 그것은 시인의 놀라움이기도 하다. 누가 사과밭을 지나며 그 밭으로 사랑하는 사이의 다툼과 갈등을 끌여들여 둘의 사이를 돌아볼 수 있겠는가. 그건 시인이 아니면 아무도 못한다. 시인은 언어 생태계를 교란시키지만 그 교란으로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의 다툼과 갈등을 어느 비유에서보다 새롭고 기발하게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두 번째로 살펴볼 시는 「발」이다. 「발」에선 「사과」와 달리 전혀 다른 두 개의 의미가 혼란스럽게 뒤섞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시가 어떻게 탄생되었을까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하여 상상력을 동원해야할 필요도 없다. 우리들 누구에게나 발은 있기 때문이다. 그 발은 모두 우리들 각자의 발이며 신체의 일부로서의 그 발이다. 수족처럼 부리다라는 말이 누군가를 자기 마음대로 부리는 경우를 뜻하듯이 우리는 대체로 발을 내 마음대로 부린다. 발이 스스로 생각하며 독립된 움직임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병록의 시 「발」에선 그런 일이 발생한다.

인간 하나쯤 아무렇지 않게 태우고 다니는 네발짐승 같다 말귀를 알아듣는 가축 같다

소리 없이
나를 태우고 밥집에도 가고 상점에도 들른다 달리거나 한곳에 오랫동안 서 있기도 한다

한참을 잊고 지내다
네 등에 올라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발」, 부분

우리는 두 발밖에 갖고 있지 않은데 그 두 발이 시 속에선 네 발의 짐승으로 독립을 한다. 왜 시인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삶은 종종 고통스러울 때가 많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그 고통을 모두 감내하고 견딘다는 것이 믿기질 않는다. “참을 만한 시간이 참기 어려운 밤”을 지나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시인은 우리가 어떻게 그 시간을 지나가는지를 우리의 의지라는 설명만으로는 이해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우리는 고통에 순종하지 못하나 우리 몸 가운데 일부에서 그 고통을 감내하며 삶의 하중을 짊어져 주는 부분이 있어야 고통을 견디는 우리의 삶이 오히려 설명이 된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 부분으로 시인의 눈에 띈 것이 바로 발이다. 우리가 스스로 삶의 고통을 이겨나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견디지 못할 때 우리 몸의 일부, 바로 발에서 그 고통을 감내하며 삶의 짐들 가운데서 가장 힘겨운 부분을 그 등에 나누어 짊어진다. 그래서 우리가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시를 읽고 나면 시인의 시각이 훨씬 더 삶에 대한 통찰력있는 설명으로 들린다.
「발」을 우리의 몸에서 독립시켜 삶의 무게를 감당하는 중심축으로 바라보게 해주는 이러한 시각은 「산다」에선 정반대의 양상으로 뒤바뀐다. 우리는 보통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바람직한 삶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유병록은 「산다」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내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말은 한없이 자세를 낮추며 스스로를 비우려고 드는 말처럼 들렸다. 시인이 스스로를 비운 자리에는 “말할 수 없는 짐작의 세계를 닮아가는 일”이 들어선다. 그 짐작의 대상은 ‘당신’이다. 당신이 전부 괜찮은 것은 아니다. “당신의 말투로 인사를 하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당신의 말투로 다짐을 하면 쓸쓸해”진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시인은 당신을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시인도 알고 있다. 이러한 삶이 어느 정도 걱정스럽다는 것을. “내 목소리를 잃어간다는 걱정, 알고 있습니다 기어이 실패하리라는 말, 틀리지 않습니다”라는 말은 시인의 우려스런 심정을 증거한다. 그렇다면 시인은 당신을 거절하고 분연히 일어나 자신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렇질 않다. 시인은 여전히 자신을 낮추고 비우려 한다. 아니, 단순히 비우려는 정도가 아니라 비우겠다는 의지까지 내비친다.

무덤이 죽음을 거부하지 않듯이
두렵지 않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산다」, 부분

어떻게 내가 죽어 사라지는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비울 수 있는 것일까. 산다는 것은 대체로 나를 지키고 나만의 길을 걸어갈 때 그 의미가 더 빛난다. 그러나 반대일 때도 있다. 사랑할 때이다. 사랑할 때는 나를 내려놓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채웠을 때 오히려 삶이 빛나는 역설이 발생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내 목소리로 내 얘기를 당신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보면 내 “입술에서 당신의 억양을 발견”하는 일이다. 시인은 그것을 “지독한 다행”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지독하다고 했을 것이며, 그 지독한 일이 아직 그에게 가능하여 ‘다행’이라고 했을 것이다. 사랑하며 「산다」는 건 바로 그런 일일지도 모른다.
시 「모자」 또한 「발」과 비교가 된다. 「발」에서 우리 신체의 일부분이 삶의 고통을 감내하며 우리들의 삶을 업고 가는 등으로 분화한 반면 「모자」는 그 반대이다. 모자는 우리 신체의 일부가 아니다. 그러나 때로 오래 같이한 물건은 우리 몸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시는 시인이 “친구 만나러 인천 가는 길”이란 것을 알려준다. 그런데 아마도 모자를 잃어버렸는가 보다. 시인이 “괜찮다고, 잃어버릴 때가 되었다고, 곧 나한테 어울리는 모자를 구할 수 있다고 믿고 싶어”진다고 스스로 위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모자에 대한 시인의 애착은 매우 깊다. 그 애착은 보통을 넘어선다.

인천의 친구가
모자 이야기를 들으며 웃는다

네 손이 어디에 슬그머니 두고 온 모양이지
잘됐어, 곧 어울리는 모자를 구할 수 있을 거야, 원한다면 내가 하나 사줄 수도 있어
모자한테도 잘된 일일지 몰라

그가 미워지고
모자를 잃어버린 사실도 미워지고
—「모자」, 부분

내게 친구의 말은 위로로 들린다. 그런데도 시인은 친구가 미워졌다고 한다. 도대체 왜 미워진 것일까. 그건 모자가 시인에겐 모자가 아니라 몸의 일부인데 친구에게 있어선 그것이 그냥 모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몸의 일부를 잃어버렸을 때도 우리가 그런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시인은 “모자도 없이/인천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람들이 머리에 쓰고 있는 것을 모두 벗기고 싶”었다고 말한다. 때로 어떤 상실은 그 상실을 똑같이 겪지 않는한 이해가 되질 않는다. 유병록에게선 모자가 그렇다.
시 「이불」은 「모자」보다 양상이 더 확대된다. 모자처럼 신체의 일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이불이 누군가를 완전히 대신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얘기로 보자면 그리 달가운 상황은 아니다.

방 한쪽에 코끼리 한 마리가 모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아무 말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위로도 타이름도 자신을 일으켜 세울 수 없다는 듯이, 널따란 귀로 얼굴을 가리고
—「이불」, 부분

상황은 짐작이 간다. 누군가 토라져서 이불을 몸에 둘둘 감고 마치 커다란 코끼리처럼 방 한쪽의 공간을 모두 차지하고는 누워 잠들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상대방은 지금 침묵 시위 중이다. 함께 살다보면 이런 일이 발생할 때가 있다. 시인은 그 침묵 시위를 “이불처럼 커다란 귀를 덮고/코끼리는 잠을 잤다 방을 어지럽히거나 물건을 부수는 일도 없이, 간직한 이야기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듯이”라고 말하며 받아들인다. 시의 마지막은 다행이 해피엔딩으로 짐작된다. 나는 시의 마지막 구절, “너는 떠났다/광목 이불 같은 귀를 베어서 머리를 두고 눕던 자리에 곱게 개어놓고”라는 대목을 상대방이 집을 나갔다는 말로 이해하지 않았다. 시인이 기다려주는 동안 상대방의 마음이 풀려 다시 상황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으로 이해했다.
둘 사이에 갈등이 있으면 감정이 격해지기 쉽고 그러면 그러한 상황은 시적으로 녹여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유병록은 그러한 상황도 시의 언어 생태계에서 새롭게 구성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사실 그의 시 「이불」을 읽으며 나는 조금 킥킥 거리며 웃었다. 부부 싸움할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도 종종 부부 싸움이 벌어지면 시 속에서와 똑같이 이불을 뒤집어 쓰고 며칠 동안 침묵 시위를 벌이곤 하기 때문이다. 이불을 둘둘 감고 방의 한쪽 구석에 누워있는 것이 시인 자신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앞으로는 그럴 때면 유병록의 시를 인쇄하여 상대방의 앞으로 슬쩍 디밀어 주며 며칠간 참아달라는 신호삼아 건네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는 때로 대책없는 인생 문제의 가장 현명한 답이기도 하다.

3
생명체들이 살아 있는 자연 생태계와 달리 우리의 언어 생태계는 완고하게 굳어 화석화되어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유병록의 시는 그 완고한 일반적 언어 생태계를 교란시켜 말들이 숨을 쉬는 살아있는 언어 생태계를 만들어낸다. 사과라는 말 속에 과일로서의 사과와 잘못을 빌 때의 사과가 혼란스럽게 뒤섞이는 것은 그 생태계 교란의 가장 확실한 예이다. 정도는 약하지만 교란은 그의 어느 시에서나 접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 몸의 일부인 발이 스스로 생각하며 우리의 몸에서 독립을 한다. 내 자신의 삶을 살아가도 부족할 판에 스스로를 한없이 낮추며 나를 내려놓는 일도 벌어진다. 또 모자가 우리 몸의 일부가 되고, 우리들이 이불을 둘둘말고 토라지면 코끼리로 뒤바뀐다. 이런 교란은 시를 쉽게 읽을 수 없도록 방해하는 측면이 있지만 교란을 통하여 화석화되어 있던 언어 생태계가 새로운 생명을 얻어낸다는 긍정적 측면을 갖는다.
유병록은 이렇게 언어의 교란을 통하여 우리가 사는 일반적 언어 생태계에선 접할 수 있는 또다른 세상을 열고 있다. 그 세상은 일반적 언어 생태계보다 한결 깊이가 깊다. 시의 세상에서 교란은 혼란과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징조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징조를 감지할 때마다 시가 어렵다고 손을 놓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열릴 시의 세상에 들뜨며 새로운 언어 생태계로 더 자주 깊이 들어가 보는 것이다. 그러면 시는 읽는 이들을 결코 배신하는 법이 없다. 물론 유병록도 그 점에선 예외가 없었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16년 1, 2월호)

**대상 시의 원래 발표 지면은 다음과 같다.
―사과, 월간 『현대시』 2015년 6월호
―발, 월간 『현대시』 2015년 6월호
―산다, 『현대시학』 2015년 11월호
―모자, 계간 『한국문학』 2015년 가을호
―이불, 『현대시학』 201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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