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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시가 시를 얘기할 때가 있다. 2017년 계간지의 겨울호, 그리고 비슷한 시기의 격월간지를 읽다가 그러한 경우를 만났다. 시인은 정재학이다. 그는 “이제 막 한글에 흥미가 생긴 아들”의 물음에 대답하는 형식을 빌려 시를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 경우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시인의 답을 들을 수 있다.
아빠가 시인인 건 아는데 시가 뭐야? 시는 우리를 꿈꾸게 하는 글자들이야. 시 속의 글자들은 우리를 새로운 곳으로, 글자 수보다 훨씬 긴 여행을 하게 해 주지. 많은 사람들, 많은 사물들을 만날 수 있고 많은 놀이를 할 수 있단다. 엄청 멋진 거지! 달팽이 속에도 글자가 숨어 있고 매미 날개에도 글자가 숨어있고 기차 소리에도 글자가 숨어 있고 미끄럼틀 속에도 글자가 숨어 있단다. 시인은 그걸 찾아내는 거야.
—정재학, 「글자의 생」(『릿터』, 2017년 12월-2018년 1월호) 부분
정재학에 의하면 시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시인이 산고 끝에 써내는 창작의 산물이 아니다. 시는 세상의 모든 것에 숨어 있는 글자를 찾아내고 그것을 옮겨 적는 단순한 필사 행위의 결과물이다. 시인이 시를 창작의 산물이 아니라 옮겨 적는 행위의 산물로 본 것은 수긍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시라는 결과물은 인간의 창작 능력 한계 내에서 수긍하기에는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까를 의심스럽게 만들 정도로 경이로울 때가 많기 때문이다. 즉 시는 때로 인간이 과연 이런 것을 쓸 수 있을까를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놀라울 때가 많다. 아울러 이른바 시상이 떠올랐다고 하는 순간이 대개 무엇인가를 보거나 상황을 경험하는 순간과 맞물려 있을 때가 많다는 점도 시가 시인의 창작물이 아니라 우리들이 본 대상과 경험한 상황의 선물과 같은 인상을 줄 여지가 있다.
시가 시인이 쓴 창작물이 아니라 옮겨 적은 것이라면 시를 읽는 행위도 우리들이 그동안 생각해 왔던 것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기존의 시 읽기가 시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읽어내는 작업이라면 옮겨 적은 결과물로서의 시에서 시 읽기란 그 ‘글자’들이 숨어 있던 원래 세상으로의 여행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정재학은 세상의 온갖 것에 숨어 있는 글자를 찾아내는 것이 시라는 자신의 말에 아들이 한 반문, “그걸 어떻게 알고 찾아?”라는 물음에 “그것들을 좋아하고 마음으로 상상하면 진짜로 들린단다”라며 그것을 찾아내는 두 가지 요소로 좋아하는 마음과 상상을 꼽았다. 이는 읽는 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시인이 찾아내서 옮겨 적은 글자들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알려면 시를 읽을 때의 우리들도 그 두 가지를 똑같이 가져야 한다. 내가 이번에 시를 읽어간 방법도 그와 같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시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상상을 통해 시인들이 찾아낸 글자들의 원래 세상으로 여행했다.
2
정재학은 그의 시에서 “시 속의 글자들은 우리를 새로운 곳”으로 여행하게 해준다고 했지만 정작 우리들이 시에서 만나는 것은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일상인 경우가 흔하다. 그러므로 “새로운 곳”은 처음 가는 곳이 아니라 익숙한 일상이 새롭게 재편된 곳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김백형의 시가 그런 일상 중 하나를 보여준다. 시는 전구가 나가고 새로운 전구를 사러 갔다 오던 어느 날의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평범한 일상에 대한 표현이 시 속에서 크게 바뀌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퍽!
불이 나갔다, 필라멘트를 끊고.
어둑어둑 저녁이 오자, 진공 속의 사슬을 끊고
뛰쳐나갔다
—김백형, 「알전구 심부름」(『포지션』, 2017년 겨울호) 부분
전구의 필라멘트가 끊어지면서 불이 나가는 일은 우리들이 예외 없이 겪어 봄 직한 일상 중 하나이다. 그러나 시인에게 그것은 필라멘트가 “진공 속의 사슬을 끊고/뛰쳐나”간 탈출이 된다. 시인은 그 탈출에 대해 또 다른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그 설명에 의하면 전구가 끊어진 것은 “빤히 보이는 둥근 세상 안팎에서/전등과 소등의 줄탁이 있었고,/부화가 되자마자 어둠 속으로 날아간 것”이다. 전구는 이제 부화되기 전의 알이 되며, 불을 켜고 끄는 일은 ‘줄탁,’ 즉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 껍질을 쫄 때 어미닭이 바깥에서 동시에 껍질을 쪼아 부화를 돕는 행위가 된다. 시인은 이 부화를 “탁란이었을까?”라고 묻는다. 탁란은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 새끼를 대신 부화시키게 하는 것으로 뻐꾸기가 탁란으로 번식을 하는 대표적 새이다. 전구가 끊어지는 현상이 부화로 바뀌었지만 부화를 도운 것은 켜고 끄기를 반복한 사람들의 행위이다. 탁란을 물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전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어떤 대상과 그것을 둘러싼 경험이 시를 읽는 우리에겐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다. 전구가 우리에게 맡겨진 알로 뒤바뀌는 이러한 세상은 새 전구를 사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있었던 일로 계속 이어진다. 아마도 그 길이 구불거렸고 또 길에 돌부리가 있었나 보다. 그 현실은 “알전구를 삼키려 돌부리 내밀던 먹구렁이 길”로 바뀌고, 그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며 손에서 놓친 전구가 잠시 허공에 떠 있던 순간은 “허공에 올려 두었던 알전구”란 말로 바뀐다. 그리고 시인은 “그 위에 앉아 있던 속눈썹 같은 새” 한 마리를 본다. 나는 초승달이나 그믐달을 상상했다. “탁란을 품으러 간 사이/엄마 눈은 한쪽마저 꺼져버렸다”는 마지막 구절에선 전구 사러 간 아들을 기다리다 졸음을 참지 못해 잠든 어머니를 상상했다. 시를 읽을 때, 우리는 익숙한 세상을 완전히 새롭게 여행한다.
백복현의 시에서도 우리는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의 사연은 슬프다. 그 아들이 실종 상태이기 때문이다. 다만 정말 실종된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시속에서 만나는 “한 입 덜었다고/형편이 바뀌지도 않았다”는 구절은 집안의 누군가가 집을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을 가능하게 하지만 “나와 오빠는 겨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구절은 그러한 짐작을 확정짓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실종된 놀이로 비대해진 오빠가 맨 먼저 사라졌다”는 구절은 다시 몇 번의 가출로 집안을 놀라게 한 아들이 결국은 겨울 동안 집안에서 지내다 집을 나간 것은 아닐까를 짐작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아들이 집을 나간 상황이 이 시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고 보았다.
흔한 상황은 아니지만 이러한 상황의 변화는 그 세상을 말하는 언어를 바꾼다. 백복현의 시에서 그 양상을 접할 수 있는 것은 창과 그 창으로 보이는 풍경이다. 시는 집에 창이 하나 있고 그 창으로 길이 보이며 그 길이 집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시는 집으로 이어지는 길이 내다보이는 창이 하나 있었다고 말하지 않고 “길은 창틀에서 멈춘다”고 말한다. 시인이 창틀에서 멈추어 있는 길을 말할 때가 내가 떠올린 것은 길에 고정된 어머니의 시선이었다. 시선을 조금만 움직여도 길은 좌우로 더 많은 부분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는 길에 아들이 가장 먼저 나타날 지점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움직이지 않는다. 길이 창틀에서 멈추어 움직이지 않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골목 깊숙이 들어오는 길은 부재중이었다”며 그 길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 어구에서도 내가 느낀 것은 실종된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아픈 마음이었다. 그리고 결국 어머니의 귀가 창틀 자체가 되고 만다.
어머니의 가는 귀는 창틀이 되어
금 간 유리창을 붙들고 있다
—백복현, 「겨울, 창(窓)」(『문예바다』, 2017년 겨울호) 부분
시란 그런 것이다. 정재학은 세상에 숨겨진 글자를 찾아내는 것이 시라고 말했지만 시를 읽는 일은 창틀과 길, 골목, 유리창이란 글자들이 만들어낸 풍경에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를 보는 일이다.
백복현에게선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의 발소리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귀가 창틀이 되어 버렸지만 어머니가 사라지진 않는다. 그런데 허형만의 시에선 존재가 완전히 지워지는 경우를 보게 된다.
계단이 주저앉아 있다
무릎 관절염이 도진 탓이다
때로 옆구리가 쑤시기도 하는 계단은
제자리에서 눕고 싶어하기도 한다
(왼쪽 계단은 이미 신문지를 뒤집어쓰고 누워 버렸다)
—허형만, 「한 소식 듣는다」(『문예바다』, 2017년 겨울호) 부분
시인은 “계단이 주저앉아 있다”는 말로 시의 첫 행을 시작한다. 그 구절만으로 보면 우리가 연상하게 되는 것은 무너진 계단이다. 하지만 “무릎 관절염이 도진 탓이다”라는 다음 구절은 그것이 계단이 아니라 몸이 아픈 사람임을 시사한다. 그 사람은 또다시 계단의 이름으로 반복되지만 사실은 여전히 “때로 옆구리가 쑤”셔서 “제자리에서 눕고 싶”은 몸이 성치 않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이 계단이 된 것일까. 그것은 존재감이 지워졌기 때문이다. 왜 존재감이 지워진 것일까. 그것은 그가 노숙자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왼쪽 계단은 이미 신문지를 뒤집어쓰고 누워 버렸다”는 구절이 그러한 짐작을 가능하게 한다. 질문은 계속된다. 존재감이란 무엇에서 나오는 것일까. 존재감이란 사회적 지위와 직장, 많은 재산이나 버젓한 가족 같은 것에서 나온다. 노숙자들은 그런 것들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그런 것으로 존재감의 유무를 가르는 사회가 바람직한 것은 아니나 현실은 그렇게 굴러가고 있다.
존재감을 잃으면 “새끼들을 위해 사냥을 하”는 ‘때까치’나 “치열하게 날개를 파닥이”며 하늘을 나는 ‘두점박이잠자리’, 또는 “뜨거운 불꽃을 뿜어내”며 반짝이는 ‘북극성’만도 못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시인은 그 존재를 가리켜 “운동화 끈을 질끈 매어 보지만/슬픔으로 굳어 버린 몸은 말을 듣지 않는다”고 그 존재의 처지를 일러준다. 물론 그 말을 할 때도 여전히 사람은 보이질 않고 계단이란 말로 사람이 반복된다. 시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가 지워져 계단에 앉아 있을 때면 계단으로 치환되어 버리는 그 존재가 삶을 지탱해갈 수 있는 것은 그에게 어머니가 있기 때문으로 본다. “사랑한다, 아들아”라는 ‘한 소식’으로 전해지는 어머니가 때로 무너지기 직전의 어떤 존재를 지탱한다.
우연히 지금까지 살펴본 세 편의 시 속에선 관계의 양상은 다르지만 아들과 어머니가 등장했다. 김상백과 강태승의 시 속에선 이와 달리 나무를 만나게 된다. 김상백의 시를 먼저 살펴본다. 시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말을 위해
말들은 지상의 차원으로 내려왔다
—김상백, 「쪽지 속에 가을」(『문예바다』, 2017년 겨울호) 부분
여기서의 말은 낙엽이다. 이 두 행의 구절만으로 말이 낙엽이란 것을 짐작하긴 어렵다. 하지만 시를 계속 읽어가다 “말의 잎이 다 져 버린 나무”나 “바스락거리는 언어들을 밟”는다는 구절을 만나면 시인이 낙엽을 말이라고 지칭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 시에선 이런 식으로 풍경이 전혀 다른 말로 재편되어 있다. 잎은 나무의 말이며, 때문에 우리들이 밟고 가는 가을 낙엽은 “바스락거리는 언어들”이다. 줄기만 남은 나무는 “한 떨기 빛”이다. 지상으로 몸을 눕히고 있는 나무의 그림자는 “빛 밖으로 나온 희미한 그림자의 손끝”이 된다. “담벼락 벌어진 틈으로 쪽지를 끼워 넣”은 것도 아마 그 그림자의 손끝일 것이다. 쪽지는 물론 현실적으로는 담벼락의 틈 사이로 끼어든 낙엽이다. 이렇게 재편이 되면 가을은 낙엽이 지는 계절이 아니다. 가을은 “굳게 다문 입술”의 쪽지들로 “말할 수 없는 것을 속삭이고 있”는 계절이 된다. 화려한 단풍으로 즐기는 일반적 가을보다 훨씬 더 환상적이며 새로운 가을이 아닐 수 없다.
대개의 우리 눈에 나무는 가을이 되면 낙엽을 떨어뜨려 잎을 털어내고 빈가지로 겨울을 난다. 그리고 봄이 되면 꽃을 피운다. 그러나 강태승의 눈에는 그렇지 않다. 그는 “겨울 전에 나무는 이미 몸속에 폭설이 가득하다”고 말한다. 나는 그것을 겨울이 오기도 전에 눈을 기다리던 우리의 마음과 비슷한 것이라고 읽었다. 눈은 눈에 대한 기다림이기도 하다. 시인은 다시 “무릎을 넘어 목이 턱턱 메도록 함박눈 쌓이자” 나무가 “할 수 없이 벌겋게 달아오르다가 옷자락 벗는다”고 한다. 나는 이 구절은 겨울이 깊어지자 나무가 잎을 거의 모두 떨어뜨렸다로 읽었다. 나무는 눈이 더 오면서 겨울이 더 깊어지면 “정수리에 가득 찼을 때에 비로소 마지막 잎새를/놓는다.” 하나 남아있던 잎마저 떨어뜨린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그렇게 하여 “나무는 싱싱해지는 침묵으로 겨울을 걸어간다”고 말한다. 시인의 관찰에 의하면 나무가 침묵으로 겨울을 걸어가는 동안 “나무 밖에서 내리는 눈은 나무를 굳게” 하고 “나무 안에서 내리는 눈은 나무를 곧게 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겨울을 건너 봄이 오면 나무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마침내 침묵마저 벗을 때에 눈발이 그친다
나무는 그제야 조용해진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경칩을 건너뛰어 논둑밭둑으로 꽃을 펑펑 피운다.
—강태승, 「허물벗기」(『문예바다』, 2017년 겨울호) 부분
나는 나무가 침묵을 벗고 눈발이 그치는 시기를 봄이라고 보았다. 혼란스러운 점은 있다. 시인이 침묵과 조용함을 다른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침묵은 말을 안 하는 것이고 조용함은 일종의 평온과 다른 이름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겨울은 말하자면 나무의 “몸 소리,” 즉 내면의 소리가 요동치는 시기일 수 있다. 그러나 나무는 그 내면의 소리를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고 침묵한다. 봄은 그 요동치던 내면의 소리가 드디어 가라앉고 평온을 얻는 시기이다. 그리고 그때 나무는 드디어 꽃을 피운다. 이때의 꽃은 이 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제목, 바로 「허물벗기」와 맞물린다. 이 시의 꽃은 나무가 허물을 벗었을 때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무는 나무라기 보다 나비에 가깝다. 나비는 애벌레 시절을 마감하면서 허물을 벗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다. 시인은 나무의 봄꽃에서도 같은 것을 본 것이다. 나무의 겨울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나비의 애벌레 시절과 같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무의 봄꽃은 그러므로 겨울을 건너 허물을 벗고 화려하게 날아오르는 나비 떼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시의 세상에는 꽃이 나비 떼가 되는 신비로운 순간이 있다.
신정순과 신철규에게선 두 개의 상황이 중첩되는 경험을 만날 수 있다. 신정순의 시를 먼저 살펴보면 시인이 만난 것은 거미줄에 걸린 매미 한 마리이다. 시인은 “처마 밑 거미줄에” 걸린 ‘매미 하나’를 보았고, 그 “몸부림이 처절”했다고 말한다. “거미는 잠시 집을 비웠는지” 보이질 않았다.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은 생태계의 자연스러운 현실이지만 생명이 죽음 앞에 내몰리면 측은함을 갖게 되는 것 또한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인은 고민한다. “저 결박을 풀어 줄까?” 하지만 시인은 그렇게 하질 못한다. “움직일수록 감기는 끈끈한 줄을 온몸으로 저항하는/목숨을 두고 돌아서 버렸다”는 시 속의 구절로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왜일까?
시인의 고백에 따르면 시인이 거미줄에 걸린 매미를 살려주지 않은 것은 “어제 보았”던 거미 때문이다. 그 거미가 거미줄을 치던 순간을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제 보았다
거미가 첫 실을 바람에 날려 집을 짓는 것을
긴 시간을 허공에서 제 살을 덜어 내
은밀한 마음이 마침내 투명한 허공을 닮아 가는 것을
—신정순, 「안다는 것」(『문예바다』, 2017년 겨울호) 부분
신정순이 보았을 때, 거미줄을 친다는 것은 먹이를 잡기 위해 포충망을 치는 것이 아니라 “실을 바람에 날려 집을 짓는”일이었으며, 아울러 거미줄은 “긴 시간을 허공에서 제 살을 덜어 내” “마침내 투명한 허공을 닮아” 간 “은밀한 마음” 같은 것이었다. 거미줄은 거미가 허공에 써놓은 한 편의 시였던 셈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허공의 시를 보았던 시인은 거미의 시를 지우고 매미를 살려주지 못한다.
그러나 시인이 자신의 결정에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동시에 자신의 그런 결정에 흔들리고 있다. 시의 말미에서 “난 어느새 아는 녀석의 편을 들고 있는 것이다/안다는 것이 때로는/무섭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흔들림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한 편의 시에 방불했던 거미줄이 먹이를 노린 포충망의 이중성을 갖고 있듯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시들도 잠재적으로 그런 이중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그것의 예로 삼을 수 있는 것이 미투운동(성폭력 고발 운동)의 대상이 된 시인들의 시이다. 시는 때로 성폭력의 피해자를 옭아맨 포충망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시를 쓰면서 또 행동에 조심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신철규의 시는 그가 경험한 것이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 전기가 나갔”던 경우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냥 목욕하던 중에 전기가 나갔을 뿐인데 시인은 그 순간에 죽음을 생각한다.
우리가 죽을 때 심장과 영혼은 동시에 멈출까
뇌는 피를 달라고 아우성칠 테고
산소가 부족해진 폐는 조금씩 가라앉고
피가 몸을 돌던 중에 심장이 멈추면 더이상 추진력을 잃은 피는 머뭇거리고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고
할말을 찾지 못해 바싹 탄 입술처럼
그때 내 영혼은 내 몸 어딘가에 멈춰 있을까
—신철규, 「심장보다 높이」(『문학동네』, 2017년 겨울호) 부분
시인은 “나는 무섭고 외로워서 물속에서 울었다/무섭기 때문에 외로웠고 외로웠기 때문에 무서웠다”고 했다. 불이 나간 욕실이 무섭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 무서움에 외로움을 중첩시키면서 “물속에서 울었다”고까지 하는 것은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렇게 무서우면 욕조에서 일어나 벽을 더듬거려 문을 찾고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불이 켜지고 난 뒤 들어가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시를 다 읽고 나면 시인의 경험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 이해 속에선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을 때 불이 나간 시인의 경험에 다른 이의 경험이 중첩된다. 나는 그것을 세월호가 침몰할 때 배 속에서 죽어가야 했던 아이들이 겪은 죽음의 경험이라고 짐작했다. 욕조는 침몰하던 세월호의 작은 변형판이 된다. “어두운 복도를 겁에 질린 아이가 뛰어간다”는 구절은 욕조가 침몰하는 세월호로 전환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물이 심장보다 높이 차오를 때 불안해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깊은 물속으로 걸어들어갈 때/무의식중에 손을 머리 위로 추켜올린다”는 구절은 욕조의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세월호의 상황에 겹치고 있는 부분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말한다. “무너질 수 없는 것들이 무너지고 가라앉으면 안 되는 것들이 가라앉았다”고. 욕조의 상황이 세월호의 침몰로 전환이 된 것은 사실은 아직도 시인이 세월호 참사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 이유를 “어떤 기억은 심장에 새겨지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세월호 유족이나 미수습자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시 전기가 들어오고 불이 켜”졌지만 시인은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납덩이가 된 심장이 온몸을 내리누른다”는 구절로 시를 마감한다. 아마도 그 마음의 무거움은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모두 규명되었을 때 약간이나마 덜어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시들만으로도 세상의 온갖 것과 경험들이 시가 된다는 생각을 갖기에 충분하지만 심지어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는 정보도 시가 된다. 이민하의 시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시인은 그의 시에서 “오르톨랑은 아주 작은 새”이며 그것이 동시에 “아주 특별한 요리”의 이름이라고 소개한다. 프랑스 요리이며 요리 방법이 잔인하여 법적으로 금지된 요리라고 한다. 비슷한 연유로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있으며 좀 더 널리 알려진 요리로는 푸아그라가 있다. 시인의 놀라운 점은 정보에 불과한 요리에 대한 설명을 우리의 현실로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금지된 메뉴”가 우리의 현실이 된다.
앞집에 사는 새는 눈이 예쁩니다. 아무도 여자의 이름을 모릅니다. 밤낮을 모르고 창문 속에만 있습니다. 새벽마다 울지만 코 고는 소리에 묻힙니다. 아무도 여자의 목소리는 모릅니다. 햇볕이 좋아요. 나는 몰래 손짓을 하지만 여자는 날지를 못합니다. 예쁜 눈을 뜨지도 못합니다. 방이 꽉 끼도록 살이 쪘습니다. 몸의 둘레가 벽에 가까워집니다. 나는 평범한 이웃입니다. 앞집의 창문을 훔쳐봅니다. 금지된 영역입니다. 누군가 저녁이면 하얀 커튼을 내립니다.
—이민하, 「죄의 맛」(『창작과비평』, 2017년 겨울호) 부분
누구나 이 구절에서 여성 학대의 현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자주 이러한 학대의 소식을 전해 듣곤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민하의 시는 여성 학대의 현실에 대한 고발이다. 하지만 시인은 고발과 함께 문학의 형식을 취한 고발 자체를 반성하고 있다. 혹시나 자신의 고발이 “겨울의 숲과 해변에서 버려진 눈알들을 주”워서, 다시 말해 언론으로 전해지는 여성 학대의 소식들을 모아서, “밤낮으로 어둠에 불”리고, 다시 말해 문학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시간을 거치고, “까맣게 구워서 동공을 갈아 끼”운, 다시 말해 학대받는 여성의 현실에 마음을 동화시키는 과정을 거쳐 시를 완성하는 것이 한 편의 작품을 얻겠다는 욕심에서 나온 행위는 아니었는지를 반성한다. 이는 “눈만 뜨면 누군가의 죽은 눈”을 볼 정도로 여성 학대가 빈번한 현실에서 이런 시를 쓴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에 대한 회의이기도 하다. 왜 시인은 고발하면서 동시에 반성하고 회의하는 것일까. 아마도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은 고발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그 고발이 고발로 바꾸어야 할 현실을 이용하는 일은 아닌지에 대한 반성과 회의 속에서만 진정한 변화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라고 짐작된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제니의 시를 살펴보려 한다. 지금까지의 시들은 모두가 대상을 어떤 형식으로든 묘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니의 시는 그런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 이제니의 시는 대상에게 말을 건넨다.
새들은 어서 와요
새들은 어서 와서 쉬어요
—이제니, 「새들은 어서 와요」(『문학과사회』, 2017년 겨울호) 부분
대개 우리들은 새들을 보면 새들을 묘사하려 든다. 새를 보고 새의 자유를 노래하는 경우가 가장 흔한 예이다. 그러나 이제니는 새에 대해서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에게 말을 걸며 “새들은 이리 와요/빛 한가운데로 와서 편히 누워요/누워서 쉬어요 쉬었다 날아올라요”라고 한다. 물론 새들에게 “이리로 와요/이리로 와서 쉬어요/쉬었다 쉬었다 날아 올라요”라고 말한다고 새들이 우리 곁으로 날아 올리는 없다. 시인도 알고 있고 우리도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새들이 인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시인도 “두려움 없는 새들은/두려움 없는 오늘의 새들”에게 우리 곁으로 날아와 쉬라고 말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새들이 “두려움 없는 오늘의 마음”으로 우리 곁으로 날아드는 세상을 시의 이름으로 노래하고 그런 세상을 새롭게 즐길 수 있는 것이 시의 매력이다.
3
글을 시작하며 인용한 시 속에서 정재학은 시를 통해 우리들이 “많은 사람들, 많은 사물들을 만날 수 있고 많은 놀이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계간지와 격월간지에 실린 시들을 읽는 동안 나는 그 말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세상의 온갖 것을 시의 세상에서 만났다. 끊어진 전구와 집으로 이어지는 길이 보이는 어느 집의 창, 계단에 앉아 있는 노숙자, 가을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 눈을 맞고 있는 겨울의 나무, 매미가 걸려 있는 거미줄, 잠깐 불이 나간 욕조, 인터넷으로 접할 수 있는 프랑스 요리에 대한 정보, 그리고 새가 그것들이었다. 거의 크게 특이할 것이 없는 것들이었지만 시속에서의 만남은 그것들에 대한 매우 인상적인 경험을 남겼다. 알고 보면 시는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바로 우리의 일상 속에 우리들과 함께 있다. 그러면서 시는 우리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 속에서 흥미롭고 새로운 여행에 나설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문예바다』, 2018년 봄호, 계간평)
One thought on “시인이 찾아낸 숨은 글자들 —계간 『문예바다』 2018년 봄호 시 계간평”
나의 수필은 ‘숨은 그림 찾기’라고 진작에 말했는데 정재학 시인의 ‘숨은 글자 찾기’와 많이 흡사하군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