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세상에서 새롭게 만나는 우리 곁의 낯익은 세상 —계간 『문예바다』 2018년 겨울호 시 계간평

『문예바다』 2018년 겨울호
『문예바다』 2018년 겨울호

1
눈을 감아도 보일 정도로 낯이 익고 익숙하다고 우리가 그 세상을 잘 알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너무 낯이 익고 익숙하여 우리의 세상을 모를 수 있다.
오래전 변산반도의 채석강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지금처럼 길을 안내해주는 내비게이션이 없어 지도를 참고하며 근처까지 갔었고, 근처에선 그곳에 사는 사람에게 방향을 물었다. 그러자 동네 사람이 방향을 알려주며 말했다. 그곳에 가 봤자 돌밖에 아무것도 없다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바로 그 돌을 보러 그곳에 가는 것이라고. 익숙한 사람에겐 그냥 돌이 보일 뿐이지만 처음 방문한 여행객의 눈엔 같은 자리에서 퇴적암층의 아름다움이 보일 때가 있다.
이런 경험은 내 고향에서도 있었다. 강원도 영월의 내 고향에는 동네에서 빛바위라고 불렀던 작은 절벽이 있었다. 그 절벽은 어느 날 엄청난 소리와 함께 갈라져 절벽이 되었으며, 그때 그곳에서 빛이 번쩍였다는 전설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이제 스트로마톨라이트라 불리고 있다. 스트로마톨라이트는 원시 미생물이 쌓여서 이루어진 퇴적층으로 내 고향인 문곡리의 유적은 약 5억 년 전의 퇴적층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곳에서 자랄 때 나의 눈엔 그곳에서 매일 평범한 바위 절벽이 보였지만 그곳을 찾은 어느 지질학자에게는 5억 년 전의 바닷속이 보일 수 있다.
그렇게 여행객이나 전문가들에게는 새로운 시각의 재미가 주어진다. 익숙한 인식에서 벗어나도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접한 그동안의 이야기 속에서 흡혈귀는 밤에만 나타난다. 햇볕에는 타죽기 때문이다. 그러한 익숙한 이야기의 얼개를 뒤집어 내게 재미를 준 세 컷의 만화가 있다. 만화의 첫 컷에선 어떤 남자가 달빛이 비치고 있는 성안에서 흡혈귀에게 피를 빨아 먹히기 직전의 위험에 처해있다. 남자는 흡혈귀에게 말한다. 달은 그 자체로는 전혀 빛을 갖고 있지 않아. 달빛은 햇빛이 반사된 거야. 두 번째 컷에선 그 말을 들은 흡혈귀의 눈이 놀라서 동그래진다. 세 번째 컷에선 흡혈귀가 달빛에 타서 재가 되어 버린다. 세 번째 컷의 마지막엔 과학이 목숨도 구한다고 되어 있다(https://www.facebook.com/marchforscience/photos/a.322894318104889/627240601003591/?type=3&theater). 사실 달빛이라고 말하지만 달빛이란 없다. 엄밀하게 보자면 그것은 달에 반사된 태양 빛이다. 달빛이란 말의 익숙함을 반문해보지 않았다면 내가 본 만화의 재미는 없었을 것이다.
대개 우리들이 시에서 만나는 세상은 우리들로부터 멀지 않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는 시를 읽을 때 그 낯익고 익숙한 세상에서 새로움을 만난다. 시인들은 우리의 낯익은 세상을 여행하는 여행객이며 새로운 인식으로 세상을 재편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계간지의 가을호에서 시들을 만나며 낯익은 우리의 세상이 새롭게 재편되는 시의 세상을 만났다.

2
신성희의 시로 시작해본다. 시는 만두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만두는 모두가 먹어봤음직한 낯익은 음식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오른 시인의 기억은 그 시절을 “만두가 흔치 않던 시절”로 회상한다. 그 시절의 기억을 좀 더 들여다보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중국집 붉은 담벼락을 돌며” 만두 냄새를 맡던 시인이 보인다.“얼굴이 둥글넓적하고 엉덩이가 펑퍼짐하던 중국집 남자의 쏼라쏼라하던 말소리”가 기억에 담겨 있는 그 시절의 만두는 “훔쳐서라도 꼭 하나 먹어 보고 싶”은 귀한 음식이었다.
어린 시절에 먹고 싶었던 음식의 하나였던 만두는 시인에게 고모의 기억이 밴 음식이기도 하다. “정말 만두 하나만은 기가 막히게 맛있게 만들던” 그 ‘고모’는 “평생 우리 집에 얹혀살”았다고 시인은 전한다. 고모의 삶이 행복하게 마무리된 것은 아니다. “일만 하던 고모/중국 여자처럼 발이 작은 고모는/쉰 만두 냄새 풀풀 나는 방에서 혼자 죽었”으며 “퉁퉁 불은 두부 같은 발이 이불 밖으로 늘어져 있었다.”
고모에 대한 슬픈 추억이 배어있던 만두는 이제는 시인 자신의 추억이 밴 음식으로 바뀐다. 그러나 그 추억 또한 슬프게도 실연의 추억이다. 시인은 그 실연의 사랑을 “그와 나는 만두가게에서 처음 만났고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함께 만두를 먹”었다고 말한다. 그 사랑은 “군만두, 찐만두, 왕만두, 김치만두, 물만두, 고기만두, 새우만두, 감자만두, 치즈만두, 호박만두, 꿩만두……”의 다양한 만두를 함께 하는 것으로 이어졌으며, “커다란 양은솥에 김이 설설 오르고 우리는 말없이 뜨끈뜨끈한 만두를 삼켰다”는 것이 시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둘의 사랑이었다. 시인이 “달콤새콤하던 단무지/식초와 고춧가루를 섞은 간장/여러 접시 먹었지만 돈이 많이 나오지 않아서 좋았다”고 한 것을 보면 둘은 가난한 연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함께 만두의 세계에 탐닉했었”던 둘의 사랑은 남자가 “-나는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메모 한 장을 남기고” “만두가게 의자를 구둣발로 차며 떠”나는 것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음식과 관련하여 추억을 갖는 일은 특별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신성희의 시는 만두와 관련하여 특별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그 특별한 시각은 시의 마지막에서 드러난다.

만두를 먹으며 나는 어른이 되었다
잘게 부서질수록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작아지는 나를 껴안고
작은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주름 속에 나를 집어넣고
입을 꿰맨 채 살아 있지만
당신은 오늘도 커다랗게
입을 찢으며 웃고 있습니까
—신성희, 「만두와 만두」(『문예바다』, 2018년 가을호) 부분

시인에게 만두는 “무엇을 집어넣고 만들어도 모른다는 것”이 ‘미덕’인 음식이다. 만두 속에 들어가는 ‘만두소’는 “고기를 다지고 김치를 썰고 두부를 으”깨어서 만든다. 그것이 만두의 맛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그 만두의 세계가 시의 마지막에선 시인의 삶으로 뒤바뀐다. “잘게 부서”지면서도 웃으면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시인이 삶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렇게 살아가면서 어른이 되었다고 말한다. 부당함을 고치지 않고 오히려 감내하길 요구하는 사회가 그런 삶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시의 제목은 「만두와 만두」이다. 아마도 전자는 추억이 서린 음식으로서의 만두일 것이며, 후자는 사회의 부당함 앞에서 부서지고 입을 봉쇄당한 삶으로서의 만두일 것이다. 만두는 음식의 하나지만 때로 만두가 우리의 삶일 수도 있다. 시인은 말한다. 우리의 그런 삶 앞에서 “오늘도 커다랗게/입을 찢으며 웃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고. 누굴까. 시는 아무런 실마리도 주지 않고 있으나 일만 하다 죽었다는 고모를 생각하면 노동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자본도 그중의 하나일 것이다.
신성희가 만두에서 부당하게 억압당하고 있는 우리의 삶을 보았다면 조규남은 모기향에서 또 다른 우리 삶의 단면을 보고 있다. 시인이 말하는 모기향은 나선으로 둥글게 말려 있으며 바깥에서 안쪽으로 타들어 가는 제품이다. 색은 초록을 띤다. “가다 보면 앞이 훤히 트이겠지 깜빡이는 불빛 따라 나선의 초록 트랙을 걷는다/돌아가면 모퉁이 또 돌아가면 또 모퉁이”라는 시의 첫 구절은 그런 짐작을 가능하게 해준다.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대개 탄탄대로를 원한다. 곧고 넓게 뚫린 편안한 길이다. 그러나 실제 우리가 걷는 삶의 길은 그와는 달리 앞을 잘 보여주질 않는다. “초록 트랙”이라고 읽어낸 모기향에서 삶이 보인 이유일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기도 하지만 그 길은 “내 몸이 타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가느다란 연기에 휘감긴 발자국이 흘러내리는 줄도 모르고” 걸어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모기향은 길이기도 하지만 그 길을 걷는 우리의 걸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모기향의 초록 트랙은 우리가 걸어가는 길의 중심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환기시켜 준다는 측면에서 큰 미덕을 갖고 있다. 이 길의 끝에서 항상 “오래전의 모퉁이와 지금의 모퉁이 안쪽에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는 나의 중심”을 만나기 때문이다. 대개 아침이 되면 모기향은 다 타고 재만 남아 있게 마련이지만 새벽녘에 깬 시인의 눈에 아직 남아있는 모기향이 눈에 띄었나 보다. 시인에게 그것은 남아있는 길이다. 그 길의 느낌을 시인은 이렇게 정리한다.

가만히 불을 끄고 열기를 식힌다
나를 끌고 온 가느다란 빛처럼 희끄무레 눈을 뜨는 동녘 하늘을 올려다본다 누군가가 굴리고 있는 지구의 자드락길 같아서,
—조규남, 「푄현상, 그린 모기향」(『문예바다』, 2018년 가을호) 부분

모기향은 모기를 쫓기 위해 피우는 것이지만 동시에 바람이자 길이기도 하다. 푄현상은 습기를 많이 품은 바람이 산을 넘어가며 습기를 비로 뿌리고 산너머 지역을 건조하게 만드는 현상을 말한다. 모기향은 밤을 넘기며 방안에 연기를 뿌리고 재로 바뀐다. 모기향으로 모기를 쫓고 밤을 휴식으로 삼은 우리들은 낮에 그 모기향처럼 자신들을 불사르며 각자 삶의 길을 간다. 시인은 그 길을 자드락길이라고 부르고 있다. 나지막한 산기슭의 비탈진 땅에 난 좁은 길이 자드락길이므로 탄탄대로는 아니다. 하지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걸어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신성희와 조규남이 만두와 모기향에서 우리의 삶을 비유적으로 엿보았다면 김지은은 우리의 삶을 직접 들여다보고 있다. 김지은이 들여다본 삶은 「경계인」의 삶이다. 두 세계의 사이에 서 있는 삶이다. 시는 “털모자를 준비해야 해요/혹자는 색깔을 골고루 넣어 뜨개질을 하죠/한 올도 허락되지 않는 검은 털에게/안녕 마지막 인사를 하며”라고 시작된다. 털모자가 연상시키는 것은 겨울이지만 이 시에서 털모자는 겨울을 대비한 물품이 아니다. 이 털모자에 “검은 털”을 “한 올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구절에서 검은색이 암시하는 것은 죽음이다. 이 암시는 “자라지 않는 머리털”이란 구절에서 털모자가 암환자의 것이라는 좀 더 구체적 짐작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 둘을 묶어서 판단하면 경계인의 경계는 암환자가 겪고 있는 삶과 죽음의 사이란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털모자의 주인공이 “반쯤은 열려 있는 입속으로/죽은 아버지가 다녀간 아침”을 맞을 때가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대체로 암환자를 마주하게 되면 우리는 그가 앓고 병에 시선을 맞추게 된다. 그러나 김지은은 병이 아니라 환자가 쓰는 털모자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아주 작은 변화 같지만 큰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 병에 초점을 맞추면 우리의 시선으로 그 병이 가져올 고통과 죽음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점을 털모자로 옮기면 환자의 삶이 보일 수 있다. “모로 누워야 잠이 드는” 것이 “습관이 아니”라 “바닥을 견디는 연습”이란 것이 눈에 들어온 것도 환자의 삶이 눈에 들어온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암환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병에서 털모자로 옮겼을 때 얻어진 가장 놀라운 발견은 다음 구절에 담겨 있다.

혼은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서 입으로 뱉어 내는 단내 같은 것
—김지은, 「경계인」(『문예바다』, 2018년 가을호) 부분

단내는 사람이 몹시 아플 때 입에서 나오는 냄새이다. 시인은 그것을 사람의 혼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흔히 사람이 죽었을 때 몸을 빠져나가는 것이 혼이라고 말하지만 시인은 환자의 입에서 빠져나오는 단내에서 혼을 다하여 살고 있는 삶을 보았던 것이리라. 단내가 혼이 된 연유일 것이다. 병에서 삶을 보는 것처럼 어려운 일도 없다. 그러나 시인은 털모자로 시선을 옮겨 그것을 이룩한다. 암환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병에 대한 위로가 아니라 입을 나오는 단내마저도 혼을 다하는 삶으로 바라봐주는 시선일지도 모른다.
김지은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삶을 삶 쪽으로 당겨주고 있다면 이현호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인가를 묻는다.

죽은 별이 빛난다 무덤 속 같은 우주를 가로지르고 있는 빛은 제가 떠나온 별의 죽음을 모른다 이럴 땐 환영까지가 실제다 마음이 아프다는 거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 마음을 다 주었다면 모조리 다 썼다면 아플 마음이 없다 아플 마음이 남아 있다는 아픔 그럴 땐 외면까지가 환대다 내가 저쪽으로 돌아앉으려 할 때마다 등 뒤에서 안아주는 울음들아 밤하늘같이 어두운 눈동자로 꽝꽝 별빛이 쏟아진다 빛이 제가 떠나온 별의 죽음을 모르고
—이현호, 「확진」(『모든시』, 2018년 가을호) 전문

이 시에선 과학적 지식이 세상을 보는 시각을 바꾸고 있다. 과학에 의하면 우리가 보는 별빛은 별의 현재가 아니라 별의 과거이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인 알파 센타우리 A와 B는 대략 지구로부터 4.35광년 떨어져 있다. 이 때문에 우리가 보는 이들 별의 별빛은 4.35광년 전의 빛이다. 지금 이들 두 별이 없어진다고 해도 별빛은 앞으로 4.35년 동안 계속 빛난다.
나는 「확진」이라는 시의 제목 때문에 이 시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관한 시로 받아들였다. 확진을 어떤 질환으로 인한 죽음의 확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 앞에선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시인은 “마음이 아프다는” 것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자책한다. “마음을 다 주었다면 모조리 다 썼다면 아플 마음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책에도 불구하고 아픈 마음을 어쩔 수가 없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죽은 사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가 떠나온 별의 죽음을 모르”는 별빛처럼 죽음 뒤에서도 끝나지 않고 빛난다는 사실이다. 실체가 사라지면 슬프고 아프나 실체는 여전히 빛난다.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더더욱 그렇다. 시인에 의하면 그 빛까지 ‘실제’이다.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세상 사람들을 유형화하여 명명하는 것은 세상을 재미있게 바라볼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임지은의 시에서 그러한 경우를 엿볼 수 있다. 사람들의 유형을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은 “몇몇 사람이 모”이는 모임이었고, 모인 사람들은 “여행 가고 싶은 도시”를 “대화의 주제”로 삼았다.
먼저 누군가가 “안움직, 씨”로 명명된다. “주로 집에 틀어박혀 지내는” 어떤 유형이 이에 해당된다. 가본 곳보다 안 가 본 곳이 더 많은 유형이다. “비정규직, 씨”는 우리 사회의 차별을 대표하지만 스스로를 “자칭 여행가”로 칭한다. “자주 이직해야 하는 탓에/회사마저 여행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안정된 직장을 가지지 못하는 비정규직의 입을 빌은 이 사회의 풍자로 읽힌다. “먹음직, 씨”로 명명된 유형은 맛집 순례자로 짐작된다. “한 번도 말라 본 적 없”다는 설명은 “칠칠 사이즈가 보통 체형인 도시로/여행 가는 것을 선호했”다는 구절과 함께 칠칠 사이즈가 약간 살이 찐 유형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시의 마지막 구절에선 시인 자신에 대한 명명이 있다.

내일은 넥타이핀
을 꽂고 출근할 테지만
오늘은 필리핀에 대한 시를 쓰고
끊어진 하루하루를 핀셋으로 건져 올린다고
노트에 적는 이가 있었으니
아직 시인이란 꿈을 보관 중인 간직, 씨였다
—임지은, 「오늘은 필리핀」(『문예바다』, 2018년 가을호) 부분  

모든 시에게 진지한 태도를 요구할 수는 없다. 때로 시에는 약간 가벼운 즐거움도 있어야 한다. 임지은의 시에는 사람들을 유형별로 나누어 명명하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있다. 그것 또한 시의 미덕이다.
세상은 변한다. 남녀 관계도 예외가 아니다. 그동안의 남녀 관계에선 기다림이 여자의 몫이 되는 경우가 흔했다. 그 기다림은 모든 것을 집어삼켜 오직 기다림만 남기곤 했다. 남녀 관계에서 여자를 수동화한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는 대목이다. 김이듬의 시는 그런 관계가 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시는 “폭우가 내렸다. 그날 밤 너는 집에 오지 않았다. 나는 너를 기다리며 컵케이크를 구웠다”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평이해 보이지만 폭우 뒤에 집에 오지 않은 너가 이어지고 있어 오지 않은 너의 이유로 폭우를 탓하고 싶었던 시인의 마음이 만져진다. 그러나 시인은 그 마음을 거두어들인다. 시의 중간쯤에 나오는 “너를 기다리지 않았어도 폭우는 내렸을 것이다”라는 구절이 다시 정리된 시인의 마음이다.
폭우가 그가 오지 못한 이유가 될 수는 있지만 중요한 사실은 폭우가 그가 오는 것을 막기 위해 내리진 않는다는 점이다. 날씨와 우리들의 약속은 사실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자주 그 사실을 잊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릴 때는 더더욱 그렇다. 기다림에 매몰되면 아무 상관도 없는 날씨가 욕을 먹는다. 흔하게 있는 일이다. 시인은 그 흔한 마음을 벗어나고 있다.
그런 흔한 마음을 벗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자신의 생활을 되찾게 된다. 그렇게 되찾은 생활에 대하여 시인은 “너를 기다리”면서도 “나는 책을 팔” 수 있게 되고, “친구를 사”귈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체리를 사러 가서 손금을 보”면서도 “네가 돌아올는지 묻지 않”게 된다. 점을 보며 누군가가 돌아올 것인가를 묻는 것은 기다리는 나의 행위를 내게 기대지 않고 아무 근거 없는 누군가의 말에 기대는 일이다. 시인은 날씨탓도 하지 않고 점쟁이에게 물어보지도 않기로 했다. 이렇게 하여 시인이 자신을 기다림에 매몰시키는 일을 정리하자 관계는 새로워진다. 시인은 그 관계를 “서로를 돌보지만 바치지는 않는 삶”이라고 말한다.
기다림과 자신의 일상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쉬울 것 같아도 쉽지가 않은 일이다. 그 기다림의 상대가 “핑크도 보라도 아닌 저 컬러는 뭐니?”라고 물었을 때 그가 가리키는 “벽돌담 아래 떨어진 꽃잎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존재라면 더더욱 그렇다. 또 그 상대의 “눈동자 속에 내 인생의 한 토막이 걸려있”는 것이 보이는 존재라면 더더욱 그렇다. 상대를 기다리면서 그 기다림 속에 생활마저 매몰시키기 아주 좋은 상대이다. 김이듬은 그런 상대를 두고 생활의 균형을 유지해간다.

너를 기다리는 건 뜻하지 않은 여행 같다. 덧없는 순간, 아침이 온다. 비가 온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부르지 않아도 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좋게 변할까? 끝없이 바뀌는 순간을 바라보는 것, 스쳐가며 사라지는 풍경에 관해 원래 없었던 거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김이듬, 「너를 기다리는 동안」(『시로 여는 세상』, 2018년 가을호) 부분

시인은 기다림을 “뜻하지 않은 여행”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다리다 오지 않으면 덧없다. 그러나 시인은 그 “덧없는 순간”에 허무를 앓지 않고 ‘아침’을 맞는다. 또 오는 ‘비’를 바라본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부르지 않아도 오는 것을 이해하게” 된 순간이기도 하다. 아침과 비가 그런 순간을 일깨운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그리하여 시인은 오지 않은 너로 그동안의 시간을 모두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와의 관계를 새롭게 이룩한다. 그 관계 속에선 오지 않았다고 그가 없는 것이 아니다. 아울러 시인의 생활이 그 기다림 때문에 지워져 있지도 않다. 이제 더이상 기다림은 그리움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생활을 그에 대한 기다림으로 삼는 새로운 관계로 볼 수도 있다. 세상은 변하고 남녀의 관계도 변하며 변화된 관계는 바람직해 보인다.
김이듬의 시가 변화된 남녀 관계를 보여주긴 하지만 그렇다고 변화를 보여주는 시인의 언어가 궤도를 크게 이탈한 느낌을 주진 않는다. 물론 모든 시는 언어의 일상적 궤도를 어느 정도 이탈한다. 그 이탈 때문에 우리는 일상적으로 보던 세계를 달리 여행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탈이 지나치게 심해지면 우리는 시가 우리를 데려온 곳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어진다. 시가 어려워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요즘의 젊은 시인들 시를 읽다 보면 그러한 느낌을 받을 때가 흔하다. 박세랑의 시에서도 그런 느낌을 엿볼 수 있다.
궤도를 크게 이탈하면 다른 무엇보다 시가 잘 읽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잘 읽히는 시나 해명이 되는 시만 읽을 수는 없다. 안 읽히는 시도 읽을 필요가 있다. 시의 생태계가 건강하려면 다양한 시가 필요하다.
박세랑의 시를 읽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시를 전체적으로 읽어 시의 현실적 공간과 상황을 짐작해보는 일이었다. ‘찜질방’, ‘목욕탕’, ‘오토바이’라는 낯익은 낱말들이 서로 조합을 이루면서 시의 현실적 공간이 “불가마 장수탕”이라 불리는 동네의 목욕탕이며, 시인이 그곳을 다녀오다가 목욕탕 앞에서 오토바이 전복 사고를 보게 되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동네 목욕탕과 오토바이 전복 사고라는 공간과 상황은 우리의 현실로부터 그리 멀지 않다. 그러나 그 공간과 상황을 채우고 있는 시의 구절은 난해하기 이를 데 없다. 예를 들자면 “때수건으로 머릿속을 밀다”라는 말도 금방 와닿질 않는다. 처음에 나는 이를 때를 밀면서 동시에 생각에 잠겼다는 것으로 이해를 했다. 둘의 동시성을 강화하면서 때수건이 머릿속까지 들어가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목욕탕에서의 생각 중 하나로 짐작되는 “매일 밤 직장(直腸)에서 튀어나와 젖꼭지를 빨아대는 뱀”은 도무지 정체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이 구절의 이해를 위하여 내가 택한 방법은 젖꼭지를 빠는 행위만 사실로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느낌으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뱀은 뱀이 아니라 뱀처럼 징그러운 느낌으로 바뀐다. 아마도 동생이 생겼고, 그 동생을 “엄마에게 빼앗”겼다는 어릴 때의 의식이 이런 느낌을 가져온 것이 아닌가 짐작되었다.
그러나 시 속에서 가장 나를 당황스럽게 만든 것은 오토바이 전복 사고를 가리켜 “하필 네 자지가 털털거리는 오토바이가/불가마 장수탕 앞에서 뒤집어지는 신기루”라고 한 대목이다. 당연히 그 당혹감은 남성의 성기를 뜻하는 낱말의 등장에서 왔을 것이다. 그것은 사용이 금기시되어 있는 낱말이다. 굳이 그 낱말을 사용했다면 그 낱말을 통해 보인 세상이 있었다는 뜻이 된다. 도대체 어떤 세상이었을까. 혹 그 세상이 거친 오토바이 운전이 지나친 남성성의 과시로 보이는 세상은 아니었을까. 넘어진 오토바이에서 일어난 남자가 내뱉는 거친 욕설의 목소리가 “가랑이를 벌린 채/우리에게 일용할 음부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으로 들릴 정도로 여성 혐오적인 말들이 섞여 있는 세상은 아니었을까. 금기시되는 한 낱말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세상을 이렇게 이해하면 시인이 “벌겋게 달아오른 강철 팬티를 벗어던지고 목욕탕 문을 나”섰다고 하는 대목의 ‘강철 팬티’는 정조나 어떤 특정한 여성성을 여자에게 강요한 억압적 사회의 다른 이름이 되며, “때수건으로 머릿속을 밀”었다고 했을 때의 그 머릿속은 그러한 생각들을 밀어낸 시간이 된다. 그러면 목욕탕이라는 공간은 시인에게 때처럼 우리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생각들을 밀어버리고 세상 보는 시각을 바꾼 장소가 된다. 시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양칫물 위에서 발버둥치는
옛 애인의 자지는 잘라먹었어야 했지
—박세랑, 「물속에서」(『문학동네』, 2018년 가을호) 부분

자지를 잘라먹었어야 했다니. 표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기괴하기 이를데 없는 말이지만 문제의 그 낱말을 남성 중심적 세계관에 대한 비유로 받아들이면 이는 그런 세계관을 바닥까지 해체해 버리겠다는 시인의 의지로 읽힌다. 세상은 변했으며, 그 변화는 이 세상의 절반인 여성들이 제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수용하고 나면 처음에는 기괴하게 보이던 시의 세상이 당연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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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세상에선 자주 낯익은 것들이 전혀 다른 모습을 한다. 음식에 불과했던 만두가 시 속에선 부당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입을 다물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삶으로 바뀐다. 초록의 나선형 모기향에선 계속 모퉁이를 반복하면서 앞을 보여주지 않는 길이 보이지만 동시에 그 길을 묵묵히 걷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보인다. 빠지는 머리 때문에 쓰게 되는 암환자의 털모자에 주목한 시인의 눈은 죽음 앞에 선 병을 밀어내고 혼을 다해 살고 있는 삶을 보여준다. 과학의 발견을 빌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끝이 아니라 별빛으로 일으켜 세우는 것도 시의 힘이다. 시가 사람들을 몇 가지 유형으로 갈라 이름을 명명하고 그 명명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재미를 줄 때도 있다. 그간의 남녀 관계와 달리 변화된 관계를 시 속에서 직접 접할 수 있을 때도 있다. 그 관계 속의 여자는 남자를 기다리는 일에 매몰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살면서 자신의 삶을 기다림의 다른 이름으로 만들고 삶과 기다림의 균형을 이룩한다. 또 시의 세상에서 목욕탕은 더 이상 몸을 청결하게 씻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남성 중심적 사회의 억압이 때처럼 덮여있는 머릿속 생각을 씻어내는 곳이 된다. 모두가 낯익은 세상이었지만 나는 시를 읽는 동안 그 낯익은 세상을 마치 처음 가본 세상처럼 새롭게 여행했다.
(『문예바다』, 2018년 겨울호, 계간평)

2 thoughts on “시의 세상에서 새롭게 만나는 우리 곁의 낯익은 세상 —계간 『문예바다』 2018년 겨울호 시 계간평

  1. 좀 퍼가도 될까요 선생님? 공유하는 법을 몰라서…
    꼭 제 맘에 들어온 듯 한 시평에 눈시울 붉힙니다…
    고맙습니다^^김해문인협회 사이트로 퍼 갈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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