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일상, 우리들의 무력감, 그리고 시 —계간 『문예바다』 2019년 봄호 시 계간평

『문예바다』 2019년 봄호

1
살다보면 무력감을 느낄 때가 있다. 가령 아는 이가 큰 병에 걸리면 모두가 무력감을 느낀다. 심지어 병을 고치는데 있어선 전문가인 의사들도 무력감을 토로하곤 한다. 모든 병을 다 고칠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병앞에서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이 느끼는 무력감은 말할 나위가 없다.
무력감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와 동의어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무력감은 삶의 모든 의미를 집어 삼키기 일쑤이다. 살다보면 우리는 그런 무력감을 만날 때가 있고 그때면 삶의 의미가 송두리째 흔들린다.
이는 시인들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시인들에겐 시가 있다. 물론 시가 현실적 문제들을 해결해주는 경우는 없다. 현실 앞에선 시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무용론은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얘기이다. 시는 병을 가진 자에게 유용한 처방이 되지 못하고, 배고픈 자에게 허기를 달래줄 음식이 되지 못하며, 가난한 자에게 부를 건네지도 못한다. 그러나 가장 무력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그 순간에 시가 그 언어를 통하여 무엇인가를 해낼 때가 많다. 2018년의 계간지 겨울호와 비슷한 시기에 나온 격월간지에서 마주한 시들 가운데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시가 있었다.
나는 마치 무력감의 순간을 내가 전혀 모르는 순간처럼 맨 마지막에 두고 시를 읽어가는 순서를 배치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가볍고 즐겁게 시를 읽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를 읽어가다 그 끝에서 심지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순간에 무엇인가를 해내고 있는 시를 마치 우연인 듯 만났다. 아주 흔한 일상적 순간에서부터 무력감의 순간으로 시읽기의 여정을 배치한 것은 시가 여유로운 순간에 우리들과 함께 하는 것은 물론이고 무엇인가 가장 절실한 순간에도 우리의 힘이 된다는 사실은 극적인 체험으로 암시하고 싶은 나의 희망 때문이었다.

2
내가 걸어갈 시의 여정을 정운자의 시로 시작해본다. 시는 화요일의 출근길 풍경을 담고 있다. 시인의 출근길이라고 특별할 것이 있겠는가. 시인은 출근하기 위해 버스를 타러 가고 있다. 가는 길에 남자가 다가서더니 자신의 얼굴이 새겨진 손수건을 건넨다. 판촉물이다. 시인은 횡단보도에 선다. 횡단보도에는 하얀 색의 선이 일정한 간격으로 칠해져 있다. 출근길의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 관심이 없다. 모두가 서로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은 화요일이다. 바람에 플라타너스의 넓은 잎이 떨어져 거리로 날린다. 기상청에선 오늘의 비올 확률을 20퍼센트로 예고했다. 그다지 특별할 것은 없는 출근길이다. 하지만 시는 그 출근길을 이렇게 바꾸어놓는다.

마주 오는 남자가 방금 프린트 된 자기 얼굴을
손수건에 담아 건넨다
횡단보도 흰 줄과 검은 줄이 번갈아 말을 바꾼다
스탬프처럼 내 어깨에 찍히는 강렬한 무관심
화요일 출근길에, 플라타너스 손바닥이 날린다
확률 20퍼센트, 서울 경기에 가벼운 기별처럼
5내지 20밀리 작년에 오지 못한 비가 예약되었다
—정운자, 「화요일의 날씨」(『문예바다』, 2018년 겨울호) 부분

시인은 출근길의 풍경에 몇 가지 의도적인 왜곡을 가한다. 먼저 자기 얼굴이 새겨진 손수건을 건네는 남자를 말하며 그가 건넨 손수건이 판촉물이었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는다. 그 순간 남자의 행동이 신비해진다. 때로 현실에서 일부를 지우면 현실에 신비로운 색채가 더해질 때가 있다. 사실로서의 현실은 즐기기 어렵다. 그러나 신비롭게 채색하면 현실도 잠깐 즐길 수 있다. 현실에서 횡단보도에는 흰색의 줄이 일정한 간격으로 칠해져 있는 곳일 뿐이다. 시인은 그 자리를 “흰 줄과 검은 줄이 번갈아 말을 바”꾸는 곳으로 바꾸어 놓는다. 횡단보도가 말이 되면 우리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 발밑에서 말을 들을 수 있다. 그러면 매일 반복되는 출근길의 횡단보도가 잠시 말을 듣는 곳으로 바뀐다. 플라타너스의 잎은 넓다. 손바닥을 펼친 모양이기도 하다. 모양의 비슷함을 들어 플라타너스 잎은 시인의 출근길에서 손바닥이 된다. 기상 예보는 출근길의 회사원들이 미리 확인해두는 일상적인 정보일 수 있다. 그러나 비올 “확률 20퍼센트”의 건조한 정보는 시인에게서 “작년에 오지 못한 비”의 ‘예약’분으로 바뀐다. 흐린 하늘은 “시무룩한 하늘, 속 쓰린 하늘”이 된다. 출근길은 매일 무료하게 반복되는 듯하지만 시인에게선 비가 오는 화요일의 출근길 풍경이 시의 이름으로 남을 수 있다.
황유원의 시로 넘어가 본다. 시인은 “최근에 했던 가장 시원한 일”이라며 “막힌 변기를 뚫은 일”을 손에 꼽는다. 어느 집에서나 변기가 막히고 그것을 뚫는 경우는 있을 수 있으므로 특별한 일은 아니다. 시적인 일이라고도 할 수가 없다. 시인은 그 일을 “피 묻는 휴지와 해체된 똥이 물 안 가득 퍼져 넘쳐 오르기 일보/직전!이었다가/변기 아래로 꾸르릉/시원하게 내려갔”다고 아주 민망할 정도로 구체적으로 전한다. 나는 시를 읽으며 킥킥킥 웃기 시작한다. 그런데 시인이 그 정도에서 시를 그치질 않는다. “막힌 변기 물 내려가는 소리보다 속 시원한 소리/별로 없네 전혀 아름답진 않지만/보기 싫은 것들이 눈앞에서 깨끗이 사라져가는 광경보다 더 보기 좋은 광경은 별로 없”다고 덧붙인다. 나는 또 킥킥킥 웃는다. 그런데 부연설명조의 말을 덧붙이는 정도에서 끝낸 것도 아니다. 시인은 “코흘리개 시절, 홍대 게스트하우스 알바 면접 보러 갔을 때 처음 받았던 질문”의 기억을 소환하기에 이른다. 그 질문은 “막힌 변기 뚫어본 적 있어요?”였고, 시인의 대답은 “없는데요”였다. 그러자 그곳의 사장이 “그럴 땐 뚫어본 적 없어도 무조건 잘 뚫는다고 말해야 한다며/아직 한참 멀었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는 것이 이어진 시인의 기억이다. 그리고 이 기억은 “뚫어도 뚫어도 뚫리지 않는 나날들/내가 싼 똥을 한참이나 마주하고서 그 냄새를 맡아줘야 하는 나날들”의 과거로 확대된다. 그러나 이 뚫리지 않는 나날들에 대한 책임은 시인에게 있지 않다. 시인은 “우리가 형편상 많이는 못 주는데 이 돈 받고도 할 수 있냐는/그 뒤로 수도 없이 들어온 똑같은 질문들”이 자신에게 던져졌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사회가 뚫리지 않는 인생을 시인에게 강요했던 셈이다. 이제 시인은 그런 사회의 부당함에 대해 이렇게 반문한다.

근데 막힐 일이 없으면 뚫을 일도 없잖아?
—황유원, 「최대치의 기쁨」(『문학과사회』, 2018년 겨울호) 부분

말하자면 이 반문은 뚫리지 않는 삶에 대한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사회에 대한 역습이다. 상황을 정반대로 뒤집는 획기적인 역공은 우리들을 통쾌하게 해준다. 나는 이 구절에서 가장 크게 웃었다. 막힌 체증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아마 이 구절을 적어내려 갔을 때 시인도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시인은 막힌 변기만 뚫은 것이 아니었다. 변기가 뚫릴 때 사회의 부당함 앞에서 막힐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의 체증도 함께 뚫렸다.
심지어 시인이 준 웃음이 이것으로 끝난 것도 아니었다. 황유원은 “오늘 시원하게 내려가는 이 변기를/내가 이 생에 누릴 수 있는 최대치의 기쁨”으로 격상시키더니 “심지어 이렇게 개방뒤 뀌는 소릴 시랍시고/발표까지 하고 돈도 좀/받게 될” 것이라는 말로 시를 읽어온 우리가 그 끝 또한 웃음으로 마무리할 수 있게 해준다. 시인에게 알려주자면 시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시를 재미있다고 킥킥거리며 읽은 뒤 평으로 언급하고 원고료까지 받아 챙기는 또다른 부가가치까지 남겼다.
덧붙여 변비가 계신 분들에게는 이 시를 읽으며 재미를 누릴 수 있는 또다른 방법으로 변을 시원하게 본 뒤에 이 시를 음미해 볼 것은 권해드리고 싶다. 시로부터 그 순간이 마치 막힌 나를 뚫는 듯한 느낌이란 것을 암시받을 수 있어 변비의 고통이 최대치의 또다른 기쁨으로 역전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꽃의 얘기로 넘어가 볼까 한다. 조용미의 시에서 만나는 “보라색 양귀비 두 송이”가 바로 그 꽃이다. 꽃이 자리한 공간은 박지도이다. 전남 신안의 서해바다에 있는 섬이며 반월도를 마주하고 있다. 시는 이 섬의 전설을 전한다. “박지도의 젊은 스님이 건너편 섬의 비구니를 사모하여 반월도 쪽으로 돌을 놓아 갔다/반월도의 비구니도 박지도를 향하여 같은 마음으로 갯벌에 징검돌을 놓기 시작했다//오랜 시간이 지나 바다의 돌무더기는 서로 만나게 되었다/두 사람은 어느덧 중년이 되어 노두 위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없이 바라보았는데/들물이 들어도 서로 움직이지 않아 물속으로 가라앉았다”는 것이 그 전설의 내용이다. 시인이 “박지도 들판에 커다란 보랏빛 양귀비가 천둥처럼 나타났다”고 한 것은 아마도 이 전설이 양귀비꽃에게 담겼기 때문일 것이다. 시의 세상에선 전설이 그렇듯 꽃에 담길 수 있다. 그리고 시인은 “돌무더기 중 노두만 남았다는 먼 미래,” 즉 오늘의 현실에 서 있다. 오늘의 섬을 찾은 시인의 눈을 끌어간 것은 “갓꽃 무리 옆 보라색 양귀비 두 송이”이다. 그 두 송이의 양귀비에 대해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미래는 향기가 없어서 우리는 그토록 옛날을 찾아 헤매는 거다 찾을 수 있을까
보라색 양귀비가 폭발한 네가 죽었던 그 자리
—조용미, 「박지도」(『문예바다』, 2018년 겨울호) 부분

양귀비는 향기가 없는 것으로 알려진 꽃이다. 하필 그 옛날 박지도와 반월도에 있었던 젊은 스님과 비구니의 사랑은 양귀비에 담겼다. 양귀비에 담기면서 사랑의 이야기는 전해졌지만 향기는 상실했다. 우리가 사는 오늘의 세상에 사랑은 있지만 그 사랑에 향기는 없다는 뜻도 된다. 그 향기가 섬과 섬의 사이를 돌다리로 이을 정도의 마음과 땀으로 생겨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가 보는 것은 전설이 있는 두 섬과 그 섬의 꽃들이지만 시의 세상에선 그 섬의 양귀비 두 송이가 전설의 사랑을 전하면서 향기를 상실한 오늘날의 사랑을 환기시킨다.
조용미의 시에선 양귀비 두 송이에 오래 전의 사랑이 담겼지만 전영관의 시에선 하나의 꽃에 수많은 삶이 담긴다. 꽃은 목련이다. 하지만 시에서 삶을 꽃의 이름으로 체험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아마도 나는 시인이 목련의 무엇인가를 보고 삶을 떠올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시인은 그 삶의 순간들을 우리들에게 나열한다. 문제는 시인처럼 목련을 눈앞에 두고 삶의 순간으로 건너가는 것은 생생한 체험일 수 있으나 그 역방향, 즉 시인이 우리에게 내민 삶의 순간으로부터 꽃으로 건너가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가령 시인은 “어미를 잃고 헤맨 어린것의 발뒤꿈치”라고 했다. 이 구절로부터 목련으로 건너가려면 정확히 목련의 꽃이라기보다 떨어진 목련의 꽃잎이 어떤 형상인가를 알고 있어야 한다. 떨어진 목련의 꽃잎은 발자국 모양을 닮았다. 하얗고 여린 빛깔에 꽃잎의 한쪽으로 약간의 분홍기를 내비친다. 만약 그 꽃잎을 눈앞에 두고 있다면 어미를 잃고 헤매다 벗겨진 아이의 발뒤꿈치는 정확히 그 꽃잎에 겹쳐질 것이다.
사실 나의 설명이 아무리 자세하게 친절을 베풀었다고 해도 시의 체험에는 크게 도움이 될 수가 없다. 때로 어떤 시는 시의 장소를 필요로 한다. 시의 이해를 위해 특별한 장소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전영관의 시에서 그 장소는 꽃이 지고 있는 목련의 나무밑이다. 시인은 시기도 암시하고 있다. “잔바람에 떨어져 낡아 가는 꽃잎들”이란 구절이 그 시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때문에 이 시는 목련이 질 때 목련 나무 아래서 읽어야 한다. 그러면 어지럽게 발자국처럼 떨어져 있는 목련의 꽃잎들이 시커멓게 변색되어 있는 것을 보며 “저를 감당하지 못해 야반도주한 청춘”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되고, 떨어진 꽃잎이 많고 갖 떨어져 여전히 아름답다면 “사랑 따위에 발목 잡혀 승천하지 못한 선녀들의 군무”를 아무 저항없이 수긍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목련을 바라보면 “하늘을 연모한 까닭에 나무에 피어난 수련(睡蓮)”이란 말을 꽃과 함께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며, 만약 목련나무 위로 달이 뜨는 시간의 우연을 함께 했다면 “보름이면 달빛을 음미하는 신의 숟가락”이라는 구절을 목련의 어느 부분에서 발견하고 아, 저것이 바로 그 숟가락이구나 하는 찬탄을 뱉을지도 모른다. 때로 시를 읽는다는 것이 시기를 기다리는 일의 뒤일 때도 있다. 때문에 어떤 시는 잘 간직해 두었다가 시기를 맞추어 목련 나무 밑으로 가져가야 한다. 그렇게 하여 때를 맞추면 시인이 우리에게 나열한 것이 모두 목련의 다른 순간이 된다. 시는 이렇게 마무리되어 있다.

전생을 돌고 돌아온 저 하뭇한 숭어리들을
목련이라 감탄하겠다
—전영관, 「나무에 걸린 은유」(『문예바다』, 2018년 겨울호) 부분

“하뭇한 숭어리”는 마음을 충만하게 채워주는 덩어리란 뜻이다. 목련은 봄의 한때를 장식하는 꽃에 불과하지만 시의 세상에선 무수한 삶이 목련이 된다. 그때의 시는 읽는 것이 아니라 때를 맞추고 장소를 찾아가 체험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하나 삶과 목련을 맞춰보다 보면 시인과는 정반대로 목련을 삶이라고 감탄하게 될 수도 있다.
조성웅의 시가 우리를 데려간 곳에선 꽃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용접 노동자와 H빔이라 불리는 철제 기둥이 보인다. 이곳이 건설현장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끝내/그는 한뼘 남짓한 H빔 위에 모로 누워버렸다/그의 등 뒤에는 10미터 허공이 펼쳐졌다”고 말한다. ‘끝내’라는 말에선 어쩔 수 없이라는 느낌이 만져진다. “가장 위험해 보이는 자세가 그래도 용접을 하기엔 최선의 자세”라는 말로 미루어 그것은 위험한 자세이지만 ‘그’로 일컬어지는 용접 노동자는 자신의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기 위해 그 위험을 감수한다. 시인은 그의 자세를 가리켜 “허공조차안전지지대로 사용하는 법”을 안다고 말한다. 시인은 허공조차 안전 지지대라고 말을 띄워쓰지 못한다. 시속의 언어로라도 그를 수평으로 바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는 24살의 젊은 나이에 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컨베이어벨트에 몸이 끼어 죽은 김용균을 떠올리게 한다. 작업장은 위험했고 위험을 줄일 방법은 있었지만 회사측은 작업 시설을 안전하게 보완해 달라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돈이 들어간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과는 노동자의 죽음이었다. ‘그’의 건설 현장에서도 똑같은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안전하게 일할 작업 시설의 보완을 결핍하고 있기는 이 건설 현장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여기서도 “몇차례의 죽음을 넘어/오늘 하루분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까지//오로지/위험에 익숙해져”야 겨우 일자리를 잃지 않고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시인은 이 건설 현장을 “야만의 세계”라 일컫는다. 그리고 시인의 눈에 노동자는 “삶의 안전을 위한 최고의 역능을 숙련”한 존재들이다. 역능은 능력과 같은 말이다. 흔한 말대신 시인은 흔치 않은 말을 쓰고 있다. 위험을 감수하면서 일을 해야 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했기에 일상적인 말로 그 능력을 불러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위험한 세상을 바꾸어야 하지만 그러나 세상은 쉽게 바뀌질 않는다. 시가 이런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난 한뼘 남짓한 H빔 위에 모로 누운 그의 모습이
목숨을 살리는 방법 같고 삶의 안전을 위한 끈질긴 질문 같고
이판사판 한번 붙어보자는 고공농성 같았다
허공은 모로 누운 그의 모습을 닮아 수평을 이루었다
—조성웅, 「위험에 익숙해져갔다」(『창작과비평』, 2018년 겨울호) 부분

시로 할 수 있는 일은 허공을 텅빈 공간으로 버려두지 않고 수평으로 눕혀 그를 바치는 것이다. 위험으로부터 그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허공을 움직여 수평으로 눕혔을 것이다. 때로 시의 세상에선 마음이 허공도 움직인다. 물론 가장 아름다운 세상은 마음으로 허공을 움직이는 세상이 아니라 건설 현장의 노동자들이 위험없이 작업할 수 있는 안전한 환경으로의 변화일 것이다. 노동자들의 시위에 행동과 마음을 보탤 때 가장 아름다운 세상이 좀더 빨리 우리 곁으로 온다.
마지막 살펴볼 두 편의 시는 고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두 이야기의 첫 순서는 이소연이다. 시인은 수족관에 갇힌 돌고래 얘기를 하고 있다. 동물보호론자들은 수족관에 반대한다. 자연을 인공의 작은 공간에 가두는 것이 그 안을 살아야 하는 물고기들과 바다 동물들에게 잔인한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에게 수족관은 자연이 왜곡된 공간이며 자연이 왜곡되면 자연이 죽는다. 때문에 수족관에선 살아있는 생명이 죽음을 견뎌야 한다.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을 좋아하는 벨루
심해는 딱딱하다고 듣습니다
—이소연, 「수족관에 돌고래나 흰고래가 있다 그러면」(『릿터』, 2018년 12월-2019년 1월호) 부분

벨루라는 이름으로 미루어 돌고래는 흰고래이다. 그 돌고래는 바다에서 살았다면 심해를 깊다라고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그러나 수족관에선 아래로 가라 앉으면 심해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 부딪친다. 수족관에선 심해를 딱딱하다고 듣게 된다. 수족관에는 수평선도 없다. 바다의 수평선 위에는 하늘이 펼쳐지지만 수족관에서 그냥 찰랑대는 수면이 있을 뿐이다. 시인은 그 수면을 “목 없는 수평선”이라고 말한다. 수족관이 죽음의 공간인 이유이다. 구경와서 “눈을 둥그렇게” 뜨고 “솜사탕을 뜯”으며 수족관 앞에 서 있는 아이는 신기함에 가려 돌고래가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른다. 수족관은 “잠도 사각형 꿈도 사각형 절망도 사각형”이 되는 사각의 왜곡된 공간이다. 돌고래의 자연에는 어디에도 그런 각진 공간이 없다.
갇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고래를 빼내 바다로 데려갈 수는 없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돌고래를 가두고 있는 수족관이란 이름의 왜곡된 공간을 드러내는 일은 시의 몫이 될 수 있다. 시인은 그 일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시는 정현우의 시이다. 이소연의 시에서 고래는 수족관에 갇혀 있었지만 정현우의 시에서 고래는 인간의 고기가 될 운명에 처해 있다. “상처 입은 고래가 바다에 떠돌다 해안가에 밀려왔”고 “해변에 닿”았기 때문이다. “수십 명의 사냥꾼들이 개들과 함께 고래를 질질 끌어 올”려 “붉은 숨이 모래사장에 길게 끌려나왔다.” 고래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된 “사람들은 신이 났다.”
하지만 누군가는 바닷가로 떠밀려온 상처받은 고래를 치료해주고 바다로 돌려보내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모두 고래 고기를 원할 때 그러한 마음은 거의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그가 고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왼손으로 고래의 커다란 눈을 감”겨주는 일 뿐이다. 하지만 정말 그것만이 사람들의 고기가 되버린 고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놀랍게도 시인은 고래를 바다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고래가 나를 헤엄쳐
대서양을 빠져나가고.
—정현우, 「거인의 묘 —에스키모의 유령3」(『모든시』, 2018년 겨울호) 부분

고래의 눈을 감겨주고 돌아온 그 날 밤, 시인은 꿈을 꾸었다. 사람들이 먹어치운 탓에 고래는 뼈만 남았지만 고래를 바다로 돌려보내 주고 싶다는 시인의 마음은 꿈속에서 바다가 된다. 그러자 고래가 그 바다를 헤엄쳐 대서양으로 빠져나간다. 시는 그렇다. 사람들이 해변으로 밀려온 고래를 끌어올려 고기로 삼을 때 고래를 바다로 돌려보내주고 싶다는 마음은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듯하지만 뼈만 남은 고래가 헤엄칠 수 있는 바다가 되어 고래가 대서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혹자는 말할지도 모른다. 고래는 이미 죽었는데 그게 무슨 소용인가라고. 어쩌면 그 반문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순간에도 시인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답을 가져다 줄지도 모른다. 누군가 물을 수 있다. 고래는 죽었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력감을 부르는 그 반문 앞에서 내 대답은 이렇다. 시인에겐 내가 바다가 되고 고래가 나를 헤엄쳐 대서양으로 돌아가는 꿈이 남아 있다.

3
시를 곁에 두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어느 비오는 화요일에 매일 비슷하게 반복되던 출근길에서 언제나 흰색 선이 일정한 간격으로 칠해져 있던 횡단보도를 건널 때 흰 색과 검은 색의 선이 번갈아 말을 바꾸는 소리를 발밑에서 들을 수 있다. 막힌 변기를 뚫는 일이 한참 멀었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세상을 뒤집으며 최대치의 기쁨을 선물한다. 오래 전의 사랑이 섬의 양귀비 두 송이에 담겨 향기없는 오늘의 사랑을 환기시킨다. 목련꽃에 온갖 삶이 담기는 생생한 체험의 봄을 목련나무 아래서 보낼 수 있다. 위험에 내몰린 노동자에게 텅빈 허공을 수평으로 펴 그를 바쳐줄 수 있다. 흰고래를 가둔 수족관이 목없는 수평선이 죽어 있는 곳으로 바뀌고 더 이상 그곳에는 가지 않게 된다. 그리고 고래가 죽어 사람들의 뱃속을 채우는 고기가 되는 것은 막을 수 없으나 시인이 바다가 될 수 있어 앙상한 뼈로 남은 고래가 시인을 헤엄쳐 고래가 살던 바다로 돌아간다. 그러니 항상 시를 곁에 두고 살아가볼 일이다. 심지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순간에도 시를 곁에둘 일이다.
(『문예바다』, 2019년 봄호, 시 계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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