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현실, 그리고 시의 세상 —계간 『문예바다』 2019년 여름호 시 계간평

『문예바다』 2019년 여름호

1
시는 서로 부딪치는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알려줄 때가 많다. 하나는 시인들이라고 사람들과 달리 특별한 곳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시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곳에서 살고 있다. 시인도 병에 걸려 투병을 하며 살아갈 때가 있다. 해가 뜨기도 전에 회사에 출근하여 밤늦게까지 일을 하는 고단한 직장인일 때도 있다. 계단을 오르는 걸음이 힘겨운 노년의 삶을 살고 있기도 하다. 가지가 텅빈 겨울 나무 아래 서서 시간을 보낼 때도 있다. 밖에 나가기 싫어 집안에서 뭉개다 내일은 더 추워진다는 일기 예보를 들으며 하루를 마무리하기도 한다. 가끔 카페의 한쪽 구석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다 집으로 오기도 한다. 고향에 내려가 이혼한 아버지를 만나고 오기도 한다. 매일매일 밤을 겪는 것은 사람들이나 시인들이나 똑같다. 가끔 단잠을 아주 깊게 자기도 한다. 모두 평이하기 이를데 없는 현실이다.
시가 알려주는 또다른 사실은 특별할 것 없는 현실을 살고 있는데도 시의 세상이 우리의 현실과는 완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똑같은 현실인데 완연히 다르다는 말은 서로 상충된다. 그러나 시의 세상과 현실이 부딪치고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우리들이 현실 대신 시의 세상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시의 세상은 현실을 전복하고 뒤집곤 한다. 강고한 현실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시에 전복의 힘이 있다.
2019년 계간지의 봄호에 실린 시들을 살펴보면서 시들이 서 있는 현실을 생각했고, 그 현실이 시의 세상에서 어떻게 달리 수용되고, 또 전복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2
황주은의 시로 시작한다. 시는 “스무 명으로 시작했다”는 ‘참사랑회’의 얘기를 전하고 있다. 참사랑회는 오랫 동안 투병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으나 “회원이 줄”면서 “이름을 바꾸자는 의견이 나왔다” 고 한다. ‘동그라미회’라는 이름이 제안되었다.

어린이집 봉고를 운전하는 7년 언니가
동그라미회가 어떠냐고 제안했다
가슴을 떼어 낸 언니들이 주로 반대했다
—황주은, 「말레이시아클럽」(『문예바다』, 2019년 봄호) 부분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픈 사람들 앞에서의 웃음은 미안한 일이나 그러나 웃음을 참기는 어려웠다. 이 순간의 웃음은 그냥 웃음이 아니라 병이 앗아간 웃음을 되찾아 웃음으로 병을 넘어서는 초월의 웃음이다. 현실에선 병으로 인하여 웃음을 잃게 되나 시의 세상은 짧지만 웃음으로 병의 한 순간을 넘어갈 수 있게 해준다. 때문에 내가 웃으면 나도 그 초월의 웃음에 웃음 하나를 보태는 것이 된다.
투병인 클럽에 대한 시인의 소개는 경쾌하게 들린다. “우리 클럽의 강령은/‘늦지 마, 죽지 마, 신입회원 항시 환영!’이다/투병 연도를 앞에 붙여 이름 대신 부른다”고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클럽의 이름은 결국 “말레이시아 클럽”으로 바뀐다. 느닷없다 싶지만 “도배 다니는 9년 언니의 의견이 신선”하여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름을 제안한 언니는 “우리 모두 찰고무같이 질기게 살아야 하니/세계최대 고무 생산국가 이름을 따자고 주장했”고 회원들도 “참사랑의 본질도 생고무와 같다고 모두 주억거렸다”고 한다. 주억거리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는 뜻이다.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니 죽음이 없을 수 없으나 시인은 죽음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대신 “3년 언니와 5년 언니는 샘물요양원을 거쳐 영구 탈퇴를 했”다고 말하며, “닭발을 팔던 19년 언니도/들국화를 꽂고 우주로 포장마차를 몰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함께 하던 이들을 보내는 마음을 말할 때는 그간의 경쾌함을 잃는다. “그해 겨울,/클럽에는 눈 대신 하얀 진액이 떨어지는 날이 많았다/우리들 가슴에는 구더기가 끓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슴이 썩어나가는 듯 아팠다는 뜻이리라.
병마와 싸워야 하는 현실이 3년, 5년, 8년, 그리고 가장 길게는 19년 정도에 이르면 대개는 삶이 병에 짓눌리고 만다. 그러나 황주은의 시 속엔 그 현실의 하중감을 뒤집는 경쾌함이 있다. 시가 갖는 전복의 힘이다. 시는 마지막 자리에서 클럽에 대한 정보 하나를 알려주며 마무리되고 있다. “말레이시아 클럽 가입은 무료”라고 한다.
정재원의 시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직장을 다니는 삶이다. 그 삶은 고달프다. “별을 보고 출근해서 별을 보며 퇴근하는/낮이 삭제된 밤의 이야기”로 그 삶이 꾸려져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퉁퉁 부은 오늘을 쥐어짜면 한 병의 눈물이 나올 것이다”라고 말한다. 내게는 “퉁퉁 부은 오늘”이 발이 퉁퉁 붓도록 일해야 하는 오늘로 짐작되었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직업을 가지면 발이 퉁퉁 부을 수 있다. 대부분의 서비스 업체에선 고객을 서서 맞아야 한다며 직원들을 의자에 앉지 못하게 한다. 쉴 수 있는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것이 이 땅의 현실임을 생각하면 이러한 예는 상당히 많다. “한 병의 눈물”은 그렇게 일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삶에 대한 슬픔으로 이해되었다.
이렇게 노동자가 휴식 없이 일해야 하는 세상에선 자연도 자연스럽질 못하다. 시인은 일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닷가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때는 저녁 때이다. 그 시간의 바닷가를 가리켜 시인은 “지나는 어선이 수평선 허리 끌어안으면/이리저리 뒤척이며” “갯메꽃 줄기”가 “모래밭을 기어”간다고 했다. 이리저리 뒤척인다는 표현이 내게는 피곤한 몸으로 밤늦게 퇴근하는 직장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피곤은 자연을 보는 시선에까지 파급이 된다. 시인이 “하루치의 태양은 바다 속으로 침몰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하루가 저무는 평범한 일몰의 풍경이었을 것이나 퇴근한 뒤 집에서 쓰러질 듯 자리에 눕는 직장인의 하루가 그 풍경에 겹쳐진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바람이 그만 불었으면, 좋겠다는 고백을/바람이 다시 불었으면, 으로 수정한다.” 처음에는 부는 바람의 시원함이 그대로 수용되지 않고 오히려 불편했던 것이 시인의 입장이었으나 그 입장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변화는 다음과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바다를 건너는 바람의 발자국들
바람은 왜 한 번도 발등이 젖지 않을까
—정재원, 「바다를 저울질하다」(『문예바다』, 2019년 봄호) 부분

물결은 바다를 건너는 바람의 발자국 같은 것이다. 우리가 바다를 건너려고 바다에 발을 들여놓으면 곧바로 발이 젖지만 바람은 발등하나 젖지 않고 바다를 건넌다. 우리는 그러지 못한다. 우리의 무게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읽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읽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바닷가에 서 있는 사람이 “낮이 삭제된” 노동의 삶을 살아가는 직장인이었고, 다리가 퉁퉁 부을 정도로 하루 종일 서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람이 수많은 발자국을 남기면서 바다를 건너는 데도 발등이 하나도 젖지 않는 것은 가벼운 무게 때문이 아니라 바람에게는 충분한 휴식이 있기 때문이다. 바닷가의 바람은 그것을 알려준다. 시인이 “바람이 그만 불었으면, 좋겠다는 고백을/바람이 다시 불었으면, 으로 수정한” 것은 빠르게 달려야 하는 노동 형태의 바람이 충분한 휴식이 있는 노동으로서의 바람으로 그 의미가 바뀐 탓일 것이다. 바람 속에는 현실과 기대가 뒤섞여 있으나 시인이 결국은 기대와 희망으로서의 의미를 바람 속에서 보게 된 것이리라.
황동규는 노년의 어느 가을날을 전하고 있다. “은행잎들이 날고 있다./현관 앞에서 하늘을 올려다본다./또 하나의 가을이 가고 있군”이라는 첫 구절이 시인이 선 계절이 가을임을 알려준다. 노년에는 지나가는 가을이 그냥 가을이 아니라 또 한 번의 가을로 확연하게 인식된다. 그것이 시인의 현실이다.
시인이 사는 곳은 아파트이며, 엘리베이터는 수리 중이다. 그러니 계단으로 아파트를 오르내려야 한다. 나이가 들면 계단으로 아파트를 오르내리는 것이 힘들어진다. 시인은 그 상황을 “수리 중인 엘리베이터 옆 층계에 발 올려놓기 전/미리 친해지려는 호흡을 진정시킨다”고 말한다. 아울러 자신의 나이를 “몇 번 세고도 또 잊어버리는/한 층 계단 수보다 두 배쯤 되는 수의 가을을/이 건물에서 보냈다”는 말로 알려주면서 중력의 위력이 실감되는 나이를 “그 가을 수의 세 배의 가을을/조금씩 더 무거운 중력 추를 달며 살고 있”다고 전한다.
그리고 시인은 층계를 오르려 숨을 고르는 그때 “위층에 사는 남자”를 만난다. 시인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는 “나보다 발 더 무겁게 끌면서도/만날 때마다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는” 사람이다. 발을 더 무겁게 끌고 있다는 말은 그의 몸이 성치 않음을 알려준다. 계단을 올라야 하는 현실은 나이가 들면 힘들어진다. 하지만 황동규는 그 순간을 힘든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에게 그 순간은 춤의 순간이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 집 8층까지 오르는 층계 일곱을
라벨의 「볼레로」가 악기 바꿔가며 반복을 춤추게 하듯
발걸음 바꿔가며 흥겹게 올라보자.
—황동규, 「오늘 하루만이라도」(『문학과사회』, 2019년 봄호) 부분

시는 힘들게 계단을 올라야 하는 삶에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할 듯하지만 놀랍게도 그 순간의 한걸음 한걸음을 춤으로 바꾸어 놓는 놀라운 힘을 갖고 있다. 시인은 앞서 계단을 올라간 위층 남자가 성치 않은 몸을 자책하지 않도록 “그의 발걸음이 몇 층 위로 오르길 기다”렸다 걸음을 떼겠다고 한다. 남에 대한 작은 배려 또한 나이에서 기대할 수 있는 미덕일 것이다. 춤에 어울리는 마음이기도 하다.
현실이 시속에서 완전히 모습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이연자의 시가 좋은 예이다. 시인은 ‘고로쇠나무’의 밑에 서 있다. 계절은 겨울이나 날씨는 따뜻했는가 보다. 시의 첫구절이 “서리도 밑동으로 젖어 눕고 있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고로쇠나무의 밑에 떨어진 “낙엽을 밟으면 물소리가 부서진다”고 말한다. 서리가 녹아 나무 밑동을 적시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낙엽을 밟을 때 물도 함께 밟히고 시인이 낙엽 아래를 적시고 있는 물에 귀를 내준 것이다. 그 순간 낙엽 소리가 물소리로 전환되었을 것이다. 전환된 “물소리는 가장 낮은 허공으로 솟는다.”
낙엽은 한 때 초록의 잎이었다. 시인은 그때의 “나뭇잎은 꽃과 열매의 그늘이었다”고 말한다. 꽃과 열매에 그늘을 드리워주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나무의 뿌리가 땅속에 있다고 알고 있지만 시인은 잎의 그늘을 ‘뿌리’라고 말한다. 잎의 그늘 속에서 나무가 자란다는 뜻일 것이다. “매미가 먼저 죽고”, 즉 매미가 울던 시절이 가고, “고산지대에서 금풍이 불어올 때”, 즉 높은 산에서 가을 바람이 불어올 때, 시인은 초록의 잎이 “휘어진 길에서 쉬는 영혼임을 알았다”고 말한다. 가을 바람이 불어올 때라고 했으니 초록은 단풍으로 물들었을 것이다. 시인은 그 단풍을 “휘어진 길에서 쉬는 영혼”이라고 말한다.
시인의 전언에 따르면 고로쇠나무는 “나이테 안쪽”에 “빛의 우물”을 두고 있다. “그 어떤 것도 뚫지 못”하는 “단단한 수피”의 속에 빛의 우물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로쇠나무에서 사람들은 수액을 채취하여 마신다. 그러니 나무의 안쪽에 그 수액이 솟아나는 우물이 있을 것이다. 제 몸에 초록의 그늘과 우물을 가진 고로쇠나무는 시인에게 나무가 아니라 물고기가 된다.

고로쇠나무는 제 몸이 초록 물고기였던 것을 모른다

나무 물고기 비늘이 저 단풍이다
—이연자, 「나무 물고기는 죽지 않았다」(『문예바다』, 2019년 봄호) 부분

시인에게 낙엽을 떨어뜨리는 것은 ‘털갈이’이며, 뿌리는 ‘부레’이다. 물고기들은 물속을 유영하지만 고로쇠나무는 뿌리를 부레로 삼고 “땅속을 유영”하며 겨울을 난다. 그리고 “초록빛을 다시 주워 입을 때까지”, 그러니까 잎이 새로 날 때까지 “얼음이 녹는 이야기를 나이테에 새”기며 산다. 이연자에게선 현실의 나무가 물고기로 변환된다. 시의 세상이란 그렇게 나무가 물고기로 바뀌는 세상이다.
이수명은 현실과 시의 거리를 생각하게 만든다. 시의 출발은 지극히 평범한 현실이다. 아마도 아는 이가 “저녁을 먹으러 오라고 저녁 먹으러 오라고” 연락을 해온 것으로 보인다. 어떤 곳에 가서 경기를 보고 좋은데를 찾아서 저녁을 먹자는 연락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시인의 반응은 “저녁 먹으러 가기 싫어 거기까지 가기 싫어 경기를 보러 가기 싫고 경기가 끝나고 저녁을 어디서 먹을지 함께 돌아다니고 싶지 않고 여기가 좋겠네 말하고 싶지 않아”라는 것이었다.
시인은 가고 싶지 않은 자신의 심정을 시로 삼고 있으며,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은 아무런 윤색없이 그대로 노출시킨다. “움직이고 싶지 않다 한 발자국도 출장을 떠났다고 말해버릴 걸 아주 먼 데로 갔다고 다들 멀리 가는 걸 좋아해 나는 멀리 가는 건 질색이야 그래서 멀리 갔다고 해버릴 걸”이라는 구절에서 그런 시인의 심정을 들여다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시를 읽는 우리들의 마음이다. 이렇게 써도 시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그때쯤 시인이 이렇게 말한다.

이제 오라는 말이 들리지 않는다 들리면 말이 끊어진다 내 인생에는 문제가 없고 오늘은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없고 이대로 집에 쳐박혀 있을 거야 여기서 땅거미한테 잡아먹혀버릴 거야 땅거미가 서서히 나를 삼킬 것이다 치워도 치워도 벌레들이 기어나온다
—이수명, 「내일은 더 추워진다고 해요」(『포지션』, 2019년 봄호) 부분

땅거미는 사실 벌레가 아니다. 현실에서 땅거미는 해가 진 뒤의 약간 어두운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시의 세상에선 그 땅거미가 벌레로 바뀔 수 있다. 그 때문에 나는 이 부분에서 현실이 시의 세상으로 바뀌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밖에 나가기 싫다는 현실적 마음의 움직임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현실적 마음의 움직임이 땅거미의 시적 변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적으로 변환된 세상은 시의 마무리 자리에서 “오늘 같은 날이 그냥 계속 이어지자 내일은 더 추워진다고 해요”라는 의식을 낳는다. 내일 날씨가 더 추워지는 것은 오늘 같은 날이 그냥 계속 이어지기 때문은 아니다. 하지만 시의 세상에선 날씨마저도 밖에 나가기 싫다는 시인의 마음을 응원하는 쪽으로 움직인다. 현실에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시의 세상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이수명의 시에서 현실과 시의 경계는 아주 모호한 편이다. 현실에서 시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간다고 할 수 있다. 시와 현실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나 분명한 구분선은 있다. 그 구분선에 아슬아슬하게 경계를 걸치고 있는 것이 그의 시가 가진 매력이다.
김선재의 시에선 한 부분만 읽어보기로 한다. 시가 전체적으로 해명되지는 않으나 한 구절이 현실과 시의 세상이 갖는 차이를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앉았다 일어나면 모서리가 된다
접었다 펼치면 오늘이 오는 것처럼
—김선재, 「3인칭」(『모든시』, 2019년 봄호) 부분

현실적으로 앉았다 일어나는 곳이 모서리가 될 수는 없다. 아마도 현실은 항상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일 것이다. 항상 구석진 자리에 앉는다와 앉았다 일어나면 그곳이 항상 모서리가 된다는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이 현실과 시의 차이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현실의 세상에선 내가 어떤 습관을 갖고 그 습관이 구석을 찾지만 시의 세상에선 나에게 습관이란 없고 그냥 내가 앉는 곳이 항상 구석이 된다. 시는 언어로 이루어진 세상이어서 언어로 무엇이든지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세상이 가능하다. 이는 오늘과 하루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현실에선 아침에 하루가 펼쳐지면서 오늘이 시작된다. 그러나 시의 세상에선 시인이 하루를 접었다 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오늘이 온다. 시의 세상은 언어로 현실의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세상이다.
서윤후는 현실과 구별하여 시의 세상을 보여주기 보다 오히려 개인적 현실을 보여준다. 그 현실은 고향이다. 고향이란 말은 고향의 실제와 관계없이 그 말만으로 어떤 특정한 분위기를 갖는다. 고향이란 말이 우리에게 주는 분위기는 푸근하기 이를데 없다. 하지만 실제로도 그럴까.
시인은 아마도 아버지를 만나러 고향에 내려갔나 보다. 그러나 “이혼한 아버지는 개밥 주는 일을 잊어서 만난 지 십오분 만에 돌아가야겠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말 앞에서 시인은 “나중에 먹으려고 불판 가장자리에 굽던 갈비뼈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고 말한다. 시인에게선 실망의 심정이 만져진다. 그 실망 때문에 시인이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기차를 타고 내려간 고향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고향과는 많이 다른 분위기를 갖는다.

우리는 차를 가지고 너무 먼 곳에 와 있었다 아버지가 친구와 통화할 적에 자신이 고향에 온 것을 비밀로 해달라고 말했다 엉망이 된 자들이 모두 돌아오는 고향, 그곳은 내가 태어났으나 엿듣기만 하는 곳이기도 했다 기억 한줌 없이 아프게 된 창밖 풍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서윤후, 「하룻밤」(『창작과비평』, 2019년 봄호) 부분

때로 말은 말의 허상을 동반할 때가 있다. 고향이란 말이 그렇다. 그 말에선 따뜻함이 만져진다. 그러나 고향이 항상 그럴 수는 없다. “챙겨온 것이 너무나도 많은 작은 가방”이나 “저녁에는 쌀쌀해질 것 같아서 챙겨온 외투”와 같은 구절을 보면 서윤후는 아버지와 보낼 「하룻밤」을 기대한 것 같다. 그러나 그 기대는 채워지지 않았다. 그 현실은 고향이란 말이 갖는 일반적인 느낌을 배신한다. 시인은 자신의 현실을 그대로 시로 옮긴다. 때로 시는 말에 동반되는 허상을 버리고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처지를 보여주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기도 하다.
심지아의 시는 밤이 시로 바뀌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시가 시작되는 부분을 들여다 보기로 한다.

밤은 깊다고 한다 깊어진다고 한다 깊은 밤에 깊어지는 밤이라고 말하면 볍씨보다 작은 이야기의 시작이 있을 것 같다 깊이를 향해 순하고 어린 구멍을 뚫는 이야기의 시작이 있을 것 같다 이 문장에는 우리가 아는 슬픔이 없다 다만 여러 개의 구멍이 유순한 눈동자처럼 깜박인다
—심지아, 「밤」(『문예바다』, 2019년 봄호) 부분

밤이 깊다거나 깊어진다는 말은 많이 쓰는 말이다. 시인은 그 흔한 말로 “깊이를 향해 순하고 어린 구멍을 뚫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자 “여러 개의 구멍이 유순한 눈동자처럼 깜박”이는 밤이 열린다. 그러한 밤이 열리자 ‘그’라고 지칭되는 누군가가 두 손으로 “깊은 것을 짠다 깊어지는 것을” 짠다. 밤은 이제 옷감처럼 짜는 것이 된다. 이어 시인은 “이 문장에는 물결이 없고”“추위가 없다”고 했으나 “그에게는 추위가 있다”고 한다. 문장에는 담기지 않았으나 그 밤에 깨어 있는 개인이 마주한 계절일 것이다. 그리고 추위가 그에게 있다고 했으니 이 밤은 겨울밤일 것이다. 시인은 “깊어지는 밤에는 밤도 밤의 가파름에 빠”지며 “밤의 가파름에 빠져 밤이 밤으로 깨어난다고 한다”고 말한다. 내게 “밤의 가파름”은 가파른 삶의 고비로 읽혔고, 밤의 깨어남은 그러한 삶으로 인해 잠못이루는 불면의 밤으로 이해되었다. 둘을 함께 엮으면서 누군가에게는 밤이 가파르고 힘든 삶의 고비로 인해서 잠못드는 밤이 되기도 한다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밤에도 “밤의 가파름을 깨우지 않으려 밤의 깨어남을 깨우지 않으려 밤보다 더 고요하게 밤보다 더 가파르게” “깊은 것을 짜고 있”는 “그의 두 손”이 있다. 누군가의 잠을 걱정하는 기도처럼 느껴진 순간이었다. 만약 그런 손의 기도가 있다면 그것은 “밤보다 더 부드러운 질료가 되어 가고 이상하게도 빛을” 낼 것만 같다. 시는 “밤은 깊다”라는 현상과 “깊어진다”는 어떤 변화로 시작을 했으나 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깊어져 결국은 “밤의 부드러움”으로 바뀌기에 이른다. 그렇게 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깊어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시의 세상이다.
마지막으로 이현호의 시를 읽는다. 시는 “잘 기억나지 않는 꿈속의 일”로 시작된다. 시인은 꿈속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흔들렸던 것 같다”고 말한다. 흐릿한 꿈을 꾼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시인은 그 흐릿한 기억의 꿈이 “꿈속에 누군가를 두고 온 것 같아서” “늦도록 산책을 하고” 나서 다시 “일찍 자리에” 눕는다. 그리고 잠을 자며, 그것도 아주 깊게 푹 잔다.

그렇게 깜깜한 잠은 오랜만이었다

꿈을 꾸지 않은 것인지
새까만 세상을 꿈꾼 것인지

젖은 눈가를 비비며 생각했다
누군가 꿈 밖에 나를 흘리고 간 것 같았다
—이현호, 「비로소 선명해지는 것들」(『문학동네』, 2019년 봄호) 부분

“깜깜한 잠”은 깊은 잠이다. 시인이 이번에 경험한 것은 흐릿한 꿈이 아니라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잠이다. 그 깊은 잠의 현실을 시인은 “새까만 세상을 꾼꿈 것이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누군가 꿈 밖에 나를 흘리고 간 것 같았다”고 말한다.
시는 “일어나야지, 창문을 열자”는 시인의 반응과 “아직 밤이 가시지 않은 것인지/어둠 속에 얼마나 많은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는 구절로 마무리된다. 마지막 문장은 이상하다. ‘얼마나’를 빼버려야 그나마 자연스럽게 읽힌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를 보기는 어려운 법인데 ‘얼마나’가 그 보이지 않는 그림자를 세려 들기 때문에 마지막 문장의 어색함이 왔을 것이다. 흐릿한 꿈이나 기억나지 않는 꿈을 분명하게 들여다 보려고 하는 것도 똑같은 것인지 모른다.

3
현실에서 병은 고통이다. 시의 세상에선 그 고통의 세상이 경쾌함과 웃음을 얻는다. 현실에서 직장인은 낮이 제거된 고단한 삶을 산다. 시는 그 직장인이 충분한 휴식을 얻는 세상을 바닷가의 바람에게서 본다. 노년의 현실에선 계단을 오르는 것도 힘겹다. 시의 세상은 그 힘겨운 발걸음을 천천히 흐르는 노래에 맞추어 춤으로 바꾼다. 현실에서 고로쇠나무가 보내는 겨울은 텅빈 나뭇가지이다. 시의 세상에선 초록의 물고기가 된다. 가끔 현실의 우리들은 누가 불러내도 밖에 나가기가 싫어진다. 시의 세상에선 그 마음이 땅거미를 벌레로 바꾸어 놓는다. 고향은 현실에선 거의 항상 따뜻함을 품고 있는 말이다. 시속에선 고향이 아버지와 보낼 하룻밤에 대한 기대가 깨진 실망스런 곳이 되기도 한다. 밤은 현실적으로 보면 하루의 일정한 시간대이다. 그 시간대가 시의 세상에선 말의 꼬리를 물며 말할 수 없이 깊어져 우리의 삶을 위로하는 방향으로 부드러워지기도 한다. 현실에서 깊은 잠을 아주 달게 자고 일어나 아무 것도 기억이 안날 때가 있다. 시의 세상에선 그 깊은 잠의 세상을 선명하게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어둠 속에서 그림자를 세려는 마음과 비슷한 것이 된다. 2019년 계간지의 봄호를 들여다보며 내가 경험한 현실과 시의 세상이다. 나는 시를 읽으며 두 세상을 산다.
(『문예바다』, 2019년 여름호, 시 계간평)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