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는 세상을 하얗게 지운다.
어둠은 세상을 까맣게 지운다.
안개가 세상을 하얗게 지우는 것은
어둠이 세상을 까맣게 지우는 것과는 좀 다르다.
어둠이 세상을 까맣게 지우면
벌써 발끝부터 세상은 까맣게 지워진다.
한발을 떼나 두발을 떼나 세상은 앞을 보여주지 않는다.
안개는 세상을 지워도 어둠처럼 야박하지 않다.
발끝에서 떼어놓은 시선이 너무 멀리 벗어나지만 않으면
안개는 끊임없이 길을 열어준다.
그래서 안개 속에선
갇힌 듯 하면서도 조금씩 길을 열어갈 수 있다.
사랑한다면
사랑을 어둠 속에 방치해선 안된다.
사랑한다면
최소한 길을 잃더라도
그 길은 안개 속의 길이어야 한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지워져 있지만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열리는 안개의 길.
살다가 아무리 힘들더라도
사랑은 최소한 안개의 길 위에 세워놓아야 한다.
사랑을 어둠의 길 위로 내몰아선 안된다.
오늘 팔당의 한강변은 안개로 자욱했다.
원래 안개는 봄에 심한 법인데
겨울이 봄같다 보니 봄처럼 진한 안개가
내 곁을 조금 물러난 강변의 저편을 하얗게 지워놓고 있었다.
그러나 걸어가면 길은 자꾸만 열렸다.
헤매더라도 안개 속을 하루 종일 걷고 싶었다.
세상을 하루 종일 안개 속에 하얗게 지워놓고 싶었다.


4 thoughts on “안개”
맞습니다…
“안개 속에선 갇힌 듯 하면서도 조금씩 길을 열어갈 수 있”어서 좋습니다…. ^&^
가내 평안하시고 두분 모두 기체후만강 하시지요?? ㅎ
선생님도 잘 계시지요?
여긴 요즘 자주 안개가 낍니다. 며칠전에는 하루 종일 안개가 끼어 있더군요. 4월에 오시면 한강만 거니는 것으로도 안개속을 걸으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언젠가 한계령인가… 거길 넘어올 때 자욱한 그 안개를 잊지 못하겠어.
딱 내 차의 불빛만큼만 길을 밝혀주는 그 안개…
자욱하고 지독한 안개 속에 갖히고 싶어라~~~
난 가장 심한 안개는 소백산 갔을 때 겪었지.
그때 비는 쫄딱 맞았지만 안개 자욱한 산길은 정말 좋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