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규원 선생님이 떠나셨다

시집 속의 오규원 선생님 컷, 그림 이제하

오규원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오늘 신문을 넘기고 있는데 그 마지막 면에
선생님의 타계 소식이 들어있었다.
나는 선생님의 시에 이끌려 문학에 발을 들여 놓았다.
한때 문학에 대한 내 꿈은 문학평론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규원 전문가가 되는 것이었다.
초창기, 내가 선생님의 시에서 받은 인상은 투명함이었다.
그의 시는 들여다보면 볼수록 점점 더 투명함이 맑게 열리곤 했다.
내가 선생님의 시에 대해 쓴 글은
발표된 것만 손에 꼽으면 세 편이다.
첫 글은 나의 등단작이었으며,
다른 두 편은 시집의 서평이었다.
그리고 박혜경과 함께 한 선생님과의 대담 기회가 한 번 있었다.
그중 가장 최근의 글은 2005년에 현대시학에 실린 글이었다.
그 글이 실리고 난 뒤, 선생님으로부터 메일을 하나 받았다.
2005년 9월 11일날 온 것으로 되어 있는 그 메일에서 선생님은 내게 이런 말을 남겨주셨다.

현대시학의 서평은 지난 3일에 읽었습니다.
독자들이 편하게 읽도록 배려가 잘 된 유니크한 글이었습니다.
곧 소식을 전한다는 게 건강 상태가 안좋아 늦어졌습니다.
요즘은 메일을 하나 쓰는 데도 이렇게 몸 상태를 봐서 해야 합니다.
이곳은 산 속의 마을이라 가을이 훨씬 빨리 옵니다.
햇빛은 투명하고 바람에서는 산 속의 깊은 그늘 냄새가 납니다.
마음이 자주 숲 속으로 혼자 가서 걸어다니다 옵니다.
좋은 서평 고맙습니다.
모쪼록 가족 모두 건강하시길 빕니다.

건강은 선생님도 챙기셨어야 할 몫이었으나
결국 선생님은 오늘 신문에 타계 소식을 남겨놓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비어버린 허전한 날이다.
빈소에 다녀와선 선생님의 시집을 펴들었다.
빈 마음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으나 오늘은 슬픔이 여전했다.

14 thoughts on “오규원 선생님이 떠나셨다

  1. 제자라고 불릴 수도 없는 처지이기에 슬픔을 드러내지도 못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80년대 후반 원고 뭉치를 들고 찾아간 저에게 나무람 대신 “학교는 오늘도 안녕하다” 시집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은 라스베가스에서 살고있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국시를 항상 마음에 담아두고 삽니다.
    삼가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2. 강화에 가셔서 오규원 선생님이 잠들어 계신 나무를 찾으시면
    꼭 사진으로 올려주세요……보고싶습니다…..시인이 묻힌 곳의
    나무는 어떤 모습일까 하고요. 톨스토이의 무덤이 생각남니다.
    봄이 오면 한번 다녀오실 수가 있으실까요…….

  3. 대개 엄한 분들이 속내의 사랑은 더 자상하시고 깊더군요.
    병자는 평상시 자신의 건강한 모습만을 사람들이 기억하고
    추억하기를 바라더군요.

    그래서 아플 때는 그것이 특히 죽음에 이르는 특별한
    병일 때는 더욱더 누굴 만나기를 거부하더군요.
    아니면 죽음을 담대하게 받아드리며 아무 말 하지
    않고 손을 잡아 주고 곁에서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언어는 전해지고 감정 또한 사랑도 다 전달 되더군요.

    이제는 자상하신 분이 곁에 계시면 그 어떤 기회도
    놓치지 마세요. 배려를 먼저 하세요…어떤 모습으로든
    그러면 그 몇배로 사랑은 마종기 시인의 시 “우화의 강”처럼
    전해져 오더군요….절실한 그리움으로요.

    1. 이제 강화에 가면 선생님 묻히신 그 나무를 한번 찾아봐야죠.
      전등사 부근이라고 했으니, 헤메다가 못찾으면, 그곳에 사는 함민복 시인이라도 불러내 찾아봐야 겠어요.

  4. 여기는 먼 이국입니다.
    문학을 사랑하는 한 작은 사람이 우연히 모국어로 된 어느 곳을
    지나다가 한눈에 들어 오는 문자가 있었습니다. [오규원 시인]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여서 따라가보니 오마이뉴스란 곳이었지요.

    그분이 남기셨다는 마지막 무제의 시를 읽어가는 동안
    지긋이 눈을 감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 한줄기에 소리 죽여
    쇼팽의 즉흥환상곡 앞에서 어둠이 내리는 저녁의 경계선에서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 이름을 알게 된 연유는 그분에게서 문학을 공부하였던
    어느 서울예대문창과 학생이었던 한 젊음을 모국어를 가슴에
    담아가던 시절 인터넷이 널리 퍼져있지 않던 초기시대 하이텔,
    천리안 유니텔이 한창 그 진가를 발휘하던 시절이었지요.

    글 벗은 그분의 시 작법 책을 먼 이국까지 선물로 보내주던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죽음 앞에서는 어떤 권력도 명예도 인식도 모두가 없을 무
    그저 무 입니다. 그러기에 살아 있을 때 잘 해란 말이 가장
    위대한 힘의 뉘앙스를 갖고 있는 지 모릅니다.

    삶과 죽음을 늘 곁에 두고 사는 한 작은 사람이 피부로
    삶으로 느끼며 산 소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절실하고 애절한 그리움의 존재가 절대 필요 불가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존재 가치가 부여되는 진솔한 만남과 우정과 사랑이
    존재의식을 위한 마지막 존엄성과 더불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좋은 사색이 있는 님의 글방을 만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평안하소서……..먼 이역에서……

    1. 좀 후회되는게 있어요.
      제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 요양을 하셨는데
      두번이나 집앞까지 갔으면서도
      미리 연락을 하지 못해 그냥 바깥에 서 있다가 왔었죠.
      또 듣기로 선생님이 사람만나는 걸 부담스러워한다는 얘기도 들어서 그냥 막무가내로 들어가기도 주저스럽더군요.
      그때 한번 얼굴이라도 봤으면 슬픔이 좀 덜했을 걸 하는 후회도 되요.
      참, 자상하셨는데…

  5. 김현 선생님 소식을 들었을 때도, 오규원 선생님 소식을 들었을 때도
    마음이 정말 허전하네.
    영화 까미유끌로델에서 보면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가 죽었을 때
    마을 사람들이 슬피 울며 뛰어가던 장면이 있었는데…
    많이 허전한 날이다…

    1. 위고의 경우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소설이긴 했지만 그래도 일반 사람들이 위고 죽었다고 그러는 건 더 대단한 일이야. 사실 위고보다 그 사람들이 더 감동적이더라.

    2. 오규원 선생님 사진을 보니까
      털이, 턱수염과 콧수염이 당신과 아주 똑같더라.
      다만 선생님은 희끗희끗하고 당신은 아직 검다는 차이 뿐…
      눈빛은 아주 두꺼운 안경알도 그 따뜻한 눈빛을 가리지 못하더라구. 선한 그 눈빛이 잊혀지질 않네.

    3. 대담할 때 생각나네.
      중간에 점심을 먹었는데
      그때 내가 ‘자신을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냐’고 물었더니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거야.
      그래서 그치만 선생님 시는 너무 논리적이라고 했더니
      자신은 논리가 결핍되어 있어서 아마도 그걸 채우려는 욕망이 시 속에 녹아들었을 거라고 하시더군.
      그래서 또, 논리가 결핍된 사람에게서 어떻게 논리가 나오냐고 했더니,
      ‘어허, 이 사람 참, 논리의 결핍이 논리를 키우는 거 아니겠나’라고 하시면서 무엇인가가 크게 부족했던 사람이 그 부족한 부분에서 가장 큰 대가가 되었던 예를 하나 들어주었던 기억이야.
      난 논리적이긴 했는데 항상 시적 감성이 부족해서 시인들이 부러웠는데 그 결핍이 혹시 오늘의 나를 키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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