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나무의 내면에서 만나는 역동적 삶 —이상열의 그림 세계

2020년 갤러리인사아트 이상열 전시회 도록 표지

한 시인의 싯구절에서 그림이 무엇인가에 대한 독특한 시각을 만났다. 김언의 시 「팔레트」이다. 시는 “나무가 없으니 숲이라고 썼다”는 말로 시작된다. 말이 안된다. 나무가 없는데 어떻게 숲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의문은 다음 구절에서 해소된다. 다음 구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이 많아서 도시가 안 보이는 것처럼 터치가 많아서 으깨어놓은 나무와 바위와 미역 감는 여인들 남자들 그리고 그들의 일렁이는 자화상 흘러내리는 옷주름 정지해버린 사과와 배 굴러떨어지는
자신의 명성까지 소란스럽게 담아놓은 과일 바구니 시장바구니 닳고 닳은 주머니에서 꺼낸 자신의 돋보기안경조차
그는 이것으로 그렸다.
—김언, 「팔레트」 부분

아하, 이제 나는 알겠다. 시인이 말한 숲이 실제의 숲이 아니라 그림 속의 숲이란 것을. 그림 속에서 숲은 “터치가 많아서 으깨어놓은 나무”로 채워져 있다. “으깨어놓은 나무”는 보다 구체적으로는 팔레트의 물감을 으깨어서 그려놓은 나무가 될 것이다. 이렇게 이해를 하면 그림이란 팔레트의 물감 속에서 나무를 으깬 뒤 화가의 터치로 숲에 담아낼 수 있는 예술 장르이다. 수많은 터치는 나무 하나하나에 기울인 화가의 섬세한 손길이 될 것이다. 문제는 나무를 그려넣었는데 나무는 보이지 않고 숲만 보인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어떨까. 으깨어 넣을 정도로 나무가 많았다면 숲이 보였을까. 그런 경우 숲은 보이지 않고 나무만 보이진 않을까. 시인은 그와 비슷한 경우의 예도 들어준다. “사람이 많아서 도시가 안 보이는” 경우가 그렇다는 것이다. 사람이 많으면 사람밖에 보이질 않는다. 나무의 경우도 이와 똑같아서 나무가 많았다면 실제로는 숲은 보이지 않고 나무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에선 정반대의 경우가 발생한다. 실제의 경우와는 달리 물감으로 나무를 으깨어 넣을 정도로 많은 나무를 그려넣었는데도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그림에서 숲을 보고 있을 때 화가가 숲을 그린 것이 아니라 나무를 으깨어 넣어 숲을 조성한 것일 수 있다. 으깨진 물감으로 칠해진 듯 보이는 숲이 사실은 숲이 아니라 수많은 나무의 그림일 수 있다. 나는 시인이 숲이 아니라 으깨어진 물감으로 그려진 수많은 나무를 볼 수 있는 깊이있는 시선을 가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나무는 숲의 내면일 수 있다. 어찌보면 그림은 세상의 내면을 그려내는 예술이다.
화가 이상열은 꽃과 나무를 그린다. 그의 꽃그림에선 수많은 꽃이 꽃의 색으로 뭉개져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의 나무 그림에선 나무가 보이지 않고 숲이 보이는 경우는 없다. 그의 나무 그림에선 나무가 보인다. 하지만 숲의 그림이 숲의 내면을 채우고 있는 나무를 내비칠 수 있듯 이상열의 그림은 꽃과 나무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꽃과 나무의 내면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때 우리들은 현실에서 마주하는 꽃과 나무의 내면을 마주하게 된다.
꽃과 나무의 내면이라니? 도대체 그런 것이 있을 수 있을까? 그 궁금증에 대해선 이상열의 그림이 답해줄 것이다. 나는 이제 그 내면의로의 길을 복사꽃을 소재로한 그림들로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복사꽃이니 복숭아 나무이다. <도원>이나 <도원의 봄> 연작, 그리고 <도원의 꿈>과 같은 작품이 이에 해당된다. 모두 활짝 핀 복사꽃을 화폭에 담고 있다. 복사꽃은 봄에 핀다. 그러니 계절은 봄이다.
복사꽃을 그렸으니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꽃이 핀 복사나무이다. 하지만 이상열의 복사꽃 그림 앞에 서면 우리는 누구나 깨닫게 된다. 우리들이 봄을 맞는 환희 앞에 서 있다는 것을. 꽃피는 봄을 생각하면 그 계절이 환희로 가득차 있다는 것은 누구나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열의 복사꽃 그림은 봄날의 복사나무를 내세워 그 환희를 담아낸다. 현실에서 우리들이 만나는 꽃은 봄의 환희로 불타오른다는 느낌은 주지 못한다. 그러나 이상열의 화폭으로 옮겨온 복사꽃은 봄의 환희를 불타는 움직임으로 보여주기에 주저함이 없다. 그 때문에 2019년작 <도원3>에 이르면 우리는 복사꽃이 그냥 피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분홍으로 불타오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불꽃처럼 복사꽃은 일렁거린다. 그것이 꽃피는 시절의 복사나무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무의 마음일 것이다.
이상열의 복사꽃 그림에서 또 하나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은 색채이다. 그 색채는 우리들로 하여금 이상열이 봄의 색을 만들어냈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그 때문에 복사꽃 그림의 앞에 서면 봄기운이 완연하게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복사꽃 그림은 두 가지를 담고 있다. 하나는 봄을 맞는 환희의 기쁨이고, 또다른 하나는 화면 밖으로 쏟아져 나올 듯한 충만한 봄기운이다.
같은 봄꽃을 담고 있지만 양상이 완전히 다른 경우가 있다. <배꽃> 연작이나 <배꽃 향기>와 같은 작품, 그리고 <사과꽃> 연작이 이에 해당된다. 이들 작품에서 꽃의 자리는 흰색으로 채워져 있다. 그림의 숲에서 으깨어 넣은 나무를 보았던 시인이라면 이들 나무의 가지에선 으깨어 넣은 수많은 하얀 꽃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흰색이 연상시키는 것은 꽃보다는 눈이며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배꽃과 사과나무꽃은 그리하여 우리들을 겨울날의 기억 속으로 데려간다. 그 기억 속의 겨울날엔 눈이 내렸다. 그때 우리는 나무가지에 내려앉은 눈을 보며 눈꽃이라고 불렀다.
봄이지만 이상열의 그림 속에서 배꽃과 사과나무꽃은 그 자리를 잠시 눈꽃의 추억에 내준다. 이제 눈꽃은 엄혹하던 겨울 추위 속에서도 잊지 않고 있었던 꽃에 대한 의지가 된다. 그 의지가 없었다면 나무는 꽃의 계절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때로 어렵고 힘든 시기에도 잊지 않고 간직해둔 희망과 의지가 봄꽃을 피운다. 이제 나무는 잠시 꽃의 시절을 산 뒤 길고 오랜 여름날을 날 것이며 뜨거운 여름 햇볕을 다 이겨낸 끝에서 열매의 계절을 맞아들일 것이다. 그 오랜 날들을 앞에 두고 배꽃과 사과나무꽃이 잠시 겨울날의 추억에 젖어 있었다.
사과나무는 이상열이 가장 많이 그린 그림이다. 그의 그림 속에서 사과나무는 저 홀로 서서 수많은 사과를 가지에 매달고 <사과나무> 연작을 이룬다. 또 꽃과 짝을 이루어 <꽃과 사과나무> 연작이 되기도 한다. 집과 짝을 이루는 <사과나무집> 연작도 빼놓을 수가 없다. <푸른사과나무>라는 이름의 연작이 있기는 하지만 대개 그의 사과나무 그림에서 사과는 붉다. 그림 속의 사과가 우리들의 눈길을 끌어당기는 점은 사과의 붉은 빛이 고르고 일정하게 덧입혀져 있는 것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꿈틀대며 움직일 듯 요동치고 있다는 점이다.
왜 사과는 꿈틀대며 요동치게 된 것일까. 알고 보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곧 그 사람의 삶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아침마다 혼잡한 지하철과 버스에 몸을 실은채 출근한다. 또 때려치우고 싶다는 마음이 치밀어 오를 때도 가족들을 생각하며 직장 생활의 힘겨움을 견뎌간다. 그리고 그런 일상적 순간들이 모여 한 사람의 삶을 이룬다. 사람들은 그들의 일상적 삶으로 가득차 있다. 오욕과 분노, 성취와 기쁨, 힘겨움과 그것을 이겨내겠다는 의지 등등이 한 사람의 삶에 뒤섞여 있을 것이며, 그 삶이 그대로 바깥으로 내비친다면 모든 사람들의 내면은 꿈틀대며 요동치는 생명력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일상이 우리의 삶이라면 이상열의 사과에는 열매가 되기까지 온전히 감당해야 했던 한해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억수같이 쏟아지던 장마철의 빗줄기, 기어코 너를 털어내 일찌감치 흙으로 돌려보내겠다는 듯이 나무를 뒤흔들던 강한 바람, 말려죽일 셈이냐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강렬하게 내리쬐던 여름날의 햇볕과 그것을 이겨낸 시간이 한 알의 사과 속에 모두 들어있다. 그리고 사과가 열매가 되기까지 감당했던 그 모든 시간들 속에서 사과는 요동치며 꿈틀대는 몸짓으로 그 시간을 이겨냈을 것이다. 이상열의 사과가 요동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사과는 요동치면서 동시에 우리도 일상적 삶 속에 하루하루를 무료하게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일상으로 우리의 삶을 채우며 역동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알려준다.
사과를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과일로 배를 채우는 일이 아닐 수 있다. 그것은 한 알의 과일이 과일로 익을 때까지 삶을 감내했던 힘을 건네받는 일일 수 있다. 사과가 무성하게 달린 사과나무 그림 앞에 선다는 것은 단순히 사과나무 그림을 감상하는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때 그림을 본다는 것은 사과나무가 사과라는 이름으로 이룩한 한 해의 삶과 그 삶을 가능하게 해준 힘을 건네 받는 일일 수 있다. 그림 앞에 섰을 때 요동치는 사과를 따라 우리의 심장도 뛰었다면 그 힘이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건네진 것이리라.
이미 언급했듯이 이상열은 사과나무의 그림을 다양하게 그려냈다. 어떤 그림에선 사과나무가 홀로 서 있다. 삶은 사실은 궁극적으로는 혼자 감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떤 그림에선 사과나무과 꽃과 함께 한다. 우리의 삶에도 간간히 삶에 대한 찬사는 필요하다. 그런 것이 또 삶의 힘이 된다. 이상열이 사과나무 아래 꽃을 놓아둔 것도 그런 찬사로 힘을 보태주고 싶었던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사과나무는 집의 옆에 자리를 잡고 있기도 하다. 집은 아마도 가족의 공간일 것이다. 가족은 곧잘 삶의 이유가 된다. 사과나무 옆으로 자리한 집의 가족들도 사과나무가 자라고 열매를 맺을 때 함께 힘을 냈을 것이다. 알고 보면 사람들도 알고 있다. 사과나무가 나무에 그치지 않으며 사실은 또다른 가족이란 것을.
<겨울사과나무> 연작에 대한 언급도 빼놓을 수가 없다. 겨울에 사과나무에 열매가 남아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이상열의 그림 속에선 눈덮인 과수원을 지키고 있는 사과나무에서 붉은 열매가 가지를 놓지 않고 겨울을 나고 있다. 그런 작품이 몇 점 된다. 그림은 현실이 아니다. 때로 그림에는 화가의 바람이 담긴다. 겨울은 어려운 시기이다. 그 어려운 시기를 넘길 때 힘을 보태주고 싶은 마음이 이상열의 그림 속에서 눈내린 과수원의 사과나무에 열매를 얹게 만들었다. 그림은 때로 세상에 없는 세상을 연다. <겨울사과나무>는 이상열이 연 그러한 세상이다.
이상열의 그림으로 가을을 말한다면 그 가을은 은행나무의 단풍으로 온통 노랗게 뒤덮인다. 그의 다른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우리는 은행나무의 가을에서 은행잎을 보진 못한다. 대신 우리들은 노란 물결을 본다. 은행나무는 노랗게 물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노랗게 일렁이고 있다. 생각해보면 은행잎은 바람이 불 때마다 움직였을 것이다. 가만히 있을 때보다 바람의 손을 잡고 춤을 출 때, 더 살아있다는 느낌이 강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상열이 은행나무의 잎들을 정적인 느낌 속에 재워두지 않고 노란 물결로 일으켜 세운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바람과 춤추는 신나는 시간들이 은행나무의 가을을 담아낸 이상열의 그림 속에 있다. 사람들은 아마도 그의 은행나무 그림 앞에 서면 가볍게 몸을 움직이며 리듬을 타보고 싶게 될지도 모른다.
이상열은 사과나무 못지 않게 감나무도 많이 그린다. 사과나무와 비교하자면 열매는 사과와 마찬가지로 붉은 빛으로 요동치고 있다. 하지만 감나무는 사과나무에 비하여 잎을 털어낸 가지의 윤곽이 두드러진다. 잎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나 보이는 경우에도 가지를 가리지 않는다. 가지는 감나무가 평생 허공으로 열어간 나무의 길이다. 우리에게 삶의 길이 있다면 나무는 가지를 뻗는 것으로 삶의 길을 삼는다. 사람들은 감나무의 열매를 겨울 늦게까지 남겨두곤 한다. 그렇게 남겨둔 감을 가치밥이라 일컫지만 이상열의 그림 속 감나무에선 가치밥으로 보기에는 남겨둔 감들이 너무 많다. 때문에 가치밥이라기보다 나무가 한 해를 살면서 이렇게 많은 것을 이루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화가의 마음으로 읽힌다.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이 필요하다. 우리가 걸어온 삶을 뒤돌아보며 삶의 순간순간에 이룩한 모든 성과들을 돌아보는 시간을 말함이다. 감나무의 그림에는 그러한 순간이 담겨있다. 감나무는 풍성하게 열린 감을 그대로 매단채 그림 앞에 선 사람에게 당신도 이만큼 커다란 나무 한그루를 잘 키워내며 괜찮은 삶을 살아낸 것이라고 말해준다. 감나무는 그런 면에서 사람들에게 바치는 위로이기도 하다. 아마도 감나무의 위로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다.
그동안 주로 나무를 그려왔던 이상열이 요즘 꽃밭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라벤더> 연작이다. 은행나무의 가을에서 은행잎이 보이지 않고 물결이 보였듯이 라벤더의 그림에서도 라벤더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보라빛 물결이 보인다. 라벤더는 꽃밭에 심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꽃밭을 흘러간다. 꽃밭은 보라빛 물결을 연다. 우뚝 서 있는 나무에 비하면 라벤더는 지상으로 낮게 엎드려 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삶이 나무보다는 지상으로 낮게 엎드린 라벤더에 가까울지 모른다. 이상열의 시선이 라벤더에 이르고 그 라벤더를 화폭으로 옮겨가게 된 이유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낮은 곳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로 움직여간다. 크고 화려하지 않아서 눈에 띄지 않으나 아마도 모아놓으면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이 있어 우리의 삶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삶의 저변을 묵묵하게 떠받치고 있다. 이상열은 그들이 라벤더만큼이나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상열의 그림이 항상 그렇듯이 라벤더의 보라빛에서도 사람들의 삶이 보인다.
봄을 맞는 환희로 가득찬 복사꽃으로 시작하여 잠시 눈의 추억을 더듬으며 한겨울에도 놓지 않았던 꽃에의 의지를 보여준 배꽃과 사과나무꽃, 그리고 뜨거운 마음으로 이겨낸 모든 삶의 순간으로 요동치고 있는 사과나무, 잠시 바람과 손잡고 가을의 한 때를 즐기고 있는 은행나무, 한해한해 조금씩 길을 열어 허공을 채운 감나무, 그리고 가장 낮게 꽃밭으로 엎드려 있지만 그 낮은 곳을 보라빛 물결로 채운 라벤더를 돌아보는 것으로 이상열의 그림 세계를 살펴보았다. 그의 그림은 꽃과 나무를 보여주었지만 동시에 꽃과 나무에서 우리들의 삶도 함께 보여주었다. 뜻하지 않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모두가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다. 이상열의 그림이 사람들에게 힘내시라 말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김동원)

**전시회는 다음의 일정으로 열렸다
-전시회: 이상열 개인전 –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
-전시 기간: 2020년 11월 4일(수) – 9일(월)
-전시 장소: 갤러리인사아트 1층 및 지하 1층

도원의 꿈 Oil On Canvas 259.0*181.8cm (200호) 2010

그림은 복사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봄을 맞는 복사나무의 마음을 보여준다. 꽃으로 만개한 복사나무의 마음은 봄을 맞는 환희로 가득차 있다. 꽃을 보는 우리의 마음도 환희로 가득찬다. 그림에선 봄기운이 쏟아져 나온다. 그림은 신비로운 것이어서 화폭에 봄의 환희를 담아놓으면 한겨울에 그림 앞에 서도 완연한 봄을 살 수 있다.

배꽃 Oil On Canvas 91.0*72.7cm (30호) 2015

배꽃이 피었다. 하얗게 피었다. 하얀 배꽃은 우리에게 눈의 기억을 환기시킨다. 그렇다. 모든 생명체가 숨을 죽였던 한겨울에 우리에겐 눈이 있었다. 나뭇가지에 앉은 눈은 눈꽃이 되었다. 눈꽃은 어찌보면 한겨울에 꽃을 잊지 않겠다는 나무의 다짐으로 피는 꽃인지도 모른다. 그 다짐이 있어 봄이 왔을 때 겨울의 그 순간을 환기하듯 눈처럼 하얗게 배꽃이 피는 것인지도 모른다. 눈꽃이 없으면 눈처럼 하얀 봄날의 배꽃도 없었을지 모른다. 때로 봄꽃이 한겨울에 잉태된다.

꽃이 핀 사과나무 Oil On Canvas 116.7*80.3cm (50호) 2008

사과나무의 꽃은 희다. 열매는 붉다. 흰꽃이 붉은 열매를 꿈꾼다. 꽃의 색은 열매의 색까지 결정하진 않는다. 어린 날 어떤 색을 가졌든 다른 색의 미래를 꿈꿀 수 있다. 봄날의 사과나무에서 하얀 꽃들이 붉은 가을을 꿈꾸고 있다.

라벤더 Oil On Canvas 116.7*80.3cm (50호) 2019

라벤더는 보라색의 작은 꽃이다. 무수히 많은 라벤더가 모이면 라벤더는 꽃밭을 넘어 보라색으로 일렁이는 물결이 된다. 보라빛 물결은 일어나서 흐르기 시작한다. 꽃밭에선 라벤더가 피어있을 뿐이나 물결이 되면 세상을 적신다. 그것도 아름답게 적신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도 낮은 곳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물결이 되어 세상을 적시고 있다.

푸른사과나무 200호 Oil On Canvas 2009

사과가 푸르다. 잎도 초록이다. 한창 익어가고 있는 중의 사과일 것이다. 푸른 시절은 한동안 계속된다. 우리의 일상도 그렇다. 삶의 성과는 오랜 시간 뒤에 온다. 그렇지만 그림 속의 사과는 우리에게 속삭인다. 우리의 삶을 한 번 자세히 들여다 보시라. 익는 듯 마는 듯 보이지만 사과가 익어가듯 우리의 일상도 하루하루 조금씩 결실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고. 그러면서 푸른 사과나무는 결실을 향해 가고 있는 우리의 오늘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알려준다.

꽃과 사과나무 Oil On Canvas 259.0*194.0cm (200호) 2016

사과나무는 나무 밑에 꽃을 두었다. 우리는 알고 있다. 올해도 사과나무에 풍성하게 열매가 맺힐 것이란 사실을. 그것이 사과나무의 쓸모라는 것을. 하지만 사과나무의 한 해가 열매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과나무 밑에 꽃을 둔 연유이다. 우리도 식탁에 꽃을 두는 것과 비슷한 일일 것이다. 삶은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때로 꽃이 많은 것을 채워준다. 사과나무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은행나무 Oil On Canvas 227.3*181.8cm (150호) 2018

은행나무의 가을은 어떻게 오는가. 우리는 모두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면서 은행나무의 가을이 온다고 알고 있다. 아니다. 은행나무의 가을은 노란 물결로 일렁이면서 온다. 은행잎이 바람과 손잡고 춤출 때 그 물결이 인다. 세상 또한 그 물결에 물든다. 세상이 모두 리듬을 탄다. 은행나무의 가을은 노란 색으로 치장하고 흥겹게 몸을 흔드는 계절이다. 한해를 열심히 살아온 우리는 가을 한 때 잠시 그렇게 흥겹게 시간을 보내도 된다.

하늘아래 첫감나무 Oil On Canvas 162.0*112.0cm(100호) 2015

<하늘아래 첫감나무>는 경북 상주의 외남면 소은리에 있는 우리나라 최고령의 감나무이다. 수령이 무려 750년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감나무라는 뜻에서 하늘아래 첫감나무라고 부른다. 매년 수많은 감이 열린다. 하늘아래 첫감나무는 허공으로 750년의 길을 걸어 오늘을 살고 있다. 그 길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때로 오래도록 길을 걷는 것만으로 삶은 장엄해진다.

겨울 사과나무3 Oil On Canvas 116.7*80.3cm (50호) 2019

눈덮인 과수원의 사과나무에는 대부분 빈가지만 가득할 것이다. 열매는 가을쯤 일찌감치 거두어 들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가는 겨울의 그 빈가지에 붉은 사과를 얹는다. 사과는 나무가 올해도 한 해를 잘 살아냈다는 징표 같은 것이다. 겨울은 어렵고 힘든 시기이지만 화가는 그 징표를 다시 가지에 얹어 어려운 시기를 넘길 나무의 힘으로 넘겨준다. 때로 우리에겐 그러한 힘이 필요하다.

내가 쓴 도록의 해설 부분
전시회 팸플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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