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현실, 그리고 시의 소란 —백무산의 신작시

『포지션』, 2021년 가을호

1
언어는 세상을 드러내는 듯 하면서도 동시에 암암리에 현실을 은폐하고 왜곡한다. 가령 산업전사란 말을 생각해보자. 사전은 이 말을 가리켜 “산업 현장에서 힘껏 일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 설명이 현실의 노동자를 제대로 전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 의문을 확인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병례의 논문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산업전사’이념의 형상화와 재현」은 이 말의 기원이 일제 시대로 거슬러 오른다고 알려주고 있다. 산업전사는 “노동자를 ‘전사’로 명명하면서 국가적 사업에 죽음을 각오하고 생산증강에 나서야한다는 이념을 설파”하기 위해 일제가 만들어낸 말이었다. 독립한 나라에서 이 말이 다시 등장한 것은 개발독재시대 때였다. 부당한 정권 탈취를 경제 발전으로 희석시키려 했던 군사정권은 노동자를 “조국 근대화의 주역으로” 미화하기 위해 다시 이 말을 소환한다. 논문에서 우리는 산업전사라는 말에 청산하지 못한 일제 시대가 서려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 말의 역사적 이면에 자리한 많은 것들을 알고 나면 우리는 이 말을 계속 써야 하는 것인지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논문을 뒤지는 방법말고 그 말의 현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또다른 방법이 있다. 바로 그 말의 당사자인 노동자를 마주하는 것이다. 우리가 백무산의 시를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듣게 된다. “저들이 저들의 도구의 이름을/우리에게 붙”인 것이 바로 ‘산업전사’였다는 그의 말을. 산업전사라는 이름 아래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백무산은 “저들의 부를 위해 가난을 지키다/죽어라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 얘기는 반복된다. “저들의 보석과 빌딩을 지키기 위해/가난과 질병과 평생 싸우다/죽어라는” 것이 산업전사였다고.
원래 전사는 전장에서 싸우는 병사를 가리키지만 산업과 결합하여 산업전사가 되면 싸움은 사라지고 일하다 죽는 운명이 노동자를 옭아맨다. 백무산은 그 산업을 버림으로써 전사가 갖고 있었던 싸우는 투사로서의 모습을 복원시킨다.

아니다 우리는 노동자다
노동자는 노동자다
노동자는 노동자를 위해 싸우는
노동전사일 뿐이다.
—「전진하는 노동전사 —울산, 7월 노동투쟁에 붙여」 부분

시 한 편으로 한 시인의 시세계 전체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위험이 있다는 점을 양보해주는 선에서 인용한 시로 백무산의 시를 말한다면 시는 언어가 갖는 현실의 은폐와 왜곡을 드러내고 또다른 세상을 새롭게 여는 일이다. 나는 이 관점에서 그의 신작시를 살펴볼 생각이다. 언어가 어떻게 우리의 현실을 가리고 있고, 어떻게 세상이 새롭게 드러나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2
미래는 아직 오직 않은 시간이다. 미래가 오지 않은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무산은 그 상식과는 생각을 달리한다. 시인의 콜럼버스 얘기에서 우리는 그 생각을 만난다.

서인도제도를 ‘발견’한 콜럼버스가 원주민들을
만났던 때의 감동을 일기장에 이렇게 남겼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다.
점잖고 살인이나 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악에 관해서 전혀 모른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고….그리고 항상 웃는다”

그 감동을 스페인 국왕에게 편지에 담아 보냈다
“그들은 아주 소박하고 정직하고 아낌없이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줍니다.
그들은 자신보다 타인에 대한 애정이 더 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들은 훌륭한 노예의 자질이 있습니다.”
—「갈 수 없는 미래」 부분

콜럼버스는 우리에게 신대륙의 발견자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시는 그 사실보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서인도제도의 사람들에 주목한다. 시는 그곳의 사람들이 사람이 갖추어야 할 인성의 이상향을 실현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게 보면 콜럼버스는 인류가 이루어야할 미래의 꿈을 만난 것이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그들에게서 인류의 이상향을 꿈꾼 것이 아니라 “훌륭한 노예의 자질”을 본다. 노예없이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미래의 꿈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곁에 왔었지만 인류는 그 미래를 걷어차 버렸다.
걷어찬 미래의 꿈은 노동자들의 현실에서도 반복된다. 현실의 “노동자들은 열악한 조건에서도 묵묵히 일”하고 있다. 이제 그들의 성실에 부응하여 노동자를 공정하게 대우하면 세상은 곧바로 이상적인 사회가 된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존중해서 계속 묵묵히 일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빈곤 없이는 국가가 발전할 수 없”다면서 노동자에 대한 지속적 착취를 통해 세상을 굴려가려 한다. 더더욱 슬픈 것은 이러한 입장을 ‘정책보고서’에 담은 것이 자본가가 아니라 ‘진보개혁가’들이란 점이다. 그들은 누구보다 노동자가 존중받는 세상을 꿈꿔야 할 사람들이다. 시인은 그러한 세상에 대한 미래의 꿈이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성실한 노동자들이 그 꿈의 절반을 이미 세상으로 가져왔으나 세상이 그 꿈의 나머지 절반을 걷어차 버렸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보통 공기로 숨을 쉰다. 그러나 백무산은 “우리가 숨 쉬는 것은 공기가 아니라 바람”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우리의 폐는 여름 나무에 가득 매달린 나뭇잎”과 같아서 “바람에 흔들려야 숨을 쉴 수 있다.” 수긍할 수 있는 말이다. 시인은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근 벽에 갇혀본 사람”이 그런 사실을 알게 된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처럼 바람이 없는 곳은 도시로 확대되어 있다.

중심이 내다버린 벌레구멍에 숨 붙이고 살다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근 저 세계화의 너른 도시에 가면
나는 또다시 폐소공포증이 재발하네
—「바람에 실려」 부분

도시 생활을 답답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도시에 바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도시에도 바람은 있으며, 그 바람에 잎을 흔드는 나무들도 많다. 그런 점에서 시는 우리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왜 그에게서 도시는 밀폐된 공간이 된 것일까. 나는 이 혼란이 바람의 호흡을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근 벽에 갇혀본 사람은” 안다는 구절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바람의 호흡은 밀폐된 공간에 갇혔을 때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바람으로 호흡을 해본 사람만이 공간의 밀폐성을 감지할 수 있다. 가령 서울을 조금 벗어나 팔당쯤만 나가도 우리들은 알게 된다. 그곳의 저녁이 서울의 저녁과 다르다는 것을. 그리하여 팔당호 너머의 산위로 지는 해는 우리에게 서울이 저녁을 잃은 도시란 사실을 알려준다. 서울에 왜 저녁이 없겠는가. 그러나 팔당의 저녁은 서울에는 저녁이 없다고 말한다. 아침도 마찬가지이다. 도시에도 아침이 있지만 도시의 사람들이 멀리 동해까지 아침해를 보러가는 것은 사실 도시엔 아침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해의 아침해를 보고나선 도시엔 아침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바람도 마찬가지이다. 바람은 단순히 공기의 움직임이 아니다. 바람은 공간을 확장한다. 풀잎은 서 있는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지만 바람은 “말처럼 달려”“광활한 대지에 핀 한 닢 풀잎”을 대지의 “저 너머로 실어다 준다.” 때문에 서 있는 자리에서 꼼작을 못하는 풀잎도 바람만 있으면 끝없이 펼쳐진 대지를 질주할 수 있다. 시인은 자신이 사는 곳을 “중심이 내다버린 벌레구멍”이라고 했다. 시인의 말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말일 것이며, 사는 곳이 누추하고 작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바람은 어떤 작은 공간도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다. 바람이 지나갈 수 있으면 어떤 작고 협소한 공간도 그 크기를 바람이 갈 수 있는 곳까지 끝없이 확장한다. 도시엔 그런 바람이 없다. 건물에 막히고 부딪친 상처 투성이의 바람이 있을 뿐이다. 도시에도 저녁이 있지만 일을 멈추고 지는 해를 보내며 작별할 수 있는 저녁이 없듯이 도시에도 바람은 있지만 호흡이 되고 공간을 확장하는 바람은 없다. 그리고 시인은 밀폐된 공간에 갇혀본 사람이 알게 된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렇질 않다. 바람의 호흡과 바람이 확장해주는 공간을 체험해본 사람만이 알게 된다. 바로 이 도시가 밀폐되어 있다는 사실을.
도시가 밀폐되어 있는 공간이란 점은 백무산의 다른 시 「기차에 대해서」로부터 도움을 받으면 더욱 이해가 쉬워진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멈추지 않아 아무나 탈 수 없는 기차”, “그만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도 없는 기차”를 타고 있으며, 우리가 탑승한 기차의 목적은 오직 “달리는 속도에 있다.” 그 기차에 더욱 가까운 곳이 바로 도시이다.
시는 세상을 말하기도 하지만 개인적 경험을 통하여 시인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백무산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시인의 경험이 언어로 옮겨지면 세상은 지금까지와는 모습을 달리한다.
바람이 공기의 움직임이 아니었듯이 불구라는 것도 백무산에게선 신체의 장애를 뜻하지 않는다. 불구와 관련하여 그 경험을 전하는 시인의 현실은 경주의 “남산 자락이”다. 그곳의 “조용한 식당 창가”에서 “중년의 부부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여자는 몸이 성치 못했다. “여자가 훨씬 젊어보였는데 자세히 보니/몸 전체가 창백했기 때문이었”고 “남자가 일일이/덜어주고 옮겨주고 자세를 고쳐주고 입을 닦아주고” 있었다는 얘기가 그런 짐작을 가능하게 한다. “계산을 마치고 남자가 여자를 부축하여/야외테이블에 앉혀놓고 차를 가까이 대러 간 동안/여자는 남산에 떠오르는 달을 보고 있었”고 “남자가 오자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저기 봐, 금오산에 달 좀 봐!”라고. 남자가 별반응이 없었던지 여자는 “등에 업혀가며” 다시 달을 말한다. “저기 보란 말이야, 신라의 달밤이잖아!”라고. 그 둘을 보고 있던 시인은 기꺼이 불구가 된다.

달빛에 그늘 더 짙어지고
그들이 떠난 빈자리에
나의 불구가 거기 놓여 있었네
—「신라의 달밤」 부분

불구란 몸이 성치 않은 사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의 시속에서 불구란 금오산에 떠오른 달에 시선을 뺐겨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다. 그 달을 바라보며 노래를 불러와 그 밤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이며, 노래와 함께 오래 전에 사라진 신라 시대를 지금의 시대로 불러올 수 있는 사람이다. 시인은 기꺼이 불구가 된다. 우리는 그 불구의 부축을 받으면 달의 힘을 빌려 밤으로 노래를 불러올 수 있으며, 갈 수 없는 신라 시대로 순식간에 거슬러 오를 수 있다.

3
시인이 시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드러낼 때가 있다. 이번 신작시 다섯 편 가운데서도 그런 시가 한 편 있었다. 백무산은 “사흘 집을 비우고 돌아온 날 아침”에 “대문 기둥 위에” 놓여있던 “흠뻑 젖은 우편물” 속의 ‘시집’ 한 권을 통해 시에 대한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시집 속엔 메모지가 끼워져 있었고, 그 메모지에는 “출간을 앞두고 오랜 병고 끝에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시집의 시인이 죽은 것이다. “저희의 슬픔을 너그러이 헤아려 주십시오”라는 덧붙여진 구절 앞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헤아려야 하나 시 속에도 그가 없었다
시는 시인과 별개다 시인은 자주
자신을 다 바쳐 별개의 짓을 하는 자다
잠시 구성되고 지나가 버린다
제 자식이 낯설 듯이 나도 이미 다른 종이 돼버렸다
다만 동시대의 슬픔은 그대만의 것이라고 해도 나의 것이다
적막한 내 집 빈방에 소란이라도 잔뜩 풀어놓기를
—「주인 잃은 저들이」 부분

시를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백무산의 시는 시가 “동시대의 슬픔”을 앓고 있을 때 그것을 시인의 것으로 밀어내지 않고 “나의 것”으로 함께 앓아주는 것이 바로 시를 읽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적막한 내 집 빈방”을 시를 “잔뜩 풀어놓”을 수 있는 공간으로 내주고 그 ‘소란’으로 방을 채우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빈방 대신 잠시 시가 가득찬 방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시를 읽을 때의 가장 큰 매력이다.
나는 다섯 편의 신작시 중 이제 마지막 한 편을 남겨두고 있다. 시인의 시를 모두 수긍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때로 어떤 시는 시인에게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고 싶어진다. 백무산의 신작시 중 내가 살펴볼 마지막 시가 그런 시이다. 시는 그의 삶을 돌아보고 있다. 그 삶을 그는 “실수와 실패”라는 말로 정리하고 있다.

삶은 실수와 실패가 만들어온 여정이었단 말이지
어제 먹은 밥은 기억에도 없고 작년에 체한 일만
몸에 새겨져 있단 말이지
제 자식도 낯설고 나도 이미 다른 종이 되어버리고
이룬 것은 모두 종결되어 기억의 무덤에 묻혀버리고
실수만이 삶의 여정에 구원 따위도 거부하고
생생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고
실수와 실패 아닌 것은 나와 별 관련이 없게 되었다고
—「실수」 부분

나이는 먹을수록 완고함을 불러올 때가 많다. 그러면 세상이 변한 것을 모른다는 힐난을 불러들이기 쉽다. 백무산은 그 반대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시간은 실수 같은 것이었다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삶에 “실수와 실패”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있다. 나이가 완고함으로 삶을 지탱해주지 않고 오히려 살아온 삶을 흔든다.
하지만 나는 말해주고 싶다. 작고한 시인의 시집이 그에게로 와서 작은 소란으로 그의 빈방을 채우듯 그의 시가 내게로 와서 어떤 소란으로 내 현실을 채워주었으며, 그 소란이 말할 수 없이 좋았다는 것을. 오래 전 그의 시는 내게 산업전사란 말이 어떻게 현실을 가리고 있는가를 알려주었고, 그의 시가 내게로 왔을 때 나는 그 말 대신 노동전사라는 말로 새롭게 써가는 노동자의 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다섯 편의 신작시로 그를 만났다. 그 시들 가운데 가장 먼저 그의 시가 콜럼버스를 말하고 진보개혁가들의 정책보고서를 말했을 때 인류가 우리 곁에 온 미래를 걷어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나의 현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잠시 노예없는 평등한 세상과 노동이 존중받는 세상에 대한 꿈이 이미 절반쯤 우리 곁에 왔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나는 잠시 절반쯤 왔었던 그 꿈에 젖을 수 있었다. 나는 바람마저 상실한 도시에서 살고 있고 그것이 나의 현실이다. 하지만 그의 시가 바람의 호흡을 말했을 때 시는 바람처럼 내 곁을 지나가며 나의 호흡이 되어 있었다. 나는 바람이 없는 도시에서 잠시 바람을 호흡할 수 있었다. 그의 시가 경주의 달빛 아래 앉아있다 자리를 일어서지 못했던 순간을 말했을 때, 나는 한낮에 경주와는 먼 서울의 내 방에 앉아 있었고 그것이 나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를 읽었을 때 세상은 조도를 낮추고 어두워지면서 달을 맞이할 준비에 들어갔고, 시속의 언어들은 뭉쳐져 하늘로 떠오르더니 달이 되었다. 서울의 내 방은 잠시 신라의 달밤으로 가득 채워졌다. 나는 그가 시가 일으키는 ‘소란’이라 말한 이런 사실들에 사람들 모두가 동의할 것이라 확신하면서 우리라는 보다 넓게 확장된 복수의 언어로 백무산에게 말할 수 있다. 그가 살아온 삶이 그에게 어떠하든 우리에겐 그가 시인이란 것으로 이미 충분하다고.
(『포지션』, 2021년 가을호, 신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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