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2일 토요일,
단돈 8천원으로 남원의 봉화산에 다녀왔다.
남원까지 가는 버스비로도 어림없는 돈이다.
연유를 얘기해 보자면 이렇다.
동네에 코오롱 스포츠 대리점이 있다.
그녀의 생일날 그곳에서 등산 배낭을 하나 사고 고객 등록을 했다.
그랬더니 그 뒤로 곧잘 어디어디로 산행을 가니 참석하겠냐는 문자가 왔다.
몇번을 그냥 넘겼는데 남원의 봉화산으로 가는 산행을 안내하면서
참가비를 8천원이라고 전하고 있었다.
그날로 전화 걸어 신청했다.
사실 8천원도 안되는 금액으로 다녀온 셈이 되었다.
일단 차에 오르니 물한병 주었다. 500원이다.
새벽같이 나왔으니 요기하라고 김밥 한줄 주었다. 1000원이다.
손수건 한장에 작은 스니커즈 하나와 비상용 호루라기 챙겨준다. 2000원 잡자.
산에 올라갔다 내려와서 돼지고기 편육이랑 막걸리 내준다. 2000원은 되겠다.
올라오는 버스 속에서 백설기 한 조각과 음료를 안긴다. 또 1000원이다.
다 빼고 나니 1500원에 갔다왔는 계산이 나왔다.
지하철도 타고 나가면 들어와야 하니까 1500원이면 어디도 갔다 올 수가 없다.
물론 가고 오는 중에 잠깐의 상품 광고 말씀을 들어야 했다.
그 정도야 어찌 못들어주랴.
그렇게 단돈 8천원에 남원의 봉화산에 다녀왔다.
물론 아쉬움이 없는게 아니다.
사실 여행은 가고 오는 여정도 여행의 일부이다.
그 부분이 삭제되면 여행은 많이 허전해진다.
이번 여행의 아쉬움이 바로 그런 점이다.
하지만 재수좋게 가는 날, 날이 흐려 비가 오는 바람에
비와 안개와 함께 하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지난 번 소백산의 철쭉을 보러갈 때도 비를 만났는데
이번에도 철쭉을 보러가는 길에 또 비를 만났다.
내가 철쭉을 만나러 가는 날은 비가 온다는 징크스를 만들어낸 것도 흥미롭다.
집에서 나간 시간은 6시 10분쯤.
이미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려가는 버스 속의 차창으로도 빗줄기가 계속 따라왔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내려오는 사람들이 그랬다.
“철쭉은 다 졌어요.”
하지만 자욱한 안개가 더 눈에 들어와
그 말은 내게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안개가 끼면 나무들은 그냥 서 있는 채로 그림자가 된다.
매일 몸을 눕혀야 그림자가 되었던 나무는
안개가 낀 날 그렇게 서서 그림자가 되고,
그 얇은 한겹의 그림자로 가볍게 안개 속에서 흔들린다.
산을 올라가는 내내 빗발이 멈추질 않았다.
우리는 우산을 펼치고 그 비를 피하는데 급급했지만
나뭇잎은 그 비를 온몸으로 맞았다.
사실은 나도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나뭇잎이 되고 싶었다.
어릴 적 시골에서 살 때 그랬던 적이 있었다.
이제는 아득한 기억이 되어 버렸다.
돌아갈 수도 없는 기억이다.
조금 오르다 보니
온통 세상을 하얗게 칠해놓았던 안개가
그 하얀 베일을 잠깐 걷고
저 멀리 산봉우리를 약간 보여주었다.
철쭉도 물을 머금었다.
갓 세수를 하고 나온 듯 물이 뚝뚝 떨어지는 철쭉은 투명하기 이를 데 없다.
안개는 힘이 세다.
멀리 안개가 산봉우리 하나를
안개의 바다 위로 펼쳐들고 있었다.
봉화산 정상에 오르니 산은 안개의 놀이터였다.
안개는 초록빛 산봉우리와 골짜기를 여기저기 하얀 물결로 누비고 있었다.
잠시 안개가 벗겨지는가 싶었는데
오른쪽에서 안개가 산을 넘어 물밀듯이 밀려온다.
잠시 윤곽을 보여주었던 산이 금새 하얗게 덮였다.
안개가 밀려오면 산은
다시 봉우리를 뚝 떼어
안개의 바다 위로 내줄 수밖에 없었다.
안개는 역시 힘이 세다.
산봉우리도 거침이 잘라내
하얀 안개의 바다 위로 받쳐들었다 내려놓곤 한다.
비가 내리는 바람에
사람들이 원래 예정했던 코스를 버리고 임도를 따라 내려갔다.
사람들을 모두 보내고 산에서 시간보내다 한 시간 늦게 내려간다.
초록이 양쪽으로 넘실대는 길이다.
둘이 호젓하게 걸었다.
내려가야할 마을이 저만치 내려다 보인다.
마을 저편의 산으로 안개가 한줄기 띠를 그리며 이어져 있었다.
비는 그쳤지만 안개는 걷혔다 다시 몰려왔다를 반복했다.
내려오다 보니 물흐르는 소리가 요란해지기 시작한다.
계곡이 가깝다는 뜻이다.
내려다 보니 초록이 틈을 내준 곳으로
물줄기를 찾을 수 있었다.
물은 하얗게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 소리는 초록에 한껏 물들어 있었다.
물소리가 귀를 맑게 씻어 주었다.
우후, 나 목욕했어요.
물에 흠뻑 젖은 나뭇잎이 유혹했다.
잠시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바람 부는 날,
나뭇잎은 서로를 부비며 하루를 보낸다.
그래도 그 이상은 선을 넘지 않는다.
비오는 날,
유혹은 그 선을 넘는다.
비에 젖으면
둘은 하나로 포개지고 만다.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 왔더니
남원에서 온 시내버스도 그곳에서 함께 우리를 반겨주었다.
타고온 우리의 버스보다 남원의 버스가 더 정겹다.
그건 몇번의 여행으로 알게된,
가고 오는 여정의 맛을 알기 때문이다.
버스를 기다리고 갈아타는 것은 여행의 큰 즐거움 중 하나다.
하지만 오늘은 어쩔 수가 없다.
반가움을 아쉬움으로 적당히 마무리하고는 버스를 배웅했다.
그녀도 산에 잘 올라가고, 또 잘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쑥도 한봉지 뜯었다.
여럿이 갔는데 우리에겐 둘이 간 여행이었다.
14 thoughts on “철쭉대신 안개와 놀다 – 남원 봉화산”
와’
부럽네요””””’
이미 오래 전에 놀러갔던 건데요, 뭘.
우린 좋았지만 같이간 사람들은 비오는 궂은 날씨에 대해 불평이 많았던 날이었어요.
산의 맑고 신비한 정경이군요.
저도 비오는 풍경 넘 좋아 하는데……
비맞으며 산을 오른게 두 번인데 다 좋았어요.
차만 8시간반을 탔지만 보람이 있었습니다.
안개에 쌓인 모습 정말 멋지네요.
저도 남편이랑 산악회에 가입하자고 했었는데 아직 못했어요.
가입하면 어찌됐거나 산은 자주 갈수 있을것같은데
교회를 못가는게 시어머님이 싫어하실것도 분명하고.^^
김동원님 계산보니까 저도 남원에 무척 저렴하게 다녀온거같아요.
전 회비 15000원냈는데 차에 타자마자 생수한병,방울토마토 한봉지씩,치킨 한접시,꿀떡 한접시.생오이두개씩.오렌지한개.^^
거기에 계속 따라주는 맥주,오가피주,산사춘.ㅋㅋ
오히려 비오는 날이 풍경은 더 좋아요.
우산쓰고 올라가는게 고역이라서 그렇지.
그리고 앉아서 쉴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도 고역이고.
그래도 일행과 떨어지는 바람에 광주에서 왔다는 분께 산 위에서 술도 한잔 얻어 마셨어요.
아주 맛있더라구요. 경황이 없어 그분들 사진도 못찍어 두었네요.
와~~우!
전 이날 거의 비슷한 시간에 구례 오산 사성암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안개낀 섬진강과 구례시내을 보았어요.
공주에서 대전으로 대학 4년을 통학하는 바람에
계룡산의 사계절과 함께 雲霧 을 구경했지요.
비가 온 뒤 저 멀리 비가 물러갈 때 산의 융기와 함께 쌓인 雲霧는
꼭 동양화 같았답니다.
그 속에서 정말 신선이 나오는 듯 했어요.
거긴 더 멋졌을 것 같은데요.
섬진강을 따라 내려간 경우가 두번 정도 있었던 것 같은데 모든 곳이 그림이었죠. 언젠가 그곳을 자전거 타고 하루종일 달리다 멈추다 하고 싶어요.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네요.
비 맞으며 섬진강 따라 가면서 내내 저도 자전거을 생각했는데요.
이런 길은 자전거가 좋다고…
난 어떻게 산에 올랐는지… 정말 힘들었어.
사람들이 산을 완전히 날아다니더만.
나는 산에 오르면서 미끄러지지 않는 거에 신경쓰느라 사진하나 제대로 찍지도 못하구..ㅜ.ㅜ
그래도 조금 위로가 되는 건 남원 분위기를 조금 맛보고 왔다는 거…
6시 30분에 떠나서 10시 30분에 도착하고 또 오후 4시에 떠났으니 그곳에서 5시간 넘게 놀았네 그래도. 8천원 생각하면 아주 괜찮은 듯.
하긴… 선물도 많이 주긴 하더라.
‘우와, 싸다, 싸. 8000원’ 이러며 읽기 시작했어요.
안개가 가득한 산, 신비에 휩싸였군요.
그 산의 꿍꿍이를 헤집고 다니신 등반이었네요.
안개가 가득하면 정말 그 안개 속에 갑자기 무엇인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