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시간의 귀가

Photo by Kim Dong Won
2023년 5월 10일 서울 지하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대학로에서 술을 마셨다. 함께 술을 마신 두 여자가 그랬다. 고양과 대학로의 그녀였다. 너는 다른 건 몰라도 여복은 있는 거 같아. 우리 둘이랑 술을 마시고 있다는 것은 그것의 명백한 증거지. 그 말이 불러온 웃음을 배꼽 위에서 부여잡고 우리는 낄낄거리고 웃었다. 하필 그 웃음을 배꼽 위에서 잡고 웃은 것은 지나친 웃음이 배꼽을 뽑아버릴 수 있다는 헛소문 때문이었다. 마치 잘 쓰여진 감각적 드라마 대사를 연습하듯 말들이 오고 갔다. 얼마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으랴.
쉽게 술자리를 구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마음을 두고 찾아간 곳은 어디나 자리가 없다고 손을 가로 저었고, 가본 적은 없지만 자리가 있는 곳은 또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를 않았다. 그렇게 자리를 구하지 못한채 혼잡한 대학로의 술집을 여러 곳 전전한 끝에 우리는 겨우 한 곳에서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가 10명을 정족수로 하고 있어 겨우 세 명을 채워 그곳을 들어간 우리는 다른 곳으로 옮겨주면 안되겠느냐는 술집의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 자리한 넓직한 자리를 포기하고 중간에 자리를 옮겨야 했다. 주변의 말들이 우리의 대화를 간섭하고 우리의 대화는 주변을 간섭하는 아주 시끄러운 술집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았다. 우리가 더 시끄럽게 떠들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떠들다 우리가 처음으로 시간을 확인했을 때 시간은 밤 11시를 넘어가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 시간이면 이제 우리 집에 가야해 라고 반응했다.
하지만 우리가 흩어지는 것이 곧바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둘은 나를 빼놓고 담배 한 대를 피우고 가자는 것에 합의를 보았고 그 시간은 의외로 길어서 술집의 바깥에서 기다리던 내가 혹시 이 술집에 다른 통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잠시 의심했을 정도였다. 바깥의 거리에서 다시 머리를 맞댄 셋은 잠시 고민했다.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택시를 타고 귀가할 것인지, 아니면 밤새도록 술을 마실 것인지가 셋의 고민이었다. 셋중 하나가 오늘은 그냥 가고 다음에 또 보자고 했을 때 의외로 쉽게 그러자고 합의가 이루어졌다. 술의 자장은 의외로 약해 우리를 계속 대학로에 붙잡아 놓지 못했다.
셋 중 하나는 대학로 가까이에 집이 있었다. 그 하나는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둘은 거처가 멀었다. 역으로 걸어가며 내가 말했다. 오늘은 밤 1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갈 것 같아. 자유가 농밀해지는 시간이지. 다른 하나가 내게 물었다. 농밀? 내가 답했다. 자유의 느낌이 진해진다는 뜻이야. 늦게 들어갈 때마다 경험을 했어. 그녀가 다 안다는 듯이 웃었다. 그녀는 그 자유를 잘 알고 있는 여자였다.
같이 지하철을 탔지만 갈 곳이 달라 내가 먼저 내렸다. 예전에는 동대문운동장이라고 불렸으나 어느 날부터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라고 이름을 바꾼 역이다. 그곳에 나의 집이나 거처로 가는 열차가 있다. 그녀는 나보다 한 정류장을 더 간다고 했다. 손을 흔들어 안녕이란 말을 대신하면서 그녀를 보내고 나는 열차를 내렸다.
역에선 무슨 일인지 한곳에서 SOS를 타전하고 있었다. 술에 취해 흐려진 판단력은 이 혼잡한 지하철 속에 누군가 좌초된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를 묻게 한다. 다시 확인해보니 그것은 누군가가 타전한 긴급구조요청신호가 아니라 재난시 사용하는 물품들의 저장 장소였다. 타전된 SOS는 좌초된 인간이 보낸 것이 아니라 좌초할지도 모를 인간에게 미리 내미는 예비된 구조의 손길이었다. 좌초되어 무인도로 떠밀려갈 망망대해만 위험한 것이 아니라 도시도 그에 못지 않게 위험하여 SOS를 타전할 인간에게 미리 SOS 신호를 예비한다. 다만 도시에선 SOS 신호를 타전하는 것이 아니라 두리번거려 SOS 신호를 찾고 그것을 따라가면 살 수 있다.
신호의 양옆으로 자리한 두 개의 전광판은 연신 다음 열차를 예고하고 있었다. 하나는 하남검단산으로 가고, 또 하나는 방화로 간다. 내가 오랫동안 습관처럼 타고 다녔던 하남검단산행 열차는 3분 뒤에 들어오고, 내가 낯선 도시의 여행자처럼 타고 가는 방화행은 지금 막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나는 습관을 버리고 낯선 여행을 선택했다. 습관은 편하고 안전하나 그 습관은 때로 편하고 안전한 굴레로 얼굴을 바꾼다. 그럼 그때부터 그 습관을 참을 수 없게 된다. 낯선 도시는 불편하다.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고, 예상치 못한 사고가 나를 덮칠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있다. 그 경계를 너머가면 낯선 도시는 온통 새롭다. 심지어 낯익은 것도 낯선 도시에선 새로움이 된다. 이 동네도 올리브영이 있네라고 하는 순간, 지하철역을 내려 집으로 갈 때마다 스쳤던 익숙한 동네의 올리브영이라는 이름이 새로워진다. 나는 그 낯선 도시, 5호선의 종착역, 방화로 가기로 했다.
나는 비장해진다. 내가 탄 열차가 한 대의 마지막 열차를 남겨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신에게는 열세 척의 배가 남아 있나이다 라는 말로 우리에게 남겨진 장군의 비장함이다. 열차에 오른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아직 내겐 한 대의 열차가 더 남아 있나이다. 내가 20분 정도만 늦었어도 내게 마지막은 없었을 것이다. 언젠가 시간을 잘 계산하여 13대를 남기고 열차에 올라보고 싶다. 13척의 배와 수치를 맞춘 그 13대의 비장함은 열세 척으로 나라를 구했던 장군의 비장함에 비견할 바는 못되겠지만 그래도 13대의 열차가 집으로 실어나를 사람들의 숫자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들을 다 내가 구한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
밤늦은 시간의 방화행 열차는 낮과는 풍경이 다르다. 가는 내내 지하철의 자리는 마치 이빨이 빠진 듯 듬성듬성 비어 있다. 사람들은 마치 빠진 이빨을 채워넣는 임플란트 이빨처럼 빈자리를 채운다. 듬성듬성 비어 있다는 측면에서 늦은 시간의 열차는 부실한 치아를 가진 노년 같다. 그 노년의 빈자리가 싫은지 어떤 사람들은 빤히 보이는 빈자리를 두고도 서서 가는 것은 고집한다.
빈자리가 많은 늦은 시간의 지하철이 이빨빠진 노년 같다고 했지만 노인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늦은 시간은 젊은 사람들의 것이다. 심지어 한낮에 노인들의 점령지였던 노약자석도 더 이상 노인들의 것이 아니다. 세 사람으로 정원을 채워야 하는 노약자석의 빈자리를 젊은 사람이 가운데 홀로 앉아 1인석으로 바꾼다. 모든 노약자석은 젊은 사람들에게 공개되고 이제 노약자석은 보류된다. 어디에도 노약자는 없다. 술취한 젊은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늦은 시간은 젊은 연인들을 찢어놓는다. 지하철의 창을 사이 두고 연인들이 이별을 한다. 열차는 속도로 둘을 갈라놓는다. 정확히 둘을 찢어놓는 것은 열차의 늦은 시간이다. 이른 시간이었다면 둘은 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함께 갔을 것이다. 사실 늦은 시간은 둘을 찢어 놓으며 둘에게 속삭인다. 함께 살려고 꿈꾸지마. 함께 살면 사랑의 자양분이던 그리움의 토양이 사라져 버려. 토양을 잃은 사랑은 말라 죽을 뿐이야. 하지만 어떤 연인도 늦은 시간의 그 경고를 듣지 못한다. 사람들은 사랑하면 눈이 먼다고 하지만 사실 눈은 멀쩡하다. 머는 것은 우리의 귀이다. 사랑은 귀를 멀게 해 그리움의 토양이 유실될 것이라는 늦은 시간의 경고를 듣지 못하게 한다. 그 경고를 듣지 못한 채 그들을 갈라놓는 늦은 시간을 야속해 하며 세 쌍의 연인이 찢어졌다.
앞자리에선 술취한 사람이 술기운으로 얼굴을 붉게 칠한채 졸고 있다. 옆자리에 앉은 두 사람이 그의 몸을 안정적으로 받쳐준 덕택에 몸은 기울어지지 않는다. 그의 고개만 한쪽으로 기울다 바로 서다를 반복한다. 하지만 행선지가 다른 옆의 두 사람은 그의 몸을 끝까지 잡아주지 못한다. 둘이 먼저 내리고 나자 그의 곁은 휑하니 비고 만다. 빈공간은 쓰러지는 몸을 받쳐줄 어깨를 갖고 있지 못하다. 이제 그의 몸은 몸 전체가 쓰러진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쓰러지는 몸을 일으킨다. 그는 쓰러지고 일으키고를 반복한다. 고개만 기울던 시간에 비해 훨씬 불안한 시간이 그와 함께 흘러간다. 다행히 그는 내릴 곳을 놓치지 않았다. 쓰러지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마치 그것을 똑딱거리는 시계음 삼아 열차가 도착할 시간을 적당히 재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무사히 방화에 도착했다. 방화는 5호선의 마지막 역이다. 때문에 내릴 때면 어느 역에서도 들을 수 없는 안녕히 가시라는 작별 인사를 들을 수 있다. 내릴 때 잊고 내리는 물건은 없는지 살펴보라는 걱정까지 듣는다. 종착역엔 어느 역에도 없는 작별인사와 걱정이 있다.
방화역을 내리자 마자 개찰구를 나가기도 전에 승강장에 주저 앉아 있는 남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두 가지 운명 중 하나이다. 이곳이 그의 거처라면 그는 안심해도 된다. 어쨌거나 거처까지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내릴 곳을 지나쳐 이곳까지 와선 그의 몸을 승강장에 팽개친채 주저 앉아 있는 것이라면 그를 기다리는 것은 낭패의 시간이다. 이제 돌아갈 열차는 없기 때문이다. 안심과 낭패의 두 운명이 그의 곁에 서서 그가 놓아버린 정신줄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개찰구를 나오자 역구내에 놓인 벤치에 두 남자가 더 있었다. 한 남자는 벤치에 모로 누워 코를 심하게 골면서 자고 있었다. 한 남자는 의자에 앉아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고 있었다. 모두 술독에 몸을 담갔다 나온 사람들이다. 술은 세상의 모든 곳을 거처로 만드는 놀라운 힘을 가졌다. 술이 취하지 않으면 누구도 지하철의 벤치에 드러누워 잠을 청하지 못한다. 곧 역의 직원이 두 사람을 깨우러 올 것이다. 술이 마련해준 거처도 지하철 직원 앞에선 아무런 소용이 없다. 두 사람은 잠깐의 임시 거처를 쫓겨날 것이다.
천천히 역을 나와 횡단보도 앞에 섰다. 신호등이 깜빡거린다. 처음 알았다. 늦은 시간에는 신호등이 점멸 신호로 바뀐다는 것을. 빨간색과 초록색을 바꾸어가며 건너가고 멈춰야할 순간을 엄격히 했던 낮의 질서는 더 이상 없다. 적당히 차가 오는지 눈치를 보고는 건너가면 되었다. 질서가 사라진 밤거리에선 차들도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질서의 눈을 빨갛게, 혹은 초록으로 번뜩이던 신호등이 그 눈을 감은 밤길을 천천히 건너 나의 거처로 향했다.
거처에 도착하자 시간은 밤 1시를 5분 정도 남겨놓고 있었다. 방은 하루 종일 외로움을 앓은 느낌이 역력하다. 내가 이 방에 혼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번갈아가며 방을 채워주는 이른바 가족의 방과 달리 이 방은 내가 없으면 그때부터 텅비고 만다. 내가 없을 때 방을 지키는 것은 내가 올 때를 기다리는 외로움이다. 방에 내가 들자 방엔 더 이상 외로움이 없다. 너가 돌아왔구나. 방안 가득 내가 찬다. 저녁 시간을 혼자 앓았을 외로움이 채워진 나로 희열에 들뜬다.
술은 감각을 날카롭게 한다. 특히 지구의 자전에 대한 감각이 날카로워진다. 지구의 자전을 느끼긴 어려운 일이나 술에 취하기만 하면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것을 예외없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술이 일깨우는 지구의 자전에 대한 감각 때문이다. 술이 깨면서 그 감각이 둔화된다. 나는 감각이 둔화되는 것을 느꼈다. 이래선 안된다 싶은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냈다. 한 캔의 맥주로 둔화되던 감각을 되살리고 나자 피곤함이 몰려온다. 저녁내내 방을 지킨 외로움이 내게 속삭인다. 침대에 누워. 저녁 시간 내내 나없이 보낸 방의 외로움이 나를 침대에 눕혔다. 내 곁에는 언제나 나의 귀가를 말없이 기다리는 외로움이 있다. 외로움이 지긋이 잠에 드는 나를 지켜보는 늦은 밤에, 내가 잠에 든다.
술을 마실 때 나는 두 여자를 탓했다. 너는 못됐어. 호칭이 너가 된 것은 두 여자가 하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둘은 모두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여자였다. 너는 항상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사는 내 삶이 대단한 것처럼 말했지. 나는 그 말 때문에 내 결혼에 뭔가 있는 줄 알고 그 수렁에서 발을 빼질 못했어. 그런데 집나오고 나서야 알게 되었지. 나는 실패하고 너는 성공했다는 것을. 너는 내게 빨리 결혼의 수렁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만날 때마다 내게 실패한 인생의 청산을 부추겨야 했어. 두 여자는 내 불만을 듣다가 말했다. 하지만 결혼을 30년 넘게 견디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긴 해.
결혼을 한다는 것은 가족의 언어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것은 세상의 언어이다. 누가 쓴 작품이 아니라 전해 내려오며 세상에 굳어진 언어이다. 그러나 나는 글을 쓰는 작가였다. 나는 나의 언어로 세상을 다시 쓰려했다. 가족의 언어는 빈번히 나의 언어와 충돌을 빚었다. 나의 언어로 새로 쓴 세상이 훨씬 재미난 세상이었지만 가족의 언어는 고루한 옛날 언어를 고집했다. 그 고루한 언어의 고집이 내게는 나에 대한 언어의 억압이었다. 그 억압을 견디는 일이 한계치에 이르렀을 때 나는 집을 나왔다.
나는 이제 알게 되었다. 나를 기다리는 외로움이 자유의 다른 이름이란 것을. 외로움이 내 곁에 있을 때 나는 자유 속에 잠든다. 자유가 잠에 드는 내 귓가에 속삭인다. 나는 너밖에 없어. 자유의 너가 되어 달콤하게 잠에 빠져든다.
(2023년 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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