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줄이고, 글을 늘려야 한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그게 쉽진 않다.
여전히 말이 많다.
8월 19일, 좋은 사람들 만나 저녁먹고 얘기를 나누었다.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그걸 글로 소화해내면 좋으련만
모든 시간을 내 얘기로 덧칠하는 무례를 범했다.
글은 속도가 느리다.
속도가 느리다 보니 아무래도 많은 생각 끝에 얻게 되고,
또 못할 얘기, 안할 얘기를 어느 정도 걸러낼 수 있다.
반면 말은 속도가 빠르다.
감정이 밀어내면 전혀 고삐를 죌 틈도 없이 아무 생각없이 입을 뛰쳐나간다.
그 말이 개인사에 관련된 것일 때는 더더욱 감정이 실리기 쉽고
그런 말들은 꼬인 상황을 해결해주기보다 상황을 더욱 비틀어놓는다.
다 뱉고 나면 시원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말이 갈등을 겪고 있는 상대방과의 거리감만
더욱 확연하게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얘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속에서 말이 계속된다.
그 말은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이 아니다.
그건 둘 사이의 벌어진 간극을 그대로 보여주는 갈등의 말이다.
그런 말이 계속되자 차는 집으로 가던 습관적 길을 버리고 길동으로 넘어간다.
그리곤 종잡을 수 없이 방향을 틀면서 여기도 한번, 저기도 한번 기웃거린다.
여기가 어디지?
그녀가 물었다.
퇴촌가는 길이지, 뭐. 마방집으로 나가는 길이야.
길을 놓치면서도, 또 길의 실마리를 잡는다.
그렇게 길을 놓쳤다 잡았다 하면서 차는 길을 간다.
차는 퇴촌을 지나 벌써 양평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리를 건너 춘천과 홍천 방향의 갈래길에서 잠시 머뭇거린다.
잠시후 차는 홍천으로 가는 길을 달리고 있었다.
빛을 뿌리치고 싶을 때가 있다.
둘의 사이가 어두울 때는 더더욱 그렇다.
빛은 둘 사이의 어둠을 밝혀 길을 내주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가 어둡다는 것을 더욱 확연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둘의 사이가 어두울 때는
오히려 빛을 뿌리치고 짙은 어둠 속으로 가서
둘의 어둠을 어둠 속에 잠시 묻어버리는 것이 오히려 낫다.
그러나 그건 쉽지가 않다.
멀리 앞쪽에서 차 한대가 가고 있다.
앞차는 빨간 후미등으로 저만치 앞에서
자신도 같은 길을 함께 달리고 있음을 분명하게 주장한다.
맞은 편 차로에선 지나는 차들이 우리의 눈앞으로 불빛을 치켜들며
어둠을 송두리째 하얗게 뒤흔들고 지나간다.
어둠은 불빛에 눈을 떴다감았다 하며 늦은 밤을 끊임없이 뒤척인다.
잠깐 우리 차의 불빛 이외에 모든 빛이 사라지기도 한다.
차의 불빛은 그렇게 멀리까지 가진 못한다.
멀리 앞쪽은 모두 온통 새까만 어둠이다.
뒤를 돌아보면 달려온 길도 까맣게 지워져 있다.
그러나 차는 그 불빛이 비추는 거리만큼 계속 길을 벗겨내며
쉼없이 길을 간다.
늦은 밤엔 어둠이 세상을 까맣게 지워버린 듯 하지만
사실 어떤 어둠도 길을 지우진 않는다.
차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어둠 속에서도 전혀 당황하는 기색없이 쉼없이 길을 간다.
그 불빛으로 조금씩 조금씩 길을 벗겨내며.
그러나 어둠은 잠깐, 다시 또 불빛이다.
표지판으로 보아 휴게소가 있나 보다.
불이 켜져 있다면 잠시 들렀다 갈 수 있을 것이다.
강원도 길의 휴게소들은 밤늦은 시간엔 대부분 문을 닫지만
홍천을 지나 속초로 가는 길의 중간쯤에
밤새도록 문을 열고 있는 휴게소도 있다.
거의 홍천에 다왔나 보다.
표지판은 홍천이 13km 남았다고 일러주고 있었다.
멀리 앞쪽에서 신호등이 보인다.
낮엔 차를 세웠다 보내며
‘이젠 가시오’라는 속삭임이었던 신호등은
한밤엔 푸른 가로등이 된다.
푸른 가로등을 지나고 나면
혹 어둠 속에서 푸른 파도 소리가 들리진 않을까.
차는 계속 길을 갔다.
갑자기 멀리 불빛이 환하다.
차의 불빛은 여전히 자신의 앞가름을 하는데 급급한 상태지만
가로등이 환하게 길을 밝히면 잠시 그 앞가름의 긴장을 놓는다.
밤길에서도 긴장을 놓을 수 있는 순간이 있다.
며느리고개 터널이다.
터널은 원래 깜깜해야할 터인데
한밤의 터널은 빛으로 환하다.
저만치 터널의 끝이다.
비록 가로등이 그 앞을 밝혀주고 있긴 하지만
밤엔 오히려 터널의 바깥이 더 어둡다.
돌아올 땐 터널 속이 하얗게 보였다.
밝다는 뜻이 아니다.
말 그대로 하얗게 보였다.
안개가 절반쯤 차 있었기 때문이다.
터널 속의 빛과 몸의 바깥으로 삐져나간 약간의 취기로 인하여
그 하얀 안개의 터널은 몽롱한 환각처럼 보일 정도였다.
어둠 속에 그런 세상도 있었다.
차는 홍천에서 멈추었다.
고속도로를 타고 춘천으로 갔다가 서울로 올라갈까.
그건 좀 먼 길이다.
그녀가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건 오던 길을 그대로 다시 짚어 돌아가는게 가장 빠르다고 했다.
그녀는 차를 반대 방향으로 틀었다.
차는 다시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우린 양평을 거치고 양수리, 팔당을 지나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시간은 새벽 네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깜깜한 강원도의 고개를 넘어
동해로 간 적이 있었다.
한번은 진고개를 넘어 주문진으로 간 뒤 속초로 올라갔고,
또 한번은 미시령을 넘어 속초로 갔다.
진고개에선 그 진한 어둠 속에서 불을 끄고
잠시 우리 사이의 어둠을 그 어둠 속에 묻고 말없이 앉아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다.
우리의 어둠마저도.
미시령에선 차를 고개에 세우고
멀리 불빛으로 반짝이는 속초를 내려다 봤었다.
두 번 모두 우리는 올라올 때, 우리 사이의 어둠을 털어낸 느낌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것을 속초 바다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연 그랬던 것일까.
혹 그게 속초 바다가 준 선물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길을 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길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어둠이 길을 지웠다면 우리는 그 두 번의 밤길에
절대로 속초 바다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번에 속초 바다로 가지 않았다.
바다는 그동안 우리에게 착시 현상을 일으킨 것인지 모른다.
어둠을 털어내준 것은
우리가 자동차의 불빛으로 조금씩 조금씩 벗겨내며 달려간 우리의 밤길이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속초 바다의 선물로 착각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녀가 나를 싣고 달린 그 늦은 밤,
그녀와 내가 탄 차의 불빛이 끊임없이 길을 벗겨가고 있었으며,
때로는 가로등이 잠시 그 어둠을 벗겨 길을 내주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자꾸만 되뇌이고 있었다.
“어떤 어둠도 길은 지우지 않는다.”
내가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집에 도착하자 피로가 엄습했다.
쓰러져서 잤다.
8 thoughts on “어떤 어둠도 길은 지우지 않는다”
어둠 속을 내달리는 길,
그 길처럼 말이 어둠을 맞이해 침묵할지라도
목적지를 향하듯 무언가 감정도 속력을 내고 있군요.
요즘도 제 화두는 <관계의 미학>과 <마음의 평화>예요.
잘 풀어내시길.
젊으니까 끈기있고 참을성있게…
세삼스레 참 글을 잘 쓰신다는 생각이 드네요.
글은 천천히 다듬으면서 하는 작업이니 잘 쓸수도 있지만
말도 글처럼 그렇게 물흐르듯, 글쓰듯 술술 하는건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건 아닌거 같아요.
외부에서 부지런히 공급받아 내것으로 소화하는 일과
내부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남다른 뭔가가 있기때문일거란
생각을 했어요.
“우리의 밤길”이 어둠을 털어내신거지요?
어두움을 저렇게 선명하게 나타내주는거 분명 좋은 사진기 덕분이겠죠?^^
내일은 두 분 얘기가 나가는데…
정확히는 바깥분 얘기이긴 하지만요.
전 어제 남편이랑 축구보다 열받았었어요.
우리 선수들이 역전으로 이겨서 신나하는데
찬물을 뿌리잖아요.넘 시끄럽다고. 그 시간 이후 내내
애교작전을 부리지만 제 마음은 이미 얼어버렸답니다.
좋아하는것도 제 맘대로 표현하면 안되나봐요.
기뻐도 그냥 속으로 조용히’와..잘한다~’해야하나.
저도 얼른 연수받고 그런일있을때 멀리멀리 달려봐야겠네요.^^
그래도 싸우지 마세요.
애교도 부린다는데 봐주셔야죠.
(사실 이런 말할 입장이 못되는데…)
오늘은 글이 많으신데요? ^^
언젠가 뾰류퉁한 제가 모는 차를 타고 암말 없이 가던 새벽의 강원도 행 차안에서 느꼈던 우리 부부의 냉냉함이 느껴졌습니다~ ㅋㅋㅋ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들이 있게 마련인가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