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1월 13일 서울 천호동에서
아마도 계절 가운데 색채가 가장 화려하기로 보면 그 계절은 가을일 것이다. 꽃은 시절을 마감하지만 잎이 색을 물들여 꽃이 끝난 시절의 아쉬운 자리를 채워준다. 잎은 꽃에 방불해진다. 초록의 단색으로 여름의 혹독한 더위를 넘긴 나무들에게 색을 보상으로 쥐어주는 계절이 가을이 아닌가 싶어진다. 나무는 욕심이 없어 수고했다는 징표로 받아든 단풍을 한계절 기쁘게 흔들다 미련없이 내려놓는다.
그리고 겨울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의 베란다에서 내려다 보면 아파트 마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골목과 경계를 맞댄 담장을 따라 나무들이 서 있고 가지는 모두 텅 비어 있다. 햇볕이 그 온기만 베란다로 들여 겨울의 베란다는 잠시 집의 온실이 된다. 하지만 창을 열면 밀고 들어오는 냉기는 계절이 겨울임을 분명하게 확인한다. 하루에 한 번 음식물과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내려 갔다 온다. 짧은 거리를 오가지만 그때마다 두께가 두툼한 옷을 갑옷처럼 챙겨입고 털모자도 꺼내쓴다. 나무들은 겨울이라며 가지를 비우지만 나는 겨울이라서 옷을 더 두텁게 걸친다.
아파트 마당의 담장을 따라 늘어선 나무는 여러 그루이다. 겨울이라고 모두 잎을 떨구진 않는다. 사철나무는 여전히 푸른 잎을 고집한다. 그렇다고 사철나무에게 계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철나무는 점점히 박힌 작고 붉은 열매의 속을 비워 나무가 감당하고 있는 지금의 계절이 겨울임을 증명한다. 그 이외의 나무들은 모두 가지를 비운다.
베란다에 서면 나무들을 차례로 하나하나 살펴볼 수 있다. 가장 왼쪽으로 사철나무가 있다. 사철나무는 넝쿨장미와 마치 짝이라도 되는 듯 뒤섞여 있다. 넝쿨장미의 빈가지에선 여름마다 만나는 붉은 꿈을 볼 수 있다. 가지에 감당 못할 정도로 많은 장미를 들고 지나는 사람의 시선에 그 뜨거움을 나누고자 한다. 그 옆은 감나무의 자리이다. 가을에 감이 열리면 따서 아파트 주민들에게 집마다 하나씩 나누어 준다. 콩 한 쪽을 나눠먹는 느낌을 준다. 감나무는 두 그루이다. 두 그루의 감나무 사이를 벚나무가 비집고 서 있다. 몇 년 되지 않은 나무여서 아직 봄에도 꽃이 화려하질 않다. 나는 나무가 아직은 수줍음을 타서 꽃을 내밀지 못하고 있다 생각하고 있다. 점점 그 수줍음을 벗어갈 것이다. 벚나무를 지나면 다시 사철나무이다. 그리고 독특하게 마가목이 한 그루 있다. 흰꽃이 피고 붉은 열매가 달린다. 나무의 이름을 아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무의 이름을 알아낸 뒤로는 세상의 모든 마가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마당의 나무 중엔 예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잘려나가 밑둥만 남아 있는 나무도 있다. 앞을 너무 가린다는 아래층의 불만 때문에 비운의 운명을 맞이한 그 나무는 느티나무였다. 느티나무가 잘려나갈 때 그 바로 옆자리에 있던 나무는 굳건하게 살아남았다. 그 나무는 마당의 가장 오른쪽으로 자리한 살구나무이다. 나는 살구나무가 꽃을 가졌기 때문에 살아 남았다고 본다. 매년 봄 가장 사랑받는다. 봄날에 꽃이 피어 있는 동안 외출할 때마다 잠깐 살구꽃의 배웅과 마중을 받는다.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맞은 편에 아파트 쪽으로 화단이 있다. 화단에도 나무들이 있다. 좌우로 서 있는 나무는 단풍나무이다. 아, 한쪽의 가장 가장자리고 감나무가 한 그루가 있는 것을 지나칠 뻔 했다. 단풍나무 두 그루는 가을에 가장 화려한 색을 뽐낸다. 그리고 주목이 한 그루있고 앵두나무가 있다. 아직 그 이름을 정확히 모르는 나무도 한 그루 있다.
사라진 느티나무를 빼면 아파트에 이사와서 마주했던 나무들은 그때 그대로이다. 벚나무는 사는 동안 누가 새로 심었다. 아파트에 누가 사는 지 잘 모른다. 하지만 나무들과는 친해졌다. 베란다에서 내려다 보면 마치 지도 위에서 장소를 짚어내듯 나무들을 하나하나 모두 짚어낼 수 있다. 아파트에 이사와서 이웃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는데 나무에 대한 기억은 매해 차곡차곡 쌓였다.
가지를 비운 겨울엔 나무들이 일깨우는 그 기억이 드러난 가지를 따라 더욱 선명해진다. 기억은 시간이 만든다. 처음 만나는 사이는 기억을 갖기가 불가능하다. 세상에 감나무는, 또 벚나무는 많지만 내 기억을 가진 나무는 그리 많지 않다. 그 기억의 인연으로 잎을 털어내 빈가지만 갖고 있어도 아파트의 마당에선 나무 이름을 모두 챙겨줄 수 있다.
겨울은 나무의 텅빈 가지에 기억을 채우기 좋은 계절이다. 잎을 털어낸 빈 가지의 나무가 그것을 알려준다. 여름은 초록이 범람하여 우리의 눈으로 밀려들고 그때면 기억의 자리도 밀려난다. 나무는 확연한 기억의 거처가 되어 겨울이 인연을 돌아보기 좋은 계절이며 여름은 초록에 시선을 내주고 그늘 밑에서 더위를 피하기 좋은 계절이라고 알려준다. 이 겨울, 지날 때마다 나무의 빈 가지에 그동안 새겨온 기억들이 또 한 계절을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