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사람들이 살고
사람 사는게 다 그렇고 그럴 것 같지만
사람들은 모두 나름대로 자기만의 삶을 꾸려가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그 사람 같고, 그 사람이 이 사람 같다가도
또 이 사람이 이렇게 다르고, 저 사람은 저렇게 다르곤 합니다.
사람들은 사실은 사람 사는게 다 그렇고 그렇다는 말을 비켜나
모두 자기만의 삶을 엮어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에 나무가 있고, 바위가 있고,
모든 산이 다 그렇고 그런 것 같지만
산에 갈 때마다 그곳의 나무와 바위가 내게 건네는 말은 항상 다릅니다.
2월 16일 토요일, 축령산에 갔을 때도,
그곳의 나무와 바위는 내게 어디서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한
그들만의 얘기를 속삭이고, 그들만의 표정을 내밀었습니다.
산 아래쪽은 나무가 많습니다.
나무가 많으면 햇볕이 잘 비집고 들어오질 못합니다.
햇볕보다는 그림자가 땅을 덮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용케도 빈틈을 찾아낸 햇볕 한줄기가
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그것도 숲속의 벤치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벤치에 앉아 다리를 편 햇볕의 얼굴이 환했습니다.
벤치가 놓여있는 자리에서 벤치로부터 시선을 거두면
그 자리에 앉은 햇볕의 얼굴이 보입니다.
나무를 올려다보면
지상으로 내려오지 못한 햇볕이
나무 줄기에 걸려 여기저기서 환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유려하게 곡선의 자태를 끌고 위로 올라간 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나무는 그 속에 불의 욕망을 품고 태어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나무 자체가 불꽃처럼 하늘로 치솟고 있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러고 보면 나무는 누가 불을 놓지 않으면
평생 초록 불꽃으로 타오를 수 있습니다.
또 불꽃은 나무가 타는게 아니라
나무가 보여주는 생애 마지막의 화려한 춤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럼 정말 뜨거운 열정의 춤이 되는 셈이네요.
아마도 이곳의 약수는 그 물줄기가
그리 굵지는 않았을 겁니다.
바위틈을 어렵게 흘러나오는 약수인지라
물줄기가 그리 굵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줄기가 가늘어도 흘러내리면 흘러내리는대로
길을 열어갈 수 있는게 물입니다.
그런데 겨울 추위는 그 약수의 가는 발목을 잡습니다.
못가오, 가지마오.
봄까지만 있어주오.
붙잡힌 물의 걸음이 차곡차곡 하얗게 쌓였습니다.
바지가랑이를 놓았다 잡았다 했나 봅니다.
물의 마음도 가고 싶은 마음 반, 있고 싶은 마음 반이었나 봅니다.
바위의 이름이 수리바위라고 하더군요.
올려다보면서 독수리를 닮았나 했는데
올라가서 곁에 세워놓은 설명을 보니
예전에 이 바위 위에 항상 독수리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수리바위는 독수리 닮은 바위가 아니라
독수리가 많이 살고 있는 바위입니다.
하긴 우리 집도 나나 그녀를 닮아서 동원이나 기옥이네 집은 아니니까요.
우리가 살고 있어서 동원이나 기옥이네 집이죠.
독수리 산다고 수리바위라고 했다니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올라갔더니 남이바위라고 나오더군요.
남이 장군이 그 바위에 올랐던 적이 있다고 그 바위는 남이바위가 되었습니다.
한번 남이 장군이 그 바위를 자기 것으로 만든 뒤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올랐어도 아무도 그 바위를 자기 것으로 하지 못합니다.
독수리 떠난 바위가 여전히 수리바위고
남이 장군 떠난지 이미 오래이건만 여전히 그 바위는 남이바위였습니다.
집은 누구네 집에서 누구네 집으로 자주 주인이 바뀌지만
축령산의 수리바위와 남이바위는 주인이 떠났어도 주인이 바뀌질 않습니다.
남의 바위에서 잠깐 쉬다가 또 걸음을 옮겼습니다.
내 바위였으면 아마 찾아주는 그 많은 사람들이 크게 신경쓰였을 것입니다.
좀 전엔 나뭇가지 사이로 커다란 바위가 보이더니
이번에는 가지 사이에 구름이 걸려있습니다.
혹시 좀 전에 그 바위가 꾼 하얀 꿈이 저 구름은 아닐까요.
꿈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위처럼 육중한 몸도
새털처럼 가볍게 들어올려 구름처럼 날 수 있도록 해주는게
바로 꿈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말을 확실하게 딱 잘라도 될 것 같습니다.
구름은 바위가 꾼 하얀 꿈이다.
올라가다 보면 점점 무거워지는 몸,
한잠 자면서 하얀 꿈꾸다 가고 싶습니다.
축령산 정상이 저만치 보입니다.
산꼭대기에서 태극기가 여기야, 여기하고
바람에 직사각형의 손바닥을 펴 열심히 흔들어줍니다.
설악산 갔을 때 생각이 나는 군요.
끝청에서 대청봉이 보이기 시작하자
갑자기 다리에 힘이 솟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끝청에서 대청봉까지는 두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그렇지만 힘든 줄 몰랐죠.
산의 정상이란 참 이상합니다.
일단 눈에 보이면 정상이 저만치 있는게 아니라
산의 정상이 그 자리까지 나를 마중나와 있는 듯 보입니다.
난 겨울산을 아주 좋아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나무의 밑둥까지
깊숙이 들어오는 햇볕도 그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여름엔 잎들이 햇볕을 가지 위에서 낼름 가로챕니다.
중간에서 꿀꺽하는 거지요.
겨울은 춥지만 그래도 나무 밑둥까지 깊게 햇볕이 들어와서 좋은 계절입니다.
게다가 또 가지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은 어떻구요.
나뭇잎이 촘촘하면 하늘을 가린 느낌인데
가지 사이가 비면 하늘이 그 사이로 비처럼 마구 새는 느낌입니다.
그냥 하늘만 쳐다보면 하늘이 너무 먼 느낌이 들고 말지요.
겨울 나무의 빈가지 사이로 보면 하늘이 그 사이로 마구 쏟아집니다.
겨울산에 가면 가끔 빈가지 사이로 하늘을 보면서
그리로 마구 새는 하늘에 푹 젖어들곤 합니다.
산을 오르면 길을 따라 나무들이 끊임없이 마중을 나옵니다.
언덕을 넘어가면 그곳에선 또 다른 나무가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상까지 가는내내 나무의 마중을 받습니다.
이런 환대는 산에 갔을 때나 누릴 수 있습니다.
나무들의 사이사이로
멀리 산이 언듯언듯 지나갑니다.
한참을 지나가도 계속 지나갑니다.
봄은 물이 오르는 계절입니다.
물은 겨울엔 땅밑으로 납짝 엎드려 겨울잠을 자죠.
몰랐죠. 물이 겨울에 겨울잠을 잔다는 걸.
잠자는 물은 가장 먼저 깨워 가지끝으로 불러내는 것은
아마도 버들강아지일 것입니다.
버들강아지가 내민 싹의 솜털에 물의 윤기가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구들장 없는 집을 상상해 보셨는지요.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는 아래로 푹 꺼지고 말겠지요.
이 새집이 그렇습니다.
자세히 보면 밑이 빠져 있거든요.
새가 들어갔다가 아래로 쑥 빠지는 장면을 상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구들장없는 새집입니다.
아니, 왜 남의 집 구들장을 빼가고 난리야.
산을 내려오다 길을 잘못들었습니다.
차를 세워둔 주차장은 위쪽에 있는데
아래쪽으로 걸음을 옮긴 것입니다.
내 발길을 현혹한 것은 솔잎이 깔린 숲길입니다.
솔잎은 나무 가지에 있을 때는 그 끝을 뾰족하게 세우고 있지만
숲길에 깔리면 좀 달라집니다.
밟으면 내 몸무게를 안고 부드럽게 내려앉는 약간의 깊이를 갖죠.
그 깊이와 솔잎 위에 하얗게 깔리는 저녁 햇살,
그리고 전나무 숲이 주는 솔잎의 향기는
나로 하여금 가야할 길도 버리고 그곳을 걷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내가 그 길로 접어드는 바람에
나를 따라간 모든 사람들이 고생하고 말았습니다.
나를 데리고 가면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입니다.
4 thoughts on “축령산에서 만난 풍경”
글과 사진들이 다시 읽어도 맛깔스럽네요
물이 납작 엎드려 겨울잠을 자고
겨울산에서 솔잎의 향기 맡으시는 허허로움
구들장 없는 새 집을 보는 눈
모두 글을 쓰시는 분의 안목~
글재주..축복 받으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족분들 모두 건강하시길요^^
글재주가 축복인지 저주인지 헷갈려요.
오늘 하루 잠시 좀 우울했었는데… 다시 기분좋아 지네요.
요즘 자꾸 술기운을 빌리고 있어서 조금 걱정이예요.
에이, 뭐, 될대로 되겠죠.
고맙습니다.
어제 함께 했던 사진을 방금 봤네요.
역시 동원님께서 찍은 사진이라 그런지 색감과 표정이 참 따스하네요.
사진으로 봐도 참 좋은 사람들이라 생각했지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런 저런 좋은 얘기과 좋은 분들 뵙게 또 기억속에 담을 수 있어서요…
그리고 저도 예전에 가족끼리 축령산 자연휴양림에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땐 등산이 아니라 그냥 산책을 했더랬죠..사람이 있어 참 좋았던 기억..
건강하세요.. 담에 또 들러겠습니다. ^^
얄라셩님 사진이 그중 잘나온 것 같아요.
사진 올리는 걸 싫어하는 분들도 있어서 그냥 개인 서버에 올렸어요.
언제 한번 대여섯이 산에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