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의 스포츠팀인 벅아이스(Buckeyes)의 공식 홈 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그 어느 구석에서 우리는 케빈 홀(Kevin Hall)의 간단한 약력을 접할 수 있다. 그 페이지에서 우리는 현재 그의 학년과 전공, 그리고 출신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출신 고등학교이다. 그는 세인트 리타 농아학교를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아울러 또 하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골프 선수란 것이다. 그의 이력은 오하이오 주립대 남자 골프팀의 페이지에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기량이 뛰어난 선수였지만 그가 대학 골퍼로 성공하리라고 기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2004년 5월의 어느 날, 퍼시 홀은 이제 무엇인가가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아들 케빈은 빅텐 챔피언십의 우승자가 될 영광의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만약 그가 우승의 권자에 오른다면 그는 오하이오 주립대가 배출한 그 대회의 17번째 우승자가 된다. 그 자리엔 골프의 황제라 불리는 잭 니클로스도 함께 하고 있었다. 빅텐 챔피언십은 미국 중서부 지역의 대학들이 자웅을 겨루는 대학 골프 대회이다.
케빈은 당당한 모습으로 18번 페어웨이로 들어섰다. 18번 페어웨이는 골프에선 대회의 최종 마지막 부분이다. 이미 수많은 뛰어난 선수들이 그의 앞에서 고개를 숙인 상황이었다. 그는 무려 11타를 앞서 나가고 있었다. 그날 그는 전반 9홀에서 29타를 기록했다. 홀컵은 블랙홀처럼 그의 볼을 빨아들였다. 그는 구슬을 굴리듯 매끄럽게 퍼트를 집어넣었다.
그날 그 자리엔 그의 아버지 퍼시 홀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는 신시내티에 사는 육류절단원이었으며, 케빈을 돕기 위해 53세의 나이에 은퇴를 한 사람이었다. 그와 그의 아내 재키는 그의 아들이 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항상 그의 곁에 함께하며 아들을 지켜보았다. 그날따라 유명인사들이 그 대회를 많이 참관하고 있었다.
케빈 홀은 66, 65, 68타의 성적으로 그 지역 최고의 기록을 수립했다. 퍼시 홀은 최종 홀인 18번 홀에서 한 펜실베니아 주립대의 마음씨 좋은 선수가 “그가 스코어카드에 서명을 하는지 확실하게 확인해!”라고 소리치는 얘기를 들었다. 사람들이 그를 염려하고 보살펴주고 있다는 증거였다.
수상식장에서 그가 개인 메달을 받는 순간 대학에서 최정상을 달리고 있는 참가 선수들이 그에게 ‘그의 인생에서 가장 값진 순간’을 선사했다.
바로 모두가 일어나 기립 박수를 보낸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박수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소리를 들을 수 없을 때도 과연 기립 박수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소리란 엄청난 흡인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실황 공연에선 음악과 더불어 관중들이 외치는 그 엄청난 함성이 소음이 아니라 음악의 한 부분이 된다. 함성이 소음이 아니란 것은 월드컵의 열기속에서 모두가 하나되어 ‘대한미국’을 외쳤던 한국 사람이라면 그에 대해 이견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도 남을 일이다. 소리는 그렇게 사람들의 가슴에 뭉클한 감동을 선물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그런 측면에서 기립 박수가 선사하는 감동이 얼마나 클 것인가는 상상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케빈 홀은 한달 동안 헤모필루스 인플루엔자로 인한 뇌막염을 앓은 뒤 귀가 멀었기 때문에 기립 박수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그에겐 아예 소리를 들은 기억도 없다.
아주 슬픈 일이지만, 척수와 뇌를 방어하는 얇은 막이 박테리아의 공격을 받아 결국 그 막을 제거할 수밖에 없었던 가혹한 일이 한 아이에게 일어났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39도 이상의 열이 한달 동안 계속되면 헤모필루스 인플루엔자에 의한 뇌막염은 종종 환자를 죽음으로 몰고갈 수도 있다. 죽음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그의 어머니 재키의 말이다. “케빈은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었다.”
그들의 아들이 생사의 위기를 넘기고 난 뒤, 홀 부부는 청각 상실의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케빈이 병원의 복도를 걸어갈 때, 그의 아버지는 그의 뒤에서 풍선을 터뜨려 보았다. 케빈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퍼시 홀은 이제 그 가능성이 현실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일어난 가장 가혹한 일이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겐 축복이었다.”
퍼시 홀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항상 우리의 책임은 아니다. 하지만 그 일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책임이다.” 그리하여 육류절단원인 그와 사업분석가인 그의 아내는 귀가 먼 아들의 장애에 정면으로 맞서게 된다.
그들은 손가락을 이용한 문자전달법인 지화법을 배워 케빈에게 읽는 법을 가르쳤다. 그들은 부엌의 마루에 앉아 볼링공을 전후로 굴리며 그에게 횟수 세는 법을 가르쳤다.
3살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그는 세인트 리타 농아학교를 다녔다. 그곳에서 그는 입술을 보고 말을 알아듣는 독순술과 수화를 배웠다. 이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의 소리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는 전자우편과 휴대용 삐삐를 사용하여 의사를 소통한다.
그가 9살 때 이들 가족의 친구인 도널드 반스가 볼링을 함께 치다가 홀 부부에게 이런 말을 꺼냈다. “내가 케빈에게 골프를 가르쳐 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얘기가 나오자 마자 그들은 곧장 골프 연습장으로 달려갔다.
재빨리 볼이 준비되었다.
“아무런 레슨도, 교습도, 심지어 한마디 말도 없었다.” 케빈의 말이다. (그를 취재한 기자는 전자우편을 통하여 얘기를 주고 받았다고 한다.) “나는 그냥 스윙을 했다. 볼을 완벽하게 맞추었고, 샷은 약간 왼쪽으로 휘어지며 목표에 적중했다. 그것은 내가 내 인생에서 지금까지 보았던 가장 아름다운 샷이었으며, 나는 곧바로 골프에 매료되었다.”
7년 뒤, 16살의 그는 타이거 우즈의 입술을 보며 그의 얘기를 눈으로 듣고 있었다. 타이거의 골프 클리닉에 참가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 자리에서 서너 번의 드라이버 샷을 날렸다. 타이거는 먼저 그에게 백스윙을 좀더 크게 뻗어주라고 말했다. 그의 조언은 효과가 있었다. 아울러 그는 당시 타이거가 했던 또 다른 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그럼 나중에 투어에서 봅시다”란 말이었다. 투어란 야구로 치면 메이저 리그에 해당되는 프로 골퍼의 최고 활동 무대이다.
놀랍게도 그 말은 말 그대로 되어가고 있다. 사상 최초의 귀머거리 프로가 탄생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의 얘기를 할 때면 항상 뇌막염과 함께 그의 조산에 관한 얘기를 빠뜨릴 수가 없다. 그는 예정보다 6주나 일찍 1.8kg의 몸무게로 태어났고, 20일 동안을 인큐베이터에서 보냈으며, 그때만 해도 생존이 불확실했다. 퍼시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그때 이후로도 살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귀머거리란 장애는 나에게 어떤 장애가 있든 항상 내가 그것을 넘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나에게 가져다 주었다.” 케빈 홀의 말이다.
그는 키 173cm, 몸무게 79kg인 작은 체구를 가진 사람이다.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즉 흑인이며 우즈와 테드 로데스, 리 엘더, 찰리 시포드에 대해 속속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모두가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거나 활동했던 흑인 골퍼들이다. “타이거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그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무엇인가 성공을 이룩할 수 있는 희망과 자신감을 주었다. 때문에 이제는 그런 사람들도 자리에 눌러앉아 있지 않다. 만약 계속 그랬다면 그들의 꿈은 모두 무너져 버렸을 것이다.”
오하이오주의 최연소 대학 장학금 수혜자 중 한 명으로 선정된 홀은 오하이오 주립대를 선택했다. 그곳의 골프 전통이 그의 인생 여정과 잘 맞았기 때문이다. ‘대담하고 도전적인’ 골프가 그곳의 모토이다.
그의 팀을 맡고 있는 감독은 짐 브라운이다. 그는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31년 동안 15명의 선수를 골프의 메이저 리그인 PGA 투어로 배출했다. 그는 홀의 스윙을 가리켜 ‘그림처럼 완벽하다’고 말한다.
저널리즘을 전공한 홀은 올봄에 학교를 졸업할 예정이다. 그가 강의를 들을 때면 의사 소통을 도와줄 사람들이 따라다닌다. 브라운의 말이다. “그런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1학년 때 케빈은 골프팀의 여행에 함께 하면서 공통의 기초 훈련 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의 친구이자 3학년인 자크 도런은 그의 팀이 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저 친구는 어디서나 잠을 잘 수가 있다. 그런데 깨어나면 그때부터 심술이 많다.”
2004년 빅 텐 챔피언십에 참가하기 위해 미시건을 찾았을 때 케빈은 3학년 시즌에 단 한 대회의 우승을 챙기는데 그친 선수였다. 하지만 연습 라운드에서 돌풍의 기량을 보여주더니 자신의 어머니에게 “이번에는 꼭 우승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얘야, 너무 희망을 높게 잡지 말아라”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 장담하건데 분명히 우승할 거예요.”
“너무 기대를 높게 잡으면 실패했을 때 실망도 크단다.”
“어머니, 그것도 알고 있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우승을 손에 넣었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차린 순간이기도 했다.” 홀의 말이다. “바로 PGA 투어에 진출하여 프로로 플레이하는 것이다.”
올여름 그는 네이션와이드 투어(2부 리그)와 후터스 투어(3부 리그)에서 플레이할 수 있게 되길 희망하고 있다. “나는 지금 하늘을 찌를 듯한 심정이다. 나는 어느 날 뒤를 돌아보며 ‘그때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라며 후회하고 싶지 않다.”
아무리 감동적인 장면도 소리가 빠지면 감동이 반감한다.
그러나 자크 도런은 이렇게 말한다. “케빈은 귀머거리이다. 맞은 얘기이다. 또 그는 흑인이다. 그것도 맞는 얘기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그가 골프의 세계로 넘어가지 못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골프에선 그가 얼마나 뛰어난 선수인가가 가장 중요하다. 또 그의 성격이 더욱 중요하다. 그는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좋은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아주 기분 좋은 일이며, 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케빈 홀도 소리가 없는 그의 현실에 대해 나름대로 답변을 갖고 있다. 그는 삐삐에 문자를 찍어 그의 대답을 이렇게 밝혔다.
“만약 박수를 치는데 들을 수 없는 그런 순간이 온다면 아마도 그때의 진동이 나의 가슴에 전달될 것이며, 그러면 ‘소리’를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귀가 먼 사람들도 그들의 가슴으로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사람들이 박수를 칠 때면 그들의 미소가 지금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박수를 치는가를 나에게 알려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좋은 사람’이라고 하거나 ‘잘했어, 케빈’이라고 하는 얘기, 그리고 심지어 ‘축하한다’고 하는 말도 그런 식으로 눈을 통해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때의 느낌은 형언하기 어렵다.”
알고 보면 사실 우리들이 그의 얘기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기사 출처: http://www.golfdigest.com/features/index.ssf?/features/gd200503kindred.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