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린 시절,
강원도 영월 읍내에서도 40여리를 더 들어가야 하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성장했다.
시골이다보니 보는게 산과 물이었고,
그래서 철마다 그곳에서 다양한 꽃과 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물론 그 꽃들 중엔 진달래도 있었다.
하지만 그곳의 진달래는 띄엄띄엄이었다.
여기서 한그루, 저기서 한그루 그런 식이었다.
진달래 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꽃들이 그랬다.
굳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가느골이란 이름의 동네 뒤편으로 있었던 밤나무들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군락이라는 느낌보다
밤서리의 추억이 더 강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어쨌거나 올해 처음으로 나는 진달래 군락지를 보았다.
군락지는 몇송이의 꽃과는 그 느낌이 사뭇다르다.
오늘 그 진달래 군락지의 기억에 사랑의 느낌을 덧입혀 본다.
난 아직도 사랑이 어떻게 오는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아마 그것이 진달래 꽃몽우리처럼
작은 몽우리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몰라요.
생각해보면
사랑의 꽃몽우리로 여겨지는
작은 추억들이 누구에겐들 없겠어요.
저에게도 그런 기억은 있어요.
어느 날 한내에 내려갔을 때
그녀를 자전거에 태우고
한적하게 달려보았던 밤길이 그런 예가 되겠지요.
아마 작심하고 뒤져보면
그런 작은 추억들은 상당히 많을 거예요.
하지만 하늘을 호흡하며 일제히 몽우리를 터뜨리고 있는 진달래처럼
사랑이 한눈에 쏟아지듯 몰려오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군요.
말하자면 한눈에 뿅 가는 경우라고 해야겠죠.
나는 아직 그런 경우는 경험해 보지 못했어요.
어쨌거나 우리는 그러다 깨닫게 되죠.
우리가 사랑의 한가운데 서 있다는 것을.
그러면 그건 거센 파도처럼 한순간에 우리를 집어 삼키고 말죠.
저 분홍빛 진달래의 위세를 한번 보세요.
그 길의 모든 것을 분홍으로 물들일 듯,
그 위세가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사랑도 바로 그런 거예요.
그 한가운데서 온통 사랑을 뒤집어쓰게 되고,
또 사랑에 물들게 되죠.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을 것 같죠?
하지만 그게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예요.
사랑의 한가운데 선다는 것은
사랑에 점령당한다는 거예요.
그때부터 사랑은 우리의 점령자가 되어 버려요.
점령당한 자들은
점령지 속에선 아무 것도 제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사랑의 나라가 그렇죠.
우리는 그 나라에 드는 순간
삶으로부터 격리되어 버려요.
그래서 사랑은 무서운 거예요.
아마 자주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알 거예요.
그 분홍빛 고운 진달래가
산을 뒤덮을 듯 밀려가고 있어도
그것이 얼마가지 못한다는 것을.
산의 빛은 분홍이 아니라
사실은 초록이나 빈가지의 앙상함이란 것을.
그러나 사랑은 그 초록을 밀어내고
분홍으로 산을 칠해 버리죠.
사랑이란 바로 그런 거예요.
초록이나 헐벗은 나무의 풍경으로
오랜 시간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풍경과 친해지기 보다
봄의 한때,
잠시 눈을 화려하게 채웠다가 사라지는
진달래에 더 눈이 가는 거예요.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누가 사랑을 막을 수 있겠어요.
올해도 어김없이 진달래는 산을 점령했어요.
산을 완전히 뒤덮어 버렸죠.
그러고 보면 사랑이란 그런 것 같아요.
철모르던 시절엔
그 사랑의 한가운데서
점령당한 식민지 백성의 애환으로 울고불고 하다가
철들고 나선 그 사랑의 곁으로 난 길을 따라
오래도록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바로 그런 것 같아요.
그 길은 어찌보면
내가 추억의 무게로 밟고 갈 때마다
그 무게로 다져져 길이 되는
추억의 소로 같은 것이죠.
아마 진달래가 지고 난 다음에도
나는 그 길을 갈 때마다,
아니면 심지어 다른 산을 오를 때도,
또 분홍빛 옷을 입고 거리를 지나는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스칠 때도
그 봄의 추억을 떠올리게 될 걸요.
결국 한번 사랑한 뒤로
그 길은 영원히 진달래의 길이 되고 말죠.
그러니 사랑은 역시 사랑인 거예요.
사랑에 피고지고는 없어요.
사랑했다면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그리고 겨울이 와도
여전히 그 곳을 갈 때
당신은 이제 진달래 속으로 길을 가게 되는 거예요.
하지만 좀 오래 살아보니
이제는 알겠어요.
그 진달래의 길이
뜨거운 태양볕과 매서운 찬바람의 계절을 거치면서
초록과 헐벗은 나무의 세상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그러니 내가 걷는 추억의 소로는
과거의 길이 아니예요.
왜냐하면 나는 오늘도 그 길을 걸어
여기 오늘의 이 하루 속을 가고 있으니까요.
내가 그 길이 아니라
내내 초록과 헐벗은 나무의 길을 걸어
오늘의 여기로 왔다면,
오늘이 아무리 배부르고 따뜻하다고 해도
나의 삶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슬펐을 거예요.
사랑은 내게 과거형은 없어요.
그러니 당신,
사랑이 식었다거나 내 마음이 다른 곳에 있다며
나를 맘아프게 하지 말아요.
곁에 있으면 항상 내 사랑은 현재형이예요.
내가 당신 곁에 있는 시간을
당신의 아픔이나 힘겨움으로 보내지 말아요.
그 시간은 언제나 사랑의 시간이예요.
내게 사랑은 언제나 현재형이니까요.
5 thoughts on “진달래로 엮은 사랑 연서”
봄은 또 오고 꽃은..피고 또 지고.. 피고..
아름다워서 너무나 슬픈이야기…
봄날은 가네..무심히도..꽃잎은 지네 바람에..
머물수 없던 아름다운 사람들…
가만히 눈 감으면.. 잡힐 것 같은…
아련히 마음 아픈…추억 같은 것들…
눈을 감으면..문득 그리운 날의 기억…
아직까지도 마음이 저려오는걸..
그건 아마도 피고지는 꽃처럼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거야..
아마도…
꽃길을 걸으며 내내 김윤아를 들었지요. 야상곡, 봄날은 가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등등… 이 봄날에 김윤아만큼 어울리는 가수가 또 누가 있겠어요. 현재형의 사랑에는 어울리지 않는 김윤아 인가요?
봄이 오면도 들으셨나요.
저는 경쾌함 때문인지 기타버전보다 피아노 버전이 더 좋더군요.
진달래는 그냥 한 두 송이 피어있을 때는 꽃인데… 한꺼번에 몰려 바다를 이루니 강한 사랑의 환기력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아요. 과거가 된 사랑인 줄 알았는데 그걸 현재형으로 만들어줄 정도의 강한 환기력이죠.
네. 아주 경쾌하게 봄들판에 나간듯 그런 마음으로 김윤아를 들었지요.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내일 출근을 생각하면 글루미 썬데이를…ㅎㅎ
고려산에서 저희도 내내 그 얘기했어요. 진달래에서 느끼는 애잔함이 왠것이냐고… 진달래들의 함성이 들리는듯 했어요.
어찌나 생동감있고 화려한지…
연애편지의 대가다우십니다.
저 진달래 군락지를 보고 내 사랑의 현재형까지 끌어올리시다뉘… 크헉~
사진 뽑아놓으면 보통 곧바로 사진과 글을 엮는데
이건 한 5일 정도 걸렸어요.
세번 정도 엎었죠.
보통 한방에 되는데 요건 좀 걸리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