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읽었던 시 구절의 느낌이
새로운 경험과 함께 달리 와 닿을 때가 있다.
가령 시인 이원은 그의 시 「몸이 열리고 닫힌다」에서
“몸 속에 웹 브라우저를 내장하게 되었어”라고 말한다.
또 「사이보그 3 —정비용 데이터 B」에선
“눈물이 나오질 않는다//전자상가에 가서/
업그레이드해야겠다/감정 칩을”이라고 말한다.
처음에 나는 웹 브라우저를 내장하게 되었다는 그 구절을 읽었을 때
그것을 이제 인터넷 없이 생활할 수 없게된
우리의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 표현 정도로 받아들였다.
감정칩을 업그레이드해야 겠다는 표현도
슬픈 일을 봐도 무감각해진 우리의 무디어진 정서에 대한 비판 정도로 이해했다.
그의 싯구절이 다시 떠오른 것은
새로운 카메라를 장만하고 나서이다.
나는 5년 동안 써오던 카메라 D70을 최근에 D700으로 바꾸기에 이르렀다.
사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계는
D70을 손에 들고 있거나 D700을 손에 들고 있거나 똑같다.
그러나 그 세계에 대한 D70과 D700의 사진은 미세한 차이를 보인다.
물론 내게는 그 미세한 차이가 확연할 정도로 커보인다.
D70과 D700은 모두 니콘 기종이다.
아마 카메라가 캐논이나 시그마, 더 나아가 라이카로 바뀌면
그 차이는 더더욱 확연하게 벌어질 것이다.
카메라는 기계에 불과한 듯 하지만
그 미세한 차이를 통하여 동일한 대상을 달리 열어보이고
그렇게 카메라를 통하여 세상이 달리 열리면
세상에 대한 느낌도 바뀐다.
나는 그것을 카메라가 열어주는 새로운 세상으로 이해하고 있다.
나에게 좋은 카메라는 그런 측면에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카메라이다.
문제는 그런 카메라가 다 비싸다는데 있다.
보통 사진을 찍는 순서는 내가 눈으로 보면서 어떤 느낌을 갖고
그 다음에 카메라가 대상으로 향한다.
즉 눈의 느낌이 항상 먼저이다.
그런데 좋은 카메라는 그 순서를 뒤집는다.
즉 어떤 느낌을 갖지 못하고 그저 막연히 무엇엔가 홀린 듯이 찍었는데
그 사진에서 새로운 느낌을 열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이다.
무슨 그런 경우가 있겠나 싶겠지만
그게 똑딱이라 불리는 일반 카메라로 사진을 찍다가
DSLR로 옮겨탄 뒤 내가 가장 먼저 경험한 놀라움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좋은 사진이란 말을
그냥 선명하고 화질 좋은 사진으로 이해를 하는 것 같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 사진을 글의 위에 놓질 않는다.
나에게 있어 좋은 사진이란 내게 좋은 글의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이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좋은 사진과는 크게 다르다.
어떤 이는 화질이 좋은 사진을 좋은 사진이라 할 것이고
어떤 이는 구도가 좋은 사진을 좋은 사진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좋은 사진이란 세상을 달리보게 해주면서
새로운 발견에 이르도록 해주는 사진,
그것도 매일 보던 일상 속에서 새로운 발견에 이르도록 해주는 사진이며,
그런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해주는 카메라가 좋은 카메라이다.
혹자는 그런 카메라는
굳이 비싸고 좋은 카메라가 아니어도 관계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경험상 그렇질 않다.
카메라를 손에 쥐는 순간,
우리는 세상을 그 카메라의 한계내에서 보는 이상한 습성을 갖고 있다.
즉 기계를 우리 몸에 이식하지 않고 그냥 손에 들고 있을 뿐인데도
우리가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 기계의 한계 내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계는 우리의 바깥에서 작동이 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손에 드는 순간 이미 우리의 몸 속으로 이식이 된다.
웹 브라우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어떤 브라우저를 쓰는가에 따라 세상이 달리 인식될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사용하는 사람과
애플의 사파리를 사용하는 사람은
동일한 대상을 다른 브라우저로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암암리에 동일한 대상을 달리 바라볼 수 있다.
이름이 벌써 다르지 않은가.
하나는 인터넷을 항해하는 기계의 느낌이 드는데
다른 하나는 아프리카의 초원을 어슬렁거리는 사냥꾼이나 관광객의 느낌이 난다.
또 미세한 인터페이스의 차이가 세상을 달리 보이게 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
난 사파리 사용자이다.
당신의 몸 속엔 어떤 브라우저가 이식되어 있는가.
난 이 점에선 시인이 그냥 모든 브라우저를 하나로 뭉뚱그린
인식의 한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한계에서 좀더 나아가지 못한 이유도 짐작이 간다.
그가 한국의 일반적 컴퓨터 환경에 묻혀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거의 모두가 윈도 머신을 사용하고 있다.
그 환경에서 사파리는 낯설 뿐만 아니라 불편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몸에 브라우저가 이식된다면
이식된 브라우저에 따라 세상이 달라질 수도 있다.
카메라의 경우엔 그 차이가 더욱 더 커질 수 있다.
브라우저는 거의 동일 내용을 보여주지만
카메라는 대상의 해석을 달리 내놓기 때문이다.
기계는 단순히 기계가 아니라 알게 모르게 우리 몸에 이식이 된다.
전의 카메라는 붉은 색을 대개는 뭉개고 있었다.
이번 카메라는 그 정도가 많이 줄어들었다.
마당의 넝쿨장미가 피운 붉은 색의 장미와 화분의 붉은 꽃이
분명 예전과 차이를 보인다.
뭉개져 있을 때는 사진의 꽃이 눈으로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과 많이 달랐다.
문제는 전의 카메라가 전해주는 그 뭉개진 사진은
내가 눈을 통해 가졌던 감각까지 뭉개버리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 감각을 새롭게 열어주기 보다 오히려 눈의 감각마저 닫아 버렸다.
D700은 그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찍을 때 가졌던 눈의 느낌과 훨씬 가까워졌다.
일단 사실의 세계가 모든 감각의 출발점이다.
또 카메라는 종종 사실에 머물지 않고 감각을 확장하곤 한다.
D700은 그런 경우가 예전보다 훨씬 더 많다.
이번에 장만한 니콘 D700을 내가 좋은 카메라라고 하는 이유이다.
슬슬 라이카 욕심이 난다.
라이카가 독자적인 풀프레임 바디를 내놓으면 아마도 무지 비쌀 것이다.
하지만 비싸도 욕심이 날 것 같다.
나는 사진을 찍을 때마다
잠시 잠깐 그 기계가 내 몸에 이식되어 사이보그가 된다.
시인의 얘기는 그냥 상징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기계를 우습게 보지 마시라.
**인용된 시가 수록된 시집
이원 시집,『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문학과지성사, 2001
7 thoughts on “기계와 몸 – 이원의 싯구절과 새로운 카메라에 대한 단상”
와, D700 이라니! 화각이 뻥 뚫리셨겠습니다. ^^
신혼여행 후에 사진 정리하면서 사진들 보정을 살짝 했는데
역시나 스파이더가 없어서 그런지, 제 모니터에서 멀쩡하게
보이던 색감이 인화된 상태로는 좀 이상하더군요.
하아하아-
뭐 저희한테만 좋으면 되겠습니다만.
인화해서 부모님과 처가댁에 드려야되는 거였는데…
좀 -_ㅠ 가슴 아팠습니다. 흑.
여기는 제주예요.
본격적으로 실험하고 있는데 좋긴 좋군요.
풀바디의 위력은 놀라워요.
모니터는 욕심내면 한이 없는 거 같아요.
생각같아선 에이조 하나 사고 싶지만 그저 욕심이 불과한 듯.
D700 어제 쥐어보니 꽤 묵직하더군요.
몇 장 보여주신 사진이 조화를 부린듯 신기한 구석이 있더군요.
그런데 문제는, 좋은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대부분 모니터로
보게 되는데, 모니터 성능이 또 천차만별이잖아요.
같은 모니터래도 밝기 설정 등에 따라 또 달라보이구요.
모니터 뿐만 아니라 브라우저에 따라 달라보이기도 해요.
이미지 파일은 모두 컬러 프로파일이 있는데 사파리를 제외하곤 컬러 프로파일이 웹 색상으로 일괄처리해 버려요. 색상이 날라간듯 보이죠. 제가 사파리를 좋아하는 이유예요.
모니터는 다행스럽게도 최근에는 적절하게 조정을 하는 기능이 OS에 생겼어요. 비스타가 그건 잘 돼 있더군요. 엑스피에선 어도비의 감마라는 제어판을 사용하여 설정을 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감마가 나오질 않더군요.
맥은 오래 전부터 모니터의 색상 조절 과정이 있죠. 물론 정확히 조정을 하려면 하드웨어 조정 장치를 구매해야 하지만 일단 저는 제가 작업하는 모니터는 조정을 해놓고 작업하고 있어요.
모니터에따라 색상이 천차만별인 건 현재로선 어쩔 수가 없는데 현재 그걸 이미지 파일 내에서 조정하여 맞추어주려고 하는 작업들이 진행되고 있긴 해요. 모니터를 감별하여 색상을 최대한 원본 작업자가 지정한 것으로 맞추어주는 거죠.
언젠가는 작업자가 작업한 색상대로 보게 되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싶어요. 디지털의 발전은 놀라워서 가능성을 모두다 열어놓게 되더라구요.
어제 즐거웠습니다. 깜빡했어요, 제가. 입을 좀 다물고 목소리를 낮추어야 하는데 어제도 그만 그걸 기억을 못하고 말았습니다. 다음엔 두 분 말씀에 귀기울일께요. 약속!
무슨 말씀을!
두 분의 고담준론 용쟁호투에 끼어 듣는 재미 좋았는데요.
마치 테니스 경기 보듯, 고개를 일정 간격으로 좌우로 돌리는 재미.
안 해 보신 분들은 모를 거에요.^^
꽤 괜찮은 적수를 만나신 듯 합니다.
요즘 Chantal Mouffe라는 교수의 책을 읽는데, 현대 정치를 비판하면서
사회와 정치를 분리시킬 수 없는 이유가 갈등은 언제나 존재하고
자아와 타자가 적대적 관계로 인식되는 것은 불가피 하기 때문에
이를 없애기보다는 공존의 방법을 찾아야 하는다는 것이 주장이죠.
카메라마다 색감이 달라서 찍는 게 조금씩 다르게 나오는 걸 보면
사람들도 세상 보는 게 가지각각이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지않나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네요.
그나저나, 동원님의 꽃에서 생동감이 느껴진다는..
정희님 얘기들으니 카메라는 왜 그렇게 다양한가라는 물음과 그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는 것도 참 재미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각 카메라의 고유한 색상이나 특성이 어떻게 세상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그걸 통해 공존해가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거죠. 하지만 그러려면 이런 저런 카메라를 다 써보아야 하는데… 생각만해도 뿌듯하긴 하지만 지금으로선 너무 먼 꿈이예요. 써보고 싶은 카메라가 몇 가지 있는데 가격이 다들 호락호학하질 않아 그저 니콘에 만족하고 있지요. 니콘이 그중 저렴하거든요.
꽃은 이번에 새로산 카메라로 찍은 것이랍니다. 위의 것은 28-300mm 탐론의 파워줌 렌즈로 찍었는데 그 렌즈 성능이 별로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갖고 다니지도 않고 쳐박아 두었는데 카메라 바꾸었더니 놀라운 성능을 발휘하네요. 아래 것은 제가 좋아하는 105mm 마이크로 렌즈로 찍었죠. 105mm는 워낙 좋은 렌즈이지만 색감이 더욱 생생해진 것 같아요.
아, 저 오늘 제주도가요. 일요일날 오는데 사진 한 2천장 찍어가지고 오려구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