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된 현상에 대한 저항, 혹은 탈주 모의 —이현승의 신작시 다섯 편

Photo by Kim Dong Won
이현승의 시 속에선
목욕탕에서 샤워하다 넘어진 짧은 순간이
“가장 촘촘하게 추락을 몸에 새기는 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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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떤 현상이, 그것도 우리들이 잘알고 있어서 전혀 낯설지 않은 평이한 현상이, 갑자기 우리의 이해 선상으로 들어오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거나 혹은 우리의 이해로부터 멀리 벗어나 도망을 치려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을까.
가령 지금 우리의 눈앞에서 “아이스크림이 녹”고 있다고 해보자. 어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것이 아이스크림이고, 그것이 얼어있다는 사실을 잘알고 있는 우리는 그것이 원래의 형체를 버리고 흐물흐물해지면서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현상을 눈앞에 두었을 때, 그 현상을 “아이스크림이 녹”고 있다는 말에 실어 손쉽게 이해를 구할 수 있다. 우리는 대개의 경우 그것으로 끝이다. 아이라면 아마도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이 아까운 마음에 울음을 터뜨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장면 앞에서 어떤 모반의 실마리를 잡고 있는 시인이 있다. 바로 이현승이다. 그는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는 것을 보고 “표정을 바꾸는 변검술사의 손놀림처럼/재빠르게, 혹은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무언가가 빠져나가고 있”다고 말하더니 급기야는 “동물원을 탈주한 늑대처럼/아이스크림”이 ‘도주하’(「아이스크림과 늑대」)고 있다고 말하기에 이른다. 아이스크림은 녹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왜? 누가 아이스크림을 가두었나? 우리는 늑대의 탈주와 도망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원래 늑대는 초원을 누비며 자유롭게 살았을 테니까. 동물원의 늑대는 갇힌 것이며, 따라서 그 곳을 나온 늑대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탈주한 것이다. 하지만 아이스크림이 무슨 늑대처럼 초원을 마음대로 뛰놀던 동물인가. 그것이 아닌바에야 어떻게 아이스크림이 녹는 것을 탈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쯤되면 우리는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었던 현상, 바로 아이스크림이 녹고 있는 현상이 우리의 이해 선상으로 들어오질 않고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에 충분하다. 아이스크림은 도대체 무엇에 갇혀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아이스크림이 녹으면 그것을 ‘녹다’라는 일상적 말에 실어 받아들인다. 그런데 혹시 우리들이 일상적 말에 실어 보고 받아들이는 그 현상이라는 것이 ‘녹다’라는 언어에 의해 손쉽게 사육된 현상은 아닐까. 동물만 사육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의 현상도 언어에 의해 사육이 되는 것은 아닐까. 마치 닭장 속에 가두고 모이를 주면서 ‘닭’을 사육하듯이(「뚱뚱한 그녀, 혹은 비둘기에게」), 그리하여 사육된 닭이 나는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아이스크림이 녹고 있을 때 그 현상을 오직 ‘녹다’라는 일상적 말의 모이를 주며 사육하여 받아들이고 있고, 그 사육된 현상에선 이제 어떤 언어도 날아오르거나 탈주를 꿈꾸지 못하게 되는 것을 아닐까. 우리들이 보고 이해하는 현상이란 것이 사실은 현상을 일상적 언어 속에 가두어놓고 기르고 있는 사육의 현장은 아닐까.
이현승은 그런 사육된 현상이 탈주라는 언어에 실려 도망가고 있는 가장 적절한 상징의 예를 손아귀를 벗어나 녹아내리고 있는 아이스크림에서 발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 짐작이 맞다면 그의 시는 일상적 언어에 의해 사육되고 있는 현상들의 탈주와 도망을 획책하는 모의들이다.
내가 그의 시에 대해 이런 실마리에 이르게 된 것은, 내게 건네진 이현승의 신작시 다섯 편을 처음 읽었을 때의 인상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다섯 편의 시를 읽으며 그 각각의 시가 시작된 계기가 되었음직한 장면이나 얘기를 상상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낯이 익거나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를 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마치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처럼. 시가 시작된 장면이나 현상을 짐작하기 어려운 경우와 달리 그런 경우 우리는 그 익숙함 때문에 그런 장면에 쉽게 다가설 수 있을 듯이 여기게 된다. 그런데 이현승의 시속에서 나는 그런 장면이나 현상이 그의 시어에 실리면서 내게 저항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 연유가 궁금하여 그의 시집 『아이스크림과 늑대』를 뒤지게 되었고, 결국 그 속에서 그가 일상적 언어로 사육된 현상에서 꿈꾸는 도주의 모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신작시 다섯 편을 다시 읽을 때 그의 시를 풀어가는 실마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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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첫번째 장면을 한번 들여다 보자. 그의 시 「젖지 않는 사람」에서 시의 시작이 되었음직한 장면을 일상적 언어로 이해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 없다. 시인은 화분에 심어진 나무에 물을 주고 있다. 나무는 죽어가고 있다. 화분과 나무라는 말로 미루어 분재가 아닐까 싶다. 시인은 물을 주며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는 “죽은 사람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대듯이/나는 화분에 물을 주면서 귀를 기울인다”고 말하며 시를 연다. 나는 비록 죽어가고 있지만 나무와 정이 많이 들어 그 숨소리라도 들어보려는 것처럼 물을 주면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까지는 전혀 어려울 것이 없는 장면이다. 그런데 “화분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듣던 시인이 갑자기 “귓속은 물을 채우기에는 너무 작은 용기”라고 말한다. 말은 맞지만 우리는 뜬금없다는 느낌을 갖기 쉽다. 왜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일까. 그 지점은 바로 “비약적인 점프”가 이루어지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이 생기면 우리는 “말의 꼬리를 놓치고”(「꼬리」) 만다. 그 순간 우리는 처음에 익숙하다고 느꼈던 장면이 우리와 멀어지고 있는 느낌을 갖게 된다. 나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어떤 현상을 앞에 두었을 때 그것을 일상적 언어로 사육함으로써 울타리 안에 묶여있는 반면, 이현승의 경우 그 사육된 현상을 울타리 밖으로 탈출시켜 다른 언어에 싣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나의 일이란 그 비약적 점프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를 해명해 주는 것이지만 나는 그것을 풀어내진 못했다. 나는 끊어진 말의 꼬리를 잡고 추락해 버렸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다음 구절로 넘어간다.
이제 시인이 죽어가는 나무에 물을 주며 생각을 하는 동안 저녁이 온다. 시인은 불을 켜는 것도 잊고 집이 컴컴해질 때까지 그대로 앉아 있는다. 그러나 사육의 언어, 즉 일상적 언어를 비켜간 시인에게서 그 장면은 이렇게 표정을 달리한다.

죽어가는 나무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저녁은 제 물줄기를 부어 텅빈 집을
수족관처럼 빈틈없이 채운다

어떤가. 한참 동안 죽어가는 나무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다보니 저녁이 되어 집안이 캄캄해졌다는, 일상적 언어에 실린 우리 앞의 사육된 현상보다는 훨씬 아름답지 않은가. 그리고 표정을 바꾼 그 장면의 끝에서 우리가 만난 것은 죽어가는 나무가 아니라 마치 “해안을 향해 헤엄”쳐가 자살하는 ‘돌고래’처럼 “스스로 죽을 결심을” 한 ‘나무’이다. 시인은 “나무에게서 호흡을 빼앗은 것”이 어떤 결핍이 아니라 ‘어떤 범람’이 아닐까를 묻고 있다. 그 범람 또한 어떤 범람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내가 마주한 저녁 풍경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시 「눈물의 원료」에서 우리가 들어선 곳은 장례식장이다. 그 조문의 자리에서도 우리에게 친숙하게 와닿는 부분이 있다. 바로 “산적과 편육과 장국으로 차려진 상”이다. 하지만 시인의 시선에 포착된 장면과 우리의 시선이 화해를 하는 부분은 그 정도에 불과하다. 이현승은 영정을 마주한 순간부터 우리들의 일반적 인식을 빗나간다. 그는 사람이 죽으면 우리가 “언제나 두 번 놀”라게 된다며 “한 번은 갑작스런 부고 때문”이고 다른 “또 한 번은 너무나 완강한 영정 때문”이라고 말한다. 부고의 갑작스러움은 우리들도 함께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영정을 마주했을 때 우리의 시선은 대개의 경우 고인의 모습에 대한 회상에 머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영정에 ‘완강하다’는 형용사를 붙이고 있다. 부고는 한 존재가 사라졌다는 알림인데 그 사라짐과 달리 장례식장에선 죽은 사람의 영정이 생전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는다. 이미 세상을 뜬 사람과 대비시키면 그 느낌이 완강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우리들이 대체로 절하고, 부조하고, 차려내온 음식을 먹은 뒤 돌아오는 그 자리에서 시인은 삶의 마지막 숨에 대해 궁금해 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호흡은 들숨일까 날숨일까
마지막 날숨을 탄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들숨을 결심할 때의 그것으로 볼 수 있을까

왜 그런 것을 궁금해할까 의아해할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은 우리들도 똑같은 것을 궁금해한다. ‘날숨’은 ‘탄식’이고, ‘들숨’은 “결심할 때의 그것”이라고 시인은 말했다. 탄식은 후회이고, 결심은 인생을 잘 정리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일상적 언어로 옮겨놓는다면 어떤 사람이 삶을 마치는 마지막 순간에 후회를 했을까, 아니면 인생을 잘 정리하고 편안하게 눈을 감았을까를 묻는 질문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사람이 세상을 뜬 자리에서 보통 우리는 그런 정도의 궁금증은 갖는다. 그러나 어떤가? 우리의 사육된 궁금증보다는 멀리 도망간 듯한 시인의 궁금증이 훨씬 괜찮아 보이지 않는가.
시 「낭떠러지」는 더더욱 재미나다. 이 시를 읽으며 내가 떠올린 장면은 샤워를 하다 미끄러져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장면이었다. 샤워를 하는 장면이야 모두에게 익숙할 것이고, 목욕탕 바닥이 미끄러워 휘청했던 경험도 모두 공유하고 있을 수 있다. 시의 현장은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그러나 한번 물어보자. 샤워를 할 때,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시는가. 이현승은 샤워을 할 때 “샤워기의 물줄기에서” ‘강의 냄새’를 맡는다고 하며, 그것을 빌미로 “물살을 역류하는 물고기가 된다.” 샤워를 하며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샤워는 모두에게 익숙할 수 있지만 샤워를 하면서 하는 상상으로 그는 우리들이 익숙한 샤워 장면으로 멀찌감치 비켜선다. 그러나 너무 상상이 깊었던 것일까. 그는 그만 “미끌하며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만다. 짧은 순간일 것이다. 목욕탕에서 미끄러져 넘어진 것이니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에 비견할 순 없다. 하지만 그는 그 순간을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순간에 비한다. 그 짧은 순간 그는 허공을 휘저은 손에서 나무에서 떨어지는 “긴 꼬리 원숭이”을 연상하고, 떨어지는 순간에는 다시 ‘새’로 연상을 바꾼다. 그리고 그런 연상의 끝에서 미끄러져 넘어진 그 단순하고 짧은 순간은 추락을 몸에 새긴 순간으로 표정을 바꾼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길고 긴 추락이 순간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그 짧은 순간의 미끄러짐이 낭떠러지에서의 추락이 된다.

사실상 떨어지는 내내 나는 온전히 나 자신으로
가장 촘촘하게 추락을 몸에 새기는 중이다

우리는 모두 미끄러져 넘어지면 목욕탕에서 샤워하다 미끄러져 넘어졌다는 그 일상적 언어의 울타리 속에 그 현상을 가둔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현상들을 사육한다. 미끄러져 넘어졌다는 그 사육된 현상으로부터 탈주하여 멀리 도망쳐야 같은 현상을 “가장 촘촘하게 추락을 몸에 새기는 중”이라는 언어에 실을 수 있다. 짧게 순간적으로 넘어졌으니 상당히 촘촘하게 몸에 새겨진 추락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사육된 현상의 울타리를 넘어 탈주를 획책하는 모반의 의지에다 시적 재능을 타고 나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불효자는 웁니다」에서 우리들은 익히 들어왔던 청개구리 이야기를 만난다. 우리들이 전해들은 이야기 속에서 청개구리는 불효자이다. 그 불효자는 비만 오면 운다. 이현승은 그 청개구리를 빌려 “억수같이 쏟아지는 물줄기 앞에서” ‘청개구리처럼’ 울고 있는 ‘불효자’를 말한다. 보통 우리가 그때 울고 있는 청개구리에게서 보는 것은 때늦은 후회이다. 그러나 이현승은 뉘우침에 동반된 그 눈물을 효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에겐 불효가 후회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효로 완성된다.

효는 불효에서 완성되는 것이니까
눈물을 흘리면서 불효자는 비로소 효자가 된다

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들릴 곳은 「밥집 골목」이다. 시의 전언에 따르면 그 골목에서 “자주 가던 밥집이 하나 없어”지는 경우가 있었나 보다. 누구에게나 자주가는 익숙한 밥집 골목이 있을 수 있고, 또 그곳의 밥집이 없어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나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딱히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없다. 때로 어떤 현상 앞에서 우리는 아무 반응도 보여주지 못할 때도 있다. 사육된 현상마저도 갖지 못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현승은 그 순간을 가리켜 “익숙하던 표정 하나를 잃어버리는 일”이라고 말한다. 자주 갔으니 익숙해졌을 것이고, 익숙해진 표정을 잃고 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진다. 시인은 자주 가던 밥집이 없어졌을 때의 심정을 그렇게 표현한다. 나는 화들짝 놀란다. 그건 내가 어떻게 할 것인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한 그 말이 표정을 바꾼 경우이기 때문이다. 나는 시인은 반응이 있고, 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밥집이 그렇게 친절한 집은 아니었던 듯 싶다. 시인이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그 집의 바깥 양반이 바람을 피웠나 본데 그때마다 밥상에 나온 나물무침의 맛이 아주 썼다고 한다. 우리들이 입에 올려 방아를 찌을만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대목의 표정은 전혀 다르게 바뀌어 있다.

몸의 분별력이란
단순한 반복 속에서 예리해지는 것인데
혀의 경우도 그렇다
바람은 바깥양반이 피웠는데
소태 같은 나물무침을 손님이 받아내야 하는 그런

이현승의 시속에선 아주 익숙한 얘기들, 가령 예를 들어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 배고픈 사람이 옆에 있으면 함께 밥을 먹는다는 얘기라고 하면 그것이 “어떤 사람들이든 밥집이 있는 골목을 지날 땐/금새 타인의 허기도 내것이” 된다는 식으로 표정을 바꾸며, 그렇게 표정을 바꾸면 우리는 익숙한 장면이 우리에게 다가서지 않고 저항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물론 그 저항이 이현승의 시가 갖는 힘이자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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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현승의 신작시 다섯 편을 읽기 전에 현상을 말하는 일상적 언어들이 사실은 현상을 말해주기 보다 현상을 사육하고 있으며, 이현승의 시는 사육된 현상의 탈주와 도망을 획책하고 있는 듯 보인다고 짐작했다. 내 짐작이 맞다고 해도 우리가 언어로 사육하는 현상들은 그 운명이 그리 밝지 못하다. 그것은 우리 앞의 현상들은 “언어가 없어 눈을 맞추고 내내 고요”(「애완 시대」) 하게 우리가 던져주는 일상적 언어의 모이를 받아먹으며, 그 언어 속에 갇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우리들 앞에서 ‘녹다’는 그저 ‘녹다’가 될 수밖에 없다. 현상은 사육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고, 우리는 항상 같은 언어의 모이를 던진다.
그러나 우리는 사육된 현상의 세계를 살아가면서 동시에 그 울타리 너머, 즉 아이스크림이 녹는 세계가 아니라 아이스크림이 탈주하여 도망을 하는 세계를 꿈꾼다. 우리는 그런 세계를 이현승의 시에서 만난다.
우리는 사실 “앞을 보면서 그러나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육된 언어가 지배하는 세상은 그렇다. 이현승은 말한다. 그런 세상을 벗어나 보라고. 그러면 어떤 세상이 펼쳐지는가. 그의 시에 기대보면 그런 세상은 마치 ‘미용실’ 같이 “가만이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달라진 자신의 헤어스타일을 보는” 것처럼 “자기 안에 숨겨진 또 다른 자기 같은” (「경험주의자와 함께」) 것을 찾을 수 있는 세상, 또는 사육하면서 잃어버린 현상 속의 다른 이야기를 새롭게 보고 들을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조심하시라. 일상이 반란을 획책하는 그 세상에선 우리들이 사육한 세상이 쫓겨나는 듯 싶지만 실제로는 우리 자신이 우리의 익숙한 세상에서 쫓겨나는 것일 수 있다. 물론 내가 보기에 그것이 큰 축복이긴 하지만.
(『현대시』, 2010년 3월호)

2 thoughts on “사육된 현상에 대한 저항, 혹은 탈주 모의 —이현승의 신작시 다섯 편

  1. 사육된 언어가 현실마저 사육하는 세상,
    그래서 탈주 모의라고 하면
    점점 탈모가 심해져 수챗구녕이 막혀
    탈주 모의를 했다는 생각마저 들지 않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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