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서 연락이 왔다.
영재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전화였다.
영재는 나의 고향 친구이다.
나이가 40대 중반을 넘기면 이제 죽음은 그렇게 낯설지 않다.
그러나 고향 친구의 아버님이라면
그 죽음은 매우 남다르다.
사회에 나와 직장이나 학교를 고리로 맺어진 인연 속에선
사실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들의 부모님 이름자까지 알고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러나 고향 친구라면
우리는 친구들을 그들의 아버님 이름으로 부르며
농을 주고받을 정도로
그들의 부모님에 대해 친숙하며,
그들에 대한 수많은 기억의 편린들을 갖고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한치 걸러의 그 죽음은 아득하게 멀리 보였는데
이제 고향 친구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니
죽음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 느낌이었다.
서울과 인천에 사는 친구들이 시간을 맞추어
함께 고향으로 내려갔다.
심한 빗줄기 때문에
꽃상여에 실어보내진 못했지만
봉투를 내밀고 황급히 돌아서는
도회지의 죽음과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맞상주 김영재.
같은 동네에서 같은 해에 태어나 함께 자란
말 그대로의 고향 친구이다.
강원도 영월의 문곡리에 새집을 짓고
부모님을 모시려 했으나
이번에 아버님을 먼저 떠나보냈다.
고향을 지키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도시를 사는 우리들에겐 복받은 일이다.
그가 없었다면 고향은
반쯤은 비어 보였을 것이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죽음은 산자를 불러모은다.
그래서 상가집에는 떠나보내는 슬픔과 함께
오랫만에 보는 얼굴의 기쁨이 있다.
그곳은 슬픈 눈물의 장소가 아니라
슬픔과 기쁨이 뒤섞여 중화되는 자리이다.
우리는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몸을 낮추고 머리를 조아린다.
서양의 인사가 시선을 가볍게 스치며 지나는 것이라면
우리의 인사는 몸을 서로 부비는 뜨거운 포옹에 가깝다.
죽음 앞에서도 우리의 그러한 인사는 예외가 없다.
아들과 어머니의 눈물.
어머니는 “아이고, 광재(둘째) 아버지, 이렇게 우리를 남겨놓고 떠나시면 어떻게 해요”라고 오열하셨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들은 그 옆에서 어머니의 슬픔을 부축했다.
친구의 아버님은 콩과 고추가 자라는 밭과 밭의 사잇길로 이리저리 흔들리며,
당신이 누울 자리로 오셨다.
누군가 작은 집 한채를 또 장만했다고 했다.
장례는 빗속에서 치루어졌다.
갑자기 빗줄기가 굵어지자 급하게 묫자리의 위로 비닐을 펼쳤다.
서양의 죽음이 검은색이라면
우리네 죽음은 순백의 흰색이다.
하관을 하기 전에 바닥에 까는 창호지의 빛깔만 보아도 그 점은 여실해 진다.
사는 곳에 따라 관을 그대로 묻는 경우도 보았지만
내가 태어난 곳에선
탈관을 하고
몸만 땅으로 내려보낸다.
현대 문명의 범람은 마지막 가는 길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시신을 묻고 난 뒤,
예전 같으면 사람 손을 빌렸을 과정을
지금은 포크레인이 대신한다.
때로 사람들은 기계 문명의 편안함이 죽음의 자리까지 함께 하는 이 현실 앞에서
죽음의 훼손을 보기도 하지만
버스에 실려 그곳까지 온 문명화된 죽음의 길을 생각하면
그리 백안시할 일은 아니다.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자리에서
슬픔과 기쁨이 뒤섞여 중화되듯이
이제 우리의 죽음이 마지막 가는 길에선
비록 아직 그 낯설음으로 인하여
삐그덕 거리고 있긴 하지만
문명과 전통이 공존하고 있다.
회닫이의 시간이다.
기계의 시간에 이은 사람의 시간이다.
먼저 회닫이꾼들에게 술한잔과 안주 한점을 돌린다.
첫켜의 회닫이는 동네 사람들이 맡았다.
어허, 달구호, 어허, 달구호.
한 사람이 소리를 이끌고,
회닫이꾼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땅을 다진다.
쉴 때는 장대를 모아 한자리에 세워둔다.
다섯번째의 마지막 켜는 초등학교 동창들이 맡았다.
나의 친구들이다.
그러나 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해준씨가 이끌었다.
사진의 맨 왼쪽 사람이다.
그는 문곡리의 새마을 지도자이다.
우리는 고향을 떠났지만
그는 새롭게 우리의 고향을 찾아 그곳에 삶의 둥지를 틀고
우리의 고향 사람이 되었다.
다섯 켜를 다지는 동안
보통은 중간에 누군가 한두 번 소리를 대신 이끌어주지만
이번에는 그가 내내 가락을 이끌었다.
그에게 무척 고마웠다.
돌아간다는 말의 의미가
하늘나라가 아니라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임을
회닫이만큼 여실히 일러주는 예가 또 있을까.
그러고 보면 우리네 죽음은
회닫이 가락에 실려 땅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그 길을 가는 동안
바로 옆의 산자락에선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안개가 하얗게 피어오르며
산을 타고 오른다.
몸을 땅에 주고,
이제 지상의 인연을 훌훌 털어버린
혼백이 가는 황홀한 하늘의 길 같았다.
마지막 작업은 사람과 기계가 함께 했다.
사람들이 다진 그 자리에 봉분이 솟고
내년이면 아마 잔디가 파랗게 덮혀있을 것이다.
땅으로 돌아간 자가 키우는 또다른 삶이다.
산 자들은 마치 그가 살아있는 듯 그 자리를 찾을 것이며,
살았을 적 그의 얘기를 나눌 것이다.
죽음은 그렇게 삶으로 이어지며,
삶은 그렇게 계속된다.
8 thoughts on “회닫이 가락에 실려 땅으로 돌아가다”
지역마다 장례문화가 다소 틀리긴하지만 이곳 강원도에서는 탈관(베토장)을 하는게 제일 좋다고 합니다…위의 선소리하던 문곡에사는 이웃 사촌입니다…
반가운 분이 오셨네요.
영재는 영 인터넷을 못해서 여기도 들어오질 못하는 듯 싶습니다.
기회되면 영재도 좀 구경시켜 주세요.
이렇게 안면도 텄으니 고향내려가서 얼굴 부딪치면 아는 척 하겠습니다.
물론 제가 술한잔 사겠습니다.
허… 저도 돌아가신 할머니의 장례가 생각납니다.
저도 중학교 2학년때 였던 것 같습니다.
관째 묻는 것이 관례라고 알고있었는데… 오히려 탈관을 한 모습이 더욱 뜻있게 느껴집니다.
저는 할머니 장례만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 사진의 경우와 똑같았죠.
아마 중학교 2학년 때가 아니었던가 싶어요.
어린 나이에 죽음이 뭔지 깊게 생각했던 관계로
그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다만 그때는 할머니가 상여에 실려 마지막 길을 가셨는데
이번에는 비가 너무 내려서 상여를 내지 못했어요.
저는 고향이 강원도 영월인데
이곳에선 항상 이렇게 하는 것 같더군요.
이런 경우는 제 고향에서만 본 것 같습니다.
할머니 이후로 장지까지 따라간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고향 친구의 아버님이 돌아가신게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저희 고향에선
장례가 생기면 딸가진 집의 사위가
그날 곤혹을 치루죠.
그동안 자주 못찾아온 죄를 치루는 거라고나 할까요.
할머니 장례 때 고생했던 고모부가 생각나네요.
탈관을 한 뒤 묻는 부분은 저도 무척 놀랐어요. 여긴 남해안인데 관채 묻거든요. 저의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어요. 스물 여섯이면 다 컸는데, 그땐 울기만
해서 지금 돌아보면 정확하게 그 과정이 생각나지 않네요.
그게 동네마다 틀리더라구요.
서울은 거의 관채 매장을 하는 것 같구요.
남해의 어디는 풍장을 하는 예도 있다고 하더군요.
회닫이를 잘하면 거의 삽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땅이 단단하게 다져진다는 얘기를 어렸을 때 많이 들었어요.
사실 시골의 장례식은 슬프기보다
그냥 사람을 떠나보내는 슬프면서도 흥겨운 축제같은 인상이 크죠.
상주가 막역한 친구이다 보니
서로 농이 오가고….
의례적인 장례 분위기와는 완연히 다른 면이 커요.
상가에 가서 밤을 새우고
끝까지 지켜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옛 장례식은 저렇게 치러지는거였군요.
탈관을한뒤 묻는부분에서 깜짝놀랐어요.
처음보는 장면이라서..
비오는날의 장례식은 더 쓸쓸하고도 엄숙해보여 눈물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