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삶을 지우다 – 고진하 시집 『수탉』

고진하 시집 『수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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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을 드러내기 위하여 대상을 지워야 하는 경우가 있다. 가령 대표적인 경우가 조각이다. 조각의 질료가 나무나 돌처럼 단단한 고체에 가까울수록 그 점은 아주 분명해진다. 그 경우엔 깎아내고 쪼아내면서 나무와 돌을 지워가게 되며 그 지움 속에서 나무와 돌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 나무와 돌 속에서 형상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물론 이와 반대의 경우가 있다. 점토와 같이 형상을 빚는 질료가 딱딱하지 않고 말랑말랑한 경우이다. 그 경우엔 손의 힘에 내 의지를 실어 형상을 빚어내게 된다.
시가 삶이나 세상을 말할 때 그 질료가 되는 삶이나 세상은 딱딱한 석조질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말랑말랑한 점토질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일까. 만약 세상이 말랑말랑하다면 시인은 그 세상을 주물러 시를 빚어내는 것이 될 것이며, 세상이 딱딱하게 굳어있다면 그와 반대로 세상을 지워서 시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진하의 시집 『수탉』을 읽으면서 내가 받은 인상은 그의 시가 삶을 지우면서 삶을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렇다면 삶은 말랑말랑하기보다 굳어있다는 얘기가 된다. 삶이 굳어 있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이며, 삶을 지워서 삶을 드러낼 때 시가 보여주는 삶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 되는 것일까. 나는 그 점에 초점을 맞추고 고진하의 『수탉』을 둘러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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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탉』에서 세상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인식은 모처럼 시인을 찾아온 “머리칼이 반백인 친구”를 통하여 엿볼 수 있다. 그 친구는 “사는 게 너무 힘들다고 푸념만 잔뜩 늘어놓고” 간다. 그 푸념의 삶을 마주했던 시인은 “어떤 나침반도 밝은 길눈이 되지 못”하는 “생의 미로”가 대체적인 사람들의 운명이라고 정리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뜻대로 길을 열면서 살 수 있는게 삶이 아니다. 그 불투명한 삶의 길은 그 길에 선 사람들의 입에서 푸념으로 쏟아진다.

수심도 모른 채 뛰어들어야 하는
심연으로의 잠수.
그게 삶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가끔씩 마주친 눈빛에서는
그런 푸념이 거친 눈발처럼 쏟아지곤 했다.
—「그 남자가 오르던 키 큰 나무」 부분

미로란 사실은 길인데도 길이 아닌 길이다. 미로에 서면 우리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길에 갇힌다. 그 길은 다만 길을 갈 뿐 그 앞을 전혀 알 수 없는 길이다. 길로 만들어진 감옥, 그것이 미로이며, 우리들은 바로 그 길 위에 서 있다. 우리들은 가끔 그 길의 고삐를 풀고 그 길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런 순간은 우리에게 잘 주어지지 않는다. 시인은 그런 순간을 가리켜 은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인간의 것이 아니라 잠깐 동안 소가 누리는 것이었을 때도 시인은 그 은총의 순간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시인이 “치악산 황골 골짜기”로 “물통 들고 물 뜨러 갔다가” “산비탈 밭 가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는/고삐 풀린 소”를 마주한 것이 바로 그 순간이다. 시인은 그 순간을 두고 “고삐 풀린 소가/풀을 뜯어먹고 있는 광경을 보는 일은/드문 은총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그 은총의 순간에 대한 성원자가 된다.

저 소는 어떻게 질긴 고삐를 끊었을까.
구제역은 아니더라도
병들어 일부러 풀어준 것은 아닐까.
물 뜨러 길게 늘어놓은 물통 옆에 서서
순서를 기다리며 맛있게
풀 뜯는 고삐 풀린 생을 응원하고 있었다.
—「우인도」 부분

고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소가 없듯이, “고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도 없다. 그러니까 인간은 삶을 자신들의 의지대로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기보다 그 삶에 갇혀있다고 봄이 옳으며, 그때 인간을 가두고 있는 삶은 견고하기 이를데 없다. 그것도 돌처럼 견고하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돌을 잘 지워가기만 하면 그 돌로부터 형상이 빚어진다는 점이다. 고진하에게서도 그와 유사한 비유를 구할 수 있다. 그것은 가시덤불 속에서 울려나오는 새의 울음소리이다. 좀더 명확하게 말을 바꾸면 가시덤불 속에서도 새가 머물 수 있으며, 새가 그곳에 머물 때는 가시덤불 속에서 새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새소리는 재잘재잘 들리는데
새들은 보이지 않는구나
마른 잎새를 간신히 매달고 있는 가시덤불
주자의 얼굴은 감추고 생음악만 내보내는 가시덤불
가까이 다가서니 생음악은 뚝 그치고
귀가 민망해 돌아서니 다시 연주를 내보내는 가시덤불
—「노래하는 가시덤불」 부분

그런데 그 가시덤불이 시인에게 “너의 바탕도/노래”라고 속삭인다. 다시 말하여 “너와 나는 한통속”이라고 속삭이는 것이다. 그러나 삶이 말랑말랑한 점토성이 아니라 돌처럼 견고할 때는 그 삶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빚어내려면 돌을 잡은 손에 아무리 힘을 가해도 소용이 없다. 가시덤불도 그와 같아서 “가까이 다가서면” 노래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침묵의 가시로 무장”을 하면서 노래를 거두어 들이고 만다. “오직, 경청만을 허용”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가시덤불은 우리들을 가둔 견고한 삶과 매우 흡사하게 닮아있다. 시인은 그 침묵의 가시덤불로부터 노래를 얻어내려면 가시덤불로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가시덤불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물러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나의 삶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내려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 삶이 돌처럼 견고한 상태이고, 내가 그 속에 갇혀있다면, 그 견고한 갇힌 삶으로부터 “생음악을 연주”해 내려면, “은밀한 자아”를 “쓱쓱 지워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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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쯤에서 우리의 삶이란게 처음부터 그렇게 견고하게 굳어있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혹시 그게 처음엔 말랑말랑했는데 어느 때부터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고진하도 그 점에 대해선 뜻을 함께 하는 것 같다.

무슨 신성이라는 부를 만한 게 인간에게 있다면
무쇠가위처럼 자르거나 찢거나 나누는
분별이 싹트기 이전의 천진무구한
어린아이에게나 있을 것이다.
—「어린 신성」 부분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은 생각만해도 말랑말랑한 삶의 느낌과 겹쳐진다. 그러나 그 ‘아이’를 우리의 내면에 그대로 살려둘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살다보면 우리의 삶은 어느 새 굳기 시작한다. 고진하의 『수탉』에서 그 원인에 대한 직접적 언급을 들을 순 없지만 간접적인 우회로를 찾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가령 그는 어느 날의 조반 자리에서 아내와 함께 그들이 가보고 싶은 곳으로 “아부 산 정상에 있다는 나키 호수”를 입에 올린다.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신들이 손톱으로 팠대요.” 신들의 손톱이니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지만 그의 아내는 그 손톱에서 느리지만 섬세한 손길을 본다. 그래서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에겐 속도가 목표가 아니란 얘기겠죠?
—「조율」 부분

그 얘기를 뒤집으면 우리의 삶에선 반대로 속도가 목표란 얘기이다. 아마 이에 대해선 모두가 동의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 속도가 우리들을 더욱 빠르고 활기차게 움직이도록 만들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속도에 묻혀 우리들의 삶은 점점 굳어져 간다. 삶의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더더욱 우리는 삶속에 견고하게 갇히기 때문이다.
시집 『수탉』의 마지막 자리에서 시인은 우리들이 너무 앞만보고 달려가고 있다는 얘기로 서두를 뗀다.

너무 앞으로만 걸었어.
앞으로
앞으로
걸어도
진보는 없고
생은 진부하기만 하니
이젠
뒤로 걸어보렴.
—「뒤로 걸어보렴」 부분

앞만보고 사는 삶은 사실은 속도와 밀접하게 엮여 있다. 삶의 속도가 빠를수록 사실 우리는 뒤를 돌아볼 여유를 갖지 못하며, 또 뒤를 돌아보기도 겁난다. 잠깐만 한눈을 팔아도 현재로부터 밀려나 아득하게 뒤로 쳐질 것 같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 속에서 속도와 앞만 바라보는 삶 속에 묻힐 때 우리의 삶은 굳는다. 삶이 굳으면 우리는 그 속에 갇힌다.
사실 고진하의 시 속에서 삶을 굳게 만드는 원인을 간접적으로 두 가지만 엿보았지만 그 이외에도 이유는 수없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질에 경도된 사람들의 욕망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며, 배우는 즐거움 대신 좋은 대학에 대한 진학의 욕망으로 뭉쳐진 교육도 그 이유 중의 하나로 손에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모두 그런 삶의 한가운데 있어 그런 삶을 피해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굳고 고착된 삶은 우리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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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언급한대로 고진하의 시 속에서 엿보는 우리의 삶은 굳어 있으며, 그 때문에 그는 삶을 지워서 삶을 얻어내려 한다. 나는 그것의 전형을 시집의 제목이 된 수탉의 삶에서 엿본다. 그 수탉은 그냥 닭이 아니라 싸움닭, 즉 투계이다. 시인은 “시골 공터, 임시로 설치한 조그만 원형경기장 쇠창살 속에서/황금빛 목털을 쥘부채처럼 활짝 펼”치고 ‘맞짱’을 뜨고 있는 “수탉과/수탉”을 보게 된다. 그 두 수탉은 서로에 대한 ‘적의’가 있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싸워야 한다. 그런 싸움은 더더욱 슬프다.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망울”을 모으고 “웃음과 박수로 응수”하고 있지만 그 싸움은 사실은 슬픈 싸움이다. 아니, 나아가 그 싸움은 끔찍하다. 그 싸움이 끔찍한 것은 우리들이 그것에서 우리들의 삶을 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탉의 싸움에서 삶을 볼 때 우리의 눈엔 “뾰족한 부리에 쪼인 볏”에 “맺히기 시작”하는 ‘선혈’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그 선혈에서 눈을 거두기 어렵다.
그러나 그 수탉의 싸움에서 삶을 슬쩍 지워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 순간 ‘수탉들’은 “태양의 혼령”을 지니고 “치열한 싸움”으로 “나른한 인류의 잠을 깨”우는 전사가 된다. 그 수탉들은 “쉽사리 전의를 꺾지 않는/태양의 전사들, 빠르고 날렵한 몸을/휙휙 솟구치며/허공을 핏빛으로 물들”인다. 그리고 보는 시인까지 그 역동적 힘의 현장으로 빨아들인다.

지상의 마지막 태양의 축제라 부르고 싶은,
극채색의
짜릿한 영상 같은
닭싸움을 지켜보면서 나는
늦은 봄날의 권태와 나른함을 휘휘 날려보냈네.
—「계명성: 투계를 보다」 부분

투계의 경우처럼 역동적이진 않지만 삶을 지워서 빚어내는 또다른 삶의 형상은 “제 몸의 몇 배나 되는/호랑나비 날개를” 물고가는 개미에게서도 엿볼 수 있다. 삶을 지우지 못했을 때 우리가 개미에게서 보게 되는 것은 그 큰 호랑나비 날개를 가져가기 위해 “뻘뻘” 거리며 흘리게 되는 땀과 힘겨움이다. 그리고 사실 그게 우리의 삶이다. 하지만 그 삶을 지워버리면 그 날개가 “근사한 돛”으로 뒤바뀐다.

날개는 근사한 돛이다.
(암, 날개는 돛이고말고!)
바람 한 점 없는데
바람을 받는 돛배처럼
기우뚱
기우뚱대며
산길을 가볍게 떠가고 있었다.
개미를 태운
호랑나비돛배!
—「호랑나비돛배」 부분

삶을 지워서 삶을 드러내는 이러한 방식 때문에 고진하는 채워져 있는 것보다 비어져 있는 것에 더 눈길을 주고 있으며, 나아가 자신이 빚어낸 대상까지도 지우려고 한다.

활터는 텅, 비었다.
(중략)

평소 화살로 붐비던 하늘엔
텃새들이 우우우 날아오르며 재잘거린다.
—「공일」 부분

겨우 손바닥만하지만
빈 마당하고 친하게 지내는 날들이다
—「빈 마당에 꿈 일기를 적다」 부분

그가 이렇게 빈자리를 좋아하는 것은 그렇게 비어야 그 자리가 끊임없는 생성의 자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처음엔 ‘눈 조각’으로 “붓다의 미소를 빚고” “형틀에 매달린 예수의 고뇌를 빚”으려 하지만 그 길의 궁극은 빚으려 하는데 있다기 보다 그렇게 빚은 “눈 조각이 녹아내리는 것을 바라보는 일”, 즉 자신이 빚은 것을 지워버리는 것에 있다.

어느 날
눈 폭풍이 휘몰아쳐 눈 조각을 뒤덮으면,
미소도
고뇌도
사라지고
모습을 알 수 없는 모습
형상을 알 수 없는 형상으로
부풀어
우뚝우뚝 자라나는데
그 유현한 형상을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얼음수도원 3」 부분

나는 고진하가 사람들에게 일러주는 가장 유효한 전언은 바로 이것, 즉 지우면 대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나타난다는 것이라고 본다. 시인의 언어를 빌려 요약을 하자면 그것은 “나 아닌 나가 되는 신비”(「옻나무」)이다. 전자의 나가 옻나무라면 후자의 나는 그 옻나무에서 나온 칠흑을 말한다. 나는 처음에 옻칠을 보았을 때는 그것이 튜브를 짜서 쉽게 칠할 수 있는 물감의 검은색과 어떻게 다른지 구별이 되질 않았다. 그러다 나는 어느날 그 칠흑이 그렇게 쉽게 덧칠하는 검은색과 다른 검은색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날은 내가 색깔도 깊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날이었다. 옻칠로 만들어내는 칠흑은 깊이를 가진 검은색이었다. 고진하는 그 깊이의 칠흑을 가리켜 “검은 상처가 환희 비추는,” “불멸의 빛”이라고 말한다. 삶을 지우면 바로 그 불멸의 빛을 얻을 수 있다. 삶에 붙들려 있으면 그 불멸의 빛은 그냥 흔한 검은색의 하나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선 그 옻칠의 칠흑이 사라지고 쉽게 튜브를 짜서 덧칠하는 검은색이 판치고 있다. 따라서 옻칠의 깊이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시에서 깊이를 얻을 것이요, 튜브에서 짜낸 검은색 물감의 편리함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시가 먹고 살기 바쁜 현대적 삶을 너무도 모르는 배부른 소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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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의 시에서 가장 큰 아쉬움이라면, 아주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바로 그의 시의 축조 원리가 되고 있는, 삶에서 삶을 지우는 그의 강력한 힘이다. 삶을 지워서 시를 얻고 있는데, 사실 나는 그 점이 그에게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건 젊은 사람이 아니라 나이든 사람의 힘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무게가 불고, 무게가 불면 몸이 무거워지며, 몸이 무거워지면 중심이 잡힌다. “예나 이제나 고향 우시장에 박힌/말뚝처럼 비쩍 마른 건 여전하”(「말뚝」)다는 그는 나이가 들면 몸이 불어난다는 내 말에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이는 “쉰한 살”(「꽃다운 첩 들여?」)이지만 “파릇파릇 내 상상을 샘솟게 하는” 느티나무의 구멍을 들여다보며 “느티가 늙었다고 구멍마저 늙었다고 생각하지 말”(「느티, 검은 구멍」)라는 얘기 또한 그가 늙었다는 내 느낌에 대한 반론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시는 너무 중심이 잡혀 있다. 젊은 시는 중심이 잡혀있는 법이 없다. 젊은 시는 비틀거린다. 나는 그 비틀거림을 삶과 동의어로 이해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는 삶을 지워서 삶을 얻어내고 있다는 점에선 그 나름의 지평을 열고 있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너무 늙고 노쇄한 냄새가 난다. 시인도 나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시인에게 권하고 싶다. 자꾸 삶을 지우려고만 들지말고, 기회가 되면 젊은이들의 삶 속으로 한번 휩쓸려 들어가 보라고. 나는 그 기회가 그에게 생겨, 삶을 지워서 삶을 얻는 시가 아니라, 삶과 삶 사이에서 절묘하게 비틀거리면서도 균형을 보여주는 시를 보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연배로 보면 그가 나를 훨씬 앞서지만, 나는 그에게 버르장머리 없음을 무릅쓰고 마지막 한마디를 남겨두고 싶다. 오십을 넘겼다고 너무 세상 다 산 듯이 그러는 것 같지 않우?
(『시와 세계』, 2006년 여름호)

**대상 시집
고진하, 『수탉』, 민음사, 2005

3 thoughts on “삶에서 삶을 지우다 – 고진하 시집 『수탉』

  1. 처음에는 지루해서 읽기 힘들었는데, 중간 넘어가면서 잔잔하게 전개되
    성장통이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

  2. 간만에 제가 아는 시인의 작품들을 볼 수 있었네요. 아쉬워하신 대목은 모르긴 해도
    시인의 나이 때문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1. 시에 완전히 세상 달관한 듯한 태도가 자꾸만 보여서.. 이게 나이탓인가 싶더라구요. 가령 수탉같은 경우 그 수탉을 싸움터에서 꺼내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해 제 목숨을 바치는 좀더 숭고한 경우와 잘 연결해 보았으면 어땠을까 싶었어요. 그럼 삶이 지워지지 않고 삶에서 삶이 솟을 수 있을 듯 싶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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