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 속에서 접하는 세상도 우리들이 살고 있는 것과 똑같은 세상이지만 시 속의 세상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세상과는 좀 다르게 움직인다. 시인이란 알고 보면 그 자신만의 고유한 시적 원리로 세상의 움직임을 재구축하는 자들이다. 시인 서상영도 그 점에선 예외가 아니다.
예를 들어 봄은 어떻게 오는가를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구의 공전이나 자전축의 경사 변화와 같은 것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과학적 지식에 기대어 그 설명을 찾아보려 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질문의 대답을 시인에게서 구하면 양상은 달라진다.
오래전 일제 병탄 시기에 식민의 땅을 살아야 했던 시인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고 물었다. 그의 물음에는 봄은 해방의 땅에서나 비로소 오는 것이라는 대답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봄은 독립된 나라와 해방의 땅에서나 맞을 수 있는 계절이다. 시속에 마련된 진정한 봄의 의미가 시를 읽는 이에게서 제대로 확장되었다고 하면 식민의 땅에서 맞는 봄은 겨울 다음의 계절이 아니라 독립과 해방을 준비해야 맞을 수 있는 계절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같은 질문의 대답을 시인 서상영의 시 속에서 찾는다면 답은 또 다시 바뀐다. 그의 첫 시집 『꽃과 숨기장난』에서 서상영은 병실에서 맞아야 하는 환자의 봄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렇게 봄은, 나의 병실로
울고 있는
겨울의 뒷모습으로 왔다
병실을 청소해야지, 묵은 약과
두꺼운 일기를 걷어내어
나의 병이 편안해질 수 있도록
웃자란 슬픔의 가지도 잘라내고
작은 병에선 풀씨들을 풀어놓아
나의 병이 아름답게 꽃피울 수 있도록
너무도 화사하게 봄은 왔다
—「나의 병실」 부분
“겨울의 뒷모습으로 왔”으므로 봄은 겨울을 보내면서 온 것이다. 그 점에선 우리의 봄이나 시 속의 봄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시인은 “너무도 화사하게 봄은 왔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구절 앞에서 머리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왜냐하면 그 봄이 “세숫대야에 떨어지는 붉은 코피를/물끄러미 바라보는 소녀처럼” 온 ‘병실’의 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회의는 그런 병실의 봄이 과연 화사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에서 온다. 빼앗긴 들에 봄이 오기 어렵듯이 병실의 봄도 쉽게 오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런데도 시인은 그 병실에 “너무도 화사하게 봄은 왔다”고 단언하고 있다. 이 경우 시인의 단언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시 속의 세상이 우리들의 세상과는 다른 원리에 의해 구축된 세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다시 서상영의 시 「나의 병실」을 들여다 보면 그 병실에선 아픈 사람이 병실을 청소하고 “나의 병”을 아름답게 꽃피우겠다는 마음으로 봄을 마주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병이 꽃이 될 수는 없을 것이므로 여기서 병이란 말은 병과 싸우는 나의 삶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병이 거의 삶이 되어버려 그냥 삶을 병이라 부르게 된 삶이지만 봄을 맞으면서 환자는 다시 의지를 일으켜 세우고 있다. 그 의지가 환자의 봄꽃이다. 봄은 그러므로 계절적 순환의 주기라기 보다 그 의지를 다지는 시기이다. 그러한 원리 속에 서면 병실의 봄도 얼마든지 올 수 있다. 시인이 구축한 매우 독특한 봄의 원리이다. 독특하긴 하지만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가장 설득력있고 의미있는 봄의 원리가 될 것이다.
시인은 그렇게 똑같은 세상의 움직임을 나름대로의 특유한 원리로 재구성한다. 나는 내게 건네진 서상영의 신작시 다섯 편을 바로 그와 같은 입장, 즉 그의 시 속에서 어떤 시적 원리가 작용하여 세상의 움직임을 재편하고 있으며, 그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방향으로 그의 시를 읽었다.
2
다섯 편의 신작시 가운데서 내가 첫순서로 차례를 잡은 것은 「둥굴유리 애벌레」이다. 일단 이런 이름의 애벌레란 없다. 짐작으로는 둥근 유리 상자에서 자라고 있는 애벌레가 아닐까 싶다. “둥굴유리 애벌레가 우는/야단법석 신전”이라는 말로 미루어 아이들이 많이 찾는 곤충 박물관 같은 곳이 아니었을까 짐작하게 된다. 아마도 둥근 유리 상자 속에서 애벌레를 키워 아이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해놓은 곳을 상상하면 될 듯 싶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애벌레는 “꿈틀대는 게 고작/숨는거”에 불과한 작은 미물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둥근 유리 상자 속에서 꿈틀대는 애벌레는 일정한 삶의 틀에 갇혀 반복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자신을 연상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서상영이 그려내는 시의 세상에서 그 애벌레는 꿈틀대는 미물이 아니라 날개를 달고 날아가게될 먼 미래를 꿈꾸는 자리이기도 하다. 애벌레가 날개의 꿈으로 확장되는데 필요한 것은 애벌레의 오늘을 “먼 미래의 옛날”로 바라보는 시간의 확장이다.
먼 미래의 옛날이여
날개를 달아야지
미로(迷路)가 부드러운 텅 빈 갈대 속
기어가노라면, 나는
소리인가 흔들림인가 어둠인가
콸― 콸―
아 자꾸 우는 이여
아무래도 난 너무 환장했나보다
—「둥굴유리 애벌레」 부분
“먼 미래의 옛날”은 바로 오늘이 될 것이다. 애벌레의 오늘과 먼 미래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나비와 나비의 애벌레가 확연하게 다른 경우가 그 예이다. 애벌레의 오늘은 “꿈틀대는 게 고작”인 미물의 삶이지만 먼 미래는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는 비상의 삶이 된다. 서상영은 그가 구축한 시의 세상에서 시간을 먼 미래로 확장하는 방식으로 애벌레를 날개의 꿈이 잉태되어 있는 자리로 바꾼다.
그렇다면 그 꿈의 자리는 언제나 나비로 부화되는 것일까. 두 번째로 들여다볼 「연두」속에서 살펴보면 그 대답은 그렇게 긍정적이질 못하다. 「연두」의 부제는 「집짓기」이다. 나는 그 집짓기의 집을 결혼을 하여 이루게 되는 일반적인 가정이란 말로 읽었다. 따라서 집짓기는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뒤 꾸려가는 삶이 된다.
연두는 연두빛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단순히 색깔의 하나를 지칭하고 있다기 보다 진한 초록으로 변하기 전의 색깔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집짓기라는 부제와 “오래도록 꿈꾸었던 곳”을 결합하여 결혼하여 마련하고자 하는 가정을 집에 대한 꿈이라고 하면 연두는 연두빛 시절에 품었던 개인적인 꿈이다. 시인은 그 연두에 대해 “빗자루로 연두를 쓸자/내가 사라지는 것이다/빗자루를 놓고 잘못했다 빌어도/나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가정과 개인적 꿈의 충돌로 읽었다.
가정과 개인적 꿈은 종종 충돌을 빗는다. 연두빛 신록은 연두를 버리고 진초록으로 변하며 그 진초록으로 여름의 긴계절을 넘긴다. 연두가 봄의 꿈이라면 진초록은 뜨거운 계절을 넘겨야 하는 현실적 필요에 적응한 빛깔이다. 현실속에선 종종 개인적 꿈을 버려야 가정이 이루어진다. 결혼과 그것을 통하여 이루는 가정은 실상은 꿈의 실현이라기 보다 꿈을 추억 속으로 밀어낸 삶이 될 수 있다. 꿈을 잃었다는 측면에서 보면 그 삶은 ‘수척’하다.
바라보면 바보라서 눈감으면
연두야!
여태 눈물이 성글한 언덕 위다
낙화 없고 꽃만 성한 언덕 위다
추억의 마루를 깔고 앉은
수척한 사내가
물음표처럼 담배를 피고 있다
—「연두—집짓기」 부분
그러나 시인은 우리들이 가정보다 개인적 꿈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는 않다. 「연두」의 마지막 구절로 반복되고 있는 “어여 너도 보내야 할 텐데”라는 싯구는 그 꿈에 대한 추억을 버려야 할텐데 우리들 대다수는 가끔 그 추억을 들추어 보며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다는 말로 들린다.
실제로 꿈을 이룬 삶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될 것인가. 이 세상의 삶은 대부분 화려한 성공이나 꿈의 실현과는 거리가 멀다. 사람들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보다 거의 대부분 그냥저냥 살고 있다. 아니 꿈을 이루기는 커녕 “여린 꽃잎도 다 펼쳐 보이지 못한 채” “바람으로 세상을 떠돌다” “나이 스물”을 겨우 채우고는 “한줌의 재”로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시 「봄날은 간다」를 들여다 보면 “찻집 <女苑>을 지키는 관록의 여자”가 “재작년 봄 순자가 심은 작약꽃”을 바라보며 ‘순자’의 삶이 그랬다고 그 사연을 전하고 있다.
이미 짐작이 가겠지만 여원은 찻집이라기보다 실제로는 술집이며, 그 술집을 꾸려가는 삶은 잔고가 “늘 바닥을 기는” “진부한 살림”으로 이어지는 삶이다. 중요한 것은 그 삶에서도 봄날이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삶의 봄날은 화사하게 오고 가진 못한다.
손톱에 낀 때같이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부분
그렇다면 봄날이 “손톱에 낀 때같이” 가는 그런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꿈틀대는 애벌레에게서 나비의 꿈을 읽을 때만 해도 어떤 희망이 보이는가 싶었지만 나를 지워야 얻을 수 있는 가정을 살아가면서 한때의 꿈이 추억이 되어버린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서상영은 바로 그가 그려내는 시의 세상에서 그런 모든 삶이 다 의미가 있으며 그냥 의미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세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그들의 삶이란 것을 보여주려 한다. 자신의 아버지 일생을 담아낸 「어느 화전민의 일생」에서 우리는 그 실마리를 엿보게 된다.
그는 “일제 때 태어나서 일본말 배우며 소학교를 다녔다는 아버지”의 일생을 한편의 시에 잔잔하게 담아내고 있다. 군대 갔다 온 뒤에 고향에서 줄곧 화전 농사만 지었다는 아버지의 삶은 평범해 보인다. “장에서 돌아오는 날엔 어김없이 술에 취해 집안을 풍비박산 냈”지만 “술이 깨면, 재빨리 하인이 되어 어머니의 악다구니며 자식의 멸시를 받으며 火田으로 나갔던 아버지”는 그냥 이 땅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전형적 아버지의 모습으로 여겨진다. 너무 전형적이어서 나는 그의 아버지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 아버지는 그렇게 흔하디 흔한 삶을 살다가 고향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나 시인이 전하는 아버지의 얘기에서 마지막 부분이 강한 자력으로 내 시선을 끌어가더니 놓아주질 않는다.
…(전략)점점 기운을 잃어, 화전이 점점 산이 되어 갈 때, 불현듯 흙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흙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그렇게 자연스러웠던 아버지.
—「어느 화전민의 일생」 부분
이 대목에 이르렀을 때 내 머릿속에서 떠오른 물음 하나는 세상의 대지는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가였으며, 예전 같았다면 풍화작용에 기대어 찾게 되었을 그 질문의 답을 이 시에서 달리 듣고 있었다. 혹시 대지란 것이 농사를 지으며 “밭에만 서면 달을 알고, 해를 알고, 비를 알고 바람을 알고, 흙의 마음을 알았던 아버지”로부터 생겨나고 그 아버지가 흙으로 돌아가면서 이 세상의 대지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 답이 맞다면 흔하디 흔한 삶을 살았던 이 땅의 무수한 아버지들은 우리들이 먹을 것을 길러내는 이 땅의 기원이 된다. 그에 이르면 그것은 결코 하찮은 인생이 아니다. 이 땅을 이룬 것은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이러한 시각이 결정적으로 확연해지는 것은 「울릉도」이다. 울릉도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지질학적 설명에 기댄다면 신생대나 플라이스토세, 홀로세와 같은 지질시대를 동원하고 화산 활동 등으로 그 답을 마련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울릉도가 그러한 지질학적 과정의 생성물일까. 시인 서상영에게 기대면 울릉도란 섬을 만들어낸 것은 그곳을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으며, 살아갈 사람들이다.
시 속에서 구체적으로 만나보면 ‘도동항’의 햇살이 따가울 정도로 날이 맑고 물이 “잔잔한 날” “노를 저어 먼 바다로” 나가 오징어를 잡아 들였던 “오징어 배꾼”들이 바로 그들이다. 아마 폭풍우에 휩쓸려 죽은 어부들도 많았을 것이다. 울릉도란 섬의 새와 꽃, 바위와 샘은 모두 그들이 만들어낸다. 시인은 바로 그러한 울릉도 생성의 비밀을 전설을 빌어 전한다. “그 옛날 섬에선/바다에 나가 소식이 없는 사람들은/죄다 무엇이 되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리워하면 그리워하는 대로 돌아와/새가 되고 꽃이 되고 바위가 되고 샘이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삶은 쉽지 않은 삶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울릉도 성인봉은 그곳의 어린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서 그들과 함께 솟는다.
살아간다, 섬은
아리면 아린대로
미역줄기처럼 짭짤한 숨을 쉬며
흑비둘기는 후박나무 열매를 쪼고
나리꽃 피고 더덕꽃 지고
어린 사람들은 숲으로 가서 성인이 된다
—「울릉도」 부분
어느 날 바다로 나가서 돌아오지 못한 어부들의 삶 때문에 바다는 “큰 눈물방울”이긴 하지만 그 슬픔의 삶으로 키워낸 섬이 바로 울릉도이다. 서상영이 엮어낸 시의 세상에서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흔하디 흔한 삶의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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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연 무엇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혹 우리의 세상은 돈을 많이 벌거나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어 성공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런 사람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일반적 의식이 아닐까.
시인 서상영은 이번에 선보인 신작시 다섯 편을 통하여 그러한 현실적 세상의 중심을 전혀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다. 그가 자신이 구축한 시의 원리에 의해 엮어낸 시의 세상에선 평범한 사람들의 흔하디 흔한 삶이 세상의 중심이 된다. 그 세상에서 애벌레는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작은 유충이란 의미대신 날개의 꿈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 세상은 가정이라는 꿈을 이루면서 젊은 날 꾸었던 꿈을 잃어버린 삶의 상실을 동시에 전한다. 그 꿈의 상실은 결코 화려하지 않은 술집 여자의 삶으로 나타지만 시의 세상에선 그 삶이 봄날을 밀고 간다. 아니 시인은 그 진부한 삶이 사실은 봄날을 밀고 가면서 계절의 순환을 가져오는 동력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흔하디 흔한 사람들의 삶은 화전을 일구면서 평생을 살았던 아버지에 이르러 아버지에게서 세상 흙의 기원을 발견해내기에 이르고 결국 울릉도에 이르러선 울릉도란 섬과 그곳의 성인봉이 그곳을 살아왔고 또 살아갈 아이들이 그 생성의 밑바탕이란 것을 찾아낸다.
어느 집에서나 아이들을 위해 하나씩 마련해 놓았을 위인 전기의 주인공들이 우리 세상의 중심을 이루어왔을 것 같지만 서상영은 그에 대해 고개를 가로 젓는다. 세상을 이루고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세상 사람들이다. 그 삶은 한때 날개의 꿈으로 꿈틀대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그 삶은 가정을 이룬 뒤 날개의 꿈을 추억으로 반추하는 쓸쓸한 삶이 되기도 한다. 그 삶은 봄날을 밀고 가며 계절을 순환시키는 동력이며, 그 삶은 이 세상 대지의 기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삶의 어린 시절이 자라 울릉도의 성인봉으로 솟는다. 세상의 중심은 바로 그런 삶이다.
서상영의 시는 여기 우리 사는 세상에 사람이 있다며 그 세상을 평범하면서도 힘들고 슬프게 살아가는 삶에게 바치는 노래이기도 하다. 그의 노래에 고개가 끄덕여 진다면 어느 날 울릉도를 여행할 때 그곳 사람들의 슬픔으로 일렁이는 커다란 “눈물방울,” 바로 그곳의 바다에 눈물 방울 하나를 보태 그들의 삶을 위로해 주시고, 그들의 삶을 보다 애정어린 눈길로 바라봐 주시라. 그리고 그들과 함께 모두가 세상의 중심으로 우뚝서시라.
(『계간 문예』, 2012년 가을호)
**서상영 시인의 시집
─서상영, 『꽃과 숨기장난』, 문학과지성사, 2006
2 thoughts on “여기 사람이 있다는 시인의 노래 — 서상영의 신작시”
시인들은 행복할 것 같아요,
자신의 시어를 시인 자신보다 더 공감하는 이가 있어서.
그래, 내 시는 이렇게 읽어야지.
시인들은 행복할 것 같아요.
자신의 시편을 종횡하며 새로운 정서를 만들어 내는 이가 있어서.
아니, 내 시에 이런 구석이 있었다고?
오독을 하는 바람에 시인이 서운해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 경우 원고를 거절당하기도 하죠. ㅋㅋ
서상영 시인은 사실은 제 후배입니다.
중간에 좀 헷갈리는 부분이 있긴 있었어요.
연두는 사람 이름이 아닌가 싶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