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이면에 어른거리는 우리 시대의 어두운 자화상 – 박판식의 신작시

Photo by Kim Dong Won
『현대시』에 실린 시인 박판식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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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표현을 항상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시인의 표현은 종종 우리들의 일반적인 감각과 충돌을 일으키면서 우리들을 당혹스럽게 만들 때가 있다. 시인 박판식의 경우에도 그런 예를 만날 수 있다.
가령 박판식의 첫시집에 실린 그의 시 「칠월」은 “고통으로 물집 잡힌 포도들”이란 구절로 시작된다. 따라서 시인의 눈에 포도는 고통으로 물집이 잡혀 있는 과일이다. 마을의 전설을 안고 주저리주저리 영글어가며 고향을 환기시키는 이육사의 청포도는 처음 읽어도 쉽게 사람들의 감각에 수용이 되지만 박판식의 포도는 그렇질 못하다. 왜 그런 것일까. 그것은 그의 포도가 과일이라기보다 시인이 갖고 있는 어떤 세계관이 투영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이육사의 청포도가 하늘의 꿈이 알알이 들어가 박혀 있고 고달픈 몸을 이끌고 찾아온 손님을 맞아 그 앞에 내놓고 싶은 고향의 과일인 반면 박판식의 포도는 “방직공장의 처녀들”이 손이나 발에 고통스럽게 물집이 잡히도록 일해야 하는 세상과 그 세상이 포도라는 과일에 투영된 결과물일 수 있다. 때문에 박판식의 포도를 받아들이려면 달콤한 과즙이 가득차 있는 과일이 아니라 물집이 잡히도록 일해야 하는 세상의 다른 이름으로 그의 포도를 수용해야 한다. 아마도 그런 세상이란 시인의 다른 시를 인용하여 좀더 구체화하자면 “쓰러지지 않기 위해 쉼 없이 강철 팽이처럼 돌아가”며 살아가야 하는 ‘혹성'(「심장의 타종」) 같은 곳이 될 것이다. 그곳은 곧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지구가 되겠지만 시인은 그 지구가 낯설다는 듯이 우리의 행성을 마치 다른 별이라도 되는 듯 혹성이라는 말로 부르고 있다.
나는 박판식의 신작시 다섯 편도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보며 시인의 표현 이면에서 엿보이는 세상이나 그의 세계관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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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살펴볼 시는 「빗사발」이다. 빗물받이로 쓰고 있는 사발을 뜻한다. 그런 사발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시인이 만들어낸 조어이다.
처음에 읽었을 때는 난해하게 느껴졌다. 난해하면 시와의 거리감이 벌어진다. 때문에 시와의 거리감을 좁히기 위하여 이 시를 접한 내가 처음으로 한 것은 시의 흐름과 풍경을 아주 평이하게 재구성해보는 것이었다. 그러자 비가 오는 어느 날 어느 집의 대문간에서 지붕에서 떨어지고 있는 빗물을 받아내며 빗물받이로 쓰이고 있는 사발 하나가 보였다. 집의 주변으론 잡초들이 무성했고 잡초들 사이에 개양귀비꽃이 피어 있었다. 집은 벽돌집이었으며 한쪽 벽에 작업용 비옷이 걸려 있었다. 그 풍경을 앞에 두고 시인은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친구를 생각하고 있었다. 항상 이상한 얘기를 하는 친구였다. 그런데 그 친구의 얘기들이 그의 머릿속을 뒤흔들고 있었다. 친구 생각을 하는 동안 머리 위로 짙은 먹구름이 가득했다.
내가 구성한 얘기의 흐름과 달리 시는 풍경이 아니라 친구의 얘기로 시작된다.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그 ‘친구는’ “허벅지에서 뽑았다는 깃털을 보여주”기도 하고 “장화를 벗어 자신의 구멍이라고도” 하는 친구이다. 정신이 이상한 친구임에 분명해 보인다. 시인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한 듯하다. 그를 가리켜 “꽉 잠기지 않는 수도꼭지”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친구의 “이상한 목소리”는 시인의 귓속에서 “작은 무상을 이야기”하며 시인의 머릿속을 뒤흔든다. 왜 미친 친구의 이야기가 시인의 머릿속을 뒤흔드는 것일까. 혹 그것은 미친 친구보다 이 사회가 더 미쳐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사회가 미쳤다는 인식이 풍경에 투영되면 풍경은 어떤 모습으로 와닿게 되는가.

자신을 진품이라고 믿는 사발은
대문간에서 비를 받으며 부서지지 않으려고 떨었다
—「빗사발」 부분

시인은 지붕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아내고 있는 사발을 가리켜 사발이 “대문간에서 비를 받으며 부서지지 않으려고 떨”고 있다고 말한다. 사발은 국이나 밥을 담는 용도의 그릇이다. 그 사발이 대문간에서 물을 받고 있다는 것은 원래의 용도를 잃었다는 뜻이 된다. 물을 받는다고 사발이 부서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용도를 잃고 원래의 자리에서 밀려난 사발은 이제 부서지지 않으려고 떨고 있다.
사발이 떨고 있는 것으로 비치는 것은 미친 친구가 일깨운 미친 사회가 투영된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 세상에선 인간의 존재 자체를 하나의 가치로 존중하지 않고 쓸모와 용도로 인간을 재단한다. 그리고 용도를 잃으면 사람마저도 폐기하고 버리려 든다. 그러한 사회적 인식이 투영되면 대문간에서 빗물을 받으며 다른 용도로 버티고 있는 사발도 그 용도마저 잃고 나면 필연적으로 처하게될 폐기의 운명앞에서 떨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부서지지 않기 위해 버티면서 떨고 있는 사발의 뒤에는 인간을 용도로 재단하며 이용하고 폐기하는 미친 사회가 어른거린다.
두 번째의 시 「성(聖)서울—구」 또한 아주 평이한 흐름의 이야기로 바꾸어 볼 수 있을 듯 싶다. 시인은 어느 날 어느 소설가와 함께 서울에 있는 인왕산의 천향암에 오른다. 시인은 그 곳에서 만난 풍경을 나열하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들이 만나는 첫장면은 “소설가가 따라가려다 놓쳐버린 지네 한 마리가/인왕산 천향암 샘 속에 들어가 있”는 장면이다. 샘의 물은 맑다. 그러나 그 물 속에 지네가 들어가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아무도 그 물을 먹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맑은 샘은 졸지에 지네 한 마리로 인하여 더러운 샘이 되고 만다.
그러나 시인은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지네가 들어갔다고 사람들이 모두 더럽다고 하지만 그 더러운 샘에서 여전히 맑은 물이 솟고 있기 때문이다. 지네가 그곳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샘은 여전히 맑은 물이 솟는 샘일 것이다. 때문에 시인은 ‘창녀’에게서도 “숙녀의 음성”이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시인은 “크게 깨달은 고려 스님 대우는/창녀가 출산한 아이였다”는 사실을 덧붙여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는 더러운 샘에서 맑은 물이 솟았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시인의 이러한 인식 속에선 더러움과 맑음의 경계가 지워져 버린다.
숲엔 말라서 죽어가고 있는 참나무들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말라 죽어가고 있는 나무를 보고 있을 때 시인은 그 나무에게서 ‘두레박’을 본다. 나무를 나무로 보는 나에겐 삶과 죽음이 있지만 두레박에게 삶과 죽음은 없을 것이다. 두레박이 되면 살아있을 때의 나무는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올려 푸른 잎의 목을 축여준 존재가 된다. 죽은 나무는 죽은 것이 아니라 다만 “물을 길어 올린 지 한참 된 두레박”일 뿐이다. 시인의 시선 속에선 죽음과 삶이 구별을 잃는다.
그리고 또 나는 붉은 노을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인은 전혀 다른 얘기를 한다.

불에 닿으면 하늘의 공기도 화상 입는다
—「성(聖)서울—구」 부분

왜 내가 본 붉은 노을이 시인의 눈엔 불에 닿아 하늘의 공기가 입은 ‘화상’이 된 것일까. 혹 그것이 노을을 바라볼 때 분신으로 저항하며 목숨을 던져야 했던 사람들이 시인의 머리 속을 스쳐간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는 버려진 빈 접시에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흙이 쌓이고, 그리하여 그곳에서 풀이 자란 것을 보았다. 시인이 “접시조차도 오래 비어있으면 무엇인가를 창조하려 든다”고 말했을 때 바로 내가 본 것이었다. 무엇이든 채우려고만 들고 비어있음의 미학을 모르는 사회가 그 자리에 투영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천향암 샘 속”을 헤엄치고 있는 ‘올챙이들’을 보았다. 올챙이가 헤엄을 치는 것은 내게는 본능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것을 “임시변통의 지혜”라고 이름짓는다. 자연의 세계에선 미물들도 삶에 관한한 그러한 지혜를 갖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인간에게 삶이란 본능만으로 헤쳐갈 수 없는 힘겹고 험난한 것이다. 인간이 삶에 관한한 올챙이에도 못미치는 느낌이었다.
다음으로 살펴볼 「성(聖)서울—석양」은 대중목욕탕의 풍경을 옮기면서 볼록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쳐보고 있는 한 아이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달걀 모양의 거울에다
호기심 어린 얼굴을 비쳐보는 어린아이
너는 거울 속의 네가 어디쯤 있는지를 추적 중이고
언젠가 네가 잃어버릴 소중한 지금은
자신을 조금씩 시간에게 소매(小賣)하는 중
—「성(聖)서울—석양」 부분

시인에게 아이들이 성장하여 어른이 된다는 것은 지금을 조금씩 시간에게 팔아 넘기면서 나를 잃어가는 것이다. 박판식의 시에서 아이들의 탄생이 축복이 아닌 경우를 찾아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의 시 「개종」은 “수정할 수 없는 오자처럼 아이는 자라고 뱃속은 복마전이다”라고 말한다. 아이가 오자이니 삶이 정상적이지 않을 것이며, 아이를 잉태한 뱃속이 복마전이니 이미 출발부터 축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교육마저 아이들을 자살로 내몰 정도로 경쟁적 환경이 된 것을 생각하면 그의 생각에 무리가 있다고 탓하기는 어려워보인다.
시 「성(聖)서울—실종」은 탑골 공원이나 지하 서울역 등의 거리를 쏘다니며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옮겨놓은 듯이 보인다. 그 풍경 속에선 “지하 서울역 공용의자”에 앉아 “겨울 부츠를 신은 채로 꽤매고 있는 여자”나 “말없이 손바닥을 내”밀며 구걸을 하는 ‘행려자,’ 그 행려자가 “무섭고 부끄러”워 “지하철 개찰구로 잽싸게 달아나”는 ‘소녀’ 등을 접할 수 있다. 그냥 일반적으로 서울 거리로 나서면 우리들이 흔하게 접할 수 있는 풍경이다. 그 풍경을 시인은 이렇게 마무리한다.

옛날의 꿈속에서 오늘은 이미 이루어졌고
마음의 종은 울리고, 꿈은 부화하여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성(聖)서울—실종」 부분

꿈이란 무엇일까. 꿈이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만약 우리들의 꿈이 달걀처럼 부화하는 것이라면 내 꿈은 달걀에 담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들은 모두 찍어내듯 똑같은 달걀의 꿈을 가진 것은 아닐까. 안정되고 좋은 직장을 얻어 좀더 부유하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꿈이 되어버린 것이 우리의 사회가 아닐까. 달걀의 꿈은 병아리로 부화될 수밖에 없으며, 그런 꿈은 내 꿈과 네 꿈의 구별이 없이 매번 똑같이 반복된다. 아니, 어찌보면 똑같은 꿈들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사회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살펴본 네 편의 시에서 나는 난해함으로 거리를 벌리며 내게서 멀어지려고 하는 시들을 내 곁으로 끌어당기기 위해 평이한 현실적 풍경을 상상하고 그 풍경을 징검다리로 삼아 내가 상상한 현실적 풍경과 시의 사이를 오고 갔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으로 살펴볼 「뿔」에서 벽에 부딪쳤다. 「뿔」은 그러한 방식의 평이한 재구성이 어려웠다. 이미지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으며, 어떤 현실적인 흐름으로 그 이미지들을 엮어내기가 불가능했다.
그 이미지들의 마지막에 “망가진 싸리 울타리”가 “파도에 휩쓸리면서” 물에 잠겨있었으며, 시인은 물밖으로 삐져나온 나뭇가지들을 가리켜 “출구를 찾고 있”는 “현기증 나는 뿔”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말한 파도에서 세파를 떠올리며 세파에 휩쓸려 살아가고 있는 우리와 그 어지러운 삶 속에서 출구를 찾고 있는 우리들을 상상했다. 그러나 해명되지 않는 앞의 이미지들이 어지러워 자신할 수가 없었다.

3
박판식의 시는 쉽게 읽히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시가 우리 곁에서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비오는 날 어느 집의 문간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고 있는 이빨빠진 사발이나 인왕산 천향암을 오르며 만나는 샘이나 말라죽은 참나무, 파도에 휩쓸려 물에 잠겨 있는 망가진 싸리 울타리는 사실은 우리 곁의 풍경이다. 그런데도 그 풍경은 아주 멀어 보인다. 그 풍경이 그냥 일반적인 풍경이 아니라 사회나 삶에 대한 그의 인식이 투영된 풍경이기 때문이다. 그의 인식은 그 이미지들의 뒤에서 그림자처럼 어른거린다. 일부 이미지들은 그 이미지들에 투영된 사회적 인식을 읽어낼 수 있었으나 일부 이미지들은 그것을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시의 이미지에 어른거리는 삶에 대한 그의 인식을 읽어냈을 때 그의 시가 가까이 다가왔고 그것을 읽어내지 못했을 때 그의 시는 멀어졌다. 그의 시는 가까이 왔다 멀어지곤 했다.
(『현대시』, 2012년 10월호)

**박판식 시인의 시집
─박판식, 『밤의 피치카토』, 천년의시작, 2004

2 thoughts on “표현의 이면에 어른거리는 우리 시대의 어두운 자화상 – 박판식의 신작시

  1. 시인의 환하게 웃는 이미지 컷이 있어 생소한 시가 그래도 조금 읽혀지네요.^^
    다섯 편의 시로 풀어내는 시평은 암만 봐도 신기한데,
    시인만큼이나 평론가도 어려운 직업 같습니다.^^

    1. 유난히 시가 어려워서 평단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일군의 시인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한명이예요.
      그동안의 시들이 너무 뻔한 측면들도 있어서 이들이 시의 다양성에 끼친 영향은 확실히 긍정적인데 그래도 어렵긴 한 것 같아요.
      한편에 붙일 해설도 엄청 길어지는데 다섯 편을 짧게 말하려니 그게 힘들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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