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쓴 시인의 진화론 —김주대 시집 『그리움의 넓이』

김주대 시집 『그리움의 넓이』
김주대 시집 『그리움의 넓이』

1
루카치는 말했었다. “별이 빛나는 하늘을 보고 가야 할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고. 그 행복했던 시절, 밤하늘의 별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의 방향이자 우리의 삶이 투영된 무한한 이야기의 공간이었다. 그 시절엔 철마다 자리를 바꾸는 별들의 한가운데에 별 하나가 붙박여 하늘의 중심을 잡아주었다. 바로 북극성이다. 북극성을 중심으로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별들은 그중에서 몇개를 엮어 북두칠성과 같은 별자리를 이루었고 별자리는 곧 우리의 이야기가 되곤 했다.
그렇다면 혹 한 편의 시를 북극성처럼 밤하늘에 걸어놓은 뒤, 여기저기 흩뿌려진 별을 올려다보듯 시를 읽고, 그것으로 방향을 짚어내거나 시인이 그려낸 별자리를 찾아내며 밤길을 가는 것도 가능할까. 나는 김주대의 시집 『그리움의 넓이』를 그렇게 읽어보려 한다. 내가 그의 시집을 이렇게 읽어보려 한 것은 우연은 아니었다. 나는 시집 속의 시들이 어떤 일목요연한 흐름을 이루며 줄을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밤하늘의 별처럼 시집 속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 연유로 나는 한편의 시를 골라 그의 시가 이끌어줄 내 걸음의 방향을 묻기로 했으며, 그 시가 일러주는 대로 길을 갈 것이다.

2
내가 밤하늘의 한가운데에 걸어 북극성으로 삼은 시는 「시간의 사건」이다. 「시간의 사건」은 시집의 첫머리에 걸려있다. 북극성으로 북쪽의 위치를 점치고 그것으로 방향을 가늠하듯 나는 「시간의 사건」의 첫 구절을 읽어 내가 가야할 방향을 묻는다.

우주는 지구를 저질러놓고
용암 같은 점액질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육신을 만난 시간이 뼛속에 나이테를 새겨
뜨겁고 촘촘히 과거를 감아놓았다
—「시간의 사건」 부분

김주대는 우주가 “지구를 저질러놓”은 뒤 “점액질의 시간”이 흘렀다고 했다. ‘저지르다’라는 말은 계획된 치밀한 행동이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충동적 행동을 가리킨다. 저지른 일의 결과는 거의 실수에 가깝다. 시인의 눈에 지구는 의도하지 않은 사건의 결과이다. 지구에 흐른 시간과 그 시간이 축적되며 이룩된 역사를 모종의 합리적이고 치밀한 계획 아래 이루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탓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을 흘러간 시간은 “점액질의 시간”이다. 점액질의 시간은 끈적끈적할 것이다. 끈적끈적한 시간은 과거와 현재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과거는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현재는 또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 시인은 그 시간이 시인의 육신을 만나 “뼛속에 나이테를 새겨/뜨겁고 촘촘히 과거를 감아놓았다”고 말한다. 언뜻 느끼기엔 과거가 그에게 속박의 시간이 되었다는 느낌이다.
과연 어떤 과거가 그의 몸에 새겨져 속박이 된 것일까. 나는 「시간의 사건」의 첫 부분을 읽으면서 속박이 된 시인의 과거로 가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가장 먼저 가야할 길을 밝혀준 북극성의 빛은 시인의 과거로 향하고 있었다.
시인의 과거로 가자 가장 가까이 그의 어머니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보이질 않는다. 그는 고백하고 있다.

외할머니 밑에서 자란 나에게 어머니는 늘 잠깐 다녀가는 아모레 화장품 냄새였다. 누나의 동동구루무를 하얀 종이 위에 쏟아놓고 냄새를 맡으며 어머니를 생각하다가 죽도록 맞은 적도 있었다.
—「어머니」 부분

시인에게 어머니는 결핍의 존재였다. 존재가 결핍이 되자 시인은 그 결핍의 자리를 어머니의 화장품 냄새로 메우려 한다.

햇살을 과자인 듯 조몰락거리며 외할머니를 기다리던 나는 꿈속에서 가끔 고향의 어머니를 만났더랬습니다. 그런 날엔 햇살과 함께 일어나 고무신 두 량으로 칙칙폭폭 칙칙폭폭 고향 가는 기차놀이를 하였지요. 고개를 잔뜩 숙이고 기차를 밀던 내가 주인 여자의 아모레 화장품 냄새를 따라간 날이 있었습니다. 아득한 추억 속 아모레는 어머니의 냄새였으므로 어린 후각의 기억이 주인 여자를 졸졸 따라 기차를 몰았었지요.
—「아모레 화장품을 기억하십니까」 부분

그 결핍은 시인이 성인이 된 뒤에도 계속 결핍으로 남아 그는 “그후로 나는 아모레 화장품 냄새가 나는 여자만 지나가면 코를 킁킁거리며 몇 걸음 따라 걷는 버릇이 생겼”으며, “결혼을 하고도 집에 들어가지 않은 날은 대부분 아모레 냄새가 나는 다른 여자를 따라간 날들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어느 것이 더 늦고 이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과거엔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형이 모두 한 집에 살던 시절도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때의 풍경은 그다지 평온해 보이질 않는다. “어릴 적 어느 겨울”로 기억되는 그날로 돌아가보면 아버지가 고함을 지르며 걷어찬 밥상이 나뒹굴고 있고, 어머니는 “죽은 개처럼 끌려다니”며 “아이고 이봐요 한번만 봐줘요 왜 이래요” 하며 애원하고 있다. 그 기억 속의 장면을 계속 들여다보면 아버지는 “무섭게 빛을 내”던 도끼를 들어 장독을 두들겨 부수고 있으며, 형은 “거친 숨소리를” 몰아쉬며 “헛간 나무 그림자 속에 칼을 숨기”고 있다. 시인은 그 “어린 날”을 가리켜 “목숨의 어두운 밑바닥 같은 걸 처음으로 보았던” (「어디만큼 왔을라나」)날이었다고 적어놓고 있다.
또 그의 어린 날을 들여다보면 작은 권력 앞에 줄을 서서 맛보았던 비애의 순간도 있다. 상국이의 라면땅에서 나오는 그 작은 권력은 아이들을 “무료급식소의 노숙자들처럼” 길게 줄을 세우고 “짧디 짧은 라면땅 한 올에 목숨을 걸”(「라면땅 인생」)게 만든다. 어머니는 곁에 없었으며 집안은 가난한 데다가 단란하지도 못했다. 그의 과거엔 많은 것이 결핍되어 있었다.
그 결핍은 이제 해소가 된 것일까? 나는 문득 시인의 오늘이 궁금해진다. 오늘은 시간이 지나면 미래의 과거가 될 것이다. 시인의 오늘은 과연 어떠한가.
오늘로 옮겨오자 어머니의 결핍을 앓으며 성장했던 시인은 아버지가 되어 있다.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자란 그가 이제는 가난한 아버지가 되어 있고, 그 아버지의 딸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새벽까지 일을 한다. 그러나 가난이 그의 것만은 아니다. 가난으로 인한 빈궁한 삶은 시인의 집안뿐만 아니라 도처에서 눈에 띈다.
“무릎이 많이도 튀어나온 때에 쩐 바지의 사내가” “시장 입구”에서 “버려진 사과 앞에 멈추어” 서 있을 때 우리는 그에게서 가난한 삶이 바닥으로 몰렸을 때의 모습을 접한다.

산발한 머리를 들어 사방을 한번 둘러보더니
발가락이 삐져나온 시커먼 운동화 발로 슬쩍슬쩍 사과를 굴려
구석으로 몰고 간다
—「한 끼」 부분

그것이 사내의 한 끼였다. 그런 노숙자의 삶은 또다른 사내에게서도 엿보인다. 이번의 사내는 누군가 버리고 간 “공원 나무탁자 위”의 캔을 팔꿈치로 슬며시 밀어서 “묵직”한 무게를 확인해보더니 “낚아채듯 캔을 들어/먹이 문 길고양이처럼 재빨리 자리를 옮”겨서 그것을 입에 털어넣는다.

나무그늘 아래서 목을 뒤로 활짝 젖히고
시커멓게 열린 목구멍 안으로 캔을 기울이자
남은 음료가 질금질금 쏟아진다
울대뼈가 몇번 꿈틀거린 후
길게 내민 허연 혓바닥 위로
캔 속의 마지막 한 방울이 똑, 떨어진다
—「노숙」 부분

빈궁한 삶이 노숙의 처지에 내몰린 사람들만의 몫은 아니다. 한때의 “노동해방 투사이자 가장 주목받던 작가”를 “큰 출판사가 주최하는 시상식 뒤풀이에서 20년 만에” 만난 자리에서도 빈궁한 삶은 눈에 띈다. 둘이 “행사장을 빠져나와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부딪”칠 때 우리는 그들의 빈궁한 현재를 볼 수 있다.

그는 감격하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어느 틈에 싸왔는지 은박지에 돌돌 만 식지 않은 탕수육을 술잔 앞에 시부적시부적 꺼내놓고 있었다.
—「슬픈 탕수육」 부분

궁핍하고 가난한 삶은 시인에게 눈물이자 슬픔의 동의어이다. 그 슬픔이 가장 진하게 전해지는 것은 그가 딸에 대해 이야기할 때이다. “시급 오천원짜리” 아르바이트를 하는 딸만 생각하면 “진열장 속 비싼 음식 모형”만 보아도 아버지로서의 시인은 눈물이 나고, 그의 “몸에는 어느새 눈물 냄새가 번진다”(「먹먹한」).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이는 이제 시인의 슬픔이 된다.

아르바이트 끝나고 새벽에 들어오는 아이의
추운 발소리를 듣는 애비는 잠결에
귀로 운다
—「부녀」 전문

그렇다면 왜 슬픈 것일까. 가난하고 궁핍한 삶이란 정말 슬픈 것일까. 김주대에게 가난하고 빈궁한 삶이 서글픈 것은 그러한 삶이 본질적으로 슬픔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본주의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세상은 돈으로 존재 가치를 재단하려 든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존재가 삶의 밑바닥으로 내몰릴 때 우리는 슬프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시인이 가난한 삶 앞에서 슬퍼지는 연유이다. 시인은 그런 삶을 어떤 언어로도 미화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눈물은 돈이 없다는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돈이 없다는 이유로 존재 가치가 지워지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그 분노에도 어찌할 수 없는 서글픔에서 온다. 눈물은 그런 세상에 대한 김주대의 가장 소극적 저항이기도 하다. 눈물이 소극적이나마 저항이 되는 것은 눈물로 그곳에서의 삶을 견디고 있기 때문이다.
김주대에게 눈물은 밖을 견디는 힘이다. 시인은 철근콘크리트 벽에 붉게 흘러내린 녹 자국을 보면서 “소처럼 서서 빗속에 붉게 운다”고 말한다. 그 자국이 시인의 눈에는 “밖을 견”디면서 “안을 지”켜낸 눈물의 흔적이다. 그 눈물 덕분에 “안은 무사하다”(「철근콘크리트 벽」).
그러나 눈물로는 가치를 손상당한 존재의 결핍을 위로하며 시간을 견뎌갈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 결핍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는 없다. 때문에 마냥 울고 있을 수만은 없다. 무언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그것은 아마도 돈과 관계없이 우리의 존재 가치를 다시 세우는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김주대에게 그 방법은 우리의, 나의 과거로 거슬러오르는 것이다. 사실 나는 처음에 북극성의 빛을 살필 때 그 빛이 가리키는 방향을 시인의 과거로 가라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시인의 과거로 떠난 나의 행보는 시인의 어머니와 어린 시절이라는 가까운 과거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미래의 과거가 될 현재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가까운 과거와 미래의 과거가 될 현재에선 현재와 미래를 속박하고 있는 과거를 보았다. 북극성의 빛은 그런 나에게 이제 가까운 과거와 내가 현재라는 이름으로 살펴보던 미래의 과거로부터 더 먼 과거로 걸음을 옮겨보라고 말한다. 그것은 시인이 앞서 걸으며 나를 이끈 길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여 더 먼 과거로 거슬러오르자 그곳에서 뜨겁게 사랑을 나누고 있는 시인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시인은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아버지가 빨아 먹던 할머니의 젖, 그 할머니가 먹던 미역국, 그 미역을 키운 바다에 이른다. 그리고 결국은 그 “바다를 쏟아낸 하늘”에 이르고야 만다.

아버지의 정자는 갈기를 달고 사자처럼 달렸다
나의 시작은
소용돌이치는 어머니의 열기 속으로
아버지가 맹렬히 뛰어들 때부터이다
아니, 나의 시작은
아버지가 어머니의 벌거벗은 곡선 위에서
꼬리뼈를 흔들며 정자를 태동시키던 때부터이다
아니, 정자 이전 수유기의 아버지가
할머니 유두에 입을 대던 그 따스했던 처음부터
할머니의 젖과, 젖을 돌게 한 펄펄 끓던 미역국부터
미역부터가 나의 시작이다
아니, 더 거슬러올라가 나는 물을 잡고 울던 해저
미역을 밀어올린 바다이기도 하지만
천둥과 시퍼런 폭우로
일렁이는 바다를 쏟아낸 하늘이 나의 진짜 시작이다
—「인내천(人乃天)」 부분

아득한 과거로 거슬러오르자 그 세상에선 사람이 곧 하늘이 된다. 어떤 결핍을 가진 사람도,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그곳에선 모두가 하늘이다.
나는 이제 다시 북극성을 쳐다보며 지금까지 내가 읽어온 시의 길이 맞는지를 확인해야 할 순간이라고 느낀다. 처음에 북극성의 빛은 나에게 시인의 과거로 가보라고 했다. 시인의 뼛속에 새겨진 과거는 결핍의 과거였으며, 사람들을 삶의 밑바닥으로 밀어넣는 속박의 과거였다. 과거를 더욱 가까이 거슬러오를 때, 다시 말하여 곧 과거가 될 현재를 맴돌 때, 그 가까운 과거는 모두 속박이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시간을 계속 거슬러올라 하늘을 “나의 시작”으로 삼기에 이른다. 아마도 시인은 더욱 거슬러올라 우주가 시작되던 순간에 이르렀으리라. 바로 그 순간 자본주의 세상에서 존재 가치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모두 하늘이요, 우주가 되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진다.

나는 사건이다
깊은 숲 속 시간의 무거운 흐름 위로
어느날 튀어오른 물고기처럼
세상에 왔다
—「시간의 사건」 부분

시인은 그냥 사건이라고 말했지만 시간을 거슬러올라 발견한 ‘나’는 그냥 사건이 아니라 사실은 놀라운 사건이다. 그는 속박이었던 시간을 이제 이 세상을 만든 그 무구한 세월이 집적된 존재로 환원시키면서 존재 가치를 새롭게 세운다. 그 시간은 어머니의 시간을 극복한 시간이다.

어머니의 무당은 육신의 나이테를 벗겨
기록을 읽고 미래를 점쳤지만
시간의 열기 속에
형체도 없이 사라지기 전까지
생은 시간을 역류하여 솟아오른 사건이다
—「시간의 사건」 부분

어머니의 시간 속에선 과거가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까지 속박한다. 어머니는 그래서 아이의 몸에 새겨진 과거를 무당의 힘을 빌려 점쳐보고 그에 맞추어 자식의 삶을 옭아매는 속박을 어떻게든 풀어보려 하지만 자식은 그 시간을 역류하여 아득한 과거로 거슬러오르고 그 역류의 몸짓으로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세운다.
그렇다면 시간을 역류하여 존재 가치를 다시 세운 뒤로 세상은 달라지는 것일까. 달라진다면 어떻게 달라지는 것일까.
시간에 순응할 때 화석은 굳어 있는 돌이다. 그러나 시간을 역류하면 그 돌은 하늘이 된다.

돌이 된 하늘, 새는
한번의 날갯짓으로 백만년을 난다
흐르지 않는 시간의 딱딱한 결을 뚫고
퇴적된 돌 속 바람 소리가 바위처럼 융기한다
—「새의 화석」 부분

그리하여 김주대에 이르러 진화론이 다시 씌어지기 시작한다. 지금까지의 진화론 속에서 우리는 환경에 대한 적응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해야 했다. 자본주의 세상에선 돈을 놓고 경쟁하여 그 경쟁에서 이긴 자들이 승리자가 된다. 그러나 김주대의 진화론은 그 경쟁에서 패배한 자들을 위한 진화론이다. 현실의 진화론에서는 허공에 적응한 승리의 뒤끝에서 새의 진화가 설명되지만 그에게 새의 진화는 “벼랑 끝에 이른 삶”이 “허공에서 길을 찾”을 때 이루어진다. 다시 말하여 새는 하늘을 나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추방된” 운명을 “하늘에 터널을 뚫”(「진화론」)으며 극복한 존재이다.
동굴도롱뇽붙이의 진화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된다. 동굴도롱뇽붙이는 동굴에 살면서 눈이 퇴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찾아 “시력을 버린 것”이다. 시력의 퇴화는 곧 사랑의 진화된 양상이다.

내가 시력을 버린 것은 사랑이 눈으로 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눈으로 나눈 사랑의 가벼움이 무지개를 만들던 순간에도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동굴도롱뇽붙이」 부분

진화는 환경에 대한 적응이 아니라 벼랑 끝으로 몰리거나 꿈을 가진 자들이 이룩한 능동적 대응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김주대의 진화론은 이제 현실로 옮겨간다. 한진중공업의 김진숙이 정리해고 철회와 노사합의 이행을 외치며 크레인 위로 오른 것은 고공 농성이 아니라 사실은 새로운 진화의 모습이다.

차가운 바람이 주검처럼 너풀대는 곳
서 있기만 해도
반평생 용접공의 불똥
빵구 난 몸 구멍마다 고름처럼 피리 소리가 새어나오는 곳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목매달아 죽은 시신의 얼굴이 편안했던 곳
죽은 자와 산 자가 연대하는
목숨의 바닥이자 고공인 크레인에서
인간의 궁극을 운다
—「김진숙」 부분

사람들이 “인간의 궁극”을 우는 그 울음에 공명하여 그 자리에 함께 모이고, 그 사람들 모두가 “고공”이 될 때 그것이 바로 이 사회의 집단적 진화가 된다. 그리고 사회가 진화될 때 시인의 바람대로 ‘세상의 모든 김진숙들’이 “살아서 뚜벅뚜벅” 크레인을 내려오게 된다. 시인은 뚜벅뚜벅 걸어서 내려온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 순간 함께 고공이 된 수많은 사람들이 김진숙을 살아 내려오게 하는 허공을 이루는 것이며, 김진숙은 그 허공을 날아 하늘에 터널을 뚫고 있는 새에 다름 아니다. 무수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드는 그 지상의 허공이 없을 때 고공에 오른 자는 떨어져 죽는다.
이제 북극성의 별빛을 길 안내로 삼아 걸었던 밤길의 끝에 다 온 느낌이다. 시인이 새롭게 쓴 진화된 세상에선 어디서나 풍경이 편안하다. 그 세상에선 하늘의 구름이 지나갈 때 양떼가 이동하는 하늘을 볼 수 있다. 양떼구름을 양떼로 줄여 쓴 것이라 평범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내게는 양처럼 착한 존재가 하늘 같은 가치를 갖게 되는 세상처럼 여겨졌다. 아마도 아직 진화되지 않은 세상에선 산이 그처럼 착한 양떼가 이동하는 길을 막는 험난한 장벽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진화된 세상의 풍경은 그렇지 않다. 그 세상에선 산이 양떼가 지나갈 때까지 낮게 엎드려 높이를 낮춘다.

양떼가 이동하는 하늘을 보았다
몽골의 어느 길가 깊고 순한 사람들처럼
산은
양들이 다 지나갈 때까지 엎드려 있었다
—「구름」 전문

진화된 세상에서도 어느 집의 빨랫줄에 널어놓은 양말에서 “한주일의 고달팠던 발들”이 보이는 것은 여전하다. 하지만 이제 이곳에선 그 한주의 고달픔을 햇살이 위로해주고 있다.

발들이 걸어왔던 눅눅한 길을 햇살이 어루만져주고 있다
월요일에는 저 가운데 하나가
뽀송뽀송한 몸으로
주인을 따라 길을 나설 것이다
—「양말 여섯켤레」 부분

이제 세상은 평온하다. 새롭게 진화된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그 진화의 세상에 와 있다. 그럼에도 이 진화된 세상을 우리 모두가 향유하고 있는 세상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멀어 보인다. 그 진화된 세상으로 모두가 함께 갈 수 있는 길이 아직 진화가 덜된 세력에 의해 여전히 막혀 있기 때문이다.

3
걸음을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다. 나는 다시 북극성을 올려다본다.

아들이 나의 해결할 수 없는 벅찬 사건이듯이
모든 생은 스스로를 수습한다
—「시간의 사건」 부분

어머니의 시간을 살았던 시인은 그 시간을 극복하여 아버지의 시간을 세우고 그 시간을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으로 자신의 시간을 마무리 짓는다. 어머니의 시간이 과거에 순응하며 살아가려 했던 시간이라면 아버지의 시간은 속박의 시간이 된 가까운 과거를 거슬러올라 하늘과 우주에 이르고, 그 역류의 시간으로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세우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 역류의 시간 뒤에 아침이 밝아온다. 오래도록 밤길을 걸어 아침을 맞은 내 눈에 이 여행길을 마무리해준 것은 한 가족이다.

여자가 아기의 말랑한 뼈와 살을 통째로 안고
산후조리원 정문을 나온다 아직
아기의 호흡이 여자의 더운 숨에 그대로 붙어 있다
빈틈없는 둘 사이에 끼어든 사내가
검지로 아기의 손을 조심스럽게 건드려본다
아기의 잠든 손이 사내의 굵은 손가락을
가만히 움켜쥔다
—「가족의 시작」 전문

밤길의 끝에서 마주한 아침의 세상에서 새로운 진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걸어 그 아침의 가족을 만난 나는 루카치의 그 옛 시절 사람들처럼 행복했다.
(김주대, 『그리움의 넓이』, 창작과비평사, 2012, 시집 해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