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봉된 세상의 봉인 뜯어내기 – 이현승의 시세계

Photo by Kim Dong Won
『시와 사상』에 실린 시인 이현승 특집

1
언어는 두 얼굴을 갖고 있다. 세상을 보여주는 듯 하면서 동시에 가리려 든다. 아니, 가리려는 정도가 아니라 밀봉하려 든다.
우리 앞에 펼쳐진 세상은 언어를 통해 비로소 그 인식이 확연해지는 경향이 있다. 가령 봄철에 일찍 피어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분홍색의 꽃은 그것이 눈앞에 확연하게 존재해도 그 이름을 모르면 손에 잡히질 않는 듯한 모호한 느낌을 준다. 그것의 이름이 진달래라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그 꽃을 확연하게 손에 잡은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그렇듯 진달래는 진달래라는 이름을 통하여 비로소 확연해진다. 그러나 진달래라는 이름으로 확연해지면서 동시에 그 이름은 꽃을 진달래라는 이름으로 밀봉해 버린다.
이현승의 시에서 이에 대한 비유를 구해보면 고착화되어 굳어진 언어는 절대로 깨뜨릴 수 없는 수면과 같은 것이다.

손바닥에 돌멩이를 말아쥐고
얇은 유리창 같은 수면을 노려본다
와장창 깨졌다가도 금세 원래대로 회복된다

수면 아래로 봉인되는 소리들 돌멩이들
—「돌멩이」 부분

언어는 얇은데다가 투명하기까지 하다. 때문에 실제로는 대상을 밀봉하고 있는데도 대상을 훤히 보여주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온다. 때로 우리는 완력으로 그 언어의 수면을 부셔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언어를 정치적 차원으로 옮겨가면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화난 사람들”이 “돌멩이를 하나씩 들고 물가로” 갈 때가 그때이다. 그러나 완력으로 대상을 덮고 있는 언어의 수면을 깨는데는 한계가 있으며, 그런 방법은 또다른 누군가의 돌멩이를 부를 수 있다.
밀봉된 언어를 가장 효과적으로 뒤흔들어 봉인을 뜯어내고 그 속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결국은 언어이다. 아마도 그런 측면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시의 언어일 것이며, 이현승의 시가 갖는 매력이 바로 그 점에 있다. 나는 어떻게 우리 앞의 세상이 언어로 봉인되어 있으며, 그가 그 봉인을 뜯고 보여주는 또다른 세상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살펴보는 것을 그의 시세계를 둘러보는 여정으로 삼았다.

2
언어가 두 얼굴을 갖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언어의 속성이다. 더 큰 문제는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들도 두 얼굴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배고프면 먹어야 한다. 우리는 먹기 위하여 식탁에 앉는다. 그러나 우리가 식탁에 앉는 순간 우리의 ‘식사’는 “식탁의 구도를 벗어나지 못”(「늑대가 나타났다」)한다. “예의 바르고 가지런한 식탁”(「동물성」)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 순간 우리들은 식욕은 해결할 수 있지만 대신 식탁에 갇힌다. 그때부터 식탁은 식탁이 아니라 우리가 된다. 우리에 갇히면 우리는 우리를 탈출하고 싶어한다. 이현승에서 있어 이 두 얼굴의 우리는 ‘늑대’로 상징화된다. 배가 고파 식탁에 앉지만 식탁의 우리에 갇히면 그 우리를 탈출하고 싶어하는 이중의 얼굴을 가진 동물이다.
이를 언어의 구도로 환치하면 우리는 소통과 세상의 명확한 파악을 위하여 언어의 체계를 필요로 하지만 소통과 언어 습득이 이루어지는 순간, 언어의 체계 속에 갇힌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그 체계를 벗어나고 싶어한다. 언어 앞의 우리는 식탁 앞의 늑대와 똑같다.
그러나 모든 늑대가 다 탈출을 꿈꾸는 것은 아니다. 식탁에 앉아 계속 먹는데만 집중하다 보면 “자신의 몸무게보다 무거운 식욕”(「늑대가 나타났다」)이 우리의 삶을 집어삼키게 되고 그러면 우리는 식탁을 떠날 생각을 못하게 한다. 먹는 문제는 이빨을 날카롭게 갈고 몸을 날렵하게 움직이면 어느 정도 해결이 되지만 종종 우리는 식욕에 갇히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식탁이란 우리를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은 늑대의 본능이기도 하지만 늑대의 의지를 요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현승도 그 점을 알고 있다.

물론 나는 새가 무거워서 날지 못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아. 문젠 무게가 아니라 그 무게를 들어 올리려는 의지에 있어. 도도는 멸종되었고 닭은 사육되고 있어. 가령 「길버트 그레이프」라는 영화에서 물풍선처럼 부푼 엄마가 일층에서 이층으로 올라가는 것도 나에겐 작은 비행처럼 느껴지는 거야. 그녀의 발밑 금방이라도 으스러질 듯 신음하던 목조 계단보다 먼저 그녀는 죽어버렸지만 그것은 그녀가 감행한 일생의 모험, 낯설고 두려운 공기 위로 사뿐히 자신의 전 존재를 던지는 비행처럼 느껴지는 거야,…(하략)
—「뚱뚱한 그녀, 혹은 비둘기에게」 부분

시인은 인간도 퇴화한 조류라고 생각한다. 원래는 인간도 날 수 있었으나 “아주 오래전 날기를 그만둔” 것이며, “등에 퇴화한 날개 자국이 흉측하게 남은” 것이 오늘의 우리들이다. 그것은 식탁에서 일어날 줄 모르는 늑대이기도 하다.
이제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가 있다. 바로 시인이다. 먹고 살기도 바쁜 세상에서 시는 무슨 시야라고 말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맞는 소리이다. 먹고 사는 문제는 중요하기 이를데 없다. 그러나 식탁에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영원히 사육된 인생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때문에 우리에겐 한 늑대가 식탁이란 우리를 탈출할 때 함께 묻어 탈출할 기회가 필요하다. 바로 시인이 그 탈출을 감행할 것이다.
그렇다면 식탁의 우리로부터 탈출하여 언어의 봉인을 뜯어낼 시인은 어떤 자질을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우선 그에겐 날카로운 감식안이 필요하다.

온통 검은 자장면의 색깔 속에서
서로 다른 맛의 재료를 분별하듯
도다리와 넙치를 구분하는
감식안이 필요해
—「해변의 여인」 부분

그가 늑대의 탈출 본성을 버리지 않았다면 그런 감식안은 믿을만할 것이다. “모든 사자들이 그렇고 그렇게 생겼듯이/모든 들소들도 그렇고 그렇”게 생겼지만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소떼들”이 “자기의 가족을 알아”보듯이 그도 매일 반복되는 듯한 비슷한 풍경이 사실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미세하게 구별해낼 수 있어야 한다. 이현승은 그 방법을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일상을 벗어던지고 기존의 앎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씩 벗기고
알고 있는 것을 하나씩 지우고
나는 동물의 왕국 속으로 들어갔다
—「동물의 왕국—가족」 부분

그는 또 언어로 밀봉된 봉인을 뜯으려면 마치 세상을 처음 대하는 것처럼 낯선 얼굴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매번 하는 일이 이따금씩 처음 하는 일 같다
—「초심자들」 부분

탈출을 모두 그에게 맡겨두어선 안된다. 우리도 해야할 일이 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먹고 살아가야할 일도 바쁜데 시는 무슨 시냐는 비아냥을 거두는 한편으로 그가 우리에 대해 이러한 힐난을 하더라도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다.

다른 세계를 조심스럽게 바라볼 수 있도록 가만히 좀 내버려두면 안 되나?
—「경험주의자와 함께」 부분

그가 우리에게 제안하는 요구 사항도 있다. 이 또한 적극적으로 들어줄 필요가 있다.

사과나무를 이해하기 위하여 바람이 불어오는 골짜기를 쳐다봐야 한다
어쩌면 구름을 바라보는 당신의 습관도 조금은 바뀌어야 할지 모른다
—「근원적 골짜기」 부분

우리를 탈출한 늑대는 사실 배가 고플 것이다. 시가 밥이나 돈이 되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늑대는 언어의 봉인을 물어뜯은 뒤에 얻어지는 새로운 식탁의 만찬으로 배고픔을 달래기는 어려울 것이 뻔하다. 하지만 그것이 시인의 운명이다. 이제 그 운명의 시인이 언어의 봉인을 뜯어낸 세계로 우리도 함께 탈출해보자.
언어가 봉인된 세상에 있을 때 우리는 체구가 큰 사람을 만나면 몸집이 듬직하셔서 그런지 말이 별로 없으시네요라는 표현을 건넨다. 언어의 봉인을 뜯어내면 그 자리에서 접하는 표현은 달라진다.

나는 당신이 당신의 그 거대한 체구 속에
말을 거의 담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동물성」 부분

그 세상에선 또 포플러나무의 잎이 일제히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포플러나무의 잎들이/바람 속에서 일제히 깔깔거”린다.
우리의 세상에선 어느 눈오는 날 병원을 찾아온 방문객들이 어찌나 날씨가 추웠는지 입과 목과 손을 모두 꽁꽁 싸매고 있다. 이현승이 언어의 봉인을 뜯어낸 자리에선 그 세상은 이렇게 바뀐다.

회오리바람을 뚫고 온 내원객들은
입이 없고 목이 없고 손이 없다
—「눈사람 학교」 부분

우리는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면 그냥 떨어지는 것이다. 변화를 준다고 해도 같은 뜻이란 이유로 떨어졌다는 말대신 추락했다는 말을 대신 쓰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 장면은 이제 이렇게 변주된다.

사실상 떨어지는 내내 나는 온전히 나 자신으로
가장 촘촘하게 추락을 몸에 새기는 중이다
—「낭떠러지」 부분

이쯤에 이르면 사람들은 약간 회의스러울지도 모른다. 언어의 봉인을 뜯는다는 것이 독특한 시적 표현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이다. 사람들의 회의와 달리 나는 표현의 독특한 변주라고 오해를 살만한 시들만으로도 그 세상이 재미나기 이를데 없었다.
그 재미난 세상을 하나 더 경험해보자. 나의 세상에선 투명인간을 생각하면 투명인간이 되어 다른 누군가를 몰래 훔쳐볼 것에 가장 먼저 생각이 미치지만 봉인이 해제된 그의 세상에선 ‘투명인간’이 “옷을 입지 않는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앞을 선다. 옷을 입을 수도 있지만 그러면 옷만 있고 얼굴은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때문에 이현승은 이렇게 되묻는다.

모든 게 남들과 똑같은데 얼굴만 없다면그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지나친 사람」 부분

시인은 그런 이유로 투명인간은 옷을 입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문제는 아무도 보지 않는데/부끄럽다는 것”(「지나친 사람」)이 문제가 될 것이라고 진단한다. 옷은 인간과 결합되어야 옷이지 그냥 옷만 있어선 그건 옷이라기 보다 세탁물로 전락하기 쉽다. 나는 옷을 걸치는 순간 투명인간에겐 옷만 보일 터이고 그러면 투명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걸어다니는 세탁물로 추락할 것이라며 시를 읽은 끝에서 낄낄거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의 시를 모두 낄낄거리면서 읽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세상에선 아는 친척이 도축업자라면 갓 잡은 신선한 고기를 얻어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그러나 ‘삼촌’을 도축업자로 둔 그의 얘기는 다르다. 그는 “삼촌이 막 잡은 짐승의 살점을 입에 넣어줄 때,” 그것이 “사실 피 묻은 칼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다고 고백한다. 신선한 고기를 입에 물었을 때 마치 “입속에 혀를 하나 더 넣은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백은 다시 이렇게 이어진다.

고기에서 죽은 짐승의 체온이 전해질 때
나는 더운 비를 맞고 있는 것 같다
바지 입고 오줌을 쌀 것 같다
—「따뜻한 비」 부분

시인의 이 얘기를 듣고 난 나는 다시는 신선한 고기는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체온을 씹을 수가 있단 말인가. 봉인이 해제된 세상의 얘기는 고기에 대한 내 태도를 바꾸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언어의 봉인을 뜯는다는 것은 그 이상이다. 그것은 언어가 왜곡하고 있는 현실을 좀더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측면으로 나아간다.
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강의 둔치에는 흙탕물이 남기고간 토사와 그 냄새가 가득하다. 그러나 그 언어의 봉인을 뜯고 난 뒤 접한 세상은 그와는 다르다.

강이 토한 자리에서 진동하는 바닥의 냄새.
—「굿바이 줄리」 부분

강의 구토라 아니라면 그렇게 냄새가 날리가 없을 것이다. 이 순간 시의 언어는 표현의 변주를 넘어 더욱 진실에 가까운 영역으로 확장이 된다. 표현을 변주하지 않고 사실을 또다른 사실로 대치하여 언어를 더욱 진실에 가깝게 가져가는 경우도 눈에 띈다.

편의점 가판대에서 스위티오 바나나가 익어갑니다
—「라디오」 부분

우리의 일상적 표현을 환기해보면 그저 편의점 가판대에 바나나가 진열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진열이란 말은 바나나에 대한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 사실 우리의 상점에 놓이는 바나나는 익은 바나나가 아니다. 그것은 아직 채익지 않은 바나나이다. 다 익은 바나나를 따서 그것을 배에 싣고 우리나라까지 왔다가는 그것을 팔아먹을 수가 없다. 바나나가 수송되는 기간을 견디지 못하고 썩어버리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영양을 끝까지 섭취해가며 제대로 익은 맛난 바나나를 먹을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서 바나나는 가판대 위에서 익어간다. 시인의 말은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사실이다. 시인은 사실로 사실의 은폐를 드러낸다.
이번에는 멀리 아프리카의 세렝게티 초원으로 가보자. 그곳에선 누우들이 풀을 찾아 이동을 하며, 이동하는 길에 악어가 우글거리는 강을 건너야 한다. 당연히 악어에게 물려죽는다. 이현승이 그의 언어로 펼쳐놓은 그 장면을 들여다보자.

악어는 누우를, 누우는 물을
놓지 않는다, 놓을 수 없다.
세렝게티의 건기가 누우들의 입을 사정없이 물어뜯는다
—「세렝게티의 물소리」 부분

내 눈길을 끌어당긴 것은 “누우들의 입을 사정없이 물어뜯”고 있는 것이 최종적으로는 ‘악어’가 아니라 “세렝게티의 건기”라는 점이다. 아프리카의 초원에선 그 건기가 자연현상이지만 만약 물어뜯고 뜯기는 삶이 사회적 현상이라면 건기는 누군가 조장한 것일 수 있다. 내 머리 속에선 정규직의 일자리를 지키려 비정규직의 고달픈 삶을 외면하고 방치하는 우리 사회의 분열이 스쳐 지나갔고, 시는 그 원인이 정규직의 욕심이 아니라 마치 악어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강물로 타는 목을 축일 수밖에 없는 누우처럼 일자리에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없도록 건기를 조장한 자본 세력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먼 아프리카가 아니라 우리 동네로 돌아와 좀더 친숙한 현실로 가까이 가본다. 이현승이 세상의 봉인을 뜯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동네 세탁소 주인은 그냥 옷을 깔끔하게 세탁하고 다려주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시인이 얘기하는 세탁소의 그 사내는 좀 달랐다.

사내의 손에서 주름은 날을 세우기도 하고 잠자기도 하지.
어느 모로 보나 사내는 주름의 왕이라 할 수 있네.
적어도 이 골목에서는 어떤 주름도 사내를 당할 수 없지.
구김살 없는 옷들이 이력처럼 내걸린 세탁소의
태양 또는 주름의 왕.
—「주름의 왕」 부분

나는 이제 세탁소 주인을 만나면 세탁 기술자가 아니라 ‘주름의 왕’에 대한 존경심으로 그와 인사를 나누게 될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시에서 봉인이 풀린 세상의 모습을 몇가지로 추려 보았다. 봉인이 풀린 세상에선 표현이 새로워지며, 나와는 다른 그의 태도를 따라 세상에 대한 내 태도의 전환이 이루어기도 한다. 아울러 풍경이 좀더 진실에 가깝게 드러나기도 하고 또 은폐된 사실을 또다른 사실이 밝혀주기도 한다. 또 그 세상에선 현상의 배후에 도사린 문제의 원인이 드러나기도 하며, 흔하게 접하던 동네 세탁소의 주인을 달리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깨닫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동안 밀봉되고 은폐된 세상에서 살았다.

3
나는 이현승의 시세계를 고착화되고 굳은 언어로 밀봉된 세상의 봉인을 뜯어내 그 세상을 새롭게, 또 때로는 좀더 진실에 가깝게 여는 것으로 보았다. 세상이 그렇게 언어로 봉인된 것은 그의 시 속에서 찾은 원인에 따르면 배고픔을 해결해야 하는 우리의 생존 본능에 기인한 것이었으며, 그 세계를 탈출하려고 하는 것 또한 우리의 본능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현승 그 자신이 우리를 대신하여 그 세계를 탈출하고 그 봉인을 뜯어내고 있었으며, 나는 그러고 나면 우리도 함께 그 세계로의 탈출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사람들의 기대를 부추겼다. 물론 봉인이 해제된 세상의 모습을 몇 가지 보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현승의 시를 돌아보며 그의 시가 갖는 가장 큰 매력으로 느낀 것은 그의 시세계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 보면 나도 모르게 늑대의 탈출 본능이 몸안에서 꿈틀거리며 고개를 드는 듯한 느낌이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시를 읽는 중간중간 나는 아오하는 늑대의 울음으로 포효를 할뻔 했다. 시를 읽는 동안에는 잘 참았지만 그 본능이 느닷없이 살아나면 나는 바람이 나무를 흔들고 지나갈 때 “나무의 멱살을 잡고 가슴을 때리는 이”가 ‘바람’(「5분 후의 바람」)이며, 내 눈앞의 나무가 “변심한 애인”이란 것을 눈치채고 봉인이 풀린 세상에서 그것을 알아차린 기쁨에 아오하고 늑대의 울음을 울지도 모른다.
(『시와 사상』, 2012년 겨울호)

**이 글의 대상이 된 시집은 다음과 같다.
─이현승, 『아이스크림과 늑대』, 랜덤하우스, 2007
─이현승, 『친애하는 사물들』, 문학동네, 2012

2 thoughts on “밀봉된 세상의 봉인 뜯어내기 – 이현승의 시세계

  1. 한 편의 시도 겨우 이해할까 말까 한데, 이 시 저 시를 밀당에 여닫기에
    횡종단해 주시는 바람에 시의 얼굴이 조금 보일락 말락 하는 것 같습니다.

    1. 이현승의 시는 아주 재미난 시들이 많아서 즐겁게 읽어볼만 합니다.
      읽는 동안 많이 웃을 수 있었어요.
      시인들이 어려운 시들을 쓴다기 보다 세상을 재미나고 즐겁게 하는 시들을 쓰는 것 같습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