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어떤 행위인가
글: 빌렘 플루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또는 누군가가 들고 있는 카메라)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우리는 누군가가 몸을 숨기고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구체적으로 지적하자면 그것은 다름 아닌 사냥의 동작이다. 구석기 시대에 툰드라 지역에 살았던 사냥꾼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동작은 오래전 사냥감에 몰래 접근할 때 우리 인간이 취했던 바로 그 동작인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제 더 이상 사진작가들은 탁트인 초원에서 사냥을 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문화적 물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숲에서 사진 찍기라는 형태로 그 모습이 바뀐 사냥을 하고 있으며, 그들의 다양한 사냥터는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가 만들어낸 인공의 숲에 의해 조성되어 있다. 사진을 찍는 행위를 관찰하면 사진찍기를 방해하는 문화, 즉 “문화적 규제”가 눈에 띄며, 이론상으로 보자면 사진 그 자체에서 이러한 점, 즉 문화적 규제를 해독해 내는 것이 가능하다.
사진의 숲은 문화적 대상, 즉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물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문화적 물체들은 사냥감을 바라보는 사진작가의 시야를 가로막는다. 사진이란 이름의 사냥을 할 때 사진작가들이 걷는 그 복잡한 사냥의 이동 경로는 어떤 의도를 숨기고 있는 이들 다양한 문화적 물체의 주변으로 뻗어있으며, 사진작가들의 목표는 문화적 규제에서 벗어나 “문화적 규제의 한계 속에 머물지 않고” 자신만의 사냥물을 낚아채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진을 찍을 때 서구 문명이 이룩한 인공의 숲에서 사진작가들이 보여주는 사진의 길과 일본이나 기타 ‘개발도상국’에서 사진작가들이 보여주는 사진의 길이 다른 이유이다. 이러한 문화적 규제는 모든 사진에서 피해가야할 “부정적인” 방해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사진 비평에서는 이른바 문화적 규제를 폭로하는 것이 목적인 ‘다큐멘터리’나 ‘르포르타주’성 사진에서는 물론이고 모든 사진에서 사진 내에 존재하는 이러한 문화적 규제를 해독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해독을 위해선 사진 찍는 행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이해가 선결되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문화적 규제의 구조는 사진에 찍힌 물체가 아니라 사진을 찍는 행위 속에서 포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진 자체만으로 사진에 대한 문화적 규제를 해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사진에 나타나는 것은 카메라의 표현 범주에 의해 결정되며, 이들 카메라의 표현 범주는 문화적 규제를 그물처럼 취급하면서 그물눈을 통과한 것만 우리들이 볼 수 있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후기 산업 사회, 즉 지식과 정보, 서비스 산업이 우위를 차지하는 공업화 단계 다음의 사회에선 어떤 기능을 갖고 있는 모든 기기의 특징이다. 카메라라는 기기는 그 표현 범주 내에서 문화적 규제를 받아들이고, 사진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규제에 의해 사진을 걸러낸다. 따라서 다양한 문화적 규제가(예를 들자면 대략적으로 ‘서구의,’ ‘일본의,’ ‘개발도상국의’ 문화적 규제가) 뒤쪽으로 은폐될 수밖에 없다. 바로 그 결과가 카메라라는 기기가 만들어내는 획일화된 대중 문화이다. 요즘은 서구의, 일본의, 개발도상국의 어디에서나 모든 것이 똑같은 표현 범주와 똑같은 그물눈을 통하여 사진으로 ‘찍혀지고’있으며, 그런 점에서 현상을 12가지의 범주 아래 인식하고 판단하려 했던 칸트의 입장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듯 인식이나 표현의 범주가 제한적으로 설정되면 인식과 표현은 그 범주를 넘어갈 수가 없게 되며, 따라서 모든 인식과 표현이 범주의 한계 내에서 비슷해지고 만다.
카메라가 완전히 자동으로 작동하지 않는한 카메라의 표현 범주는 외부에서 설정되며, 외부에서 조정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외부 설정에 의해 사진의 시공간이 결정되며, 카메라의 시공간이 결정되면 그에 따라 표현의 범주도 결정된다. 보통 물리학에서 시공간은 뉴튼의 관점에 서느냐, 아인쉬타인의 관점에 서느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사진은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카메라의 각종 값, 즉 조리개 값이나 셔터 속도, 감광도와 같은 것을 설정할 때는 시공간을 다양한 별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접근하게 된다. 사진의 시공간이 되는 이들 지역은 포획하는 사냥물, 즉 찍게 되는 사진을 기준으로 하면 거리와 관점으로 나눌 수 있으며, 그 때문에 “사진에 찍힌 물체”가 사진이라는 시공간의 중심부에 위치하게 된다. 예를 들자면 이러한 지역으로 매우 가까운 거리(접사), 가까운 거리(광각), 중간 거리(표준 시각), 매우 먼 거리(망원)라는 공간적 지역이 있을 수 있다. 또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는 시각, 어안 렌즈를 통해서 보는 시각, 걸음마를 배우고 있는 어린 아이의 관점에서 보는 시각에 따른 공간적 지역이 있을 수 있다. 계속 예를 들자면 옛날처럼 눈을 크게 뜨고 정면으로 바라보는 관점이나 옆에서 슬쩍 곁눈질로 바라보는 관점으로 나누어본 지역적 공간이 있을 수 있다. 또는 번개처럼 순식간에 엿보는 시각, 슬쩍 엿보는 시각, 차분하게 응시하는 시각, 명상적 탐구의 시각으로 분류하여 살펴볼 수 있는 시간적 지역이 있을 수 있다. 사진을 찍는 행위가 일어나는 시공간의 구조는 바로 이러한 형태, 즉 피사체까지의 거리와 관점, 그리고 셔터 속도라는 시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사냥을 할 때, 다시 말하여 사진을 찍을 때 사진작가는 표현 범주가 되는 하나의 시공간에서 다른 시공간으로 이동을 하며, 이동하는 동안 시공간의 표현 범주를 다양하게 결합하여 사진의 시공간을 조정한다. 말하자면 카메라를 아주 가까이 들이대고 접사로 사진을 찍다가 망원의 거리로 시각을 바꾸면서 움직인다. 사진작가에게 사냥이란 카메라의 다양한 시공간을 결합하여 새로운 시공간을 만들어내는 게임이며, 우리가 사진을 볼 때 접하게 되는 것은 사진작가가 만들어낸 새로운 시공간, 즉 그만의 관점이다. 우리가 사진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게임의 구조이지 사진작가에 대한 문화적 규제의 구조는 아니다. 나중에 사진에 대한 추가 정보를 얻고 난 뒤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지만 최소한 사진을 접한 그 순간 만큼은 그렇다.
사진작가는 사진을 찍을 때 여러 가지 카메라의 관점을 결합하여 구체적으로 선택을 한다. 예를 들어 그는 아래쪽에서 비치는 빛을 이용하여 대상을 찍을 수 있게끔 카메라의 위치를 조정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사진작가는 표현의 시각을 자유롭게 선택하며, 카메라 또한 사진작가의 의도대로 정밀하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진작가의 선택이 카메라의 표현 범주에 따라 제한이 되며, 그의 자유는 미리 프로그램되어 있는 자유이다. 다시 말하여 카메라가 사진작가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긴 하지만 사진작가의 의도 그 자체는 카메라에 설정된 프로그램의 기능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사진작가가 카메라에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은 새로운 카메라의 표현 범주, 즉 매우 독특한 시각을 고안해 낼 수도 있다. 만약 사진작가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는 사진을 찍을 때 사진 산업계의 프로그램을 뛰어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그 자신만의 표현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으며, 그 말은 물론 그가 카메라를 직접 프로그램하는 위치에 설 수 있다는 뜻이다. 정리를 하자면 그런 사진작가가 사진을 찍을 때는 카메라가 사진작가의 의지대로 움직이게 되며, 사진작가는 카메라를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프로그래밍 할 수 있는 수준이 된다.
사진작가의 역할과 카메라의 기능 사이에 구축되어 있는 것과 똑같은 관계가 사진찍을 ‘대상’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로 관찰될 수 있다. 사진작가는 무엇이나 자유롭게 찍는다. 누군가의 얼굴, 벼룩, 윌슨의 구름상자 속에서 발견되는 소립자의 흔적, 은하, 거울에 비춰본 자기 자신의 사진찍는 모습 등등을 모두 사진에 담아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진으로 찍기에 적절한 것만, 다시 말하여 카메라의 프로그램에 의해 기록될 수 있는 것만 찍을 수가 있다. 카메라의 프로그램 속에 설정되어 있는 “사진 찍기에 적절한 것”이란 얘기는 사진이 완전히 상황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다. 사진작가가 어떤 것의 사진을 찍든 그는 그것을 어떤 상황 속에서 찍게 된다. 그러므로 사진작가가 사진찍을 ‘대상’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카메라의 프로그램이 제대로 기능하여 그 대상을 사진으로 찍어낼 수 있을 때에 한한다.
표현의 범주를 선택할 때 사진작가는 자신만의 미학이나 인식론적 기준, 또는 사회정치적 기준을 적용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예술적이고 과학적이거나 정치적 성향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카메라는 단지 도구에 불과한 것이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카메라의 기능을 넘어서는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기준들도 사실은 카메라의 프로그램에 내장되어 있는 것들이다. 카메라 자체에 내장되어 있는 카메라의 표현 범주를 선택하려면 사진작가는 반드시 카메라를 ‘설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설정은 본질적으로 ‘기술적인’ 설정 행위이며, 보다 정확히는 ‘개념’ 설정 행위이다(나중에 살펴보게 되겠지만 ‘개념의 설정’은 선형적 사고(단계별로 진행되는 논리적 사고를 뜻하는 것으로 이와 대비되는 것이 논리를 뛰어넘어 새로운 생각을 하는 창조적 사고이다)의 특징적 요소이다). 예술적이거나 과학적, 혹은 정치적 성향의 이미지 사진을 찍기 위하여 그에 맞추어 설정을 하려면 사진작가는 ‘예술’이나 ‘과학,’ ‘정치’라는 말의 개념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물론 그 다음에는 그러한 개념을 카메라의 프로그램을 통하여 구현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사진을 찍을 때 전혀 개념 설정이 되어 있지 않은 행위란 있을 수가 없다. 사진이란 사진작가가 설정한 개념을 구현하고 있는 이미지이다. 이렇게 보면 사진작가가 사진에 적용하는 자신만의 기준이란 것도 사실상 카메라의 프로그램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카메라의 프로그램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이미지 창의력은 거의 고갈되는 법이 없을 정도이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이제 더 이상 달리 찍을 수가 없을 정도로 사진으로 찍힐 수 있는 모든 것을 사진으로 남김없이 찍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카메라에 내재된 이미지 창의력은 한 명의 사진작가가 갖고 있는 창의력보다 더 크며, 세계의 사진작가들이 갖고 있는 창의력을 모두 합한 것보다도 더 크다. 엄밀하게 말하여 바로 이것, 즉 카메라가 갖고 있는 무궁무진한 이미지 창의력이 사진의 어려움이다. 분명히 카메라의 이미지 창의력 가운데는 이미 충분한 탐구가 이루어진 부문이 있다. 그러한 부문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이미 봤던 사진을 다시 찍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한 사진은 ‘쓸모없고’ 아무 ‘소용이 없는’ 사진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그러한 쓸모없는 사진은 이 책의 논의에서는 제외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사진을 찍는다’는 것의 의미는 카메라에 내장된 프로그램 내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이미지의 표현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이며, 다시 말하여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고, 유용하면서도 세상 어디에도 있을 것 같지 않은 이미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책에서 말하는 엄격한 의미에서의 사진작가란 이전에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을 만들어내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사진작가는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저 밖의’ 세상에서 이러한 상황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사진작가는 저 세상의 어디에도 있을 것 같지 않은 상황을 이곳, 바로 사진의 세상에 구축해보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사람이며, 그 욕망 앞에서 저 밖의 세상은 하나의 구실에 불과하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사진작가들은 그러한 상황을 ‘저 밖의’ 세상이 아니라 카메라의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는 이미지 창의력의 가능성 속에서 이룩해보려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사실주의와 이상주의의 전통적 구별이 사진에서 극복되고 있다. 사진은 ‘사실’로서 ‘저곳에 있는’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며, 아울러 카메라의 프로그램에 내재되어 있는, 세상에 대한 ‘이곳’의 개념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사진에서 ‘사실’이란 곧 카메라가 만들어내는 이미지 자체를 가리킨다. 즉 사진의 세상에선 사실로서의 세상이 따로 있고 사진이 그 세상을 담아내는 매개체가 아니라 사진이 곧 사실이자 실제이다. 세계와 카메라의 프로그램은 그러한 사진 이미지, 즉 사실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필요한 전제조건일 뿐이다. 따라서 사진이란 사진에서 비로소 사실이 되는 가상의 실제이다. 논지를 이런 식으로 전개하면 사진에선 의미의 방향이 정반대로 역전된다. 즉 원래 ‘사실(또는 실제)’은 무엇의 의미 내용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사진에선 의미를 표시하는 기호, 정보, 상징으로서의 사진이 곧 사실이자 실제가 되어버린다. 이렇듯 의미의 방향이 역전되는 것은 기기를 이용하여 하는 모든 일의 특징이며, 대체로 후기 산업 사회의 특징이다.
사진을 찍는 행위는 사진작가가 표현 범주로서의 개인적 시공간에서 마주하게 되는 보이지 않는 다양한 어려움을 뛰어넘는 일련의 극복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어려움 중에는 사진작가가 획기적 도약을 통해서만 넘어설 수 있는 높은 장벽도 있다. 사진작가는 이러한 어려움을 마주했을 때(예를 들어 대상을 찍을 때 가까이서 촬영하는 접사와 멀리서 찍는 원사(遠寫) 사이의 애매모호한 경계에 서 있을 때 어떻게 찍어야할지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카메라의 위치를 어떻게 잡고 어떻게 조정을 해야 하는지 결정을 내려야하는 상황에 부딪치게 되며, 그러한 경우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게 된다. (카메라가 완전히 자동으로 작동이 된다면 사진을 찍을 때의 이런 어려움을 극복해가는 섬세한 도약 과정은 이면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처리될 것이며, 이러한 처리 과정은 초미세 전자공학 분야에서 만들어 카메라에 내장시킨 ‘신경 시스템’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사진을 찍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극복하여 도약을 이루도록 해주는 이러한 판단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않으나 이 세상 모든 물질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양자와 같이 사소하지만 사진의 기본을 이루는 특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도약을 위한 탐구는 ‘회의’, 즉 의심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사진작가는 회의를 하지만 그 회의가 과학이나 종교, 또는 실존적 형태의 회의는 아니다. 이는 새로운 종류의 회의에 가까운 의심으로, 더 이상 회의할 수 없는 사진의 기본에 이르러서야 회의를 접고 결정을 내리게 되는 그런 종류의 의심이다. 물리학의 세계에서 더이상 나눌 수 없는 기본 입자를 양자라고 부르는 것을 생각하면 사진작가의 회의는 그러한 양자에 가까운 기본적 차원의 의심이다. 사진작가들은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대상’에 대해 특별한 관점에 서 보면서 카메라가 대상에 대해 수없이 많은 다양한 관점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를 통해 사진작가들은 그 자신들도 ‘대상’에 대해 카메라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다양한 관점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울러 그들은 어느 하나의 관점을 다른 관점에 비해 우선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하여 단 하나의 완벽한 관점을 갖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능한한 많은 관점을 사진 이미지로 옮겨가는 것, 즉 사진이란 이름의 사실 세계를 수없이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에 따라 그의 선택은 질적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양적인 것이 된다. “최고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많이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진 찍는 행위는 가능한한 많은 다양한 관점에서 현상에 대한 접근을 시도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종의 ‘현상학적 회의’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회의가 표면에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심층적 구조’의 형태로 카메라의 프로그램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는 경우는 예외로 해야 한다. 현상학적 회의의 결정적 요소로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사진을 찍는 실제 행위는 반이념적이다. 이념은 다른 모든 관점에 비하여 어느 단일 관점을 우선시하게 만드는 전제가 된다. 사진작가들은 심지어 그들이 어떤 특정 이념에 대해 헌신적 태도를 갖고 있다고 해도 이념을 넘어선 방식으로 행동한다. 둘째, 사진을 찍는 실제 행위는 카메라에 내장된 프로그램에 묶여 있다. 사진작가는 심지어 그가 이러한 프로그램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카메라에 설정된 프로그램 내에서만 행동할 수 있다. 후기 산업 사회에서의 행위는 어떤 종류의 것이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사진을 찍는 행위가 반이념적이며, 미리 카메라에 프로그램되어 있는 행위란 측면에서 보면 이들 모두 ‘현상학적’이다. 이런 점에서 대중 문화를 통한 이념화란 말은 실수이며, 이를 실수라고 보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예를 들어 대중적 사진을 통한 이념화). 카메라의 프로그램은 사진찍는 과정을 탈이념적으로 처리한다. (이 부분의 이해를 위해선 ‘현상학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현상학적이란 말의 의미는 현상을 바라볼 때 어느 하나의 관점을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시각에서 현상을 고찰한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사진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한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다양하게 찍을 수 있다. 또 대상을 전체의 일부로 놓고 찍을 수도 있으며, 대상의 일부를 크게 부각시킬 수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사진찍는 행위는 현상학적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사진 찍는 행위를 취할 때 필요한 마지막 결정 사항이 있다. 바로 셔터를 누르는 것이다. 사진작가들은 셔터 누르는 것을 마치 미국 대통령이 최후의 순간에 핵 미사일의 발사 버튼을 누르는 것과 같은 결정적인 행위로 여긴다. 하지만 사실 이 마지막 결정은 일련의 부분적 결정들 가운데서 마지막 순서를 차지하고 있는 결정일 뿐이며, 비유를 하자면 모래 알갱이처럼 작고 사소한 결정일 뿐이다. 이는 미국 대통령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핵미사일 버튼을 누르는 것도 결정적인 행위가 될 수 없다. 낙타가 짊어진 짐이 한도를 넘으면 지푸라기 하나를 더 얹어도 낙타의 등뼈가 부러진다. 따라서 핵미사일 버튼을 누르는 것이 사실은 지푸라기 하나를 더 얹는 작고 사소한 행위일 수 있다. 알고 보면 우리들이 결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작고 사소한 결정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사진을 찍을 때 진정한 의미에서 ‘결정적인’ 결정은 있을 수가 없으며, 일련의 부분적이고 사소한 결정이 있을 뿐이다. 사진에서 모든 결정은 양자와도 같이 아주 작고 사소한 결정이다. 때문에 어떠한 결정도 사진에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결정적인 영향은 미치진 못한다. 이는 결과물로서의 사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진작가도 여러 장으로 구성된 일련의 사진을 통해서만 자신의 의도를 보여줄 수 있다. 단 한 장의 사진에 자신의 의도를 모두 담아내기는 어렵다. 다시 말하여 단 한 장의 사진이 진정 ‘결정적인’ 경우는 없다. 사진에서는 심지어 셔터를 누르는 ‘최종 결정’의 순간도 모래알처럼 작고 사소한 순간일 뿐이다.
사진을 찍을 때는 모든 결정이 결정적이지 못하고 사소해지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사진작가들은 마치 영화에서 감독판을 만들 때와 똑같은 방법으로 그들이 찍은 이미지 가운데서 몇 장의 사진을 골라 주제를 구성하는 방법으로 이러한 사소함을 극복해보려는 시도를 펼친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 조차도 사진을 선택하는 행위 또한 물리학에서의 양자처럼 작고 사소한 측면이 있다. 일련의 명확하고 특징적인 이미지의 표면에서 몇가지 요소들을 부각시키는 것 이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카메라 촬영이 끝난 뒤 사진을 선택하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사진을 이용하여 하는 모든 일은 물리학의 양자처럼 사진찍는 행위의 부분적 기본을 이루긴 하지만 작고 사소한 측면이 있다(그리고 카메라를 이용하여 하는 순수하고 단순한 모든 일들이 그런 측면이 있다).
이제 정리를 해보자. 사진을 찍는 행위는 사냥을 하는 행위와 비슷하며, 사진을 찍을 때 사진작가와 카메라는 하나가 되어 그 둘을 따로 나눌 수가 없는 상태에서 기능을 수행한다. 사진 찍는 행위는 전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상황을 찾아내려는 것이며, 아울러 이 세상 어디에도 있을 것 같지 않은 상황이나 정보를 찾아내려는 것이다. 사진을 찍는 행위의 진행 구조를 보면 아주 사소한 결정의 연속이다. 그러나 이 결정은 매끄럽게 이어지며 정해진 순서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순서없이 오히려 비연속적으로 진행된다. 사진작가들은 사진을 찍을 때 회의(doubt)를 통해 그때그때 많이 주저하면서, 동시에 그때그때마다 많은 결정을 내리면서 사진을 찍는다. 바로 이런 행위가 후기 산업 사회의 전형적인 행위이며, 이러한 행위는 탈이념적이고 사전에 기기에 프로그램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런 경우에는 정보가 그 정보의 내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 자체가 곧 ‘사실’이 된다. 이러한 점은 사진찍는 행위에 국한되지 않고 은행 직원에서부터 미국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능의 수행자들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요즘은 사진찍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며, 사진을 찍는 행위의 결과로 오늘날엔 우리의 주변 어디에서나 사진이 넘쳐난다. 사진이란 이름의 이미지는 의미가 표면으로 드러나는 매체이다. 우리의 주변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는 이들 사진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려할 때 사진을 찍는 행위에 대한 이러한 관찰과 고찰이 사진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주는 서론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다음의 글을 번역한 것이다.
Vilém Flusser(Translated by Anthony Mathews), “ The Gesture of Photography”(Vilém Flusser, Towards a Philosophy of Photography, Cromwell Press, 2000, pp.33-40)
**번역되어 나온 한글 책자가 있으나 한글의 독해가 영어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어서 다시 번역해 보았다. 원래의 책자는 독어로 되어 있으나 독어를 모르는 관계로 영어 번역본 두 권을 동시에 비교하면서 번역했다. 이해를 위하여 원문에 없는 추가적인 구절을 가미하면서 한글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보고 내용을 알 수 있는 수준으로 번역했다. 기존의 한글 번역은 전혀 참고하지 않았다.
4 thoughts on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어떤 행위인가 – 빌렘 플루서”
사진의 철학을 생각해 본 이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글이군요.
어떤 순간을 충실히 담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냥한다는 관점으로 푼 게 흥미롭네요.
옆에서 한글 번역서를 읽다가 무슨 한글이 독해가 안된다고 해서 번역을 하긴 했지만 논지는 잘 수긍이 되질 않더라구요. 당장 도입부에서 나타난 주장, 그러니까 사진이 문화적 대상을 찍고 다닌다는 주장부터 이해가 가질 않았어요. 그럼 자연 다큐는 어떻게 할 건데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냥 사진 중에서 인간의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사진을 제한적으로 살펴보며 그때 사진의 의미가 자연을 대상으로 할 때의 사진과는 다른 측면이 있다는 걸 고찰했으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어요.
사진을 십년가량 많이 찍어 왔지만….
늘상 찍으면서도 딱 뿌러지게 정의 하기 여렵더군요.
그때그때 다르고…사실 무한대더라구요…
딱 하나 와닿는게 있다면 회의…..이거는 포함되었어요.
잘 읽었어요.번역하시느라 수고 하셧어요.^^.
사진찍는 분들에게 한번 읽어볼만한 번역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을 글쓰기의 보조 수단으로 삼는 저와는 입장이 좀 다르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