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 때문에 깨진 어떤 사랑과 그 뒷이야기 — 황병승의 시 「내일은 프로」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7월 4일 강원도 영월에서
땅에 떨어진 살구.
이 살구 때문에 갈라선 것은 아니다

시인 황병승은 그의 시 「내일은 프로」에서 자신이 자신의 시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실패’였다고 말한다.

나는 보여주고자 하였지요, 다양한 각도에서의 실패를. 독자들은 보았을까, 내가 보여주고자 한 실패. 보지 못했지…… 나는 결국 실패를 보여주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황병승, 「내일은 프로」 부분

황병승은 자신을 ‘실패한 자’라고 말하며, 실패는 고통스러운 것이고, 그 ‘실패의 고통’을 듣는 것도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의 시를 읽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도 나는 그 고통을 감내하며 그의 시를 읽었다. 나도 끊임없이 그와 비슷한 실패를 겪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황병승의 시가 가장 먼저 보여주는 것은 실패의 내역이 아니라 실패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실패 뒤에 가장 먼저 나타나는 증상은 방황이다. 실패를 하면 “찬비가 얼굴을 때리는 새벽”에 그 비를 맞으며 정처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게 된다. 실패했을 때의 또다른 증상은 누군가와 얘기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아무도 보고 싶지 않을 것 같지만 실패했을 때 우리는 사실은 더더욱 대화에 대한 갈증이 커진다.

나는 누구에게라도 전화를 걸고 싶었습니다
죽은 할머니에게라도, 할아버지에게라도
거리의 부랑자들과 매춘부들에게라도
웃거나 울지 않으면서
침묵하거나 침묵하지 않으면서
—황병승, 「내일은 프로」 부분

전화를 건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얘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지만 아울러 그 욕망은 그냥 누군가의 옆에 아무 말없이 가만히 있고 싶다는 욕망과 뒤섞여 있다. 그것은 말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지만 동시에 편안한 침묵에 대한 욕망이기도 하다. 우리에겐 아무 말없이 있어도 편안한 누군가에 대한 욕망이 필요할 때가 있다. 실패했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우리는 털어놓고 싶기도 하고, 그냥 아무 말없이 그 곁에 있는 것만으로 존재의 위로를 받고 싶은 이중의 상태가 된다. 하지만 그 욕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는 전화기를 들고 아무 번호나 눌러대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모두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누구시죠? 누구십니까?
—황병승, 「내일은 프로」 부분

‘아무 번호나 눌’렀으니 정말 모르는 사람이 전화를 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얘기는 아닐 것이다. 결국 자신을 털어놓거나 아무 말없이 편안하게 곁에 있다가 올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이 아는 사람들 중에 하나도 없었다는 얘기가 이 싯구절의 진실에 더 가깝다. 실패했을 때는 실패의 고통과 함께 그 실패를 얘기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동시에 깨닫게 된다. 실패는 실패의 고통과 내가 이 세상에 그저 홀로 던져진 존재라는 사실을 동시에 각인시키면서 이중고를 안긴다. 실패를 했을 때, 우리는 철저하게 혼자로 고립된다. 따라서 모든 고통을 혼자서 감내해야 한다. 누구도 그 실패의 고통을 나누어지지 못한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에 실패한 것일까. 그는 “찬비를 맞으며/삼 일 만에 귀가했”다고 말한다. 돌아온 “집 안은 어두웠고 여자는 침울한 얼굴로/식탁에 앉아 있었”다. 이쯤에서 이제 우리는 대충 시인의 실패가 어떤 것인지 짐작 할 수가 있다. 시인이 공개한 집안의 분위기로 보아 황병승이 말한 실패는 관계의 실패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사랑의 실패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실패의 극단에는 이혼이 기다리고 있다.
물론 이혼을 과연 실패라고 볼 수 있느냐는 이의가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관계가 좋은데 이혼할리야 없지 않겠는가. 문제는 이혼이 실패냐, 아니냐가 아니라 함께 살면서도 마음이 부딪치고 갈라서는 경우가 흔하고, 그 극단적 양태가 이혼이란 점에서 이혼을 과연 실패라고 볼 수 있느냐는 이의를 잠시 무마하고 이 문제를 좀더 주의깊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의를 접고 계속 이 문제를 시인이 끌고가는 흐름을 따라가며 들여다 보기로 했다.
시인은 그간의 상황을 이렇게 말해준다.

우리는 약속을 했지요
지난달에도 지지난달에도
우리는 약속에 도달하기 위해
서로를 철사로 꽁꽁 묶었고
우리는 서로에게 석고를 들이부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석고가 부서져 날리는 새벽
—황병승, 「내일은 프로」 부분

둘의 약속은 자유의 약속이 아니라 구속의 약속이다. 서로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약속이 아니라 서로를 꽁꽁 묶는 약속이다. 내가 나로 살고, 네가 너로 살 수 있는 약속이 아니라 내가 나를 버리고, 너는 또 너를 버려야 하는 약속이다. 서로가 서로를 내려놓아야 둘은 함께 살 수 있다.
사람들은 둘의 관계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맞는 얘기다. 하지만 현실에서 둘의 관계가 대부분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이상적인 관계는 아니다. 처음부터 둘의 관계는 항상 그렇게 현실적으로 출발하는 것일까. 천만에. 둘의 관계는 언제나 이상적으로 출발한다. 둘의 관계가 이상적으로 출발하는 것은 둘이 현실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상대가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양말 한짝도 그의 자유일 수 있다. 그 자유마저도 받아들이면서 사랑이 시작되고, 반대로 또 그 자유에 대한 억압을 기꺼이 수용하면서 사랑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 자유가 몇 번 거듭되면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양말에서 자유의 빛이 서서히 지워진다. 그가 먹다가 치우지 않고 저녁 때까지 그대로 둔 밥그릇도 그의 자유일 수 있다. 그러나 둘이 함께 살기 시작하면 그의 게으름을 덮어주었던 자유의 빛은 곧 바래고 만다. 여자가 직장을 다니고 있어 집에 와서 그 그릇을 치워야 하는 입장이 되면 더더욱 그럴 여지가 커진다. 그렇게 자유의 빛이 바래고 나면 양말은 꼭 벗어서 빨래통에 넣어야 된다는 약속의 대상이 된다. 그릇은 밥먹고 나면 곧바로 깨끗이 씻어서 정리해 두어야 하는 약속의 대상이 된다. 그 약속은 아무 곳에나 벗어놓은 양말이 곧 자유인 존재에게는 지켜지기 어렵다. 사랑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을 듯했던 여자의 요구는 잔소리란 이름의 작은 억압이 된다. 이 무슨 개소리냐 싶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 지저분한 일상이 게으름이 아니라 자유인 존재들이 있다. 시인들이 특히 그렇다.
나는 시인이 말한 관계의 실패에서 은근슬쩍 시인의 편을 들었다. 시인의 자유를 그의 모든 작품의 원천으로 보는 내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가 억울하지 않을까. 이제는 여자의 불만을 들어볼 차례이다.

“당신은 내가 좋아하는 살구를 한 번도 사다 준 적이 없지…… 당신은 살구를 한 번도 사 온 적이 없어…… 어째서, 내가 그토록 원하는 살구가 당신의 마음속에 뿌리내리지 못했을까…… 당신은 살구 대신 복숭아를 사 오곤 했지, 나는 복숭아 알러지가 있는데…… 언제나 당신뿐이라고, 언제나 당신이 우선이라고 말하는 당신의 마음속에…… 어째서, 나의 간절한 살구가 열매 맺지 못했을까……”
—황병승, 「내일은 프로」 부분

여자는 이 속마음을 털어놓은 끝에 “울음을 터뜨”린다. 대개의 여자들은 그렇게 운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를 욕한다.

“나쁜 새끼 같으니라고!”
—황병승, 「내일은 프로」 부분

나는 보통 욕에 대해선 관대한 편이다. 대신 의미를 부정할 수 없는 말들에 대해선 민감하다. 그러나 시인은 “나쁜 새끼”라는 이 욕에 대해서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쁜 새끼는 나뿐인 새끼, 나밖에 모르는 새끼, 라던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황병승, 「내일은 프로」 부분

나쁜 새끼는 그냥 욕에 그치지 않고 시인의 내면에서 ‘나밖에 모르는 새끼’라는 말로 해석되어 시인을 이기적 인간으로 몰아세운다. 욕은 견딜 수 있지만 그 욕이 이기적 인간으로 해석되는 순간, 욕은 말이 된다. 시인에겐 그 말로 치환된 욕이 견디기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과연 나의 이익만을 취하는 인간이었을까. 나쁜 새끼라는 욕은 참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욕이 번져나가면서 몰아세운 끝에 시인이 스스로를 이기적 인간인지 아닌지를 돌아보아야 하는 상황은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과연 그가 무슨 이익을 취했겠는가.
나는 또 은근슬쩍 시인을 변호하고 있다. 여자는 또 억울할지도 모른다. 이 자식은 도대체 뭐야. 왜 계속 황병승이 편만 들어. 아울러 여자의 얘기는 여자에게 매우 불리한 측면으로 오해의 소지가 크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지 않겠는가. 그깟 살구가 뭐라고 도대체. 다시 여자의 자기 변호를 들어보지 않을 수 없다.

“살구 때문에, 살구 하나 때문에, 라고 말하지 말아…… 살구는 내가 지금까지 당신과 함께해온 이유이고 목적이고 전부였으니까…… 살구 때문에 나는 당신과 함께 지내는 내내 괴로웠고…… 살구 하나 때문에 당신과 한동안 떨어져 지내야 했으며…… 살구 때문에 떨어져 지내야 했던 한동안이 이렇게 ‘영원’이 되고 말겠지…… 살구 때문에, 살구 하나 때문에……”
—황병승, 「내일은 프로」 부분

여자의 불만은 곧 여자의 사랑론이기도 하다. 그 사랑론을 요약하면 사랑이란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다. 아주 단순해 보인다. 상대가 살구를 좋아하면 살구를 사다 주는 것이 사랑이다. 지극히 사랑하면 상대가 살구를 좋아했을 때 살구가 내 마음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되고, 내 마음 속에서 살구가 열매를 맺기에 이른다. 그녀가 좋아하면 살구는 단순한 과일의 의미를 넘어선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한다는 그 이유 하나로 그가 사서 들고 오는 살구로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을 확신한다. 그녀에게 세심하게 신경을 써주면 써줄수록 확신은 더 커진다. 확신은 사랑의 굳건한 지반이 된다. 그럼 궁극의 사랑은? 그것은 시인이 자신을 버리고 그녀가 되는 것이다. 그녀보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더 잘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단순히 살구를 둘러싼 매우 쪼잔한 문제 같지만 그녀의 사랑은 근본적으로는 너를 버리라는 요구이다. 시인은 자신을 모두 버리기는 커녕, 살구를 사다주는 것도 해주질 않았다.
둘은 어떻게 되었을까. 시인은 ‘여자’가 “집을 나가버렸”다고 말한다. 영원이란 말로 꿈꾼 것은 둘의 사랑이었을텐데 그 영원은 이제 영원한 파경의 영원이 되어 버렸다. 영원은 둘의 사이에서 처음 그 둘이 꿈꾸었던 자리를 찾지 못했다.
여자는 집을 나가 버렸고, 관계는 끊어졌다. 그것은 관계의 실패, 또 사랑의 실패이다. 시인은 어딘가 전화를 걸어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얘기를 나눌 사람도 찾을 수가 없다. 아마도 백이면 백, 야, 네가 그렇게 하는데 집에 있을 여자가 어디에 있냐, 여자가 집 나가는 건 당연하다고 나올 것이 뻔하다. 시인은 어찌해야 하는가. 시인의 여자는 “캐리어를 끌고 골목 끝으로 사라져”버렸고 시인은 이제 혼자가 되어 버렸다. 떠나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시인은 “불현듯 지난가을에 적어두었던 메모가 떠올랐”다고 했다. 시인은 그 메모를 공개한다.
그 메모는 피츠와의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왜 하필 피츠일까. 낯선 이름이다. 한국의 상황에는 공고하게 굳어진 한국의 상황이 있다. 한국에서 그것을 비켜가기는 쉽지가 않다. 외국인이라면 한국의 상황에서 비켜서기가 한결 수월하다. 그가 얘기 상대로 피츠를 불러낸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얘기 상대는 물론 가공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피츠와의 대화는 스스로를 앞에 앉혀 놓고 스스로와 얘기를 나누면서 얻는 자기 위안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때로 스스로를 대상화하는 형식이 그 자기 위안의 한계를 너머 큰 위로가 될 때가 있다. 그 형식 속에서 나는 남이 되어 나를 위로한다. 그냥 남이 된 나와의 대화 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이봐 피츠, 부모님은 무슨 일 하셔?
세탁소
어디에서?
어딘가에서
깨끗한 옷 좋아해?
금세 더러워질 테지
나쁜 짓 많이 했어?
살인 빼놓고
부모님은 뭐라셔?
뭘 뭐라셔
하긴 세탁부들은 대개 말이 없지
세탁기하곤 말이 안 통하니까
너도 다를 건 없어
뭐라고?
이봐 피츠! 그러니까 내 말은 소가 쓰러질 때까지 투우는 계속되지 않겠냐는 거야
무슨 소리야, 갑자기
알아, 우린 언젠가 창에 찔린 소처럼 쓰러지고 말겠지
웃기시네
웃기시네라니, 누가 누구한테?
차라리 머리통을 세탁기에 쳐넣고 말지
그럼 내가 스팀다리미로 문질러줄게
내 머릴?
네 머릴
빳빳하게?
빳빳하게
현찰처럼?
기념우표처럼
서랍 속에라도 넣어두게?
그래, 금고 깊숙이

와아…… 피츠는 갑자기 혼자가 되어버리겠군!
—황병승, 「내일은 프로」 부분

사실 피츠는 시인이 앞에 앉혀놓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대상의 투사체라는 측면에서 가공의 인물이지만 아울러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대신 스스로의 대화 속으로 고립되어 버렸다. 시인은 암암리에 눈치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결국 혼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 것을. 이제 그 어렴풋하게 짐작되던 운명대로 시인은 혼자가 되었다.
여자는 갔지만 여자의 기억도 가버린 것은 아니다. 시인은 떠나버린 그녀를 “도시 사람답지 않게 순박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회상한다. 또 시인은 자신이 “좁은 방에 틀어박혀 소설을 끄적거리고 있을 때면/여자는 차와 간식이 담긴 쟁반을 건네며 덜떨어진 미소를 짓고는 했”다고 전한다. 시인은 그 여자를 무척이나 사랑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 여자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겠다고 결심을 했기 때문이다. 시인이 그녀에게 해주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두더지처럼 생긴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살아 있는 동안 아름답고 근사한 것을 만들자/죽는 순간까지 책상 앞에 쪼그려 앉아/연연하고 고려하자”고 ‘다짐’을 했다고 말한다.
시인의 다짐은 시인의 사랑론이기도 하다. 여자의 사랑론은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 사랑이었지만 시인의 사랑론은 “살아 있는 동안 아름답고 근사한 것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책상 앞에 쪼그려 앉아” 그녀에게 ‘연연하고’ 그녀를 ‘고려’할 때 그런 것이 만들어진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부분은 “책상 앞에 쪼그려 앉아”라는 대목이다. 시인에겐 과일을 사러갈 때 그녀가 좋아하는 과일이 무엇인지를 고려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다. 바로 그의 시, 그의 소설, 그의 글 앞에서 그녀에게 연연하고 그녀를 고려할 때가 사랑이다. 사랑할 때, 그녀는 그의 시에 대한 점령자가 된다. 시인은 사랑할 때 시의 지배권을 그녀에게 스스럼없이 내준다. 시인에겐 그것이 사랑이다.
바보 멍청이 같은 시인이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루도 빠짐없이 살구를 사서 그녀에게 들고 갔어야지.
하지만 황병승의 시 「내일은 프로」의 어디에도 그런 깨달음은 없다. 아마도 그것은 깨달음이 아닌 것이리라. 최소한 그것이 깨달음이라고 해도, 그것이 시인의 깨달음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녀가 떠나가면서 남긴 상처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아름답고 근사한 것”을 꿈꾸게 했던 그녀가 바로 시인으로 하여금 그 꿈을 회의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혼자남은 그는 말한다.

아 아름답고 근사한 것은 무엇이며
벽면 가득 붙어 있는 저 메모 쪼가리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황병승, 「내일은 프로」 부분

즉 존재는 떠나가면서 그 존재를 빌미로 꿈꾸었던 세상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 가버린다. 그게 사람을 힘들게 한다. 다른 좋은 사람 만나면 되지 않겠냐고? 관계의 실패는 그 상처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질 않다. 존재 자체를 두렵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관계 자체가 두려워지면 희망을 갖기가 쉽지 않다.
황병승의 시 「내일은 프로」는 무지 길다. 아직도 많은 부분이 남아있다. 우라질, 왜 이렇게 긴거야 그래. 투덜거렸다고 욕하지 마시라. 읽는 나도 잠시 호흡을 고를 시간이 필요하다.
너무 길면 시를 전후로 나눌 수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이 전반부일 수 있다. 그건 만나고 헤어지기까지의 이야기다. 당연히 후반부는 떠나보내고 남은 혼자로서의 시간이 될 것이다. 시인은 혼자의 시간을 과연 어떻게 감당했을까.
다시 피츠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녀가 떠나기 전의 피츠와 달리 이제 피츠는 더 이상 시인에게 자기 위안의 대화 상대가 되어주질 않는다. 아니, 오히려 피츠는 자기 분열의 양상을 보여준다.

이봐 피츠, 이 길 끝에는 뭐가 있어?
이 길 끝에는……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전당포도?
전당포도
스낵바도?
스낵바도
잠자리도?
잠자리도
맙소사, 우린 완전히 길을 잃었어
우린 완전히 새로운 길 위에 있지
우린 너무 멀리 와버렸어
하지만 우린 더 멀리 가야 해
우린 곧 쓰러지고 말겠지
창에 찔린 소처럼 말이야?
나는 지금이 너무 무서워
나는 지금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
꿈이었으면 좋겠어
그럼 또다시 피를 흘려야겠지
우린 너무 많은 걸 잃었어
우린 많은 걸 배우게 될 거야
아무도 우릴 뒤쫓지 않아
우리가 전부 해치웠으니까
아무도 우릴 막아서지 않아
우리가 악몽의 주인이니까!
나는 지금이 너무 두려워
나는 지금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우린 곧 죽고 말겠지
우린 지금 태어나고 있어
나는 태어나고 싶지 않아
아무도 원해서 태어나지 않아
제발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부디 이 모든 게 꿈이 아니기를……

—황병승, 「내일은 프로」 부분

갈등의 한 축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나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세계는 나만의 세계로 재편되면서 평온을 되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 사정은 그렇질 못하다.
피츠와의 대화 속에선 두 세계가 충돌한다. 한 세계에 서면 길을 잃은 것이지만 같은 상황이 다른 세계에선 완전히 새로운 길 위에 선 순간이 된다. 한 세계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고 말한다. 돌아갈 곳을 염두에 둔 말이다. 그러나 같은 상황에서 다른 세계는 더 멀리 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 세계는 돌아갈 곳을 팽개쳐버리고 찾아야할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한 세계는 그 상황이 두렵고, 다른 또 한 세계는 그 상황이 두렵지 않다. 한 세계는 그것이 지금까지의 내가 소멸되는 죽음이지만 다른 또 한 세계는 그것이 새로운 탄생이 되고, 한 세계는 새로 태어나고 싶지 않지만 다른 또 한 세계는 원해서 태어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 말로 새로운 탄생에 대한 두려움을 감내하려 한다.
혼자 남겨지자 시인에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갈등의 반쪽이 사라졌으니 평온이 찾아왔어야 옳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둘로 인한 갈등이 사라진 자리에선 내 속에서 전혀 상반된 두 세계가 갈등으로 들끓는다. 싸우고 살면서도 또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려운 이유이다. 그냥 싸우면서 같이 살았어야 했던 것일까. 어차피 둘이 있어도 싸우고, 혼자 있어도 마음의 갈등이 들끓는 것은 다 똑같은데. 관계의 정리로 평온을 얻을 순 없다. 삶이란게 그렇게 간단하질 않다.
결국 혼자 남은 자에게 세계는 둘이 갈등할 때와 마찬가지로 방황의 운명을 안긴다.

희미하게 밝아오는 새벽 거리를
나는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비에 젖은 후줄근한 옷차림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여자가 집을 나갔다는 사실도 잠시 잊은 채
소설, 소설만을 생각하며 나는 달리기 시작했지요
또다시 실패를 보여주는 데 실패하고 말지라도
누구시죠 누구십니까, 아무도 나의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마지막으로 한 잔 더, 마시며 소설을 완성하고야 말겠다는 들뜬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나는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술집을 향해
—황병승, 「내일은 프로」 부분

비록 혼자남겨진 뒤로 방황을 하긴 했지만 그 방황의 끝에서 시인은 소설에 대한 욕망을 되찾는다. 그 욕망은 시인으로 하여금 술집을 찾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한 잔 더, 마시며 소설을 완성하고야 말겠다”는 얘기로 미루어 그동안 술을 마신 것이 한두 번이 아닌 듯하다. 아니, 한잔 마시면 뭔가 생각날 듯하다는 핑계로 엄청나게 술을 마셨을 것으로 보인다. 술집은 지하에 있었나 보다. “술집의 나무 계단을 미친 듯이 뛰어 내려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계단은 끝없이 이어졌고/끝도 없이 이어지는 계단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고 말한다. 설마 그럴리가. 이제 좀 얘기가 이상해진다. 나는 이 얘기를 술집께나 돌아다니며 방황했다로 읽었다. 그 술집의 계단들을 모두다 모아놓으면 아마도 끊임 없이 이어질 정도였겠지. 그렇게 술집을 돌아다니다 시인은 어느 술집의 계단에서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 목소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남자는 잘생긴 코지
좋은 군인은 모두 좋은 코를 가지고 있어
너는 네 엄마를 닮았으니
최악의 코를 가진 불쌍한 녀석이 되겠지
좋은 군인은 나 하나로 족하다!

—황병승, 「내일은 프로」 부분

시인의 아버지가 정말 군인이었을까. 시인은 정말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를 닮은 것이었을까. 나는 대체로 시인의 얘기를 어떤 상징으로 보질 않고 그냥 사실로 믿는 편이다. 그러니 시인의 아버지가 군인이었고, 시인이 그의 어머니를 닮았을 가능성이 크다. 아버지가 군인이었다면 그 아버지는 이 땅에 견고하게 뿌리박힌 남자의 상징으로 남자를 이해하는 전형적 남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아버지에게 아들은 영 마음에 차지 않는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경우의 아버지는 억압의 존재가 된다.
왜 하필 그녀가 떠난 자리의 뒤끝에서 방황을 정리하고 소설을 한편 완성하려고 술집을 전전하고 있을 때쯤 아버지가 떠오른 것일까. 혹시 그에게 아버지는 잠재적 억압의 존재로 그의 삶에서 전혀 지울 수가 없는 존재였는데 떠나버린 그녀가 그 아버지를 잠시 지워준 것은 아니었을까. 혹시 시인에게 그녀는 아버지로 상징이 되는 이 사회의 억압으로부터 그가 자유로울 수 있는 꿈의 존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다 그런 자유의 존재로서의 그녀가 억압이 되면서 시인은 더욱 힘들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황병승은 “계단 아래”로 “보기 좋게 쳐박히고” 만다. 그리고 넘어진 그는 결국 ‘코피’를 보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손등으로 코피를 닦으며 술집 문을 흔들었”으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머릿속에 떠올랐다고 생각한 소설의 구상도 사라져 버리고 만다. 갑자기 열릴 것 같았던 미래가 사라지고 그의 앞으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다시 돌아온다.

머릿속의 구상은 온데간데없이 날아갔고
소설은 여전히 미완성이고, 여자가 떠난 텅 빈 집은
또 얼마나 춥고 불쾌할까
—황병승, 「내일은 프로」 부분

술에 취했을 때만 세상이 따뜻하고 환해지는 때가 있다. 술만이 우리를 달래줄 때가 있다. 하지만 술이 열어주는 문은 항상 열려있는 게 아니란 점이 흠이다. 그 문이 열렸을 때는 소설의 구상이 마구 떠오르는 것 같다가도 그 문이 닫히고 나면 머릿속의 구상은 전혀 구체화되지 못한다. 그 문이 열렸을 때 소설은 거의 완성이나 진배없지만 그 문이 닫히고 나면 소설은 아직 쓰여지지 않은 상태에서 진도를 나가지 못한다. 술의 문이 닫히고 나면 분명한 현실이 시인에게 남는다. 그것은 그녀가 떠난 춥고 쓸쓸한 집이다. 그 현실은 술로 이겨보려고 해도 이겨내기가 쉽지 않다.
그녀는 과연 시인에게 있어 어떤 존재였을까. 시인은 다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꺼내들고 있다. 목소리의 환청만으로 시인을 술집의 계단에 쳐박히게 만들었던 그 아버지이다. 시인은 “어린 시절, 아버지는 나를 가끔 나무 위에 매달아” 준 적이 있다고 했다. 그 일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아마도 시인이 어린 날 무슨 잘못인가를 하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요구한 반성의 방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버지의 교육 방식은 시인에게서 제대로된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반성이나 앞으로의 인생은 둘째 치고 내가, 여기, 왜 매달려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어떤 비참한 인생이 시작되고 있었던 거지요
—황병승, 「내일은 프로」 부분

그러니까 시인은 아버지의 그 교육 앞에서 삶이 비참했다. 혹시 그녀는 그의 삶에 각인된 그 “비참한 인생”을 지워버리고 전혀 다른 세계를 열어준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녀와 사랑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녀의 뒤로 아버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을까. 어떤 억압의 그림자가……
이제 시는 말미에 왔다. “술집 계단 아래 거꾸로 쳐박힌 채” 시인은 “다짐을 했”다고 한다. 그 다짐은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에이전시에 연락해서 타이피스트를 부탁”하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머릿속의 구상과 잠꼬대와 헛소리를 정확하고 빠르게,/열정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 타이피스트!”이다. 그런데 시인이 무슨 연예계나 프로 스포츠계에 종사하는 유명인도 아닌데 에이전시가 있을 수가 있겠는가. “에이전시라니, 타이피스트라니……” 시인이 정신이 나갔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면 그게 시인은 아니다.
시인은 이제 “계속해서 흐르는 코피를 닦으며/절뚝거리는 다리로 술집의 나무 계단을 올라”선다. 그리고 이렇게 중얼거린다.

내일은 프로
내일은 프로
—황병승, 「내일은 프로」 부분

프로? 왜 프로일까? 마지막 대목에서 기분이 이상해진다. 혹시 그녀가 있을 때와 그녀가 떠난 뒤로 시인의 소설에 대한 욕망을 부추긴 원인이 달라진 것은 아닐까.
프로라는 말은 시인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에이전시와 결합이 된다. 에이전시는 프로를 상품화하고 비싼 값에 팔아먹는 프로의 대행회사다. 상품성이 부족하여 비싼 값에 팔아먹을 수 없으면 에이전시의 대상이 되질 못한다. 가령 프로 시인, 프로 소설가가 있다면 에이전시는 작품성을 보지 않는다. 그저 그가 내놓을 작품이 얼마나 팔릴 것인가의 상품성에 초점을 맞출 뿐이다. 그런데 시인이 그런 세상에 자신을 내주려 하고 있다. 뭔가 이상하다.
그녀가 있을 때 그깟 살구 하나 사다주지 않음으로써 둘의 관계를 파탄내었던 시인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일까. 나는 이를 사랑의 아이러니로 본다. 사랑은 그것이 비록 억압으로 작용한다고 해도, 사랑의 곁에선 갈등하면서도 자신을 지킬 수가 있다. 갈등은 알고 보면 자기를 지킴으로써 사랑을 지키려는 시인의 몸부림에서 시작된다. 사랑이 떠나고 나면 그 몸부림도 사라진다.
사랑의 상실과 억압은 공포스럽다. 지킬 것을 하나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프로를 꿈꾸는 시인에게서 성공이란 이름의 자해로 복수를 꿈꾸고 있다는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다행히 그 복수의 꿈은 실행에 옮겨지진 못했다. 시인이 한순간 가졌던 복수의 꿈은 중얼거림으로 끝났다.
황병승의 시 「내일은 프로」는 무지 길다. 164쪽에서 시작을 하여 179쪽에 이른 뒤에 끝이 난다. 무슨 시가 이렇게 길어. 하도 길어서 신경질이 난 나는 시를 읽다 말고 중얼거렸다. 아주 소설을 써라, 소설을 써.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하루 종일 읽을 분량은 아니다. 그걸 난 하루종일 읽었다. 짧으면서도 오래도록 읽게 되는 것이 시이다. 「내일은 프로」는 시였다. 그는 여자를 만나서도 소설을 썼고, 여자가 떠나간 뒤에도 소설을 쓰려고 했다지만 소설을 쓰지 않고 시를 썼다. 나는 그가 복수의 마음을 내려놓고 대신 시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그 여자가 시를 보고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2013년 6월 11일)

**인용한 황병승의 시는 다음의 시집에 실려있다.
황병승 시집,『육체쇼와 전집』, 문학과지성사, 2013

6 thoughts on “살구 때문에 깨진 어떤 사랑과 그 뒷이야기 — 황병승의 시 「내일은 프로」

  1. 이혼 부분에서 오늘 단념했습니다. 에휴.. 난 100년 걸리는 것 같습니다..
    실패의 위로는 받은 그 때 일순간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좋은 전도를 위해서 이혼이 있던 것이라면 실패는 아니라고 하는.. 계속 된다 (아마)

    1. 대단하세요.
      읽어주신 것에 감사드려요.
      저도 이혼이 실패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마도 심리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요. ^^

  2. 검색들어 가겠습니다..시집 사야 겠어요 ^^
    또 몇분에게 선물도 돌리겠습니다..ㅎㅎㅎ

    시집이 많이 팔리는 세상….아마 유토피아가 될겁니다 .^^.

    1. 아이구, 감사합니다. 시인이 좋아하겠어요.
      원래 엄청 난해한 시인으로 통했는데
      이번 시집은 난해함이 많이 덜어지고 재미난 시들이 많았습니다.

  3. 아, 그놈의 살구 가끔, 아니 한 번이라도 사다 주었으면
    이리 긴 시 쓰는/읽는/해설하는/구경하는 괴로움 안 주었을 텐데요.^^
    제발 빨리 살구 사다 주고, 다시 오라고 하세요. 그래야 프로에요.

    1. 총체적 괴로움, 괴로움의 연쇄 작용, 괴로움의 악순환 되겠습니다.

      좀 기다려야 할 거 같아요.
      아직 살구철이 아니거든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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