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와 사랑 사이에, 우리는 서 있다 – 서성란 장편 소설 『풍년식당 레시피』

Photo by Kim Dong Won

서성란의 장편 소설
『풍년식당 레시피』이다.
거실로 들어온 햇볕이
책을 궁금해 하는 것 같아
잠시 햇볕에게 책을 내주었다.
햇볕은 겨울 냉기를 걷고
봄의 온기가 완연하다.
소설도 눈소식으로 시작하지만
끝에선 봄을 예감한다.
햇볕이 소설에서도
같은 온기를 느꼈을 것이다.

1
비는 슬픔이나 우울과 동의어가 되기 싶다. 그에 반하여 눈은 종종 순수나 축복과 동의어로 묶이곤 한다. 그 눈이 크리스마스이브라는 시기와 맞물리면 더더욱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서성란의 소설 『풍년식당 레시피』는 크리스마스이브의 눈소식으로 시작된다.

밤사이 도시는 눈에 잠겼다.
눈은 지상의 작고 초라한 것들을 감추고 지우고 사라지게 했다.

눈은 폭설이었다. 서성란은 이미 “어른 무릎 높이로 쌓여 있는 눈 더미 위로” 다시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으며, “인도와 차도의 경계가 지워”지고 “버스와 택시는 지나다니지 않았다”고 전한다.
작가는 “폭설은커녕 눈이 내릴 거라는 예보조차 없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소설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눈소식은 우리들에게 어떤 예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그 눈소식은 어떤 축복받은 세상에 대한 예고같은 것일까.
불행히도 그렇질 못하다. 세상 사람들은 이제 겪을만큼 겪어서 눈이 왔다고 마냥 좋아하질 않는다. 사람들은 그 눈이 가져올 불편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불편 앞에선 아무 주저없이 눈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사람들은 “온통 하얀빛으로 뒤덮인 눈길”을 좋아하면서도 그 눈길이 길을 끊어버리고 나면 “사 킬로미터 남짓 떨어져 있는 지하철역”까지 걸어가 교통편을 달리 구해야 하는 불편을 감내하지 못한다. 작가는 사람들이 불편하면 눈이고 뭐고 없이 등을 돌린다는 사실을 “눈을 기다렸던 사람들마저 진저리치게 만드는 크리스마스이브였다”는 말로 확인해준다.
작가는 또 눈이 “지상의 작고 초라한 것들을 감추고 지우고 사라지게 했다”고 적고 있다. 표면적인 서술로 보면 이러한 측면의 눈은 세상을 덮어 은폐한다. “지상의 작고 초라한 것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은 그것을 덮어 은폐한다.
눈의 부정적 측면은 불편과 세상의 은폐에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멀리 산자락을 따라 지붕에 내려앉은 눈 더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허술한 판잣집들이 보였다”는 대목을 통하여 눈이 가난한 삶에선 축복이라기 보다 그것 또한 감당해야할 또다른 무게가 된다는 점을 암시한다. 가난한 삶에선 눈도 삶을 내리누르는 무게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눈의 부정적 속성에도 불구하는 눈이 온 세상은 아름답다. 또 그 세상이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는 눈이 반갑다. 눈이 온 세상의 아름다움과 눈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한데 묶으면 앞서 언급했던 부정적 인식은 눈의 부정이 아니라 어떤 아름다운 세상의 전제 조건이 될 수 있다. 즉 아름다운 세상은 편하게 향유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불편을 감내해야 주어지는 세상이다. 불편을 감내하려고 하지 않을 때 아름다운 세상은 없다. 아울러 아름다운 세상을 제대로 향유하려면 아름다움이 세상의 은폐가 되지 않도록 동시에 아름다움을 경계해야 한다. 은폐의 속성에 신경을 쓰지 않는 순간 아름다움은 진실에 대한 가림막으로 전락할 뿐이다. 아름다움이 진실의 가림막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려면 아름다움이 무엇도 은폐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아름다움은 삶의 무게를 회피하지 않고 감내할 때 온다. 말을 좀더 구체화하면 삶의 무게를 감내하며 엮어가는 삶 자체가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눈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세상은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는 동시에 아름다움의 조건이나 전제를 함께 보여준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점이 하나 있다. 눈이 길을 끊기는 하지만 그 눈길을 걸어선 갈 수 있다는 점이다. 즉 눈은 차의 길은 끊지만 인간의 길은 끊지 않는다. 작가는 소설의 서두에서 “훗날 백년 식당으로 불리게 될 오래된 식당으로 가기 위해” 눈길을 걷고 있는 한 여자를 말하고 있다. “단화를 신은 발이 눈밭에 갇혀서 제대로 걸을 수 없었지만 여자는 아직 아무도 밟고 지나가지 않은 눈길을 힘겹게 걸어서” 드디어 식당으로 가는 골목에 이른다. 그 길에선 “여자가 힘겹게 걸음을 떼어 놓을 때마다 발자국이 눈길 위에 깊숙이 새겨”지고 있다. 그것은 찻길이 끊긴 세상에서 열어가는 인간의 길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소설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눈은 우리들에게 서성란의 이번 소설이 아름다움이 갖는 은폐의 속성에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음을 예감하게 만든다. 또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어느 정도의 불편을 수용하는 한편으로 삶의 무게를 감내하며 힘겹게 엮어내는 인간의 길을 예감하게 한다. 우리의 예감은 과연 맞을까. 예감에 대한 답은 소설을 다 읽은 후에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내 걸음은 그저 그러한 예감과 함께 눈길에 찍힌 여자의 발자국을 따라 이제 막 열리고 있는 소설의 길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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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란의 소설 『풍년식당 레시피』를 읽어가면서 가장 먼저 어렴풋하게 감지하게 되는 것은 소설 속에서 우리들이 익숙하게 사용했을 법한 어떤 단어들이 사라졌다는 느낌이다. 서성란은 소설 속의 갑숙이 낳은 아이 승복과 혜란이 낳은 아이 선희가 우리들이 흔히보는 아이들과는 다르다는 점을 암시하지만 마치 그의 소설 세상 속엔 그 아이들을 부를 수 있는 말이 달리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설명만 남겨두고 그 설명을 대치할 짧고 일반적인 지칭어는 보여주지 않는다.

식재료를 배달하는 상인들이나 손님들 모두에게 공평하게 무뚝뚝한 엄마와 늘 웃는 낯꽃인 딸은 성격이 딴판인데 비해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외모가 비슷했는데, 작은 키에 몸집이 큰데다 이목구비가 남달라서 모녀는 어디에서든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길에서 가게에서 버스에서 사람들이 승복과 엄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신기한 동물을 구경하듯 승복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웃었고 귓속말로 수군거렸고 쯧쯧 혀를 찼다.

잉태된 아기는 열두 달을 채우고 세상에 나왔다. 아기의 얼굴은 여느 아기들과 달랐다. 머리는 둥글고 납작한데다 목은 짧고 두꺼웠다. 시늉뿐인 코는 주저앉은 듯 납작했고 양 눈 사이가 멀리 떨어져 있는 두 눈은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가 있었다. 결코 예쁘다고 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사라진 그 지칭어들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짐작은 간다. 그렇다면 그 지칭어들은 왜 그의 소설 속에서 사라지게 된 것일까.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중립적이질 못하다. 심지어 아주 중립적이어야할 것 같은 언어마저도 중립적이질 못하다. 가령 문둥병이나 나병과 같은 어떤 병의 명칭은 그 병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람들의 멸시와 차별을 그 병의 명칭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 병명을 입에 올리는 순간 우리는 어떤 병명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병에 대한 우리의 혐오를 동시에 그 말에 담는다. 그 때문에 언어는 종종 어떤 현상이나 대상을 지칭하기 보다 그 현상과 대상에 대한 우리들의 차별적 인식을 함께 담고 있기 일쑤이다. 문둥병과 나병이라는 말대신 한센병이라는 말을 쓰라는 권고는 언어에 담긴 그 차별 인식을 극복해보자는 뜻이지만 한센병이라는 말도 병명이라는 측면에선 어떤 대상을 그 병의 환자로 제약한다는 언어적 차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예로 든 나병이 너무 극단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언어의 차별은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언어의 차별은 아주 일반적인 말 속에도 예외없이 내포되어 있다. 가령 ‘여자가 무슨 옷을 그렇게 난하게 입냐’라고 말을 했을 때 그 말 속의 ‘여자’라는 말은 아주 일반적인 평범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여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내포한다. 때문에 언어의 차별을 극단적인 어떤 특별한 상황에 국한된 현상으로 보기 어렵다. 중립적이지 못하며 종종 차별을 내포한다는 언어의 속성은 매우 일반적이다.
현실에서 그런 언어적 차별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소설의 세상에선 어떨까. 소설은 실질적 세상을 기반으로 하는 경우에도 철저하게 텍스트만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그 세상에선 차별적 언어를 없앨 수 있지 않을까.
서성란의 소설 『풍년식당 레시피』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접하는 것은 바로 그 차별적 언어가 사라진 세상이다. 그는 설명은 남겼지만 사회의 차별적 인식이 고스란히 담긴 어떤 지칭어들은 그의 소설 속에서 모두 지워버렸다. 때문에 그의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은 실질적으로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어떤 현실적인 지칭어로 호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텍스트의 세상에서 소설가가 세상의 차별에 맞서는 가장 적극적 방법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치밀하게 세상의 차별에 저항한다면 소설 속에서 텍스트를 통해 언어 차원의 차별을 모두 지워버릴 수 있다. 그렇게 텍스트가 차별을 지우면 우리는 언어적 차원의 차별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세상이 만들어낸 것임을 차별없는 소설 속의 텍스트와 우리가 사용하는 실질적 언어와의 대조를 통하여 보다 확연하게 알 수가 있다. 서성란의 소설 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차별의 언어가 지워진 세상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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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점이 있다. 소설 속에서 차별의 언어를 지웠다고 현실 속에서 차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란 사실이다. 때문에 차별적 언어의 제거라는 텍스트 차원의 장치가 그것만으로 의미있는 것이긴 하지만 아울러 그것만으로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현실적 차원에서 차별의 극복을 시사하지 못한다면 소설 속에 구현된 텍스트 차원의 세계는 너무 허무해 보일 수 있다. 소설은 텍스트의 형식으로 차별을 극복하면서 동시에 현실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그 차별이 어디에서 왔는지, 또 어떻게 하면 그 차별을 극복해 갈 여지가 있는지를 보여줄 때 좀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서성란은 물론 그런 기대에 부응하고 있다.
서성란의 소설 『풍년식당 레시피』는 차별로 인해 상처받은 존재들과 그 존재들이 상처를 수용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차별이 이루어지고 그 차별이 어떻게 극복되고 있는지를 동시에 드러낸다. 이제 소설 속에서 접하게 되는 우리의 상처받은 존재들을 만나보자.
가장 먼저 만나볼 상처의 존재는 승복의 모, 갑숙이다. 승복의 모이므로 그녀는 당연히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세상에 널리 퍼져있는 일반적 인식에 의하면 자식에 관한한 사랑으로 뭉쳐진 존재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랑을 어머니란 존재의 본능이라고 생각하여 모성애라 부른다. 모성애란 자식에 대한 사랑을 자식이라는 존재 이외의 다른 것으로 판단하지 않는 사랑이다. 어머니는 자식이 내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갑숙은 그 모성을 회의하게 만든다. 아이의 엄마인 갑숙은 아이의 목을 조르려고 하다가 차마 실제로는 그렇게 하질 못한다. 작가는 그 순간을 “아기의 웃음이 엄마를 혼란과 상심에 빠뜨렸다. 어둠 속에서 한없이 연약하고 보드라운 아기의 뼈와 살을 어루만질 때마다 젊은 엄마는 가슴 깊은 곳에서 샘물처럼 솟아나는 애틋하면서도 따뜻한 감정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그러나 웃는다고 해도 아니 오히려 그 웃음으로 인해서 아기의 얼굴은 한층 더 비정상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한낮의 햇빛이 방안 깊숙이 차오를 때면 엄마는 씻기지 않아 때가 낀 짧고 두꺼운 아기의 목에 두 손을 가져다 댔고 두 눈을 질금 감은 채 힘을 주어 누르려다 말고 흐느끼면서 떨어지곤 했다”고 전한다. 승복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직 의학이 기형아 검사를 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발전되지 못한 의학이 승복의 생명을 살렸다. 작가는 “뱃속의 아기를 볼 수 있었다면 엄마는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고 말한다. 모성의 결핍은 우리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아이는 태어나긴 했지만 세상 속에서 자라지 못한다. 갑숙은 아이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킨다. 소설은 “벽장이 있었다면 엄마는 그곳에 승복을 넣고 자물쇠를 채워 놓았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누구에게도, 한집에 살고 있는 식구들에게조차 아기를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 때문에 승복은 “열 살이 되도록” 집 밖을 나가보지 못한다.
엄마는 또 그 승복을 “장애인 시설”에 맡기기에 이른다. 그곳에 승복을 맡기며 엄마는 승복에게 “여긴 너 같은 애들만 모여 살고 있는 특별한 학교야. 아무렴 집보다 낫겠지”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맡긴 것이 아니라 그곳에 버린 것이었다.
승복에게 주어지는 가혹한 운명은 장애인 시설의 화재에서 살아남아 다시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계속된다. 갑숙은 돌아온 승복을 병원에 데리고가 임신을 못하도록 난관을 드러낸다. 승복에게 갑숙은 엄마라기 보다 ‘김여사’로 불린다. 승복과 갑숙의 관계가 딸과 엄마로 불리는 것은 소설 속에서 그렇게 흔치 않다. 갑숙이 모성을 결핍하고 있는 탓이 클 것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모성의 결핍을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치부하며 갑숙을 몰아세우는 것으로 이 문제를 봉합하려 든다. 우리의 딜레마는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소설은 갑숙에게서 모성애의 DNA를 제거시킨 것이 어린 날 받았던 동네 아이들로부터의 멸시에서 시작된 것임을 밝힌다. 그 멸시는 차별에서 시작된다. “제 앞가림도 할 줄 모르는 여자였”던 갑숙의 백치 언니 현숙에 대해 “어른들은 무시하고 협박하고 함부로 대했”으며, “동네 아이들은 놀려대는 것으로 모자라서 때리고 괴롭”힌다. 이에 대한 갑숙의 반응은 백치 언니를 “무시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보다 그런 언니를 두었다는 사실에 대한 원망쪽으로 발전한다.
만약 모성을 아이를 낳은 엄마에 국한시키지 않고 이 사회가 져야할 아이에 대한 공동의 책임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면 그 원망의 발로가 된 차별과 멸시도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회가 공동으로 져야할 모성을 아이를 낳은 엄마에게 홀로 떠넘겨 온 것이 그동안의 우리 사회였다. 그런 측면에서 갑숙의 원망을 개인적 차원에서 비난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갑숙의 승복에 대한 태도는 혹시 갑숙의 내면에 나도 놀리고 멸시할 수 있는 동네 아이들의 위치에 서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를 의심스럽게 만든다. 다시 말하여 우리는 차별과 멸시를 받을 때 차별하고 놀리는 다수의 우월적 위치에 대한 욕망을 함께 갖는다. 차별과 멸시를 받은 사람은 차별과 멸시가 없는 세상을 꿈꾸며 그 차별과 멸시에 맞서 싸우는 것으로 근원적 해결을 모색하기도 하지만 차별하고 멸시할 수 있는 위치로 자리를 옮김으로써 자신이 경험했던 차별과 멸시를 더이상 받지 않아도 되는 개인적 해결을 꿈꾸기도 한다. 전자는 어렵고 후자는 비교적 쉽다. 갑숙은 후자를 선택했다. 그러나 그 차별과 멸시의 대열에 동참하지 않는 소극적 저항이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더 이상 갑숙의 선택을 이해해주긴 어렵다.
상황은 좀더 당혹스러워진다. 갑숙에게 승복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승복보다 먼저 낳은 승복의 언니, 승희가 있고, 승복보다 나중에 낳은 창수가 있기 때문이다. 갑숙은 승희와 창수가 승복을 경멸하고 멸시하도록 내버려둔다. 다시 말하여 갑숙은 아이들을 갈라 승희와 창수에게 어린 날 백치 언니를 두었다는 이유로 자신을 멸시하고 차별했던 동네 아이들의 권리를 부여하고 자신도 그 편에 선다. 멸시와 놀림으로부터 상처받은 갑숙은 그때의 상처를 경멸하고 멸시하면서 푼다. 갑숙은 그것이 자신의 상처인지 깨닫질 못한다. 갑숙의 욕망이 혹시 자신의 언니를 놀렸던 동네 아이들의 편에 서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를 의심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이 방법의 문제는 자신이 가장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존재, 그러니까 갑숙의 경우 승희와 창수에게서 사랑을 제거하고 증오나 경멸, 멸시의 태도를 심는다는 것이다. 그 존재들은 사랑으로 크질 못하고 증오로 자란다.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오히려 가장 크게 망가진다. 승복에 대한 혐오는 승희로 하여금 “승복과 같은 아이를 낳을까 두려워서 위험한 줄 알면서도 여러 번 인공유산을” 하게 만들고 결혼은 이혼으로 끝을 맺는다. 창수의 경우엔 승복에 대한 혐오가 “승복을 낳은 엄마”에 대한 집요한 괴롭힘으로 이어지며 결국 집을 나갔다가 폭력배들에게 집단으로 맞아 식물인간으로 삶을 마감하기에 이른다. 갑숙은 돌이킬 수 없는 패착을 두었다. 서성란은 갑숙에게 당신의 분노가 이해는 가지만 당신의 대응이 답은 아니라고 말한다.
갑숙이 승희와 창수에게 부여한 증오와 멸시의 권리는 알고 보면 자기 존재의 부정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갑숙이 부정하고 싶었던 백치 언니가 사실은 갑숙을 이 세상에 있게한 갑숙의 엄마였기 때문이다. 언니가 없었다면 갑숙도 이 세상에 없었다. 때로 증오로 문제를 풀려하면 우리의 존재가 이 세상에서 근원적으로 지워질 수 있다.
갑숙에 이어 두 번째로 살펴볼 상처의 존재는 승복의 할머니이다. 소설 속에선 ‘노인’으로 불린다. 노인의 상처는 상실에서 왔다. 그러나 그 상실은 딸자식에 대한 차별에서 시작되었다. 노인이 들려준 얘기에 따르면 노인은 “쌍둥이 남매”를 낳았으나 “딸애한테는 눈길도 주지 않았”던 시부모가 그 중 딸을 어디론가 보내버려 “젖 한번 물려보지 못하고 딸을 빼앗”기고 만다. 그러나 노인은 딸을 잃은 그 상처를 치유받는다.
그럼 노인의 상처는 무엇으로 치유되는가. 서성란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노인은 잃어버린 딸을 찾아 “미친 여자처럼 정신없이 이곳저곳 헤매고 다”니다 자신의 손을 잡아 끄는 어떤 “곱고 예쁜 여자를 따라 가” 그 집에서 “팥죽을 한 그릇 얻어먹”는다. “배가 동산만큼 불러 있”었던 그 여자가 사실은 갑숙의 엄마가 되는 현숙이다. 그리고 노인은 그 팥죽을 얻어먹은 뒤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에 이른다.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어떻게 팥죽이 딸을 잃은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다는 거지? 그것은 그 팥죽이 정신이 온전치 못한 딸을 둔 어미가 그 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끓여주는 팥죽이었기 때문이다. 그 팥죽에는 미친 딸도 거두는 어미의 사랑이 녹아있다. 그 사랑의 힘은 딸을 잃은 어미의 상처도 치유할만큼 강력하다.
사실 갑숙 또한 그 팥죽의 바로 곁에서 자랐다. 하지만 노인은 본 그 사랑을 갑숙은 보지 못한다. 아니, 왜? 잃어버린 딸을 찾아나선 노인은 사랑으로 딸을 찾은 반면 멸시와 차별에 대한 분노 대신 언니에 대한 원망을 키운 갑숙은 그 원망이 사랑을 가리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랑을 가진 자에게만 보인다. 사랑을 보려면 먼저 사랑을 가져야 한다. 상처를 사랑으로 치유한 노인의 세상에 대한 대응은 팥죽을 쑤는 것이었다. 노인은 팥죽이 사랑의 다른 이름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세 번째 상처의 존재를 만나볼 차례이다.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 승복이다. 승복이 받은 상처는 갑숙의 상처를 말하는 자리에서 거의 언급이 되었다. 승복의 상처는 대개 그녀의 엄마에게서 왔기 때문이다. 엄마는 승복을 집안에 가두었고, 차별했으며, 승복을 버렸고, 승복에서 여자를 지워버렸다. 승복에게 상처를 키우지 않는 방법은 처음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수용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가족들이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살아가는 삶이었다.
그렇다고 수용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승복은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스스로 극복하기도 한다. 자신에게서 지워진 여자를 식당 앞에 버려진 아이 선희의 엄마가 됨으로서 극복한 것은 그 한 예이다. “아기를 낳지 않았지만 승복은 엄마가 되었고 누구보다 강한 모성을 가”진다. 그러나 운명의 수용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게 극복되었다고 믿었던 운명이 어느 순간 불안하게 흔들린다. 버림받음으로써 받은 상처를 자식을 “버리지 않”는 사랑으로 극복하려 하지만 그 극복은 아울러 자식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발전하여 자식에게 갇히게 된다. 자식에게 갇힌 부모는 동시에 부모 속에 자식을 가둔다. 때문에 승복에겐 선희를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큰 불안이 된다. 그 불안이 닥쳤을 때 승복은 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때로 우리는 고통으로 고통을 덮으려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 그 방법이 크게 효과가 없음을 알고 있다. 결국 답은 다른 곳에 있다. 그 답을 알려준 것은 노인이다. 승복이 “걸음마를 떼고 문간방을 나”와 서툰 걸음으로 “넘어지지 않고 부엌으로 갔을 때” 그곳에서 처음 보았던 사람이 바로 노인이다. “승복은 망설이지 않고 노인의 품에 안겼”고 노인은 승복을 주저없이 안아주었다. 그리고 “부엌에서 밥을 짓고 있던 노인”은 그 부엌의 세상을 승복에게 알려준다. 그것은 사랑의 세상이었다.
사랑이란 대상으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가능성을 볼 수 있게 해주는 힘 같은 것이다. 가령 승복의 엄마 김여사는 승복에게서 장애 이외의 것을 보지 못한다. 노인은 다르다. 노인이 사랑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노인의 사랑은 “승복이가 칼질은 선수”이며 “너처럼 무채를 잘 써는 사람은 없을 것이”란 사실을 보게 해준다. 사랑의 눈엔 승복이 장애를 가진 아이가 아니다. 노인은 말한다. “너는 나무랄 데 없는 아이였제. 음식 만드는 걸 좋아하고 솜씨가 있었느니라”라고.
상처는 가혹하지만 상처는 동시에 사랑의 기회로 오기도 한다. 상처는 그 상처에 고통받고 분노할 때 더 덧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상처를 잘 껴안을 때 사랑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팥죽을 쒀서 대를 이어 팔라던 노인의 말은 알고 보면 대를 이어 사랑하라는 말에 다름아니다. 팥죽은 노인에게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승복은 노인의 사랑으로 상처를 극복한다. 상처는 두 가지로 치유된다. 하나는 사랑 받으면서 치유되며, 또 한편으로 사랑을 주면서 치유된다. 승복은 노인에게 위로 받고 사랑받으며 상처를 치유하고 상처받은 영혼과 슬픈 삶을 위로하면서 그 사랑으로 스스로를 치유한다. 상처를 치유하려면 사랑밖에 답이 없다. 다행이 우리는 오갈데 없는 상처의 고통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상처와 사랑, 그 사이에 서 있다. 상처는 우리들의 몸을 고통과 분노쪽으로 기울게 만들지만 동시에 우리들에게 사랑으로 고개 돌릴 수 있는 기회도 함께 가져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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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읽는 것으론 부족하다. 『풍년식당 레시피』는 두 번 읽어야 한다. 처음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마치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그렇듯이 소설 속 인물들과 낯설게 만난다. 두 번째 만남은 처음 만남의 그 낯설음을 많이 희석시켜 준다. 물론 소설과 사람과의 만남이 같을 순 없다. 소설은 두 번째 읽으면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 관계로 읽기가 따분해진다. 그러나 『풍년식당 레시피』는 현재로부터 시작하긴 하지만 끊임없이 과거를 오가는 복잡한 구조로 인하여 한번 읽는 것으로 이야기가 일목요연하게 독자의 앞에 줄을 서지 않는다. 그것은 두 번을 읽어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 점은 여러 번 읽으면서도 지루하지 않을 수 있는 이 소설의 매력이다.
두 번째 읽을 때 『풍년식당 레시피』가 갖게 되는 가장 큰 미덕은 소설 속의 인물들에게 말을 걸 수 있다는 점이다. 가령 소설이 시작될 때 눈보라 속을 걸어 “훗날 백년 식당으로 불리게 될 오래된 식당으로 ” 가기 위해 새벽길을 나선 여인이 식당 근처쯤에 이르렀을 때쯤 이렇게 말을 붙여볼 수 있다.
아, 나 당신 알아요. 그러니까 오래전이네요. 벌써 10년도 더 된 것 같아요. 그때쯤 당신은 이곳에 살았었죠. 그 식당 앞에서 당신을 본 적이 있어요. 당신은 식당의 손님들이 한가해질 때쯤이면 식당으로 들어가 밥을 먹고 가곤 했었죠. 어느 해 크리스마스 때도 당신을 그 식당 앞에서 본 적이 있어요. 그때 그 식당의 주인이 문을 열고 나와 당신을 식당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었어요.
그러면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사실은 그 식당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고백할 것이다. 그러면 그 뒤의 소설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독특한 소설 읽기가 될 수 있다.
처음 소설을 읽을 때 당혹스럽던 부분, 가령 죽은 승복의 할머니가 부엌에 다시 나타나 승복에게 팥죽 쑤는 법을 가르쳐줄 때와 같은 그 장면도 두 번째로 책을 읽을 때는 당혹감을 많이 거둘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이 승복의 기억 속이란 것을 눈치챌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 죽은 사람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다. 우리는 승복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난 처음에는 깜짝 놀랐어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았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되요. 그런데 알고 보니 이곳이 당신의 기억 속 부엌이군요. 묘하게도 현실 속의 부엌과 똑같이 닮았어요. 당신의 기억은 너무 생생해요.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도 두 번째로 책을 읽어갈 때는 그렇게 당황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이 서성란이 이룩한 진혼의 형식이란 것을 눈치챌 수 있기 때문이다. 위령제, 혹은 굿을 통하여 원혼을 달래는 것이 우리들에게 익숙한 형식이긴 하지만 형식이란 얼마든지 변형될 수 있다. 다만 서성란은 그 진혼의 장소를 노인의 식당과 승복의 부엌으로 삼고 음식을 진혼의 매개물로 삼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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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년식당 레시피』는 크리스마스이브의 눈소식으로 시작되었다. 소설의 마지막 자리에서 우리는 또 다시 눈을 만난다.

그쳤던 눈이 다시 쏟아진다. 날이 밝으면 세상으로 난 모든 길이 끊어지고 하얀 눈으로 이어진 단 하나의 길이 생길 것이다.

눈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세상의 모든 길을 지워버리지만 그 길 위로 발자국 찍는 사람에게 있던 길 위로 길을 새롭게 열어준다. 길을 지워버리면서 동시에 새롭게 열어주는 것이 눈이다. 이미 길은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과거를 답습하고 있는 길이다. 길은 미래를 향하여 흘러가고 있는 것 같지만 알고보면 과거로 길을 채우고 있다. 그 길에 축적된 과거는 부조리하다. 그렇다면 그 길을 새롭게 걸어 지금까지와는 달리 열어야 할 것이다. 소설의 서두에서 맞이한 눈소식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기대했으나 실제로 소설 속에서 만난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소설은 눈이 지워준 그 길 위에서 새롭게 길이 열릴 것이며, 그 길 위에서 만나는 세상은 지금보다는 좀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임을 예고하며 마감되고 있었다. 예고는 작가의 몫이었으나 그 예고의 완성은 사실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몫이다.
(서성란, 『풍년식당 레시피』, 이리, 2014, 해설)

2 thoughts on “상처와 사랑 사이에, 우리는 서 있다 – 서성란 장편 소설 『풍년식당 레시피』

  1. 제목과는 달리 조금 슬픈 소설이군요.
    서성란 작가와 이름이 같은 하성란 작가 두 분 다 67년생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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