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상으로 시인을 불렀을 때 – 유병록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유병록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1
나는 나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세상의 모든 다른 사람들은 또 그들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들이 모두 격리되고 고립된 각자의 세상을 사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 각자의 세상은 서로 중첩되고 겹치면서 많은 부분에서 서로 비슷비슷한 측면이 없지 않다.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살면서 동시에 비슷하게 산다.
가령 내가 사는 곳에선 가까이에 경기도 퇴촌이란 곳이 있다. 매년 그곳에선 유월이면 토마토 축제가 열린다. 그때면 축제장을 찾는 사람들은 토마토를 재배하는 비닐 하우스를 직접 구경하기도 하고, 또 축제장에 마련된 토마토를 한 상자씩 구입해가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런 경우 축제장을 찾았던 우리의 기억은, 토마토를 중심으로 정리하면, 역시 토마토는 산지에서 직접 사서 먹는 것이 제일 맛있다는 정도로 뭉뚱그려지면서 대개는 비슷해지고 만다.
하지만 토마토의 세상으로 시인을 부르면 양상은 크게 달라진다. 우리들은 사실 이 세상의 어느 곳으로나 어렵지 않게 시인을 부를 수 있다. 그들의 시를 읽는 것이 곧 그들을 부르는 호출 신호가 된다. 유병록의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에선 「붉은 달」을 읽으면 시인이 토마토의 세상으로 온다. 그가 오면 우리는 토마토밭에서 “수천개의 심장”을 보게 된다.

붉게 익어가는
토마토는 대지가 꺼내놓은 수천개의 심장
—「붉은 달」 부분

토마토가 붉은 색이고, 생각해보면 모양 또한 심장과 비슷하기 때문에 시인이 토마토의 세상을 이렇게 바꾸어놓아도 우리 또한 어렵지 않게 시인의 토마토 세상으로 합류할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의 세상은 이에서 더욱 확장이 된다. 유월의 어느 하루, 경기도의 한 마을로 걸음한 우리들에게 토마토는 여전히 하나의 과일에 불과하지만 시인이 그 세상으로 오면 토마토는 시인이 전하는 전설의 중심이 된다. 그 전설에 따르면 오래 전 “이를테면 붉은 달이라 불리는 자”가 있었다. 그는 “재단에 올려놓은 촛불처럼, 자신이 유일한 제물인 것처럼 어둠속에서 빛”을 내던 존재였다. 그는 “비명을 삼키며 들판을 지”키다 들판에 ‘매장’이 된다. 그 전설로 인하여 시인에게 토마토는 곧‘붉은 달’이며, 결국 “사방으로 솟구친 붉은 빛이 들판을 물들인 것”이 토마토의 기원이 된다. 시인은 “이것이 토마토밭 사이로 구전되는 동화”이며, “피 뿌린 대지에 관한 전설”이라고 속삭인다. 그래서 토마토가 나올 때면 “그를 기리기 위해 운집한 군중처럼/올해의 대지에도 토마토는 붉게 타오른다.” 이제 토마토는 과일이라기 보다 우리에게 수혈되는 피에 가까워진다. 시인이 “토마토를 베어 물 때마다/내 심장으로 수혈되는 붉은빛”이라고 한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는 맛으로 토마토를 먹지만 시인이 들려준 전설 끝에서 토마토를 먹으면 우리의 세상에 “붉은 달이 뜬다.” 그 세상은 우리가 하루 토마토 축제를 즐기고 돌아왔던 세상과는 완연히 다른 세상이다.
그렇게 시인을 우리의 세상으로 부르면 우리는 비슷비슷했던, 그래서 종종 무료했던 우리의 세상을 달리 살 수 있다. 나는 내가 살아가고 있는, 내가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비슷비슷한 나의 세상으로 시인 유병록을 불러볼 생각이다. 나의 세상을 말하면서 그를 불러 나의 세상이 어떻게 뒤바뀌는지를 살펴볼 생각이다.

2
나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 8층에 살고 있어 엘리베이터로 집을 오르내린다. 나의 세상에서 엘리베이터는 하루 종일 사람들을 싣고 10층 높이의 아파트를 사람들이 원하는대로 층층이 오르내린다.
유병록을 나의 세상으로 부르자 같은 아파트에 다닥다닥 붙어서 모여 살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이름을 잃고 그 사람의 물건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거리를 쏘다니던 가방과 그림자, 병든 지팡이와 활짝 핀 브로치도 저녁이면 엘리베이터에 담겨 집으로 간다 구원받은 표정으로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엘리 엘리 라마 엘리베이터」 부분

“거리를 쏘다니던 가방과 그림자”는 아마도 매일 가방을 들고 출근하는 어느 동 몇 호의 아저씨였을 것이다.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우리는 서로 이름을 모른다. 가방으로 불릴 수밖에 없다. “병든 지팡이”는 지팡이를 짚고 구부정한 허리로 아파트 단지를 오가던 할머니나 할아버지였을 것이며, 아마도 병색이 완연했을 것이다. “활짝 핀 브로치”는 얼굴보다 머리에 꽂은 꽃모양의 브로치가 더 인상적이었던 이웃집의 젊은 처자였을 것이다. 아파트에서 사람들은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고 그 사람의 물건으로 불린다. 어쩔 수가 없다. 서로 이름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파트로 이사오고 나서 아파트처럼 폐쇄적인 주거 공간도 드물다는 인상을 받았다. 서로 문을 마주하고 살고 있는데도 바로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그 상황을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의 물건으로 사람이 인식되는 현실로 구체화한다. 그곳에서 엘리베이터는 높은 층의 집으로 편하게 오갈 수 있도록 해주는 현대적 기구가 아니라 “무엇이든 들어올”리는 강력한 힘의 존재가 되기 시작한다. 때문에 아파트의 사람들은 “저녁이면 엘리베이터에 담겨” “구원받은 표정으로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집으로 간다.” 아파트가 도시 생활을 하는 이들 모두가 꿈꾸는 주거 공간이 되어 버렸다는 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구원받은 표정”을 읽어낸 시인의 시선에는 크게 무리가 없다. 그 이해의 선상에 서면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는 그냥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그 앞에서 「엘리 엘리 라마 엘리베이터」를 외우며 기도를 올리기에 충분한 대상이 되고 만다. 시의 제목인 이 말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마지막으로 했다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에서 변형된 말일 것이다. 예수의 말이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라고 하니 “하늘 가까운 곳으로 올라가는 엘리 엘리베이터”에 오른 나는 사람들이 찾던 구원이 이 시대에는 엘리베이터로 대변된 아파트로 옮겨졌다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의 삶을 평수로 재단하는 아파트 문화의 폐단에 대해선 자주 얘기를 들었지만 엘리베이터에서 아파트 문화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얘기를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의 세상에선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바람 부는 날에는 구겨진 종이가 바람에 떠밀려 굴러가는 것을 접할 때가 있다.
다시 유병록을 나의 세상으로 부르자 “바람에 떠밀려 굴러다니던 종이가 멈춰”선다. 그러자 그가 그 구겨진 종이에서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읽어낸다. 시인은 묻는다.

세계의 비밀을 누설하리라 다짐하던 때를 떠올렸을까 검은 뼈가 자라듯 글자가 새겨지던 순간이 어른거렸을까 뼈를 부러뜨리던 완력이 기억났을까
—「구겨지고 나서야」 부분

아마도 구겨진 종이가 세계의 비밀을 폭로한 어느 책에서 한쪽을 찢어낸 것이 아닐까 하고 상상했나 보다. 또 시인은 글자를 하나의 뼈라고 본듯하다. 대부분의 글자가 검정색으로 찍히기 때문에 글자가 뼈라면 그것은 검은 뼈이다. 글이 때로 글의 뼈대를 잡는 일일 때도 있다. 글자를 뼈로 보는 것은 그러므로 큰 무리가 없다. 그러나 뼈대를 잡는 일이 잘 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때면 글을 쓰던 사람은 쓰던 원고의 종이를 찢어내 구겨버렸을 것이다. “뼈를 부러뜨리던 완력”의 순간이다. 나의 세상에선 지저분한 쓰레기에 불과하여 항상 그것을 버린 누군가를 탓하며 지나갔던 거리의 구겨진 종이가 시인을 불러 그 거리에 세우자 “구겨진 몸을 다시 펼치지 말라는 듯이 품 안에서 겨우 잠든 어둠을 깨우지 말아달라는 듯이” 몸을 말고 거리를 구르다 잠시 멈춰있었다.
나의 세상에선 여름철이 되면 종종 큰비가 내리곤 했다. 비가 심하게 오는 날이면 빗물들이 하수구를 찾아 거리를 몰려다녔고, 하수구를 찾아낸 빗물은 급한 걸음으로 이 도시를 빠져나갔다.
시인을 나의 세상으로 부르자 심하게 내리던 비가 “관을 내리치는 못질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상당히 거친 빗줄기이다. 비가 심할 때면 항상 내가 본 것은 서로 밀치고 나가듯 하수구를 급하게 빠져나가는 물줄기였으나 이제 그 자리에선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구름의 시절은 땅속으로 질주해 사라진다 딱딱한 세계에 도착한 물방울은 부서진 몸으로 흘러간다
—「중력의 세계」 부분

비가 내린다는 것은 “구름의 시절”이 지상에서 “땅속으로 질주해 사라”지는 일이다. 변주는 계속된다. 비가 많이 내리면 산에선 마른 경사를 가파르게 세워놓기만한 낭떠러지에 폭포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의 세상에서 그 폭포 앞에 서자 이제 줄기를 만든 물들이 “굽이를 지나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다. 우리도 때로 삶의 고비를 지날 때마다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실제로 누군가는 뛰어내린다. 하지만 대다수는 마음만 낭떠러지 아래로 내려보내고 몸은 거두어 다시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돌아온다. 폭포에선 흰 물보라가 일고 한여름이었다면 우리는 폭포가 식혀주는 서늘한 냉기로 잠시 더위를 잊기도 한다. 그러나 시의 세상에선 물이 낭떠러지를 떨어질 때 물의 “뼈가 부서지고 체온이 탈출”했으며 “살점이 공중으로 튀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수차례 정신을 잃고 혼절”할 수밖에 없는 고통스런 상황이었지만 놀랍게도 ‘비명’이 낭자한 그 지상의 삶에도 불구하고 “물방울은 흘러”가고 있다. 문득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때 뜬구름을 잡듯이 꿈을 꾸며 살다가 지상으로 추락하고 “조금씩 더 남루”해져 가면서. 그리고 “끝내 구름의 체온을 회복하지/못하”면서. 그러나 시인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가리켜 “부득이한 중력의 세계에서/누더기를 걸친 성자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왜 아니겠는가. 성자가 별 것이겠는가. 힘겨운 삶에 함께 해주는 작은 위로가 성자의 몫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보면 우리는 그냥저냥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 자체로 우리를 위로하며 살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곧 비다. 우리가 세상을 적셔 생명을 만든다. 성자가 따로 없다. 시인을 나의 세상으로 부르자 아무리 남루한 삶이라도 삶의 줄을 놓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의 성자였다.
그러나 나의 세상에선 자주 삶이 힘겨운 사람들이 강에 몸을 던지기도 한다. 자살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안타깝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 안타까운 마음으로 시인을 나의 세상으로 불렀다. 나의 세상에서 물에 몸을 던진 사내는 물에 엎드린 자세로 둥둥 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시인은 자살한 사내가 아니라 오래도록 물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내를 발견한다.

꽃에 날아든 나비처럼 사내는 물속을 응시한다

그 사내를 보며 시인은 이렇게 묻는다.

어둠속에 있으면 조금씩 환해지듯
오래 들여다보면
본 적 없는 심연까지 밝아질까
—「나비」 부분

시인도 알고 있다. 물에 몸을 던지는 것으로 “숨 막히던 세월은 흘러갔다”는 것을. 또 “귀를 열고 흘러나오는 소리와 배꼽을 열고 나오는 배고픔/물살을 뿌리치던 시간도 떠내려간다”는 것을. 나는 자꾸만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그가 처한 죽음을 죽음으로 덮어주지 못하나 시인은 “눈도 입도 닫고 귀마저 닫았으니/고통은 끝났다”며 그의 죽음으로 그의 고통을 덮어준다. 그리고 사람들이 죽은 사람의 시신을 인양할 때 “꿀을 빠느라 정신이 팔린 나비를 붙잡아 들어올리듯/누군가/사내를 물 밖으로 꺼낸다”고 말한다. 사내는 물속으로 몸을 날려 죽었다. 그러나 사내가 인양될 때 그 자리에선 나비 한 마리가 날아오른다. 시인이 물 위에 떠 있는 사내의 시신에서 “꿀을 빠느라 정신이 팔린 나비”를 보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제 사내는 나비가 된다. 시인은 “나비는 꽃잎을 떠날 때 영혼을 두고서 날아간다”고 시의 세상을 마무리한다. 사내는 죽은 것이 아니다. 다만 꽃잎에 영혼을 두고서 나비가 되어 날아갔을 뿐이다. 언제나 죽음 앞에서 안타까움 밖에 보탤 수가 없었던 나는 좀더 편안하게 사내를 보내줄 수 있었다. 사내가 나비가 되어 날아갔으므로. 나의 세상에선 사내가 물에 빠져 자살을 하면 그것으로 끝이었으나 시인을 부르자 죽은 사내가 나비로 살아나 날아갈 수 있었다.
나의 세상에선 봄이 되면 꽃이 핀다. 봄꽃은 대부분 여리다.
유병록을 나의 세상으로 부르자 그 여린 꽃들이 완력을 갖기 시작했다. 완력은 완강하고 강제적인 힘이다. 시의 세상에선 꽃들이 그 완력으로 피었다.

땅에 묻힌 자가 팔을 내밀듯
피어나는 꽃
—「완력」 부분

실제로 꽃은 땅속에 묻혀있는 씨앗이 발아를 하여 땅을 뚫고 나오면서 피기 시작하는 것이니 꽃의 시작이 “땅에 묻힌 자”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은 시적 표현이라기보다 사실에 가깝다. 시인은 그러나 그 “아름다운 완력도 시간을 구부리지 못한다”고 말한다. 완력이 아름다운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 꽃은 예외이다. 꽃은 대개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땅을 뚫고 나오는 그 완력과 아름다움이 합쳐져 꽃은 아름다운 완력이 된다. 아름답기까지한 완강한 힘을 가졌으면서도 그 꽃이 어쩌지 못하는 것이 있다. 바로 시간이다. 특별한 얘기는 아니다. 어느 꽃이나 시간이 되면 다 진다는 얘기이다. 져도 아주 아프게 진다. 시인의 눈에는 “부러지는 손가락처럼/뚝뚝/꽃잎”이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가락이 부러지듯 지고 있으니 팔을 내밀어 겨우내 묻혔던 땅을 완력으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지는 세월이 얼마나 아팠으랴. 그 아픔의 뒤에서 시는 “뚝뚝/꽃잎 질 때/누가 저 오월의 반지를 약지에 끼우고/이 들판을 등지리라”라는 예언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꽃이 지는 5월의 화창한 어느 날에 사랑을 언약한 누군가가 결혼을 하리라는 얘기로 들린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결혼에서 완력을 느끼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들판에 묻혀있던 씨앗이 꽃이 피울 때 완력을 보고, 꽃이 질 때 아름다운 완력도 소용없다는 것을 목도한 뒤끝에선 사람들의 사랑이란 것이 자연스럽다기보다 어떤 완력의 결과처럼 보일 수 있다. 혹시 사랑의 꽃도 완력으로 피어나는 것이 아닐까. 꽃의 앞에 시간이 기다리고 있듯이 사랑의 꽃 앞에도 예외없이 시간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름다운 완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사랑을 앞에 둔 시인의 시선이 깊다.

3
나는 유병록의 시집 속에서 몇 편을 골라 읽어보는 것으로 그를 나의 세상으로 불렀다. 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이 내겐 그를 나의 세상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가 나의 세상으로 오자 세상은 크게 달라졌다. 나는 여지껏 사과를 쪼개 놓으면 사과 속의 철분이 산화되어 단면이 붉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그를 불렀더니 그의 얘기는 내가 알고 있는 과학적 지식의 세상과는 달랐다. 그는 “쪼개진 단면은 붉게 변해 서로 낯선 얼굴을 한다”(「사과」) 고 말했다. 하긴 원래 저 낯빛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면 서로를 쳐다볼 때 얼마나 서로가 낯설 것인가. 과학을 버리고 시의 세상에 서자 세상이 남다르고 재미있었다. 겨울이면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하얀 입김에 대해서도 그의 얘기는 달랐다. 그는 우리가 “체온을 헐어 입김을 만”(「눈사람」)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시는 시적 표현의 재미를 넘어 내가 살고 있던 그렇고 그런 비슷비슷한 세상을 심도있게 파고 들었다. 나는 종종 나의 세상을 깊이있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시인이 내가 사는 세상에서 너무 멀리 살고 있다면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랴. 나의 세상으로 불러 내 세상의 얘기를 그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을 때 시는 비로소 힘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유병록은 그의 시집을 읽는 것으로 빈번하게 나의 세상으로 건너와 주었고, 그때마다 시인과 함께 한 나의 세상은 그렇고 그런 비슷비슷한 세상이 아니라 우리들만의 남다른 세상으로 바뀌었다. 시인을 곁에 두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며, 상당히 괜찮은 일이었다. 그의 시집을 펼치는 것만으로 그게 가능했다.
(『현대시』, 2014년 4월호)

**대상 시집
─유병록,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창작과비평, 2014

4 thoughts on “나의 세상으로 시인을 불렀을 때 – 유병록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1. 긴 글이라 이제야 읽었습니다. 시 평론을 하시다 보면, 이렇게
    시인의 시상과 평론가의 평설이 궤를 같이 하는 경우도 흔치 않을 것 같은데,
    시가 먼저인지, 평론이 먼저인지 경계가 느슨해지면서
    어찌 보면 짜고 치는 고스톱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시인들, 무서운 분들이네요.

    1. 젊은 시인인데 시가 좋더라구요.
      시가 좋으면 서평도 재미나게 쓸 수가 있어요.
      시대를 반영한 탓인지 사실 죽음에 대한 언급이 많아서 분위기는 어두웠습니다.

  2. 선생님의 평론글이 시집의 기준을 잡는 해석의 이정표로 보이네요…
    참고해서 꼭….감상해야겠네요…
    주문 들어갈거예요…
    기점에 빨간색 깃발 하나 꼽아 두셧네요.
    감사합니다…잘 읽었습니다..^^.

    1. 아이구, 감사합니다. 좋은 시가 많은데 다 언급은 못했어요. 언급못한 시들은 나중에 시간되는대로 블로그에 올리려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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