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시편 —계간 『문예바다』 2017년 겨울호 시 계간평

『문예바다』 2017년 겨울호

1
세상의 모든 말은 환기력을 갖고 있다. 말이 또다른 말을 부르는 힘이다. 그 힘은 사람마다 달리 작용하여 모두에게서 다른 말과 다른 이야기를 불러내준다. 그리하여 하나의 말이 주어져도 우리는 그 말의 경계에 갇히지 않고 무수한 말들을 불러 그 말의 세상을 다양하게 산다.
말의 환기력으로 말을 불러낼 때는 어떤 연관성의 고리를 매개로 하게 되지만 환기의 형식을 어떻게 취하냐에 따라 때로 굳이 연관성을 찾을 필요도 없다. 예를 들어 말의 꼬리를 붙잡고 말과 말을 이어가는 끝말잇기 놀이의 환기력에선 우리에게 주어진 말이 의미의 맥락에선 어떤 연관성도 없는 전혀 다른 말로 얼굴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보통 말의 환기력은 어떤 연관성의 고리를 매개로 또 다른 말이나 이야기를 불러다 주기 마련이다.
가령 내게 물이라는 말이 주어졌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 말은 가끔 내가 바다를 못 견디게 보고 싶어 했다는 경험을 통하여 바다를 떠올리게 만들 수 있으며, 그 바다는 모든 물이 바다로 흘러간다는 연유를 들어 물의 세상이 될 수 있다. 말하자면 바다는 내게 물의 세상을 일컫는 다른 이름이 된다. 물론 물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뭍의 물은 뭍의 세상에 끼어 있는 신세이다. 물의 세상으로 가면 뭍이 물의 세상에 끼어 들게 된다. 그때면 뭍은 섬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뭍마저 섬의 이름으로 끼어들게 되는 세상, 나는 가끔 바로 그 물의 세상으로 가고 싶었다. 바다가 보고 싶은 날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가끔 바다가 보고 싶은 것일까. 바다를 찾았을 때 가장 좋았던 것은 언제나 해변에 서 있는 나의 키 높이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 수면의 높이였다. 아니 몸을 세울 필요도 없었다. 앉아도 나는 수면보다 더 높은 시선을 가질 수 있었다. 바다는 가끔 몸을 일으켜 파도로 일어서긴 했지만 그 높이도 길고 오래도록 고집하는 법이 없었다. 뭍의 산들은 그렇질 않았다. 산은 한 번 높이를 이룩하고 나면 높이에 대한 고집이 완강했다. 힘들게 산을 오른 우리들이 갖게 되는 뿌듯한 마음도 우리들이 산의 높이에 기대어 확보하는 그 높이에 대한 충족감이 아닌가 의심이 들곤 했다.
바다에 가면 그런 고집이 없었다. 중력에 대한 저항을 모두 버리고 가장 낮게 누웠을 때가 곧 바다에 이른 물의 높이이다. 사실 우리들도 물의 자세로 누웠을 때 가장 편안함을 느끼곤 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동시에 또 높이에 대한 욕망을 갖고 살았다. 편안함을 알면서도 높이의 세상을 꿈꾸는 우리는 언제나 피곤했다. 내가 바다에 가고 싶다는 것은 어찌 보면 높이를 버린 물의 세상에 이르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높이를 버린 세상을 해발고도 0의 세상이라 부르기도 했다.
내가 계간지 가을호의 시들을 읽어보아야 할 자리를 말의 환기력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하고 그 예를 물이란 말로 든 것은 2017년 『문예바다』 가을호의 시부문이 물로 넘쳐났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물의 시편들이다. 아마도 의도된 것이리라. 우연으로 보기에는 이렇게 모든 시편이 하나같이 물을 노래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계간지 가을호의 시를 읽어가는 여정을 『문예바다』 가을호에 실린 시들을 중심으로 하고 다른 잡지에서 우연히 물을 말하고 있는 시편들로 한정했다. 어느 하나의 주제로 시들을 모으고 읽어보는 이러한 기획은 나름대로 의미 있어 보인다. 그리하여 가을호의 시들을 읽는 여정은 물의 시편에 귀를 기울인 자리가 되었다.

2
이창숙과 이성렬의 시로 시작해본다. 두 시인은 물이란 말에서 물의 기원과 최초의 물을 떠올리고 있다. 둘은 같은 것 같지만 시에선 상당히 다르다. 둘 중 이창숙은 물에 대하여 “어떤 기법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시를 시작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물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어떤 기법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고 한 말의 뒤에는 이 정도로밖에는 말할 수 없다는 말이 숨어 있다.
이창숙에 의하면 “낮은 데로 임하는 관능의 미”를 갖고 있으며 “흐르는 대로/부딪는 대로/사무치는 대로/바라보다” 보면 “숨이 멎을 듯한” 것이 물이다. 흐르고 부딪친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있지만 사무친다는 것에선 멈칫하게 된다. 그러나 시는 그 물이 어머니의 다른 이름이란 것을 시사한다.
원래 물은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하나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물의 출발점은 그러므로 “작은 입자들”이다. 시인은 그 입자들이 이미 태곳적에 “어머니의 이름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시인의 주장은 과학의 이름으로는 받아들이기에 무리가 있다. 그렇다고 과학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과학은 행성 지구에서 최초로 생명이 잉태된 곳은 바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실 시인이 바다를 구성하는 기본 입자가 물이라는 이유로 그 입자 자체가 태곳적에 “어머니의 이름으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렇게 생명 잉태의 품으로 보면 어머니로서의 물은 충분히 사무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여자는 생명 잉태의 품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지만 스스로가 또 어머니가 된다는 측면에서 물에서 태어나 물이 되는 특별한 경험을 갖는다. 이창숙의 시는 그 과정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태곳적 어머니의 이름으로 시작된 작은 입자들
어머니의 어머니 또 그 어머니로부터
내 몸 목마름 적셔 주는 생명수였으니
어느 날 나 사랑의 씨 하나 잉태하는
원류였음을 알고는
소중하게 품었었다, 축복의 작은 심장 소리 잃기 전까지
어느 누구도 사무쳤을 일,

멈추지 않는 물길은 내게 와닿았다
아픈 몸을 열어 준 생명수의 어머니
—이창숙, 「물의 기원」(『문예바다』, 2017년 가을호) 부분

모호한 부분은 있다. “축복의 작은 심장 소리 잃기 전까지”라는 부분이 그 부분이다. 그 부분이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이를 실질적으로 잃는 슬픈 일을 겪은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태어나는 순간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이창숙의 시로 보면 여자는 생명을 잉태하는 물에서 태어나 다시 그 물이 되어 생명을 잉태하는 존재이다.
이창숙과 달리 이성렬의 경우에 물은 인간의 죄를 징벌하는 수단이다. “이번 세상의 조물주는 조용히 수면 위를 거닐다가/가공할 수력으로 엄하게 인간의 잘못을 문책했음을/자서전에서 피력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도 어머니의 몸에서 생명으로 잉태된 경험을 동시에 갖고 있다. 즉 그에게 잉태의 경험은 없지만 잉태된 경험은 있다. 남자가 갖는 한계이기도 하다. 그 경험을 이성렬을 이렇게 전한다.

(전략)내 기억 속 최초의 물은
맨몸에 닿은 어둡고 따뜻한 체액, 억센 손아귀가
나를 그곳에서 끌어냈을 때 손끝에 도착한 까끌한
강보의 감촉과 귓가의 낯선 웅얼거림, 그리고
물가에서 떨어져 가는 기미에 폐부로부터 터져 나온
첫 울음(후략)
—이성렬, 「최초의 물가」(『문예바다』, 2017년 가을호) 부분

이 경험은 물로부터 태어나 스스로가 다시 물이 되어 생명을 잉태하며 어머니의 경험을 이어가는 여자의 세계와는 크게 다르다. 여자는 물을 잉태의 생명수로 기억하며 물의 입자 시절까지 거슬러 오르지만 남자는 물로부터 떨어져 나와 세상으로 던져졌던 경험으로 그 물을 기억하며 어머니 뱃속의 양수 시절까지만 거슬러 오를 뿐이다. 시인들이 모두 물을 주제로 하면 생명의 잉태를 말할 때 여자와 남자에 따라 기원과 최초가 달라지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물은 우리의 생명을 잉태하지만 한편으로 그곳에서 사는 우리의 삶을 물에 사는 것의 삶으로 바꿀 수 있다. 최금진의 시에서 그러한 삶이 엿보인다. 시인은 “섬에서 나고 자란 할망은 소라가 되었다”고 말한다. ‘할망’이란 말로 미루어 제주도에서 평생 물질을 하며 살아온 할머니로 추측된다. 현실적 사정을 보면 “식구들 모두 떠나보내고”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바닥을 기며 바닥에 사는” 제주도 어느 집의 할머니가 겪어가고 있는 노년의 삶이다. 시인의 눈에 그 할머니가 ‘소라’로 보이는 것은 바다에서 살아온 삶의 탓이 크다. 똑같은 모습의 할머니를 육지에서 보았다면 얘기는 전혀 달라졌을 수 있다. 말하자면 바다는 그 품을 삶의 무대로 삼고 살아온 할머니의 삶을 소라로 만드는 위력을 갖고 있다. 바닷가가 아니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소라가 된 할머니의 모습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할망은 제 몸뚱이를 쓰고 앉아 컴컴한 눈으로 밖을 내다본다
한 사람 들어앉기에 딱 좋은 굽은 등
소라 껍데기 안에는
할망이 들어앉아 어린애처럼 잠을 잔다
바다를 꼭 붙잡고 갯돌을 입으로 쭐쭐 빨며 잠이 든다
—최금진, 「소라」(『문예바다』, 2017년 가을호) 부분

물은 물을 끼고 살아온 삶을 물의 것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62 서영처는 물가에서 지켜보아야 했던 물의 죽음을 말하고 있다. 시인이 서 있는 자리는 “발을 담그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얕은 물”이 있는 곳이었다. 얕은 물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강은 아닌 것으로 보이나 강이 보이던 곳이었다. 시인의 전언에 의하면 그곳은 “미루나무 숲 속에” 자리한 “단내 나는 무밭”이 보이던 곳이었다. 시인은 “어느 날 인부들이 와서” “차곡차곡 무를 쌓아” “한 트럭 가득 싣고 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매년 반복되는 수확의 기쁨이 있던 곳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시인은 그곳이 “햇살이 지느러미를 흔들며 노는 곳”이었다고 말한다. 물속을 파고든 햇볕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도 그곳에선 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평화가 체감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평화는 지속되질 못한다. “어느 날은 사람들이 몰려와 허옇게 떠오른 물고기 떼를 주워 담고 부레처럼 떠다니다 돌아온 날이 있었”다는 대목은 그곳에서 바라보이는 강이 물고기가 살 수 없는 죽음의 강이 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짐작은 “겨울 강엔 낯선 트럭이 모래를 퍼 담아 어디론가 나르고 강물은 썩어” 갔다는 대목에선 짐작을 더욱 굳히게 만든다. 지느러미를 흔들며 물속을 놀던 햇살도 느낌을 바꾼다. 마치 그곳에 살다 삶의 터전을 잃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다슬기의 눈물처럼 끈끈하게 흘러내리는 햇살”로 변해 있기 때문이다. 평화롭던 시절은 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나는 뜻밖의 반응을 만난다. 우리는 대개 평화가 파괴되면 분노로 맞선다. 그런데 오히려 시인은 이제는 가버린 옛 시절의 평화를 그대로 말하는 것으로 시를 맺는다.

따뜻한 물이 발목을 감고 흐르네 얕고 따뜻한 물속에 내가 살아가네
—서영처, 「얕고 따뜻한 물」(『문예바다』, 2017년 가을호) 부분

시인이 “기억의 변두리를 흐르는 강가”라고 한 것으로 보아 시인도 자신이 찾던 곳의 평화가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다는 것은 알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면 그 강의 파괴자들에게 맞서 싸워야 하지 않을까. “그 많던 여름날이 트럭에 실려 한꺼번에 사라”진 강가에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강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에 대한 분노가 당연하지 않을까. 하지만 시는 행동이라기보다 언어이다. 언어로 싸울 때는 조심해야 한다. 분노는 자칫하면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분노할 때 행동하면서도 평화적으로 해왔다. 우리의 외침은 분노하고 있었지만 그 분노를 폭력에 싣지는 않았다. 분노를 평화에 싣고 가는 것이 이 땅을 사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국민들이 보여준 놀라운 싸움의 방식이었다. 언어는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분노를 언어에 실으면 언어 자체가 행동이 된다. 아마도 시인은 그것을 염려한 것이리라. 나는 시가 평화로운 언어로 마무리된 것이 강이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는 말로 들리지 않았으며 그것을 말들의 평화 시위로 느꼈다. 아마도 이 말들의 평화 시위 뒤꼍에서 시인이 들고 있는 피켓에는 4대강 파괴 주범 이명박을 구속하라는 문구가 적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또 다른 내 느낌이었다. 때로 시인의 평화로운 말은 그렇게 평화가 아니라 평화 시위가 된다.
이문재와 이현승은 물의 속성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가령 물은 겨울이 되면 얼어붙어 더 이상 흐르지 않으며, 날이 따뜻한 봄날이면 기화되어 아지랑이로 피어오른다. 이문재가 주목한 물의 속성이다. 이러한 관점에 서면 물은 날씨가 추워졌기 때문에 어는 것이 아니다. “초겨울/얼음이 얼기 직전”뒤를 돌아볼 때 어는 것이며, “초봄 녹기 직전/자기 앞을 내다보”기 때문에 그 얼음이 녹는다. 그럼 돌아보는 것으로 얼게 되면 물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시인은 다음과 같이 된다고 말한다.

더 차가워져서
더 딴딴해져서
스스로 터져 나가기를
원하는 얼음처럼
제 몸 밖으로
터져나가
으스러지고 싶어 하는
녹아 흐르고 싶어 하는
얼음 속 언 물처럼
—이문재, 「물의 백서 3—얼음」(『문예바다』, 2017년 가을호) 부분

우리의 삶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살다 어려움에 부딪칠 때이다. 앞으로 한발자국도 떼어놓을 수 없는 순간들을 만난다. 그러나 물에 대한 이문재의 관찰에 의하면 그 순간은 뒤를 돌아보며 혹시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갇힌 것은 아닐까를 살펴보아야할 시기이다. 그리고 그 시기를 잘 극복하면 “이윽고/가벼워져/구름의 손을 잡는/새벽 물안개처럼/보란 듯이 땅을 버리는/이른 봄 아지랑이처럼” 스스로에게 갇혀 있던 시간을 벗어나 지상의 속박을 뿌리치고 날아오를 수 있다. 때로 우리가 어려울 때 삶의 해답이 겨울과 봄 사이의 한 계절에 놓여 있을 수 있다.
이문재가 얼음과 수증기로 형태를 바꾸는 물의 속성에 주목하여 삶에 대한 잠언을 얻었다면 이현승은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는 “온기를 나르지 않는 악수를 나누며/나는 깨달았다./우리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다는 것을”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것을 「텅 빈 악수」라고 말한다. 그런데 시인은 그런 악수를 나누며 관계가 소원하다고 해도 안달하지 말라고 한다. 그것을 가르쳐 준 것은 물이다. “죽어서 가는 길엔/아홉 결의 물길이 있다는 것을/나는 물에게서 배웠다”고 말하고 “배워도 갈 수 없는 곳이 있다는 것은/그 얼마나 뼈아픈 후회인가”라고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아홉 결의 물길”은 아마도 죽어서 저승에 가면 건너야 한다는 강의 전설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강에 대해 알았다고 하여 멀쩡하게 살아있는 우리가 그 강을 건너갈 수는 없다. 시인에 의하면 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렇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관계의 사람이라고 억지로 관계를 만들 수는 없다. 시인은 이렇게 조언한다.

그러니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라.
전날 너무 뜨겁게 엉긴 사람들이
다음 날 되레 서먹한 법이다.
—이현승, 「텅 빈 악수」(『문예바다』, 2017년 가을호) 부분

정선의 물은 우물이다. 우물은 우리의 갈증을 달래주는 물이다. 정선에게 있어 이 우물이 자리한 곳은 우리의 마음속이다. 그런 것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런 우물이 우리들 마음 속에 있다면 마음의 갈증을 느낄 때마다 우리들이 그 갈증을 달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마음속 우물에 대한 비유는 흔하게 있어 왔다. 시인도 그 마음의 우물에 대한 비유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 “우물이 마르지 않기를 기도했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시를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인이 “내 안의 우물이/우투투 우투투 마른 기침을 뱉어 내는 밤/헤엄치던 문장은 슬픈 짐승이 되어 앙가슴을 파고들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물은 한을 쟁여 놓은 곳간일지 몰라”라는 구절은 마음속 우물에 대한 시인의 의구심으로 읽힌다. 또 시인은 이 우물을 가리켜 “열정의 허기 같은 것”이 아닐까를 묻는다. 열정의 허기라고 했으니 열정이 없어 배가 고픈 상황이다. 열정을 가져야 하는데 열정을 가지지 못하는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마음속의 우물이 열정으로 찬다고 보면 그 우물은 말랐을 것이다. 이 때문에 우물은 바닥을 보이고 있다. 그 때문인지 시인은 마른 우물을 우물이라 부르지 않고 ‘감정사막’이라 부른다. 시인은 감정의 사막이 된 그 우물 앞에서 이렇게 제안한다.

감정사막, 문장이 더 위험해지기 전에
우리 같이 갈지자로 흐를까
—정선, 「우물, 그 감정사막」(『문예바다』, 2017년 가을호) 부분

우리는 보통 우물을 갈증 해결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선에게 있어 우물은 갈증 해결에 대한 답이 아니다. 마르면 오히려 감정을 고갈시키는 사막이 된다. 마음의 갈증을 해결해줄 어떤 해답이 우물로 비유되었을 때 우리가 해야 될 일은 그 우물이 마르지 않기를 바라며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것이나 마른 우물이 감정의 사막으로 비유되면 그때는 갈증을 해결하는 방법이 우리 스스로가 물이 되어 그 감정 사막을 흐르는 것이다. 물론 사막이니 걸음은 좀 비틀거릴 것이다. 때로 우리는 습관적 비유를 이어받기 보다 그 비유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작은 일 같아 보이나 큰 변화를 몰고 올 수도 있다. 비유를 바꾸면 기도가 아니라 비틀거리는 걸음을 갈증난 마음을 달래는 길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방황과 흔들림의 걸음이 사막을 흐르는 물로 바뀌는 순간이기도 하다.
나는 바다가 보고 싶을 때는 바다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안차에의 생각은 다르다.

바다가 간절한 자는 바다의 감정을 발명한다.
—안차에, 「나무의 바다」(『문예바다』, 2017년 가을호) 부분

안차에가 말한 “바다가 간절한 자”는 사실은 시인의 “집 앞 후박나무”이다. 시인은 “수액이 차오르는 계절이 오면,” 즉 나무에 물이 오르는 시기가 되면, 나무가 “우우, 초록 물고기들을 몰고 다닌다”고 말한다. 초록 물고기는 물론 돋아나기 시작한 푸른 나뭇잎일 것이다. 나뭇잎은 초록 물고기임과 동시에 “천 개의 일렁임”이기도 하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순간일 것이다. 나무는 그렇게 나뭇잎으로 무성해지면서 그 초록의 궤도로 “바다의 바깥에서 안까지의 거리”를 만들어내며 작은 바다가 된다. 나의 생각으론 심겨져 있는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평생을 사는 것이 나무의 운명이지만 시인은 “떠날 수 없는 자의 방랑벽”을 “이동하지 않고도 속도를 일으키는 최초의 어류,” 그러니까 나뭇잎을 통해 “바다를 밀고 올라온 소용돌이들”로 만들고 그것으로 바다에 대한 간절함을 해갈해준다. 시인의 손에 물이란 단어 하나를 쥐어주면 시인은 그것으로 바다를 갈 수 없는 나무들에게 바다를 만들어줄 수 있다.
대체적으로 시인들이 받아들이는 물의 이미지는 긍정적인 편이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김성수에게서 그러한 예를 접할 수 있다. 시는 비가 내리는 날 “다리 난간을 벗어”나 사라진 “사내의 실종”과 그를 찾으려는 “탐조등 불빛 하나를” 말하고 있다. 사내가 다리에서 물로 몸을 던진 것이다. 안타깝게도 사내는 죽었다. 나는 사내의 죽음을 “며칠 뒤 하류 수풀지대에서 사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시인의 전언에서 확인했다. 그런데 보통의 경우와 달리 시인은 사내가 물에 몸을 던진 것이 아니라 빛에 몸을 던졌다고 말한다.

빛이 손을 뻗어 잡으라는 환 때문이었으리라
—김성수, 「착란」(『포지션』, 2017년 가을호) 부분

시인의 전언에 따르면 비가 내리는 날, 강가의 “집들이 스위치를 켜”면 “빛을/받은 강물이 물결마다 빛을 잘게 쪼”개고 이 때문에 “창문에서 내던진 빛이 살아서 출렁”이게 된다. 물이 만들어내는 착란이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사내가 그 착란으로 인하여 물로 뛰어든 것이 아님을. 하지만 시인은 사내가 착각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죽음의 길에 스스로 뛰어들었을까를 의심한다. 하긴 그 죽음을 길이라고 생각지 않았다면 사내는 그 길로 뛰어들지 못했을 것이다. 그 세상은 사실은 물이 만들어낸 착란의 세상이다. 사내가 죽은 뒤에도 “다시 세상은 황홀경이”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실제로는 “어떤 빛은 슬프게 환하고, 어떤 빛은 제 몸을 스스로/내던”지는 세상이다. 때로는 물이 그 착란의 세상을 만든다.
지금까지 살펴본 물을 주제로 한 시들은 대체로 현실적 기반에서 완전히 떨어져 있는 시는 없었다. 하지만 때로 물은 상상력으로만 접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런 물의 상상력을 보여준 시인은 길상호였다. 길상호는 “그 연못의 물결 사이엔/물고기 비늘로 지은 집이 있었다”는 말로 시를 시작한다. 시인은 그 집에 “저물녘 햇빛이 닿으면 반짝 열리던 대문”이 있었다고 덧붙인다. 그 집에 살던 사람도 있었다. “혼자 기거하는 여자”가 그 집에 살았다는 것이 시인의 전언이다. 여자는 그 집에서 “두 발을 버리고 주저앉아 종일 부레를 짰다고” 한다. 여자가 짠 부레는 물고기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물고기들은 이미 부레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니 여자가 짠 부레가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시인의 상상력 속에서 부레는 연못 바닥의 돌멩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오래전 못 바닥에 가라앉은 돌멩이들은
그녀가 건네준 부레를 달고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었다 하네
—길상호, 「마른 눈」(『문학동네』, 2017년 가을호) 부분

아쉽게도 연못은 “지금은 다 말라버”렸고 “여자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시인은 “아직 부레를 얻지 못한 돌멩이 하나가 바닥에 앉아/물속 폐가를 지키고 있다”고 전한다. 길상호의 시에서 시의 출발이 된 현실은 말라서 바닥을 드러낸 연못이다. 그 연못을 시인은 상상력으로 채운다. 그 상상의 세상은 물론 실제가 아니다. 그러나 연못이 돌멩이들도 부레를 얻어 연못 속을 헤엄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상상력의 원천이 되고 나면 그 상상은 사실은 우리들의 실질적 세상을 암시하기에 충분해진다. 부레 없는 돌멩이, 즉 여자가 건네는 부레 없이는 연못 속을 유영하는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삶은 우리의 세상에 분명히 있을 것이다. 시인의 상상은 이 세상에 있지도 않을 듯한 세상을 말하면서 그 상상을 통해 이 세상이 꿈꾸어야 할 실질적 세상으로 다시 돌아온다.

3
계간지를 뒤져 시들을 고르고 그 시들을 일정한 맥락으로 짚어가던 방식이 그간의 시에 대한 계간평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방식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문예바다』 가을호에 실린 물의 시편들이 예전과는 다른 시도로 나를 유혹한 계기가 되었다. 시인들의 손에 쥐어진 것은 물이라는 말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물의 시편들을 읽는 동안 나는 바다보다 더 넓고 다양한 물의 세상을 살 수 있었다. 올가을은 물의 시편들로 흠뻑 젖어서 보낸 계절이 되었다.
(『문예바다』, 2017년 겨울호, 계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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