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내게 있어 계획이라기 보다 충동이다.
일이 진척되지도 않고, 또 하고 있는 일이 하기 싫기도 할 때,
그 충동은 나로 하여금 일을 버리고 훌훌 어디론가 떠나라고 꼬드긴다.
6월 22일 금요일, 춘천으로 떠난 여행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냥 일이 되는 안되든 책상 앞에 앉아 있어 볼까 하는 마음은
바깥의 쨍한 햇볕과 이런 날은 사진 잘나오는데 하는 생각이 충동질한 춘천행의 유혹을 누르지 못했다.
난 동서울 터미널 가서 속초를 가볼까, 아니면 가까운 수락산을 갈까, 행선지를 놓고 몇번의 저울질을 하다가 결국은 춘천행 차표를 끊었다.
아무 것도 준비한 것은 없었다.
그저 카메라와 렌즈를 챙기고, 손에 든 삼각대가 전부였다.
산을 오를게 아니라면 굳이 별다른 준비의 번거로움을 생략해도 전혀 불편함이 없는게 우리나라니까.
춘천에 도착하니 하늘의 구름이 좋았다.
소양댐가는 11번 버스를 기다리며 힐끔힐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오늘은 구름만 구경하다 가도 좋을 듯 하였다.
여행의 이상한 점 가운데 하나는
몇번 가본 곳은 이상하게 버스가 빨리 간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처음 왔을 때 터미널에서 소양댐까지는 그렇게 멀어보였다.
서너 번 다녀가며 눈을 익힌 뒤끝이라 그런지
이제 버스는 금방 소양댐에 도착한다.
대부분의 물은 댐에 갇혀있지만
댐에서 풀려난 운좋은 물들이 멀리 아래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댐의 물이 갇혀있다고 생각한 순간 답답해진다.
그래 갇혀있다는 생각은 버리자.
댐의 물은 옹기종기 모여서 놀고 있다고 생각하지 뭐.
거대한 대가족을 거느리고.
원래 나는 양구까지 한바퀴 돌아오는 유람선을 타고
배에서 바라본 소양호 풍경을 찍거나
그 배가 양구에서 사람을 내려주면
그곳에서 내려 양구를 여기저기 돌아보다 서울로 다시 올라갈 생각이었다.
유람선은 안하냐고 물었더니
사람이 없어서 배를 띄우기가 뭐하다고 한다.
하긴 평일날 유람선 타러 오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그냥 청평사 들어가는 배표를 끊었다.
배가 뜨길 기다리는 동안 일렁이는 물결을 구경한다.
물결은 비슷해 보여도 사실은 끊임없이 문양을 바꾼다.
나도 물결처럼 저렇게 계속 생각의 문양을 다르게 엮어낼 수 있을까.
어차피 내가 몸을 묻고 있는 일상의 풍경이란 그렇고 그런 것.
하지만 그 똑같은 듯한 일상에서 항상 다른 의미와 색깔을 찾아낼 수 있을까.
나도 물결이 되고 싶었다.
똑같은 듯해도 매일 달리보이는 삶을 읽어내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가 사람들을 내려주고,
그곳에서 청평사까지는 한참을 걸어올라가야 한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돌산 하나가 나를 맞아준다.
정수리에만 나무가 남았다.
산은 오늘 나무 위로 구름을 쏘아올린다.
사람들이 모두 그냥 지나간다.
전에 분명히 한번 다녀갔었는데 그때 이런 산이 있었나 싶다.
나도 이 자리를 그냥 지나친게 분명하다.
가끔 세상은 바로 곁에 있어도 보이질 않는다.
오늘 비로소 산을 보고, 또 운좋게 구름까지 곁들여서 본다.
건너편 산도 머리 위로 일제히 구름을 쏘아올리고 있었다.
오늘의 구름은 숲이 꿈꾸는 하얀 비상이다.
청평사로 가는 길은 숲이 울창하다.
한낮의 빛은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지만
시간이 늦은 오후로 접어들면 그때부터 비스듬히 몸을 눕히는 법이다.
빛은 몸을 눕히면서 숲의 틈새를 비집고 슬쩍 숲의 품을 파고 든다.
숲은 저 혼자 있을 때면 짙푸른 녹음으로 어둡기까지 하지만
빛이 그 품에 안기면, 갑자기 투명한 푸르름으로 푸르르 떨린다.
숲길을 오를 때 그 푸른 떨림을 보았다면 발길을 멈추지 않을 수 없다.
나도 누군가를 가슴에 안을 때면 저렇게 투명하도록 푸르게 떨리는 것일까.
하루 비가 온 것 같은데도
아직 많이 가문 것 같다.
물이 많을 때는 휘장처럼 넓고 고르게 펼쳐있는 폭포인데
오늘은 좌우로 갈라져 두 줄기로 가늘고 빈약하게 내려온다.
계곡이 낳은 알이다.
계곡을 파고든 빛이 온도를 맞추어주고,
이끼가 그 부화를 보살핀다.
무엇을 잉태한 돌일까.
혹 세월을 잉태한 돌은 아닐까.
세월이 부화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사람들의 잃어버린 세월을 모두 되돌려 줄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아무래도 돌은 내 머리 속의 갖가지 생각으로 부화를 하고 있는 듯 싶었다.
아무 생각없이, 또 준비없이 떠난 여행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은 청평사에서부터 였다.
청평사로 오르는 길목에서 보았던 등산로 안내도 앞에서 나는
오봉산을 오른 뒤 다섯 개의 봉우리를 타고 배후령으로 가고
거기서 버스를 타고 춘천으로 다시 들어가 서울로 가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중간에 만난 해탈문 앞에서
나는 그 앞에 걸쳐놓은 들어가지 마시오란 표지를 보곤 겁을 먹었다.
길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절로 내려왔다.
지나는 분에게 등산로를 물었더니
청평사 경내로 들어가면 극락보전 옆으로 길이 있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난 내가 올라갈 산이 절의 위쪽으로 빤히 보여
그다지 어려울게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중간쯤 올랐을 때 나는 카메라의 삼각대를
카메라 가방에 묶어야 했으며, 카메라도 가방 속으로 집어넣어야 했다.
산은 암벽의 연속이었다.
계속 쇠줄을 잡고 올라가야 했다.
올라가다 숨을 고르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멀리 아래쪽으로 소양호가 내려다 보인다.
내가 배를 타고 왔던 소양호의 물길이 저 아래쪽으로 아득했다.
내가 발걸음을 떼었던 청평사가 숲에 파묻혀
귀퉁이의 모습만 약간 보여준다.
다시 내려가고 싶었지만 올라올 때의 그 가파른 길을 생각하면
다시 내려갈 일이 오히려 더 아찔했다.
나는 자꾸만 위로 위로 올라갔다.
조금 올라가다 또 카메라를 꺼내들고 사진을 몇장 찍는다.
경관은 좋다.
하지만 물은 작은 생수 하나가 전부이고
목의 갈증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있었지만
걱정이 되서 마음대로 마시기가 어려웠다.
풍경은 좋았지만 그러나 목의 갈증을 풀긴 어려웠다.
물은 아껴마셨지만 결국은 떨어지고 말았다.
드디어 정상을 알리는 표석으로 보이는 것이 눈앞에 나타났다.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 같았으나 뭉개져 있어 알아보기 어려웠다.
길은 또 위로 계속되고 있었다.
이 사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사진을 찍지 못했다.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나는 등산로라는 표지를 따라 길을 갔지만
결국 절벽으로 가로막힌 등산로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4봉과 3봉 사이의 구간이라고 한다.
절벽을 옆으로 두고 쇠줄을 잡고 가야 하는 아주 험악한 구간이란다.
돌아오다 보니 해탈문으로 내려가는 길이 눈에 띈다.
나는 내려가는 길을 그곳으로 잡았다.
극락문으로 들어갔는데 정작 내가 본 극락의 세계는 그 가파른 산엔 없었다.
다리는 아팠고, 계속 쇠줄을 잡고 올라가야 하는 길은 팔의 힘도 빼놓았다.
극락은 저 아래쪽 내가 사는 세상이었다.
극락문이란 그러고보면 극락의 세계로 가는 문이 아니라
극락의 세상이 어디인지 보여주는 문이다.
내가 사는 아래쪽 세상에 즐거움이 있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해탈문을 나와선 나는 힐끗 문 뒤쪽을 바라보았다.
이미 배는 끊긴 상태.
서울로 돌아갈 일이 걱정이다.
하지만 산 속에서 길을 못찾아 헤매던 시간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이 그 걱정을 덮어 버렸다.
해탈이 따로 없었다.
내려오다 계곡에서 뜨거운 발을 식히고, 계곡물로 목을 축였다.
말할 수 없이 달콤했다.
청평사에 도착하니 승용차 한대가 막 산 아래로 내려가려 하고 있었다.
108배를 드리고 떠나는 부부였다.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내려가는 길이면 태워주랴고 했다.
“태워주시면 고맙지요”하고 냉큼 뒤에 올라탔다.
뱃길이 끊어지면 못나가는 곳이지만
배후령으로 해서 배치고개를 넘어 들어오는 찻길이 있기는 있다.
그 길로 들어온 부부였다.
송파에 산다는 두 분은 우리 집앞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다.
살다보니 이런 행운도 있다.
충동질에 떠난 여행에서 이번에도 또 좋은 사람만나 여행의 마무리가 훈훈했다.
9 thoughts on “극락문으로 올라가 해탈문으로 나오다 – 춘천 청평사와 오봉산”
안녕 하세요..
청평사에서 함께 동행한 송파의 안 사람 입니다.
동원님의 홈을 둘러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저는 그날 그토록 아름다운 하늘을 보지 못했는데
사진으로 바라보는 하늘과 소양강땜의 물결
울창한 숲들 너무 멋져요
그리고 잊지 못할건 부인의 따뜻한 마음
많은 대화는 못했지만 차 한잔에도 따뜻하고
정이 많은 분이시라는 것을 느꼈어요
저희에게 주신 선물 잘 읽고 있어요
아무쪼록 행복하시고
좋은 사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홈에 자주 들리겠어요
행복 하세요~~^^
그날 정말 고마웠습니다.
하늘의 구름이 아주 좋은 날이었는데 한 네시쯤 구름이 거의 없어지더군요.
비록 제 꺼는 아니지만 그 날의 구름과 푸른 하늘도 두 분께 선물로 드릴께요.
안녕하세요. 그날 저녁도 못드시고 부랴부랴 가시게 하여 너무 죄송했어요.
염치없이 차까지 얻어타고 와서는 덜렁 쥬스 한잔으로 대접하는 몰염치를 범했습니다.
낯선 이와 같이 한 차에 타고 장시간 동행하는 일이 쉽지 않은데 마음 내주시고 직접 동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저희도 은혜갚을 기회도 주세요.
주시고 가신 선물도 잘 쓰고 있습니다. 두 분 행복하세요~^^
예기치 못 하던 여행의 변수를 즐겨서 여행을 좋아하는데,
동원님도 왠지 그러신 것 같은 느낌이 전해져요.
고생길이 훤했지만, 하늘의 구름은 밝고 결국에는 훈훈한 인정으로 끝맺네요.
저 역시 경주 가서 많이 느끼고, 배우고, 다독이며 돌아왔어요.
사진을 뒤져보니까 청평사에 간 것이 2년전이었더라구요. 다시 가보니 낯익은 것도 있고, 새롭게 보이는 것도 있구… 똑같은 곳을 완전히 다르게 여행한 느낌입니다. 다시 가도 또 그럴까요? 아마도 그럴 듯. 특히 산길은 한번 눈에 익었으니 좀 여유있게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청평사는 그만 가려구요. 입장료를 두번이나 걷는 것도 마음에 안들고…
우와~ 걸음 걸음의 여정이 사진과 함께하는 포토기행문 같아요!
소양호 물이 흐르던가요? 구름이 흐르는 것 같아요!!! 정말 그림 같은 구름입니다!
그리고…. 오봉산 이름이 별로 맘에 안찹니다~ ㅋㅋㅋ
봉우리가 다섯개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등산은 힘들어서 사실 별로 좋아하질 않는데 그냥 아무 생각없이 가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다음부터는 아니다 싶으면 절대로 가지 않으려구요.
청평다녀오셨군요.
사촌들 결혼할때마다 한번씩 가보고는 결혼을 다 하니 이제
언제 가게될지..
폭포가 그림자까지 찍혀서 너무 멋져요.
구름은 산에서 빠져나가는듯 아니면 산속으로 몰려가는듯 멋지고.^^
얼떨결에 갔다가 왔어요.
마음이 잡히질 않아서 그냥 나갔다가 이런 저런 경험을 했네요.
오늘은 이제 본격적으로 비가 오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빗소리가 완연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