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전을 보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3월 7일 집에서 떠나며


•친구들과 고흐전을 본 그녀가
입장권을 예매해 가지고 들어왔다.
“내일 보러가. 너한테 꼭 보여주고 싶더라.”
집을 나서며 챙겨다준 입장권 보았더니
입장권의 한 귀퉁이에서 고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병원 정원의 오솔길」: 오규원이 말했었다.
사람이 하나없는 도로에서
“도로에는 지금 질주하는 도로만 가득”하다고.
도로는 질주하겠지만 그게 오솔길이라면
오솔길은 졸졸 흐를 것이다.
고흐의 오솔길은 그렇게 졸졸 흐르고 있었다.
졸졸 거리며 흐르다 속도가 붙는가 싶으면
길옆으로 잠깐 넘치기도 했다.
처음에 오규원의 시를 읽을 땐
“질주하는 도로만 가득”한 세계는
시의 영역, 그러니까 언어의 변주 영역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걸 어떻게 그림으로 옮긴단 말인가.
내 오류였다.
고흐의 그림 속에서 오솔길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이런 웃기는 것들 같으니라구.
예술하는 것들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내통질이다.
부럽기도 하고, 또 놀랍다.

•「셍레미 병원의 정원」: 고흐의 풀들은
발뒤꿈치를 세우고 일제히 발돋음을 하고 있다.
풀들이 하늘 냄새에 몸을 세우는 것은 표현할 수 있겠지만
발돋움까지는 어려워진다.
고흐에선 그 발돋움이 여실히 만져진다.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 고흐의 하늘은
수많은 깃털로 이루어져 있다.
그림의 해설은 그것을 불꽃이라 말했지만
내 눈에 그것은 불꽃이 아니라 깃털이다.
태양은 그 깃털의 날개짓이다.
나뭇잎도 깃털이다.
그의 나무는 서 있으면서 난다.

•「씨뿌리는 사람」: 고흐의 농부가 씨를 뿌리면
갑자기 대지가 파도처럼 꿈틀댄다.
씨는 뿌리면 대지에 정착하지만
고흐의 농부가 씨를 뿌리면
대지는 그 씨앗을 품고 날아오를 꿈으로
일제히 꿈틀댄다.
고흐는 그 대지의 꿈을 보는 눈을 가졌다.
매년 봄, 농부가 대지에서 긴 겨울잠을 털어내고
그 꿈을 불러 일으킨다.

•「산이 있는 밀밭」: 고흐의 그림은 중력의 방향이 반대라고 말한다.
그래서 모든 것이 위를 향한다.
대지가 일어나고, 산이 몸을 일으켜 세우며,
하늘은 이러한 움직임을 잡아끌며 날개짓을 한다.
때로 하늘을 올려다 보면
우리들 마음도 날듯하다.
그건 우연이 아니다.
중력은 지상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

•「올리브 따는 두 인부가 있는 올리브 과수원」: 고흐의 올리브 과수원에선
대지가 모두 올리브 나무 밑으로 모인다.
모여선 나무를 타고 올라가 하늘로 날아오른다.
나무는 대지가 모여 하늘로 오르는 통로이다.
하늘로 오르고 싶다면 나무 밑의 대지에서 땀을 흘리면 된다.
내 땀이 나의 하루와 노고를 싣고 대지로 내려가면
곧장 나무 밑으로 달려갈 것이며
그곳에서 나무를 타고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다.

•「꽃이 핀 밤나무」: 고흐의 밤나무에서
밤나무꽃은 꽃이 아니라 달빛같은 하얀 빛이다.
고개를 바짝 위로 쳐든 빛이다.
내 기억에 밤나무꽃은 고개를 드는 법이 없다.
고흐는 그 꽃의 고개를 세워놓았다.
밤꽃이여, 고개를 들라.
그가 그렇게 말했을까.
난 올해 그렇게 말해볼 생각이다, 밤꽃이 피면.
고개를 들라, 밤꽃이여.

•「밀 이삭」: 밀밭에는 나비도 있다.
이삭은 피는 것이 아니라
저 밑의 대지를 끌고 솟아오른다.

•드로잉 작품들: 고흐의 드로잉 작품에선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난다.
드로잉 작품은 선으로 이루어진다.
완성된 작품은 색채를 갖춘다.
대신 선은 이제 보이질 않는다.
우리의 시선이 살에 막힐 때,
엑스레이는 그 살을 통과하여 뼈에 도달한다.
살아있는 우리의 몸은 모두 뼈와 살로 이루어져 있다.
색채만 있으면 그건 살만 있는 살코기 그림이다.
고흐의 그림은 살만 있는 살코기 그림이 아니라
사실은 속에 뼈를 갖추고 있는 그림이다.
살코기 그림도, 뼈만 남은 그림도, 그림으로선 많이 부족하다.
고흐의 그림엔 그 둘이 다 있다.

•나무의 호흡을 그릴 수 있을까. 혹 맥박은.
길은 왜 끊임없이 흐르는 것일까.
그림을 보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슬픔」: 고흐의 슬픔은 흑백의 슬픔이다.
흑백의 슬픔은 투명하다.
색채, 그러니까 살을 걷어내고 보는 슬픔이기 때문이다.
고흐는 살을 걷어내고 슬픔을 투명하게 보는 눈을 가졌다.

•「감자 캐는 여인들」: 여인들이 삽을 들고 감자를 캔다.
내가 사는 이 땅에선 감자는 호미로 캔다.
그런데도 그림은 낯설지 않다.
여인들의 몸 전체가 호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호미처럼 앉아서 호미로 감자를 캐고,
네덜란드에선 여인들이 호미처럼 몸을 숙이고 감자를 캔다.

•고흐의 초기 그림에선 색채들이 정착되어 있다.
자리를 잡고 있다는 뜻이다.

•「밀짚더미」: 밀짚더미는 세워져 있지만
짚더미의 밑이 안정되어 있으며, 흔들림이 없다.
초기의 그림이다.
그도 세상에 붙들려 있었다.
세상의 자장으로부터 놓여나는 것은 쉽지가 않다.

•「나무와 풀숲」: 고흐의 그림은 대부분 낯설지가 않다.
나무가 우거진 풀숲에 서 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그 풍경이 그의 화폭으로 자리를 옮겨 그림이 되면
어떤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
그는 풍경을 옮겨올 때 그 차이를 아주 미세하게 담기도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건 미세한 움직임이다.
움직임이 미세하면 움직이고 있는데도
정지해 있는 듯 보인다.
나무의 움직임처럼 미세한 움직임이 있을까.
나무는 정지해 있는 듯 하지만 움직이며, 또 자란다.
그 미세한 움직임을 보려면
다른 그림을 다 돌고 난 뒤에
움직임이 미세한 그림 앞에 서보면 된다.
그러면 다른 그림에서 확연했던 그 움직임이
미세하게 조금씩 움직임을 키워
그 확연한 움직임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흐의 그림에서 보는 그 놀라운 움직임도
하루 아침에 날개짓을 편 것이 아니다.
그는 나무처럼 천천히 가지를 펼치고,
그리고 날개를 젓기에 이르렀다.

•「아니에르의 센느 강변 길」: 깃털의 조짐.
하늘의 깃털이 엷게 나타나고
길의 물결도 엷게 나타난다.

•「자화상」: 고흐의 하늘은 푸른 깃털이다.
그의 모자는 노란 깃털이다.
그의 얼굴은 약간 진한 황토색의 깃털이다.
난 그림을 훅 불어보고 싶었다.
그럼 색들이 모두 깃털을 펴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다시 그 자리로 내려앉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고흐는 색채를 그 자리에 정착시키지 않았다.
색채의 무게를 깃털처럼 아주 가볍게 덜어내고는
그 가벼운 색채의 깃털을 화폭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훅 불면 색채의 깃털은 모두 그 자리에서 날아오를지도 모른다.
그는 색채가 화면에 고착되어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 색채의 운명에 저항했다.
훅 불어서 그가 꿈꾼 색채의 자유를 그에게 주고 싶었다.

•고흐의 그림은 많이 친숙하다.
감자가 있는 정물들은
강원도에서 자란 내겐
60~70년대의 기억과 많이 겹쳐진다.
사람들의 얼굴과 조도도 그 시대와 많이 닮아 있다.

•「생트마리드라메르의 풍경」: 초창기의 그림들에서도 풀들이 발돋움을 하지만
집들은 안정되어 있다.
발돋움한 풀들에 모든 것이 휩쓸리는 엄청난 풍경이 그의 화폭을 채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석양」: 버드나무는 드로잉 작품이 하나 있다.
드로잉 작품에선 움직임을 살피기 어렵다.
석양은 그 버드나무에서 색채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여준다.
색채는 놀라운 것이다.
색채는 지상에 고착된 삶을 들어올린다.

•「남자의 초상」: 남자는 약간 몸을 뒤로 젖히고 있었다.
나의 그녀는 그 남자의 푸른 옷이 눈에 들어와 진한 잔상으로 남았다고 했다.
내 여자의 눈에 남은 외간 남자.
“짜식, 웃기고 자빠졌어. 그 여자는 내 여자야.”
질투나서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전시장에선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오디오 기기를 빌려준다.
빌려주는 곳의 벽면에 헤드폰 그림이 그려져 있다.
젊은 처자 하나가 벽면의 헤드폰 한가운데로 머리를 가져가더니
그곳에 머리를 잘 맞추고
그림의 헤드폰을 손으로 잡는다.
그리고 사진찍는다.
놀랍다. 어찌 저런 재미난 발상을 했을까.
깃털 몇 개가 그림을 빠져나와
전시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림으로 꿈꾼 깃털이 그림을 탈출했다.
꿈은 정말 이루어지는가 보다.
그 깃털들, 그걸 아는지 그건 알 수 없었다.

•아직 못본 사람들, 꼭 보시라.
가서 고흐의 그림 속으로 걸어들어가 보시라.
그러나 호흡은 조용히 가라 앉히시라.
훅불면 그가 화폭에 조심스럽게 얹어놓은 색채들이
일제히 날아오를지도 모른다.

Photo by Kim Dong Won
2008년 3월 7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17 thoughts on “반 고흐전을 보다

  1. 세상에 아무리 좋은 구경거리도, 맛있는 것이라도,
    사람 많은곳에는 절대 안 가는 이상한 습관이 있는지라
    겨우내내 고흐전의 관람객수를 체크하다 디데이로 잡은 날이 3월 3일.
    새학기 시작된 날이니 학부모도, 학생들도 바빠지기 시작해 한가할듯해서요.
    근데…흑흑…월요일…포기하고 일본 집영사에서 나온 도판만 열심히 들여다 봤지요.
    순전히 동원이님의 <반 고흐전을 보다>의 요구절<고흐의 오솔길은 그렇게 졸졸 흐르고 있었다>때문에 내일 갑니다.
    아마도 고흐 그림을 보는 내내 빈센트를 흥얼거리고 싶을듯…
    참, 천호동은 제가 전에 근무했던 동네지요. 지금은 해공공원으로 바뀐
    빠이로트 공장이 철거될즈음요. 겨우내내 일주일에 두번씩 지나다녔어요.

    1. 그참 그림이란게 참 이상해요.
      도판은 보고 있으면 아무 생각이 안나는데 원화를 대하는 순간 느낌이 확 오거든요.
      이중섭의 황소도 도판으로 수없이 봤지만 아무 느낌이 없었는데 원화를 눈앞에 두는 순간 느낌이 확 밀려오더군요.
      고흐는 더 말할 것이 없었지요.
      다만 처음에는 정말 잘 그리는 화가인가 했어요.
      그림에서 현실의 무게감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거든요.
      나중에 알게 되었죠.
      그의 그림이 삶을 버린 그림이 아니라 삶을 딛고 이룩한 그림이란 것을.
      그래서 한번 보고, 그 다음에 처음부터 다시 봤어요.
      그림 한편을 보고 섣불리 판단을 내리는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더군요.
      엄청 감동 받으실 거예요.

  2. 그림에대한 해설이 제가 느끼지 못한 부분까지
    잡아내것같아
    놀랍기도하고 신비스럽습니다.
    같은 그림을 보고도 작품의 이미지를 글로
    명확히 표현하니 넘 부럽습니다.^^

    1. 고흐의 그림을 봤더니 선생님 그림이 마구마구 보고 싶어졌습니다.
      이번 주에 연락드리고 작업실로 갈께요.
      옥이를 데리고 옥이 누님을 뵈러 가겠습니다.

  3. 화가나 음악하는 사람들, 그리고 글쓰는 사람들 등 자기만의 색을 가지고
    열정적인 모습들 참 대단한것같아요.
    그토록 열정적으로 몰두하고 미칠수있다는것만으로도 멋진 사람들이란 생각이 드네요.

    1. 평생 그린 작품수만 해도 엄청난 것 같아요.
      극히 일부분만 본 건데 나머지도 기회가 되면 꼭보고 싶어요.
      고흐가 특히 매력이 있는 것은 그림이 그냥 우리 주변의 것들이란 점이었어요. 아주 낯이 익었는데 그 속에서 참 많은 얘기를 꺼내 주더군요.

  4. 전 7년여전 고흐그림을 처음 볼 때
    그 두꺼운 물감의 터치감에 감탄했더랬어요.
    뿅 반했죠.
    동원님의 날개,
    그 평을 읽다가 가벼워진 느낌
    여행 가기 전에 고흐전 보고 갔었어요.
    다시 고흐전을 다시 간듯, 고흐가 제 곁으로 다가오네요.

    1. 초창기 그림의 색채는 질감이 두껍고 무거운데
      후반기로 가면서 서서히 가벼움에 대한 욕망이 보이다가
      결국 세상을 깃털처럼 가볍게 담아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마치 우리 사회의 변화를 보는 듯도 하고…

  5. 그림을 보는 방법은 참 많습니다.
    어떤이는 기법과 재료, 테크닉을 보고, 또 어떤이는 작가의 삶과 당시의 환경, 정신세계를 연관지어 분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림을 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중 하나는 그저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입니다.
    그림을 처음 보는 순간에 받는 그 느낌이 가장 솔직하고 정확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림은 글로 치자면 산문이 아니라 시에 가깝습니다.
    많이 펼치기 보다는 간결하고 밀도가 있으며 상징적입니다.
    동원님의 시각으로 본 고흐전 감상 아주 재미있고 즐겁고 감동적입니다.

  6. 핑백: SERANG WORLD
  7. 올—-b^^b 고흐전에 다녀왔는데 너무 잘 읽었어요
    깃털
    날아오름
    눈을 감지 않아도 머릿속에 절로 생각풍선이 생겨요 풋
    전 고흐의 원화를 두번째로 보는지라 감동이 덜했는데…동원님은 처음 본건가요?
    처음 본 사람의 감동은 세상그무엇과도 바꿀수 없더라구요 ㅎㅎㅎ

    1. 전 처음이었어요.
      “병원 정원의 오솔길”에서 발걸음이 처음으로 딱 멈춰버렸죠.
      거기서부터 노트를 꺼내 느낌을 적기 시작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기 시작했어요.
      놀라운 화가더군요.
      그림은 원화를 직접 봐야지 프린트는 아무 소용이 없는 거 같아요.

  8. 핑백: forestory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