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법
오늘 그대의 생일에 나는 추방당한 시인을 생각한다.
먼 옛날 그리이스 시대,
플라톤이 작성한 공화국의 설계도 속에서
그가 시인들에게 안겨준 운명은
그 공화국의 성채 바깥으로 나가달라는 싸늘한 추방 명령이었다.
플라톤이 문제삼은 것은 바로 시인들의 세치 혀였다.
한마디로 그들의 말은 너무 유려했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의 말앞에서 넋을 잃었다.
그들이 장미의 아름다움을 읊을 때
사람들은 아름다움 그 자체를
손에 만지는 듯, 귀에 듣는 듯, 눈에 보는 듯 했으며,
시인들은 마치 언어 속에서 모든 진실을 찾을 수 있는 양,
말 그 자체와 그것의 다듬기에 집착했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있어 말은 무엇에 대한 묘사일 수밖에 없었고
그 무엇에 대한 묘사는 그것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묘사 대상, 그것 자체가 될 수는 없었다.
“장미”라는 말은 그것이 아무리 장미에 대한 뛰어난 묘사를 담고 있어도
“장미” 그 자체일 수는 없다.
그는 궁극의 자리에서 만나는 장미를 장미의 이데아라 불렀다.
그에게 있어 장미를 말하는 모든 언어들은
“장미”의 이데아에 대한 왜곡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말에 집착하여 이데아를 왜곡하는 시인들에게
아무 거리낌없이 거짓말장이들이란 죄명을 붙였고
그 대가는 공화국에서의 추방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나는 오늘 그대의 생일을 맞아 플라톤의 편에 선다.
나는 시인들의 언어에 의하여
실제로서의 묘사 대상이 왜곡된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나의 공화국 속에서 시인들을 추방하고 말의 사용을 금지시킨다.
말이 금지된 곳에 남는 것은 이제 몸뿐이다.
나는 장미라는 말대신,
또 장미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온갖 수식어구 대신,
장미 그 자체를 향하여 몸을 돌린다.
나는 장미의 가까이 코를 대고 그녀의 향기를 호흡한다.
나는 장미의 불타는 얼굴 가까이 시선의 촉수를 들이밀고
그녀의 색깔을 있는 그대로 묻혀낸다.
나는 사랑이란 말대신,
또 사랑을 말하는 온갖 수식어구 대신,
그대를 향하여 몸을 돌린다.
다이어먼드나,
한벌에 몇십만원을 한다는 화려한 옷에 사랑을 담는 것은
오늘 나의 공화국에선 있을 수 없는 일.
나는 그러한 사랑의 표현이
그대에 대한 내 사랑의 이데아를 왜곡하고 오염시키는 한갖된 양태에 불과하다는
플라톤의 지극히 현명한 판단을 받아들여,
(돈은 한푼도 안쓰고
그러면서도 그대에게 전하는 사랑의 감동을 더욱 증폭시킬 수 있다는
이 고도로 계산된 영리적 판단!)
그저 그대를 향하여 몸을 돌린다.
나는 그대의 체온을 손끝에 묻혀내고,
그대와 하나가 되며,
그렇게 몸을 통하여 그대의 생일에 우리의 사랑을 말하리라.
그대는 바로 내 사랑의 이데아이기에.
이데아는 그렇게 나의 공화국에서 몸으로 오는 것이기에.
오늘 그대에게 가겠다.
생일 축하한다.
1993년 2월 25일
기옥에게 동원
(오랜 세월 같이 살았다.
그 오랜 세월이 쌓여 지층을 이루고,
그 지층 속 깊은 곳에서
글로 묻혀있던 화석 하나가 발견되었다.
화석의 시간은 낡을대로 낡아
그 느낌마저 아득할 것 같은데
오늘에 꺼내놓으니
오히려 그 옛시간이 오늘을 새롭게 한다.
이것도 참 놀라운 일이다.
사랑은 내게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가 보다.)
—
딸의 사랑법
딸은 올해부터 저희 엄마의 생일에 대한 계산법을 달리 했다.
나는 여전히 음력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매년 그랬듯이 올해도 그녀의 생일을 달력에서 짚어내고 있었지만
딸은 기억하기 너무 어렵다면서
자신처럼 양력으로 지내자고 저희 엄마를 부추겼고,
그 제안에 저희 엄마가 짝짜꿍으로 손뼉을 맞추면서
매년 3월 10일을 생일 날짜로 합의를 보았다.
생일의 계산법에서 나와 빗나가더니
생일 축하의 방법에서도 나와는 길을 달리했다.
딸은 엄마의 생일에 티라미수 케익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월요일날 밤, 딸은 자신이 만들어 숙성시킨
티라미수 케익과 초콜렛 과자를 엄마 앞에 내놓았다.
말을 금지시킨다면서
또다시 세월의 지층을 파헤쳐 화석이 된 말을 꺼내드는 나와 달리
딸은 엄마의 입속에서 달콤하게 녹을 케익과 과자를 자신의 사랑법으로 선택했다.
나는 그것이 딸의 사랑법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올해는 내가 그 케익을 만드는 딸의 길에 동행했기 때문이다.
딸은 일요일 늦은 밤에 집을 나섰다.
케익 재료점은 좀 멀리 있었다.
으슥한 골목도 지나야 했다.
이 밤에 이런 델 혼자가려고 했니하고 물었더니
아파트 한가운데라서 위험하지 않다고 했다.
재료점은 문이 닫혀 있었다.
하지만 재료점에서 좀 떨어진 작업실에서 일을 하다
가는 김에 다시 한번 가게에 들러본 주인과 절묘하게 만날 수 있었고
재료점 주인은 닫혔던 문을 열고 딸이 원하는 재료들을 챙겨주었다.
딸은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가게라고 말해주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또 조금만 빨랐어도
그냥 섭섭한 발걸음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던 절묘한 시간 맞추기의 행운이
올해 그녀가 받은 케익에 들어있다.
오는 길에 파리바게트에 들렀지만
딸이 원하는 생크림은 그곳에서 사질 못했다.
딸은 네 컵 정도를 원했는데 남아있는 것은 두 컵 정도의 분량이었다.
그곳을 나와 바로 곁의 GS 마트에서 요구르트랑 필요한 재료를 다시 챙긴다.
딸은 가끔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문자왔니 하고 물었더니 살 걸 핸드폰에 메모해 가지고 나왔다고 했다.
생크림은 길을 건넌 뒤 프랑세즈 제과점에서 샀다.
그곳에 남아있는 세 컵의 생크림은 모두 우리의 차지가 되었다.
카스테라도 그곳에서 샀다.
동행해 보았더니 딸이 만들어주는 티라미수 케익과 초콜렛 과자엔
늦은 밤, 길거리를 걸어 여기저기를 다니며 재료를 챙기던
그 시간의 발걸음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딸은 그 재료들로 모양을 빚어 케익을 만들었다.
나는 과자 모양을 뜨고 있는 딸에게
넉넉하게 만들어 아빠 생일에도 써 라고 말했고,
딸은 예,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응수했다.
우리들의 그 대화도 그녀 앞에 내놓은 케익과 초콜렛 과자에 녹아 있었다.
딸은 그렇게 엄마의 생일 케익을 만들고, 그렇게 축하를 했다.
딸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케익과 초콜렛 과자는 내게 말했다.
사랑의 이데아는 그녀의 몸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싱크대 앞에서 설겆이를 해주고 있을 때 바로 내 손에 있는 것이라고.
그녀 속에 있다고 생각한 사랑의 이데아가 어느새
내 손과 내 몸으로 건너와 있는 것이라고.
어쩐지 그날 밤 딸과 함께 이것저것 케익 자료를 사면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을 때, 그녀와 함께 있는 느낌이 들긴 했다.
딸은 말없이 속삭인다.
아빠, 사랑은 엄마의 몸에서 느끼는게 아니라
내 몸에서, 내 발걸음 하나하나에서 엄마를 느끼는 거예요.
딸은 어린데, 사랑은 벌써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딸의 그 사랑이 너무 달콤하여
엄마를 위해 만들어준 그 초콜렛,
내가 그만 다 먹어치우고 말았다.
그 사랑 내 몸으로 건너온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내장 속까지 깊숙이.
26 thoughts on “나의 사랑, 딸의 사랑”
지인들 블로그 건너 건너 파도 타고 몇 번 다녀 갔습니다.
조용히 물 흐르듯 그리 조용히 씌여진 글들이.. 참 마음에 와닿습니다.
덕분에 미소 하나 가득 머금고.. 갑니다. ^^*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읽어주신 거 고맙구요.
즐거운 한 주 되기실…
제가 늘락지군요.
고운 포레스트님 사진과함께 문지양의 예쁜솜씨, 정말 부러운 가족이네요.
늦었지만 생일 축하합니다.
언제나 은은한 미소와 서글서글한 눈매 참 예뻐요.
그러니 문지양도 엄청 예쁘죠.^^
문지는 지 엄마 미모를 다 뺐어 갔으니 예쁠 수 밖에요.
오호호, 평등공주님이 엄청난 아부의 기회를 주셨네요.
캄사, 캄사. ㅋㅋ
아핫 이런이런 냉큼 달려가 축하드려야겠네요.
아름다운 가족이에요^^
도루피님도 아주 괜찮은 딸이 잖아요.
아버님 어머님 모시고 한달 동안 여행하는 딸을 어디서 찾겠어요.
우리 딸은 조런 건 잘해주는데
어디 하루 같이 놀러가자고 하면 그건 또 잘 안가요.
따님은 그 공화국에서 시가 되었네요.
축하드립니다.
딸은 시, 아빠는 산문으로 분류하면 딱 그럴 듯 싶습니다.
축하에 대한 고마움은 당사자를 대신해서 제가 표합니다.
저렇게 아름다운분과 사시는 형님이 부럽사옵니다.
형수님 늦었지만 생일 축하드려요^^
1000회 축하연 때 뵈요~~
그녀는 분명한데 저 사진 속의 그녀는 아주 가끔 나타납니다.ㅋㅋ
그녀 속에 왠 그녀가 그리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1000회 기념은 빼고, 그냥 얼굴 봐요.
1000회는 별 것 아닌데 그것을 핑게삼아 얼굴보는게
1000회의 가장 좋은 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산새님..펴엉생 부러버하고 사세용~~
헥 별꼴이야..
별꼴이라니 갸우뚱.
별처럼 반짝이는 그런 정도의 미모는 아닌 거 같은디…
감사하오이다. 그 정도로 봐주시니.
forest님도 감사하셔.
주무시는 산새님 뒤통수를 진공요법으로 한대 팍 하고 왔습니다….부러버하면서 계속 자라 자..별꼴의 반쪽이야 하고 왔더니..동원님이 걍 또 걍 또..
에잇.. 며칠후에 뵈요..
슬쩍 뽀뽀하신건 아니구요.
어쨌거나 나중에 봐요.
축하드립니다^^많이
생일파리,1000회파리..,축하할일들이 줄을섰네요^^
일간뵈요.^^
옥이가 축하 고맙데요.
순일씨네가 없었다면 1000회가 많이 늦어졌을 거예요.
제 블로그의 주인공들이 가까운 사람들이라 오히려 제가 고마워요.
시간 맞춰서 얼굴 봅시다.^^
어머! 저 화사한 여인은 누구시래요?
엄청 황홀한 생일선물을 받으니 저렇게 화사해지는군요.
추카는 저쪽집에 가서 해야지~
넘진… 반가운 이름이네요. 잘 지내시는지요?
이렇게나마 인사드릴 수 있어 좋습니다.
매일 저렇지는 않더군요, 이상하게.
같은 사람인지 헷갈립니다.
생일 추카 추카합니다.
딸 문지가 사진으로보니 예쁘고 건강하게 성장 했더군요.^^
옥 여사께서도 좋아 보이시네요.
낼 모레 시간내서 제 그림보러 오세요.
손수 만든 딸의사랑이 스며있는 생일캐익
넘 부럽고 맛있어 보입니다….^^
딸이 아빠의 부족한 부분을 많이 채워준다는 걸 알게 되었죠.
삶의 소소함이랄까.
그래서 여자들이 아이를 낳고 싶어하는가 봐요.
남자가 채워주지 못하는게 많다는 걸 알고는.
저는 사랑의 이데아를 글로 쓰는 감성적인 사람 보다는
(아, 몸으로 표현한다 하셨죠?)
생일엔 옷을 사주고, 맛난 요리를 사주는 남편이 좋은데요
또 퇴근 할 때에 장미 꽃다발을 전해주는…
그래도 포레스트님의 맑은 얼굴이 항상 사랑을 먹고 사는 여인임을 느낄 수 있죠
티라미수 케잌 만드는 법을 예쁜 따님에게 배우고 싶네요~
딸은 어릴 때 생일 축하하는 걸 하도 좋아해서
매달 그때그때 하고 싶을 때마다 생일을 정해서
생일 축하를 하곤 했었죠.
저는 생일 챙기는 걸 별로 잘하질 못해서
몇년에 한번씩 하구 있어요.
딸은 자주, 저는 띄엄띄엄.
그 누구보다 행복한 생일을 보내셨군요 포레스트님은.^^
저 편지와 케익과 과자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만큼 깊은 마음이 담겨있네요.
근데 돈이 없으셔도 장미 한송이 준비하는 정성도 함께..
나이만큼 준비한다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행복해지지않을까.^^
시들 꽃인데도 여잔 꽃받으면 넘 좋더라구요.^^
완전히 딸의 선물에 묻어가 버렸습니다.
딸의 선물을 아주 좋아하더군요.
현재진행중인 이스트맨님의 돈않들이는 고도의 사랑기술과
엄마를 위해 손수 케익을 만드는 딸레미의 노력…
모두모두 아주 드라마틱합니다!
행복하세요~
그게 돈이 없다보니 저절로 습득이 된다는…ㅋㅋ
대전에서 출사 모임이라도 한번 하시죠.
바니님도 부르고, 로스케님도 부르고… 다들 어떻게 지내시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