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프 오르간의 선율에서 화산의 폭발까지 – 여성 시인 5인의 첫 시집

1
그들을 마주한다는 것은 그들의 언어를 마주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그들이 시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통은 그들의 언어가 갖는 공통의 맥락을 살피고, 그리하여 공통 분모를 나누고 있는 그들을 하나의 군으로 나누어 한 자리에 모아보는 것으로 그 모임이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때로 그 모임이 그들의 언어와 전혀 상관없이 그들의 표면적 꼬리표에 의하여 마련될 때가 있다. 이번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내가 마주한 이번의 그들 다섯 명은 모두 여자였으며, 이번 시집이 그들의 첫시집이라는 표면적 공통점으로 나와 마주했다. 결국 그들의 언어를 마주해야할 내게 있어 그것은, 그들이 거의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경우, 그들의 시에 대한 말들이 흩어질 수밖에 없고, 그러면 어쨌거나 그들을 한자리에 모아서 얘기해야 하는 나로서는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시인이란 점에서 그러한 표면적 공통점을 빌미로 이루어지는 만남이 의외의 기쁨을 안겨줄 때가 있다. 서로가 비슷할 때보다, 색깔의 경계를 분명히 할 때, 그 색채를 병렬로 잘 배치하면, 종종 무지개에 버금가는 문양이 떠오를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 기대로 이번 만남은 시작되었다.

2
나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난 뒤, 다시 말하여 그들의 시집을 읽고 난 뒤, 그들을 하나의 궤적으로 엮어서 말하기에 좋을 것으로 여겨지는 어떤 실마리를 잡게 되었으며, 그것을 기준으로 그들의 순서를 정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시에 대한 이번 얘기의 첫자리는 강기원의 몫이 되었다. 그의 시집은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이다. 그 뒷자리는 이성미의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가 잇는다. 세번째와 네번째는 이영주의 『108번째 사내』와 이민하의 『환상수족』이다. 그리고 최종 마무리 자리엔 김민정을 내세우기로 했다. 그의 시집은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나의 얘기 순서처럼 나란히 줄을 서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 숲을 이루며, 각자의 자리에 서 있다. 그들의 숲으로 난 오솔길의 갈래는 손에 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을 것이다. 결국 나의 순서란 그 많은 오솔길 가운데서 내가 헤치고 간 하나의 작은 길에 불과하다. 내가 이렇게 길을 낸 것은 물론 그들의 숲으로 걸음할 사람들의 편리한 보행을 위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항상 이 길로 다니란 뜻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이다. 때문에 나는 사람들이 내가 낸 길을 따라 시의 숲을 거닐며 그 편안함에 안주하기보다 그 경험을 길의 방향과 순서에 따라 풍경의 느낌을 완전히 다르게 반전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
그럼 이제 시의 숲으로 향하는 초입에서 이번 길에 대한 안내도 충분히 알려두었으므로 그들의 시세계로 곧장 걸음하기로 한다.

3
나는 길이 시작되는 자리에 장식된 강기원의 시를 접했을 때, 파이프 오르간의 선율을 들었다. 그것은 깊이있는 선율이었다.

강기원 시집

사실 강기원이 직접 언급한 것은 파이프 오르간이 아니라 피리였다. 강기원은 어느 “폭우가 쏟아지던 밤/하늘이 내던진 빛나는 피리”를 보았다고 했다. 일직선으로 내리꽂히는 빗줄기가 그의 눈엔 피리였던 셈이다. 그렇게 여긴 순간 그는 비에 ‘정수리’를 맞게 되며, 비는 그의 몸 속으로 쏟아져 들어간다. 그리고 그의 “안에 숨어 있던/끝도 없이 구부러진 길들이/오물과 뒤엉킨 것을” 보게 된다. 비는 그 모든 것을 끌어낸다. 그리고 그 끝에서 그는 피리가 되어 있었다.

비는 그쳤으나
구멍이 뚫린 채로
나는 남겨졌어

내게서 소리가 나
속이 빈
뼈들의 마디

그날 밤
나는 피리가 되었던 거야
–강기원, 「피리」 부분

이 이외에도 대상이 음악적 이미지로 치환되어 있는 예가 몇 가지가 더 있다. 가령 「소라고둥」은 시인에겐 “G선만 남은 바이올린”이다. 그 연장선에 서면 소라고둥이 기어가고 있는 모래밭으로 잠시 밀고 올라온 파도는 “출렁이는 물결의 옥타브”가 된다. 아울러 그에게서 “베토벤이라는 빵” 얘기를 들을 때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아마도 누군가 빵에 베토벤이란 이름을 붙였는가 보다. 시인은 자신이 접한 그러한 계기를 그냥 재미난 발상이란 정도로 지나치지 않고, 그 빵을 “이스트가 아닌/음악으로 발효시킨 빵”으로 발전시킨다. 그 빵의 반죽은 “악상에 잠겨” 부푼다. 그러한 생각은 이 빵이 “노래를 감추고/날 숙주로” 삼아 “맛나고 연한 살의 바이러스로/내 안의 맛없는 말들”을 “노래로 바꾸어줄 새”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번져 나간다. 나는 그가 빵집 앞에서 “하루 세 번” 빵이 나오는 시간을 들여다보며 “유리창 뒤에서 바삐 움직이는/흰 고깔의 연금술사들”이 빚어내는 빵을 기다리는 풍경에서 아름다운 파이프 오르간의 선율이 들린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러나 이러한 음악적 이미지가 매우 아름답긴 하지만 이런 이미지가 그가 현실을 버리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편은 상당수가 아프고 어두운 현실에 받쳐지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난민촌에 사는 “어린 마리암”의 삶은 그 한 예이다. “그늘 한 점 없는 자갈밭”을 ‘맨발’로 가는 마리암의 삶을 그리고 있는 이 시는 그의 삶이 처한 현실을 어떠한 윤색도 없이 그대로 보여준다.

새벽 노을의 눈을 가진
마리암
튼 입술 다물지 못하고
지뢰밭 가로질러
난민촌 텐트를 향해 간다
발 밑에 깔린 이승과 저승
그 사이
–강기원, 「아프가니스탄의 흙과 재」 부분

우리들이 이 풍경에서 받는 느낌은 참혹함이다. 그리고 삶의 참혹함은 그것이 아이와 결합되면 더욱 크게 증폭된다. 같은 죽음이라도 그것이 “열두 살 아이”의 죽음이면 죽음은 더욱 참혹해 보인다. 그 열두 살 아이를 벽제에서 화장하고 돌아오는 길에 시인은 막히는 교통 체증에 시달린다.

돌아오는 여의도 길은 한 시간째 꽉 막혀 있었다.
닫힌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는 고엽제 피해자들의 고함
주검이랄 수도 없는 뼛가루의 희미한 온기와
살아 있달 수도 없는 그러나 산 자들의 열기가 뒤섞이던
팔월의 마지막 날
–강기원, 「벽제」 부분

그의 시편들은 상당수가 이러한 참혹하고 힘겨운 삶의 편린들에 할애되어 있다. 그러나 “전화선처럼 꼬인 장을 푸는” 수술이 “세 시간”을 넘기면, 일단 바쁜 대로 자장면이라도 시켜야 하며, “장을 풀다 말고 돌아앉아/(혹은 열린 내장을 들여다보며)” “뒤엉킨 창자 같은” 자장면의 “면발을 급히 빨아” 들여야 하는 것이 우리들이 처한 삶의 현실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강기원에게서 내가 들었다고 하는 파이프 오르간의 음악적 선율처럼 그렇게 곱고 우아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오아시스 속의 삶이 아니라 사막 속의 삶이다. “저녁 여덟시”에 집으로 돌아와 “낮의 얼굴이 사라진 그가/빈 몸뚱이로/욕실 앞에 우두커니 서”서 “진자 운동”을 멈춘 “시계추 같은 성기”를 늘어뜨리고 있는, 평범한 이 땅의 수많은 봉급자들을 가리키고 있는 듯한 장면에서, 시인은 그가 “이제 막 사막에서 돌아온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자정이 지난 역삼동”에서 귀가 길을 서두르는 술취한 사람들에게서 “모래바람 속을 몽롱한 눈으로 건너는/흰 낙타들의 무리”를 보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의 이해이다.
그렇다면 내가 들었던 그 선율은 어디로부터 연유한 것이었을까. 비록 우리의 삶이 참혹하고, 또 그 삶이 사막에 놓여있다고 해도, 시선을 계속 그곳에 고정시키면 그것은 우리 마음 속의 ‘옹이’로 굳어진다. 그 맺힌 옹이가 버티는 한 음악적 선율은 없다. 때문에 나는 내게서 음악적 선율로 환치가 되었던 강기원의 시들이 바로 그 옹이를 풀어내고, 즉 옹이의 자신을 비운 끝에 스스로를 공명의 피리로 만들고, 그 몸에서 만들어내는 선율로 고단한 삶을 위로하고자 한 데서 왔다고 생각한다.
내가 강기원의 시를 말할 때 많은 악기 중에서 유독 그의 시를 파이프 오르간에 비유한 것은 그것이 음을 만들어내는 특이한 과정 때문이었다. 파이프 오르간은 연주자가 건반을 누르면 그것이 파이프 속의 공기를 내리누르는 압축의 힘으로 변형된다. 그렇게 공기가 압축되는 순간, 공기의 떨림, 즉 파장이 만들어지고 그 파장이 바로 우리들이 듣게 되는 파이프 오르간의 선율이다. 그때 파이프 오르간의 선율은 적절한 규제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 현실의 참혹함을 이유로 손끝에 힘이 들어가면 선율은 무너진다. 그 고단하고 참혹한 삶을 눈앞에 두고 있더라도 그 삶을 위로하는 선율을 만들어내려면 연주자는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마음의 옹이를 버리고 스스로를 비운채 잘 제어된 규제 속에 건반을 눌러야 한다. 나는 강기원의 시가 바로 그렇게 쓰여졌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우리들이 지금까지 시란 이름 아래 이해해 온 시는 이런 원리로 축조된다. 즉 규제되고 정제된 언어로 축조된다. 그런 점에서 강기원의 시들은 고전적 의미의 시에 가장 가깝다.

이성미 시집

나는 이성미의 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를 했다. 하지만 이성미의 시는 강기원과는 다르다. 클래식과 팝의 음악적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둘의 차별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강기원의 음악이 무겁다면 이성미의 음악은, 아니 시는 가볍고 경쾌하다.
이성미 또한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의 눈에 세상의 가장 큰 특징은 대체로 세상이 휙휙 지나간다는 것이다.

넘어진 나를
시간이 밟고 갑니다 그리고 무언가 또 휙휙
지나가고 기억만 남았습니다
나만 남았습니다
–이성미, 「휙휙」 부분

무엇이 분명 지나갔는데, 그것도 나를 밟고 지나갔는데, 지나간 기억만 있고, 나밖에 남지 않은 것이 이성미가 관찰한 우리의 삶이다. 이성미는 “혁명이 내 정수리에/깃발을/꽂더니/빨간 불/인데도 길을 건너가버렸”다고 말한다. 아마도 현대의 속도 혁명일 것이다. 속도는 모든 것을 가져다 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속도의 최종 목적지까지 우리를 데려다 줄 뿐, 그 사이의 모든 풍경을 집어삼킨다. 따라서 속도가 빠를 때 우리는 풍경을 거느린 길을 가면서도 그 풍경을 보지 못한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 그 휙휙 지나치는 우리, 혹은 그 길에 뿌리내리고 있는 세상의 삶을 놓치지 않는 방법은 걸음을 멈추고, 그 옆에 쭈구리고 앉아 오랫동안 그들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손가락만 대면 바스러질 것들
훅 불면 흩어질 것들

바닥이 활짝 열릴 때까지
건드리지 않고 바라본다
–이성미, 「풀씨는 왜 자꾸 들어오고」 부분

시인이 “손가락만 대면 바스러질 것들”이라고 말한 것은 사실은 작은 ‘풀씨’이지만 그것은 곧 우리들이 속도에 몸을 싣고 빠른 속도로 걸음을 옮길 때 모두 지나치게 되는 소소한 것들을 대변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길의 시작 부분에서 만난 강기원에게서 우리는 시선이 현실에 고착되면 마음의 옹이로 굳어질 수 있다는 위험을 보았지만 이성미에게서 그럴 위험은 없다. 왜냐하면 그가 시선을 주는 삶의 대상들은 묵직한 삶의 하중에 짓눌려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부분 우리가 매일 영위하며 그렇게 살고 있으나 대체로 그냥 지나치는 것들이다.
가령 누구에게나 낮잠의 경험은 있지 않겠는가. 그는 우리들이 낮잠을 자다가 깬 순간을 이렇게 짧은 문구에 실어 요리해 낸다.

여기가 어딜까
–이성미, 「낮잠」 부분

아마도 누구에게나 낮잠을 자다 깨어 뒤엉킨 꿈의 기억이 지금있는 자리를 낯설게 만든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깨어났으나 아직 꿈속에 있고, 그래서 여기가 어딘지 잠시 멍해진다. 이러한 재미는 그의 시 곳곳에서 발견된다. 속도의 유혹을 뿌리쳤을 때 얻어지는 이러한 재미는 우리들 모두가 그 속에 한번쯤 발을 들여놓은 적이 있거나 아니면 그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점에서 공감의 파장이 크다. 가령 기차역으로 한번 가보자. 그곳에서 시인은 기차를 놓친 사람들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시인이 그들을 바라보았을 때, 그 풍경의 어디에도 속도를 놓친 자들의 허둥거림은 없다.

조금 늦게 온 사람들
조금 일찍 와
화장실에 간 사람들
너무 일찍 와
기다리다 잠든 사람들
–이성미, 「기차를 놓친 사람들」 부분

속도에 매여있던 세상이 갑자기 그 시간의 굴레를 벗어던진 느낌이다.
시 하나를 더 살펴보자. 누구에게나 갑자기 지천으로 넘쳐나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할 일이나 갈 곳이 없을 때가 있다. 시인은 그 순간을 이렇게 잡아낸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발부리를 톡톡 차면서
이미 알고 있는 답
자꾸 묻는다
–이성미,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 전문

짧은 호흡에 실어 간결하게 정리해 놓았기 때문에 그 재미가 더욱 돋보이는 이성미의 시가 소중한 이유는, 그 경쾌함과 가벼움으로 인하여 시의 스펙트럼을 다양하게 확장하는데 공헌을 했다는 것보다는, 그의 시가 시의 불모지에서 자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 곁에 지천으로 널려 있으나 한번도 시가 뿌리를 내린 적이 없었던 풍경 속에 바로 그의 시가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그 풍경이 놓여있는 자리가 우리들 삶의 한가운데란 측면에서 그의 시는 사실은 우리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영주 시집


길이 이영주에 이르자 풍경의 분위기는 다시 어두워졌다. 그 어두운 풍경 속엔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아프리카의 아이가 있고, 밀입국자의 불안한 삶이 있다.

흐릿한 인화지 위로
구더기에 싸인 눈알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암실에 아이의 눈이 가득하다
내가 찍어온 단 하나의 아프리카
몸 속에 밥그릇 하나 갖지 못한
내가 건진 건 너의 눈
–이영주, 「달」 부분

뜨거운 공중에는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고
블록마다 고여 있는 휴식은 불안하다
–이영주, 「밀입국자」 부분

이런 풍경의 삶 속에서도 어머니는 있고, 또 아이는 계속 태어나지만,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는 사랑과 보살핌의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다.

……당신, 당신은 아이를 낳았지요 밤마다 달빛이 파고드는 그곳에서 당신은 오랫동안 임신을 했어요 지붕이 없는 집 수천 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임신 중독증
아이들은 당신의 자궁 속에서부터 골조물을 갉아먹고 살았지요 앙상하게 드러난 당신의 내장을 아삭아삭 씹어 삼켰지요……(중략)……커다란 눈알이 인광처럼 번뜩이는 배고픈 아이들이 당신을 뜯어먹고 있지요……
–이영주, 「네크로폴리스 축구단」 부분<

그러나 나는 강기원이나 이성미의 경우와 달리, 이영주에게서 더 이상 그의 시를 파이프 오르간의 음악에 빗대는 설명은 무리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현실을 대하는 방법이 두 경우와 완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강기원이나 이성미에게 있어, 그들의 시는 비록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어도 나로 하여금 그것을 관객의 위치에서 바라볼 수 있는 거리감을 확보해 주었다. 그 거리감으로 인하여 나는 그들이 내게 보여주는 시를 적절한 거리의 외부에서 감상하고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영주는 현실을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두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즉 세상이 모래 사막일 때 그는 그 세상에 묻혀 있으며, 그가 그 세상에서 출입구를 찾을 때 그는 사막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낙타의 안에서 길을 걷고 있다.

모래에 파묻혀 나는 뒤척인다
–이영주, 「유적지」 부분

나는 출입구를 찾아 낙타의 몸 속을 걷는다
–이영주, 「낙타의 무덤」 부분

즉 시인은 현실과 거리를 두고 그 주변을 맴도는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숨죽인 채 구멍을 훔쳐보며 서성이던 나는 그곳에 숨겨져 있는 내부의 궁 안으로 휩쓸려갔습니다……
–이영주, 「고궁에서 본 뱀」 부분

그와 뒤엉켜 이제 나는 밑으로 가라앉네
–이영주, 「나쁜 피」 부분

물론 이러한 그의 행로는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제 속에 담긴 불로 어둠을 사냥”하는 ‘나무’처럼, 세상이 어둡다면 그 어둠 속에서 제 스스로를 밝혀 길을 여는 치열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가 이렇게 방향을 틀면 시인의 언어는 시인의 내면과 매우 깊은 밀착성을 보이게 되고, 이는 시를 읽는 이들에겐 난해함으로 작용한다. 시인에겐 그것이 자기 안의, 눈앞에 분명하게 펼쳐진 풍경이지만, 그 언어를 간접적으로 건네받는 자들이 그 풍경을 손에 잡으려면 남의 내면으로 걸음을 옮겨야 하는 쉽지 않은 단계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면으로의 소통로를 마련했을 때, 우리의 손에 쥐어지는 감흥은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잘 제어된 규제의 원리 속에서 다듬어낸 세상 풍경을 대했을 때와는 사뭇 다르다.
그래서 나는 강기원과 이성미에게선 파이프 오르간의 선율을 들었지만 이영주에게선 화산 폭발의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는 다른 양상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 둘은 같은 원리의 다른 양상이다. 지질학자들에 의하면 파이프 오르간과 화산은 같은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 파이프 오르간의 건반을 누를 때 파이프 속의 공기가 압축된다면, 화산의 봉우리를 향하여 지층 깊은 곳에서 균열된 빈틈을 타고 오르는 용암 또한 그 빈틈의 공기를 압박한다. 그때도 선율이 만들어진다. 그 둘의 선율은 똑같은 파장을 보여주며, 그것을 가리켜 장기 파장이라 부른다.
따라서 내 귀에 장기 파장이 감지되었다면 그것의 의미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누군가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화산 폭발의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영주에게선 후자로서의 위험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비록 양상을 달리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영주의 시가 그 스타일에 있어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의 시는 아직 지층의 깊은 곳에 규제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그 방면으로 이어져온 고전적 의미에서의 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강기원이나 이성미와는 구별되는 것 뿐이다. 화산은 파이프 오르간과 달리 어떤 규제도 거부한채 거침없이 폭발한다. 파이프 오르간은 연주를 위해 달려가지만 화산은 폭발을 향해 달려간다.

이민하 시집


이민하에 오면 이제 나는 이 길이 시작되던 자리에서 파이프 오르간의 연주를 들을 때처럼 여유롭지 못하다. 매우 강력한 화산 폭발의 징조가 감지되기 때문이다. 시들의 순서로 보았을 때 이민하가 시집의 두번째 자리에 일찌감치 걸어놓고 입구의 장식으로 삼고 있는 벽화 하나는 그러한 위험을 짐작하는데 매우 유용한 구실을 한다.

보라색 태양이 벤치 위에 앉아 있고 구백구십구 개의 손잡이가 여백을 메우고 있다
그리고 깃발처럼 나무의 몸통에 꽂혀 펄럭이는 바짓가랑이
–이민하, 「입구 – 벽화, 240x240cm, 2000」 부분

나는 그냥 이 시를 어떤 벽화의 그림을 그대로 언어로 옮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의 부제가 그것을 암시해준다. 물론 “구백구십구 개의 손잡이”를 모두 세어본 것은 아닐 것이며, 그것은 많다의 구체성을 담보하기 위한 변형일 것이다. 어쨌거나 이 벽화가 현실을 그대로 모사한 그림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나무가 있고, 그 나무엔 바짓가랑이가 꽂혀 펄럭이고 있으며, 나무 옆의 벤치에는 보라색 태양이 놓여있고, 그림의 여백은 수많은 손잡이가 가득 메우고 있다. 이러한 그림을 볼 때 우리의 반응은 시선을 어디에 둘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그림 앞에선 우리의 시선은 한곳으로, 혹은 그 전체를 하나의 덩어리로 삼아 집중하여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러 곳으로 어지럽게 분산된다.
이는 이성미의 경우를 떠올리면 확연하게 구분이 된다. 이성미가 「기차를 놓친 사람들」이란 제목아래 사람들을 모았을 때, 사람은 여럿이지만 우리의 시선은 결코 분산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집중된다. 이성미가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란 제목으로 내세운 풍경 앞에서도 우리의 시선은 도닥거리고 있는 누군가의 발끝으로 집중된다.
그러나 이민하는 그러한 안정된 시선의 집중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에겐 당혹스럽기 이를데 없다. 아무래도 분산된 시선의 어지러움보다는 집중된 시선의 안정감이 평화롭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가 그 평화를 여지없이 뒤흔든다. 때로 그는 우리에게 미끼를 던지기까지 한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가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라고 말했을 때, 그 구절에 편안하게 시선이 집중됨을 느꼈을 것이며, 그 미끼를 덥석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구절에 계속적으로 수식어구를 붙여나가며, 결국은 우리에게 던져주었던 그 미끼를 어지럽게 흩어놓고 만다. 우리가 처음에 물었던 미끼는 여전히 맨끝자리에 그대로이지만 우리의 시선은 더 이상 그곳에 평화롭게 머물지 못한다.

울고 있는 아이가 눈을 뜨는 모래밭에서 알을 낳는 옥색 치마의 어머니를 집어삼키던 여름 해변처럼 타오르는 갈기를 매단 붉은 사자가 달려오는 벼랑 끝에 서 있던 꿈에서 막 깨어난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이민하,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부분

그가 첫 미끼를 던지고, 우리를 이러한 혼돈 속으로 끌어들여, 선물처럼 손에 쥐어주었던 그 단일한 시선의 안정감을 뒤죽박죽으로 어지럽혀 놓는데는 단 일곱번의 단계 밖에 필요치 않았다.
결국 시란 잘 제어된 과정을 통하여 빚어낸 정제된 언어를 건네는 작업이 아니라 그에게 있어선 ‘과잉 분출’된 무엇인가의 “분비물을 시선에 담아 객석으로 나”르는 일이다. 그러나 이민하가 이 정도선에 우리를 흔들고 물러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시가 내면의식을 파고드는 방향으로 그 풍경을 축조하고 있을 때, 그래도 우리의 눈앞엔 뒤져볼 풍경이 있고, 그 풍경 속엔 소통로만 잘 찾으면 우리가 마주하게 될 시인이 분명히 있다. 때문에 이영주의 경우 그 소통로를 찾기가 어려울 뿐, 그의 시속에 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민하는, 괘씸하게도, 우리들이 그의 시속으로 걸음하는 순간, 우리만 그 속에 덩그러니 남겨놓고, 어디론가 몸을 숨겨 버린다.

저는 시를 쓴 다음 가까스로, 거의 힘들게, 어렴풋이 증발합니다. 저는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 속에 지워집니다. 시 속에 지워집니다. 시 속에 시 속에 내가 증발하지요.
–이민하, 「토크-쇼」 부분

물론 나는 시인이, 그동안 손쉽게 시를 파먹은 독자들에게 어디 잘먹고 잘 살아봐라라는 억하심정으로, 우리를 시 속에 내팽개치고 도망쳤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언제부터인가 전해 내려온 시의 경계 안쪽으로 안주해왔다. 그것의 가장 큰 미덕은 안정감이었다. 그러나 그 안정감은 이제 그 속에서만 시의 삶을 펼쳐야 하는 경작자들에게 일종의 답답함과 같은 것이었으며, 그들 중엔 그 경계의 저편을 넘어가보고 싶은 위험한 유혹에 자꾸 마음이 끌리는 자들이 있었다. 이민하도 그런 자들 중의 하나인 셈이다. 그 때문인지 그의 시에선 우리들이 전통적 시의 경계 내에 머물며 그 곳의 산물을 음미하고 즐기던 시절의 평화를 송두리째 빼앗아 버리겠다는 욕망이 만져진다.

너를 넣어 빚을 거야
–이민하, 「사슬」 부분

그의 이 한마디는 마치 사람들을 그의 시로 끌어들여 시의 한 부분으로 삼아버리겠다는 당혹스런 속삭임으로 들린다. 시는 시인의 것으로 생각했는데, 나를 넣어 자신의 시를 빚겠다니.
하지만 나는 그의 시가 폭발 상태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민하의 시는 우리들이 그동안 시의 이름 아래 보아왔던 규제의 원리를 적절하게 따르고 있어, 비록 폭발 일보 직전까지 언어를 밀어올리고 있지만 여전히 지층의 아래 쪽으로 묻혀있는 상태이다. 위험은 감지되지만 도망갈 필요는 없다.

김민정 시집


이제 나는 마지막 시인의 앞에 섰다. 그의 이름은 김민정이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머리 속이 하얗게 비어 버렸다. 내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피할 틈새도 없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는 언어의 화산재를 뒤집어 쓰고, 눈만 빠끔히 나온 우스꽝스런 몰골로, 그의 면전에 서 있었다. 그를 마주했을 때, 아니 그의 언어를 마주했을 때, 좀더 구체적으로 그의 시집을 읽고 났을 때, 나는 머리 속이 하얗게 비어버렸으며, 나는 시집을 읽는다는 것이 언어를 뒤집어 쓰는 경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연하게 깨닫고 있었다.
그래도 이제 정신을 가다듬고 그의 시를 말해보기로 하자. 일단 먼저 그의 언어를 보시라.

……구지가도 안불렀는데 거북이들이 졸라 빠르게 기어오고 있어 졸라 빠르게 기는 건 내 거북이 아냐 필시 저것들은 거북 껍질을 뒤집어쓴 토끼 일당일걸?……
–김민정, 「거북 속의 내 거북이」 부분

두껍아, 두껍아, 난 있잖아, 지지리 궁상은 딱 질색이야
–김민정, 「두꺼비 왕자는 냄새나서 슬퍼」 부분

너 는 내 가
아 직 도 니 엄 마 로 보 이 니?
–김민정, 「용용 죽겠지」 부분

……후, 하, 후, 하, 휴, 종민 아저씨, 대체 아저씨는 왜 자꾸 늘고 있는 거지요?……
–김민정, 「김종민 아저씨」 부분

혹시 언어도 진화한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디지털 시대는 그 언어의 진화 속도를 그 어느 때보다 더 빠르게 높여놓고 있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혹자들이 그 언어의 진화를 가리켜 언어의 오염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것을 언어의 오염이라고 양보한다고 해도, 그것을 시의 변경으로 밀어둔채 과거의 언어만 주무르고 있는 것은 시인의 태도가 아니다. 그 오염된 언어를 시의 영역으로 불러들여 거르고 정제해 내는 것이 바로 오늘을 사는 시인의 사명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그 사명이 바로 김민정에게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본다. 그는 발랄하고 경쾌하게 폭발하는 언어로 자신의 시대를 새롭게 열면서 그 이전의 시대를 이렇게 조롱하고 있다.

멋스러운 글귀에 밑줄을 그어대며 환호하던 시절은 다
끝, 났, 어, 요
–김민정, 「따뜻한 날 젤로 차가운 나의 체온」 부분

그의 시에 발랄함만 있고, 현실의 잔혹함을 보는 깊이가 없다고 생각하면 그건 큰 오산이다. 그 발랄함은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는 가장 강력한 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늘도 쥐약 먹은 개처럼 날뛰”는 ‘아버지’가 재떨이를 집어 던져 “엄마의 이마에서 끈적끈적한 혓바닥이 널름거”리고 있는 한 가정으로 시선을 들이밀어 보자. “엄마는 재빨리 방문을 걸어 잠그고” 아이들을 숨긴다. 결국은 들켰는지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무릎을 끓고 싹싹 빌”고 있다. 여기까지가 우리의 현실이고, 그 다음은 시인의 대처이다. 직접 경험해 보시라.

……미끄러져라 미끄러져라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왁스를 발라 마루를 닦았어요 아버지의 양말 바닥에도 구두 굽에도 호호 불어 왁스를 칠해놨어요 우리는 모두 조심조심 걷기로 약속했어요 아버지는 몰라요 아버지는 참말 몰랐으면 좋겠어
–김민정, 「그러나 죽음은 定時가 되어야 문을 연다」 부분

나는 요즘 아이들의 말투를 빌자면, 이 대목에 이르렀을 때, 뒤집어 지는 줄 알았다. 그건 세상의 부조리를 단숨에 걸어넘기는 매우 강력한 젊고 푸른 힘이었다.
바로 그 매력 때문에 나는 폭발된 언어의 화산재를 뒤집어 쓴채, 눈만 빠끔히 나온 못봐줄 몰골이 되어 버렸지만, 이제 이번 여행의 행로가 끝났음을 알면서도, 계속 그 화산재를 뒤집어 쓴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것도 미친 놈처럼 낄낄 거리며.

4
나도 시를 읽을 때면 고전적 기법으로 다듬어진 잘 균제된 정제법의 산물을 좋아하고, 또 많이 즐긴다. 그러한 시들은 시의 이름 아래 그어진 영토의 구획선을 잘 넘어가지 않는다. 그런데 보기에 아주 깔끔한 그런 시들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그때면 나는 갈증을 앓는다. 무엇인가 경계의 저쪽에서 지금까지 내가 경험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나고 싶어진다. 이번에 다섯 명의 시인을 만나며 그런 측면에서 나는 매우 행복했다. 나는 여유롭고 품위있게, 파이프 오르간의 연주를 음미하고 즐길 수 있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 내가 딛고 선 시의 영토에서 미세하게 느껴지는 지각 변동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화산 폭발의 한가운데서 화산재를 뒤집어쓰는 전혀 색다른 경험을 향유할 수 있었다.
시인들은 그들 자신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 드러냄을 통하여 다른 시인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럴 경우, 둘, 셋, 혹은 다섯이 한눈에 확연하게 들어온다. 한 사람에게 아무리 시선을 집중시켜도 그 사람의 윤곽이 흐릿하다면 차라리 둘을 한 자리에서 동시에 만나보라. 마음이 순수한 자들은 바람 피우는 것 같아 찝찝하기도 하겠지만 바람 피울 때의 그 재미를 모르는 자들은 내 생각엔 딱하기 그지없다. 부디 부탁하노니 시의 세계로 걸음하실 때, 한쪽 영토만 파먹지 말고, 가끔 아무 것이든 좋으니 어떤 빌미를 내세워, 그들을 다섯 명 정도 초대하시고, 한 자리에서 그들 모두를 만나보시라.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 시집을 다섯 권을 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장하노니, 하나를 샀을 때 그 하나를 가질 수 없었던 우리의 막막함이 다섯을 샀을 때, 다섯을 모두 손에 넣는 놀라운 기쁨이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님, 말구.
(『문학판』, 2005년 가을호)

23 thoughts on “파이프 오르간의 선율에서 화산의 폭발까지 – 여성 시인 5인의 첫 시집

  1. 살짝 후끈거리는 글 아래 껴들어보아요..^^*
    내내 기억했다가 제일 먼저 축하드릴려고 했는데
    조금 오바인것 같아서 조금 늦게 왔어요.
    천회 포스팅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쭉 훔쳐볼거야요..*^————^*

    1. 고마워요.
      축하에 업된 기분이 아직도 가라앉질 않고 있어요.
      나중에 얼굴도 봐요.
      잘생긴 신랑이랑 예쁜 딸들도 꼭 보여주기예요.

  2. 날을 나누고, 달을 나누고, 해를 나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만은,
    우리는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움을 꿈꾸고 설레기도 하지.
    천번째 포스팅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만은,
    많은 사람들과 글을 나누고, 공유하며, 생각을 나눴다는 건 참 의미있는 일이구려.
    당신의 글터가, 당신이 가진 유일한 것인 글이라는 매체로
    나눔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게 나는 참으로 감사하다오.
    수고많았수. 건필하시오.^^

  3. 천 번째 포스팅 축하 축하드립니다.
    올리진 천 개의 글이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각양각색의 유익을 나눠주었을 거예요.
    저도 그 유익을 정말 많이 누리고 있는 사람 중 하나이고요.
    특별한 글 솜씨로 두루두루 여러 사람을 이롭게 하시니 완전 ‘홍익인간’ 블로그네요.
    ^^
    감사드리고, 축하드립니다!

    1. 고맙습니다.
      어제는 사시는 아파트 근처의 한강변에서 사진찍었어요.
      거기 강변의 숲이 좋아서 사진찍을게 무궁무진하더군요.
      조정경기장에 놀러나온 사람들 모습도 보기 좋구요.

  4. 축하 와인자리에 함께하지 못해
    오히려 제가 죄송합니다.^^
    사실 기억은 했으나 천회돌파 만남일이
    하필 제 광양일정과 겹치면서 함께하지 못햇습니다.
    그러나 마음만은 함께…..^^
    경이적인 천회 돌파 에 찬사를 보냅니다.
    짝짝짝…박수……

    1. 선생님의 노래 한곡이 함께 했다면 끝내주었을 거예요.
      다들 선생님 노래를 듣고 싶어했죠.
      4월 꽃피는 시절에 모두 함께 얼굴 봐야죠.

  5. 동원님의 천번째 포스팅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항시 열정적으로 우리의 삶과 환경을 드라마틱하게
    다루어온 열심에 감사를 표합니다.

    1. 고맙습니다, 선생님.
      오늘 승재씨랑 순일씨가 술자리를 마련해주어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어찌나 고맙던지요.
      집에 들어와선 선생님께 연략할껄 그랬다는 후회를 했습니다.
      선생님 얘기도 많이 나왔지요.
      모두가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4월의 전시회 때, 시간 맞추어 다들 함께 얼굴 뵙도록 하겠습니다.

  6. 와~천번째 …포스팅이시네요…축하 축하 드려요~!
    전 한 달전부터 만났는데, 재미있는 드라마 기다리 듯이
    맛깔스런 글과 사진이 친근하게 다가 온답니다
    저도 오늘 사진기 구입 했는데
    모르는 것들 물어 보아도 되겠지요?

    여류 시인들의 시도 천천히 읽어 볼께요…
    가정에도 주님이 주시는 평강과 축복이 넘치길 기도 드립니다

    1. 사진은 제가 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정도로 관심을 많이 두고 있는 부분입니다.
      아는대로 대답해 드릴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도움을 드릴 수 있으면 그때마다 저는 행복할 거예요.

    1. 녜, 한잔하고 들어왔어요.
      사실 제 블로그는 가을소리님의 댓글로 여기까지 왔어요.
      가을소리님의 남편님도 제껴놓고 몇시간 동안 대접하고 싶을 정도로 가을소리님도 제 블로그의 소중한 자양분을 이루어주신 분이시죠.
      정말 고맙습니다.
      댓글이 없는 블로그만큼 텅빈 사막같은 블로그도 없다고 느끼던 시절 제 블로그를 풍요롭게 해주시던 그 따뜻한 마음을 어찌 잊을까요.
      감사드려요.
      이 글은 너무 길어요.
      제가 많이 아끼고 자신있는 글이라 천번째는 이 글로 장식을 했어요.
      이해해 주시길.
      가을소리님, 그냥 방문만으로도 감사드릴께요.
      동원인 학교 잘 다니고 있겠죠.
      기회되면 남편분과 함께 밥한번 대접하고 싶어요.

  7. 성실하고 가슴이 참 따뜻하실거란 느낌…
    저도 공감하고 있어요.ㅎ
    축하 드려요.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8.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시간상 내용은 못보고 흔적만남기네요^^
    매일을 일기훔쳐보듯해요.하하하

    1. 히야, 첫번째 축하 고마워요.
      전 제목만 봐도 다 읽은 걸로 해준답니다.
      얼굴보고 이름만 알면 이제 다 아는 사이로 해주는 것과 마찬가지죠.
      진짜 축하는 이따가 한잔 쭈~욱 들이키면서…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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