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조적 자연을 버리고 힘의 자연을 구축하다 – 이상열의 그림 세계

2006 한국 구상 대제전의
이상열 그림 안내 팜플렛 표지.
그림은 <새봄-개나리>의 부분

음악은 소리로 우리에게 오지만 그 소리는 소리로 그치지 않는다. 음악의 선율은 우리에게 소리로 와선 형상을 불러 일으킨다. 가령 비발디의 <사계>를 들을 때면 누구나 그 선율의 흐름을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어지는 계절의 풍경을 떠올릴 것이다.
그 점에선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그림은 형상으로 우리 앞에 서지만 그 형상은 화폭 속의 형상으로 굳어있는 법이 없다. 형상은 또다른 형상을 불러 일으키는가 하면 어떤 메시지로 이어지기도 하고, 심지어 소리로 다가서기도 한다. 널리 알려진 그림에서 예를 구해보면 가령 피카소의 <게르니카> 앞에 섰을 때, 그 그림은 우리들을 끌고 멀리 1937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그리하여 우리는 스페인 북부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에 이르게 된다. 그해 나치 독일의 공군기들은 그 작은 도시에 3시간 동안 무려 32톤의 폭탄을 퍼부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에는 그 야만적 학살행위에 대한 고발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현실참여적 성향을 갖는 이러한 그림을 피하여 순수성이 강한 그림으로 눈을 돌려도 그림에서 형상 이상을 접하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가령 우리는 고흐의 <해바라기>에서 그런 경험을 얻을 수 있다. 그의 <해바라기>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림 속의 해바라기는 중앙아메리카를 원산지로 하며 여름에 노란색의 큰 꽃이 피는 국화과의 일년초라는 사전적 의미에 갇히는 법이 없다. 고흐의 <해바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사전적 의미의 해바라기와는 전혀 다른 해바라기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고흐의 <해바라기> 앞에 섰을 때 접하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태양을 삼킨 꽃이다. 그렇게 해바라기는 한여름 하늘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불볕같은 태양을 모두 다 제 속으로 삼키며 익어간다. 고흐가 그린 것은 우리 눈에 해바라기로 보이지만 사실 그는 그 해바라기를 통하여 해바라기가 삼킨 태양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래서 고흐의 <해바라기> 앞에 섰을 때 우리는 해바라기의 형상을 너머 한여름의 이글대던 불볕을 함께 보게 된다. 한편 그림에서 소리가 울려나오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뭉크의 <절규>는 그에 대한 대표적인 예이다. 아마도 그 그림 앞에 서면 누구나 그 그림 속의 사람이 내지르는 외침이 환청처럼 고막을 뒤흔드는 경험을 겪게 될 것이다. 그렇게 그림은 형상을 너머 때로는 어떤 참여적 메시지로, 때로는 또다른 어떤 형상으로, 또 때로는 어떤 소리로 우리들을 뒤흔든다.
이상열도 그에서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형상의 너머로 우리를 이끌며 또다른 세상의 지평을 연다. 나는 이중섭의 <황소>를 보았을 때 비슷한 경험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 내가 중섭의 그림에서 보았던 것은 황소가 아니라 “황소의 힘”이었다. 황소의 형상에 녹여낸 그 황소의 힘은 캔바스를 넘쳐날 정도로 역력하여 나는 황소 뒷굽 부분의 캔바스가 뒤로 밀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찌보면 놀랄 일은 못된다. 황소는 사실 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수목원>

이상열에게서 놀라운 점은 그의 그림에서 우리들이 주로 접하는 것이 자연이란 사실에서 시작된다. 다시 말하여 그는 자신의 화폭에 꽃과 계곡, 바다를 담아 우리들에게 내밀고 있다. 대체로 자연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관조의 대상이다. 사람들은 여유로운 시선으로 자연을 내려다보며 그 정적 자태를 즐기려 한다. 그러한 관조의 시선으로 자연을 마주하는 순간, 자연은 우리 앞에서 다소곳하게 몸을 낮춘다. 그러한 자연은 역동적이라기보다 정적이며, 그래서 조용하다. 그 정적인 자연이 화폭에 담기면 더더욱 그 자태는 다소곳해진다. 하지만 이상열의 그림 속에서 자연은 우리들이 익히 보아왔던 그러한 관조의 대상으로서의 다소곳한 자연이 아니다.
개나리를 생각해보자. 그것은 초봄에 가장 먼저 우리들에게 봄을 알리는 몇가지 꽃들중의 하나지만 개나리를 보고 힘을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개나리의 노란 빛은 여리며, 꽃의 모양도 갸냘프다. 그러나 이상열이 그 개나리를 화폭으로 옮기면 느낌이 달라진다. 개나리는 그의 화폭에서 노랗게 피어있는 것이 아니라 노랗게 폭발한다. 왜 화폭에 담긴 그의 개나리는 폭발에 가까운 강력한 힘을 갖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사실은 그게 당연한 듯하다. 아직 겨울 추위가 완전히 걷히지 않은 이른 봄에 약간의 온기만으로 꽃을 터뜨리려면 남다른 잉태의 힘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감지했는지 이상열의 화폭 속에서 개나리는 더 이상 노란색의 작고 여린 꽃이 아니다. 아마도 그것을 제대로 감지한 사람이라면 그의 개나리 앞에 섰을 때 개나리 몇송이가 화폭을 튀어나와 캔바스의 아래쪽으로 흩어져 있지나 않을까 그 아래쪽을 두리번 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문학에선 자연에서 이런 힘을 감지하는 예를 종종 접할 수 있다. 시인 이준관은 풀섶길에 핀 “봄까치풀꽃”을 보았을 때 그 풀섶길에서 “얼었던 바퀴 자국을 밀고 일어서는” 역동적 봄을 본다. 또 시인 강은교는 “온 산천에 활짝 진달래”가 피었을 때, 그 진달래로부터 땅 속 깊은 곳으로 스며들어 바닥으로 낮게 가라 앉았던 가장 진한 진홍빛 슬픔이 “그 옛적 하늘 냄새 햇빛 냄새에” 눈뜨며 “사월에 다시 일어”서고 있는 역동성을 본다. 나는 자연을 그린 그림에선 이와 같은 역동성을 자주 접할 수 없었으나 이상열의 그림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 서 있다. 때문에 그가 그린 붉은 꽃은 그 색채 속에 힘을 갖고 있으며, 그가 그린 흰꽃은 피어있는 것이 아니라 일제히 솟아오르고 있는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그의 화폭 속에서 꽃은 그저 자태가 아름다운 다소곳한 식물이 아니라 힘의 생명체이다.

<계곡>

이상열의 그림에서 접하는 이러한 경험은 그의 화폭이 계곡을 담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계곡의 물은 맑고 투명하다. 그 물은 너무 맑아 속이 다 들여다 보인다. 그래서 계곡을 찾을 때면 사람들의 시선은 물의 투명함과 시원함에 모아진다. 물이 계곡을 빠져나와 하류에 이르면 이제 물의 흐름은 잔잔해진다. 그 때면 물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깊이에 모아진다. 그러나 이상열의 시선은 물의 앞에 섰을 때 투명함이나 깊이가 아니라 힘을 파고 든다. 그 징조를 나는 그의 물이 띄고 있는 흰색의 색채에서 느낄 수 있었다. 물은 그것이 힘을 갖는 순간 투명함을 버리고 흰색으로 꿈틀댄다. 웅장한 자태의 폭포를 생각해보라. 물은 흰색으로 쏟아져 내린다. 그게 아니라면 힘차게 땅을 박차고 오르는 분수를 떠올려도 좋다. 그때 하늘로 날아오르는 분수의 물줄기는 완연한 흰색이다. 이상열의 그림 속에서 물은 흰색으로 꿈틀대며 힘의 줄기로 화폭을 흘러간다.
우리들은 종종 생활 속에 있으면서 생활을 잊어버리며, 자연 속으로 걸음하면서도 자연의 내면을 들여다보질 못한다. 이상열의 미덕이라면 바로 습관적 시각 속에 굳어 있던 우리의 시선을 일깨워 우리들을 자연의 내면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이며, 그 자리에서 우리들로 하여금 힘의 자연을 만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이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여, 이상열의 그림 앞에 서게 되었다면 그의 화폭 속에 담긴 자연에서 어디 한번 힘의 자연을 느껴보시라. 그가 자연에서 그 힘을 호흡했을 때, 그것이 힘의 그림이 되었듯이, 사람들이 그의 그림에서 힘을 호흡하면, 그 힘은 일상의 힘으로 전이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사는 것이 쉽지 않은 생활 속에서 자꾸만 왜소해지고 삭제되어 가는 현대인들에게, 다소곳하고 정적으로 보이는 자연 속에 사실은 힘이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마치 정적 자연과 비슷하게 작아지고 축소되어 있는 현대인의 일상 속으로 그 힘을 전이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제 삶 속에서 힘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려는 것이 그의 그림이 가고자 하는 궁극의 길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상열의 그림은 그 화폭에 자연을 담고 있지만 사실은 자연을 넘어 힘의 자연을 보여주고 있으며, 아울러 더 나아가 힘의 자연을 보여주는 데 그치질 않고 사람들이 그 힘을 자신들의 일상 속으로 가져가 그들의 힘으로 호흡하길 바라며 그의 화폭 속에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상열 그림 안내 팜플렛의 해설)

[안 내]
2006 한국 구상 대제전
전시기간: 2006.5.8(월) – 14(일)
관람시간: 오전 11시 – 오후 8시
전시장소: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부스 B1
입장료: 5,000원

17 thoughts on “관조적 자연을 버리고 힘의 자연을 구축하다 – 이상열의 그림 세계

    1. 이 블로그의 접속자 여러분.
      오늘은 절대로 빨래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빨래하면 절대로 못말립니다.
      오늘 빨래가 마르지 않는다면 바로 저희 탓입니다.

  1. 핑백: AkiSpace
    1. 아키님, 사파리에서도 댓글에 댓글 달기가 잘돼요. 안돼면 전에 말했듯이 위의 제목을 한번이나 두번 클릭해서 페이지를 리로드한 뒤에 하면 되요. 수정도 그렇게 하면 되구요.

  2. 그림에도 조예가 깊으시네요. 우어어어어
    이 분의 그림 느낌이 참 좋아요. 후기인상파가 생각이 나기도 하지만
    색채가 아주 선명하고… 음… 다른 그림들도 궁금해지네요.
    그리고 고흐의 태양을 삼킨 해바라기라는 표현은
    그 그림을 볼때마다 도대체 이 느낌은 뭘로 설명이 가능한 걸까 싶었던
    제 마음을 들여다보시기라도 한 듯 하네요. ^^;;
    아~! 그림 좀 봐야겠어요.

    1. 개인적으로 좀 친해요.
      같이 술도 여러 번 마시고, 작업실에도 놀러가고.
      살아온 얘기도 나누고.
      원래 예술이나 문학 방면의 사람들이란게
      사는 게 고달프잖아요.
      그렇다보니 위안이 필요한데 세상은 속만 긁어대고.
      근데 같은 방면의 사람들은 서로 좀 위안이 되죠.
      아마 아키님도 한번 만나면 꼴깍 넘어가실 걸.
      노래 실력이 보통이 아닌데다
      유머 감각도 대단하시거든요.
      이번 전시회에 사람들 좀 많이 왔으면 좋겠네요.

    2. 전시회 다 본 다음에 도착해 버렸네요.
      토요일날은 우체국이 안하더라구요.
      비오는데 들고 갔다가 그냥 헛걸음했다는…
      결국 월요일날 나의 그녀가 보냈어요.

    3. 우체국가서 우편물을 보내는 일이 요즘은 귀찮은 일중에 하나일수도 있는데,
      이리 신경써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해요.
      이스트맨님의 그녀님, 감사합니다. 꾸벅!

      전시회를 본 다음에 보는 것도 좋은데요.
      개나리 그림으로 된 표지랑 그 안에 계곡그림이랑
      보고싶을때 들춰볼 수 있어서 정말 마음이 뿌듯하답니다.

      전시회를 다녀오신 후의 후기가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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