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칠 벗기기

Photo by Kim Dong Won

1 흰색 피부에서 덧칠을 보다
백인의 우유빛 흰색 피부에서 덧칠을 본 사람이 있었다. 그 전까지 그들의 하얀 피부는 빛이었으며, 진실이었으며, 가치였으며, 존재의 정수였다. 그것은 축복이었으며, 선망의 대상이었다. 모두가 그런 피부를 갖고 싶어했으며, 심지어 그것이 태어날 때부터 불가능한 꿈일 수밖에 없었던 흑인들도 그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어느날 백인의 그 하얀 피부 빛깔 속에서 누군가가 덧칠을 보고 말았다. 태어날 때부터 잿빛의 덧칠을 지닌 것이 그들의 피부였으며, 바로 그것을 본 사람이 있었다.
사르트르였다.
그에 의하면 그러한 덧칠의 백색 피부가 오만한 시선으로 그들 이외의 대상을 모두 빛이 없는 어둠 속으로 몰아넣으며 그들의 피부를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도록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피부가 정말 그러한 대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피부를 그렇게 바라보도록 사람들을 길들였기 때문이었다.
사르트르를 접하는 우리들의 놀라움은 물론 그 덧칠을 간파해낸 그의 명민한 시력이다. 우리의 놀라움은 사르트르가 그렇듯 그들의 피부에서 하얀 덧칠을 간파해 낼 수 있었던 계기의 밑바탕을 들여다 보는 순간 더 커진다. 그 곳엔 시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피부에서 덧칠을 벗겨낼 때, 그는 바로 흑인들의 검은색 피부와 그것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흑인들의 시와 어깨를 함께하고 있었다. 1948년 프랑스에서 발행된 『아프리카 및 서인도 시인 선집』의 서문으로 씌여진 사르트르의 <흑인 오르페>에서 우리는 바로 그러한 그의 시각을 만날 수 있다(사르트르의 그 글은 『제3세계 연구 1』, 한길사, 1984에서 읽어볼 수 있다).

2 덧칠된 일상
그러나 덧칠은 흑백의 인종이 대립할 때 백인들의 피부 위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시선을 돌려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어느 구석에서나 덧칠은 발견된다. 내가 덧칠, 덧칠했을 때, 그 말이 풍기는 느낌은 대단히 부정적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 덧칠은 대상을 아름다움으로 치장하면서 우리의 시선에 미적 만족감을 안겨준다. 잘생긴 백인 영화배우가 갖는 아름다움과 빨아들이듯 우리의 시선을 앗아가는 그 매력을 생각해보라. 하지만 덧칠이라는 말로 그 미적 만족을 뒤집어 버리면, 그 아름다움은 이제 대상의 은폐라는 정반대의 색채로 성격이 바뀐다.
최문자가 안내하는 파란 대문의 집앞으로 걸음을 옮겨 그 현장을 한번 살펴보자.

막다른 집에서 꽤 오래 산 적이 있다.
헐어빠진 나무대문들을
희망처럼 보이게 하려고
페인트로 파랗게 칠을 했었다.

말 그대로 덧칠이다. 사람들은 파란 대문이란 말로부터 열고 닫을 때마다 바다 내음이 가슴에 싸하게 느껴지는 낭만적 기대를 품을지도 모른다. 또 그것이 덧칠을 하는 이유이다. 시인의 말에 따르면 원래 그 파란 페인트 칠로부터 꿈꾼 것은 희망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 페인트 칠이 원래의 희망대로 시인의 눈에 희망을 보여줄 수 있었을까. 그 기대는 정반대로 빗나갔다.

대문의 나뭇결은 숨을 그치고
그날부터 파랗게 죽어갔다.

‘파랗다’라는 색으로 불러 일으키려 한 것은 희망이었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시인은 그 앞에서 ‘나뭇결’의 은폐를 보고 말았으며, 그 순간 ‘파랗다’라는 말은 시인의 머리 속에서 ‘파랗게 질려 죽어가다’를 연상시키고 만다.
문제는 그 파란색 덧칠로부터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시인조차도 바다의 환상에 현혹된다는 것이다.

늦은 밤 돌아와 보면
길고 좁은 골목 마지막 끝에
자기 그림자 꼭 껴안고
바닷속으로 뛰어들 것 같은
그런 흔들림으로 서 있던 파란 대문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 그 덧칠의 은폐성, 그리고 은폐성이 가져오는 낯설음을 알아보는 존재가 있다. 최문자에게서 그것은 바로 개이다. 사르트르가 백인의 피부에서 은폐된 덧칠을 보았을 때 보수적 시각의 백인들은 그의 날카로운 지적을 가리켜 개소리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런 사람들은 사르트르로부터 개소리를 들었겠지만 시인은 반대로 그 개로부터 사르트르를 듣는다.

그 대문을 바라보고
가끔 생각난 듯 개가 짖어댔다.
덧바른 낯선 색깔을 알아보고 짖어댔다.
어느날은
죽은 나무대문이 다시 나무로 살아날 것처럼
사정없이 짖어댔다

그러나 시인은 이제 그곳에 살지 않는다. 시인은 가장 현대적인 도시의 아파트에 둥지를 틀고 있으며, 덧칠은 이제 그의 일상이 되었다. 그 공간에선 아무도 짖어대지 않는다. 시인은 개가 그립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긴 골목도 없이 나를 막아서는 802호
지금은 거기에 산다.
열쇠를 돌리려면 한참씩 문 앞에서 달그락거리지만
잠긴 저 안은 언제나 쇠처럼 고요하다.
하루 종일
이 색깔 저 색깔로 덧칠당하고 돌아온 나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희망처럼 보이는 푸르딩딩한 폐허를
아무도 짖어대지 않는다.
사라진 개를
찾아나서고 싶다.
─최문자, 「파란 대문에 관한 기억」(창작과비평, 2001년 봄호)

우리의 일상 속에서 덧칠의 은폐성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우리들로 하여금 ‘푸르딩딩한 폐허’로부터 ‘희망’을 보도록 시선을 앗아가 버렸다.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덧칠된 일상의 세계 속으로 깊이 발목을 잡혔으며, 또 아무도 이 폐허에서 빠져나가려 하지 않는 것일까? 그 대답은 이재무에게서 들어보자.

어둠이 컹컹 짖는다
길이 빠르게 몸을 튼다
그러나 신발은 당황하지 않는다
관습이란 얼마나 뻔뻔하고도 편리한 것인가
이내 체념하고 숙명의 하인처럼 다소곳해지는,
고구마 덩굴같이 부드러운 길
총총걸음을 불평 없이 따라오는 저 충직한 노복과도 같은
밤길을 나는 사랑하고 찬미한다
누군가 목을 당긴다
돌아보니 어디 빙판길에 자빠졌다 오는길인지
달의 얼굴에 금이 가 있다
오래 삶은 계란 껍질 같은 저 표정이 나는 전혀 낯설지 않다
오늘밤, 나는, 돌아가, 또, 동어 반복의 페이지에 갇혀 지칠 것이다
나는 날마다 生의 채무자에게 납치되어 포박되는 꿈을 꾼다
하지만 이 허황한 꿈은 꿈으로서 끝날 것이다
운명이 내 희망을 수락한 적은 없다
삶은 고집 센 노인 같기도 하고, 전혀 고장을 모르는 기계 같기도
하다 나는 나라 안에서 생산되는 가십이
백성이 일용할 양식을 상회하는 한국의 유구한 전통이 자랑스럽다
폭죽처럼 터지는 화려한 이벤트 성 스캔들은 또 어떤가
살면서 는 것은 체중과 식욕뿐이다
너무도 평안하고 행복, 무사하여 불결한 나날이여
이제 어둠이 짖어도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컹, 컹, 어둠이 짖는다
누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이재무, 「밤의 산책」(문학동네, 2001년 봄호)

최문자가 몸을 묻고 있는 그 일상의 ‘푸르딩딩한 폐허’가 ‘희망’처럼 보이는 것은 이재무에 의하면 우리들이 관습의 편리성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들은 그 편안함에 지친다. “너무도 평안하고 행복, 무사”한 우리의 일상으로부터 “불결한 나날”을 읽어내는 밝은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덧칠의 은폐성에 길들여지지 않는 저항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편안하고 행복한 오늘의 현실에 지친다.
이제 골목을 서성이던 발걸음을 좀더 적극적으로 옮겨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보기로 하자. 그러면 우리는 덧칠된 일상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접할 수 있다. 잠시, 옷깃을 여미도록 하자. 시인의 아버지가 돌아간 듯하기 때문이다. 미리 약간의 실마리를 드리자면 여기는 죽은 자를 떠나보내기 위해 마련된 빈소인 듯하다.

곡을 합니다
형제들과 화투라도 치듯
앉아서 노닥거리다가
문상객이 빈소로 들어오면
냉큼 일어나 목청 돋워 곡을 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하던 곡소리가
갈수록 천연덕스러워집니다
슬픔도 그 곡소리 따라
마음 밖으로 실려나가고
소란스런 예식이 맡긴
배역만 남은 듯합니다
액자 속의 아버지도 문상객 앞에선
짐짓 근엄한 표정이 됩니다
일 치르고 나면 식구들끼리
바람이나 쐬러 가자, 자식들만 있을 때
아버지는 넌지시 이런 말을
건네는 것 같습니다

이제 덧칠은 슬픔의 형식화란 모습으로 나타난다. 슬픔이 형식화한다는 것은 슬픔이 마음의 움직임이 아니라 몸의 움직임이 되고 있다는 얘기이다. 그 덧칠의 일상이 우리들을 복속시키는 힘은 너무 강력해서 죽은 자마저 그 앞에선 ‘근엄한 표정’을 짓는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서 있는 강윤후 또한 시인이어서 그 덧칠의 일상적 풍경 속으로 천연덕스럽게 휩쓸려 가질 못한다. 우리는 그의 눈물에서 그런 모습을 본다.

방금 전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다
남 몰래 더운 눈물 한 방울
떨구고 왔습니다
─강윤후, 「哭」(현대시, 2001년 3월호)

그러나 이 정도면 누구나 약간씩은, 형식의 허례라는 이름으로, 그 덧칠의 불순함에 눈뜰 수 있을 것이다. 더더욱 무서운 것은 우리의 의식을 보다 근원적 차원에서 덧칠하고 있는 현대 문명의 가공할 힘이다. 그것은 놀랍게도 자유란 이름으로 온다. 이번에는 장례식장이 아니라 무례함을 무릅쓰고 시인의 내밀한 안방까지 밀고 들어가보자. 그 안방에선 시인 김승희가 텔레비젼을 보고 있다.

자유는 있다
넘쳐나는 자유는 있다
텔레비젼 앞에 앉아서야 비로소 자유가 보이기 시작하고
선택은 하루종일 무력했던 손 안에서
향수 냄새 물씬거리는 퍼들거리는 권총처럼 빛난다

내게도 자유는 있다
권총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화면을 겨누어본다
게리 쿠퍼, 존 웨인, 말 탄 자는 달려간다
역사스페셜을 볼까, 주말연속극 <태양은 가득히>를 볼까,
<엄마야 누나야>를 볼까, Inside USA, Sixty Minutes,
권총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시간이 넘어가도 자유의 잔액은 여전함을 팡팡 즐겨본다
뉴스데스크를 볼까, 공개수배사건 25시, Rarry King Special,
세계의 명화 <까마귀 기르기>, 은실이, 스미소니언 월드,
이상벽의 가요 중심, 대덕 밸리 뉴스, 영상 니르바나,
뷰티 클리닉, 스포츠 경마, 보스턴 저스티스, 골프 아카데미를

무엇을 볼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자유는 손 안에서 뭉클한 총신처럼 떨리고
향수 젖은 손 안에 벌컥벌컥 수십 발의 총알들이 발기태세인데
한산섬 닭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머물 것인가, 돌릴 것인가

우리는 현대 문명이 제공하는 그 많은 선택의 여지 앞에서 자유를 느낀다. 그리고 우리의 자유는 통상, 바로 그 점, 즉 폭넓은 선택의 자유에 맞추어진다. 채널을 돌릴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최종의 선택까지 갈 때까지 그 자유의 느낌은 그대로 유지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미디어 안에서의 자유, 좀더 정확히 말하여 복속된 자유이며, 더욱 엄밀하게 따지고 들면 덧칠이 된 자유이다. 때문에 시인의 자유는 돌릴 것인가, 계속 볼 것인가의 선에서 멈추지 않는다. 시인은 그 다음의 자유를 알고 있다.

볼 것인가, 끌 것인가………
─김승희, 「자유는 있다」(작가세계, 2001년 봄호)

자유는 바로 여기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있다. 현대 문명이 현혹하는 덧칠된 자유를 송두리째 거부하는 이 큰 자유는, 그 큰 자유에도 불구하고 손가락의 작은 손놀림으로 너무도 쉽게 우리의 손에 들어온다. 그러나 시인은 알고 있다. 그 작은 손놀림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시인은 아직 텔레비젼을 끄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시인은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덧칠된 자유를 일거에 잠재워버리는 그 큰 자유를 가져다줄 작은 손놀림에 우리가 의식의 무게를 얹어 드디어 시가 노리는 원래의 마무리를 이루어주길.

3 덧칠을 벗긴 자리
일상이 덧칠이란 얘기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그것은 일상에 칠해진 덧칠이 무엇인가를 가리고 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말미의 자리에 몇마디 덧붙여 두자면 덧칠을 벗겨낸 자리에는 아무 것도 없다. 시는 그런 측면에서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하나는 덧칠을 벗기는 역할이며, 또 하나는 그 덧칠을 벗겨낸 자리에 드러나는 휑한 빈공간에 무엇인가를 채워넣는 역할을 한다. 즉 시는 덧칠을 벗겨낸 자리에서 원래 있었던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옮겨놓는 작업의 소산이 아니라 유를 위장한 덧칠의 은폐성을 벗겨내 무를 만들고, 그 무의 공간에 유를 만들어내는 작업의 소산이다. 나는 이번에는 단지 덧칠을 벗기고 있는 시 네편을 둘러보는 것으로 산책의 발걸음을 마감했다. 이미 말했듯이 그것은 무의 자리로 나를 이끌 수밖에 없기에 나는 지금 다소 허탈하다. 덧칠을 벗겨낸 그 자리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그 무의 공간에 채워진 유의 시들을 말하고 싶다.
(『현대시』, 2001년 4월호, 월평)

6 thoughts on “덧칠 벗기기

  1. 선배님 평론을 읽으면 마치 기행문을 보는 것 같습니다.
    꼬불꼬불한 산길이며 정상에 올라 보이는 풍경들이 눈 앞에 펼쳐집니다.
    하지만 무식한 놈상은 제 맘대로 느껴버립니다. ㅎㅎ

  2. 동네길을 거닐다가,
    페인트 강렬한 때론 덧칠 벗겨진
    색색의 문들이 눈에 쏙 들어오곤해요.
    그 색들의 강약, 그 안의 다양성과 개성
    색이 있는 풍경은 참 아름다왔어요.

    1. 색의 심리학 같은 걸 한번 찾아서 읽어볼까 생각 중이예요.

      놀러갈 거리가 생겼는데
      밀린 일 때문에 그냥 집에서 일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어요.

    2. 놓쳐서 안타까우시겠다~_~
      주말내내 쌩쌩@ 놀아놓고서도
      월요일 아침이 늘어지네요.
      비가 내릴 것 같이 회색빛이에요.
      따뜻한 차한잔하시며, 열심히 일하셔야^^
      다음번에 꼭 즐거이 떠날 수가 있겠어요~

    3. 것도, 아주 몸만 오라는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었답니다.
      아까운 것.
      이번 주 내내 바쁠 듯.
      원고 넘겨줘도 작업도 안하면서 원고 독촉은 왜 그렇게 하는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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