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의 너머로

Feet
copyright 1997 philg@mit.edu

1 그녀가 눕고 각도를 낮추자 시선이 열리다
나는 지금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고 있다. 사진에는 “발”(Feet: http://www.photo.net/photo/pcd2668/feet-low-angle-53.4.jpg)이란 제목이 붙어있다.
나는 그 사진이 카메라 속의 필름 위에 형상을 새기기 이전으로 상상의 촉수를 들이밀어 본다. 그 상상의 세계 속에선 벌거벗은 여인이 카메라 앞에 서 있다. 여인은 지상을 수직으로 딛고 똑바로 선 자세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정면으로 자신을 드러낸 가장 일상적인 직립의 자세이다. 우리들은 대체로 그렇게 나를 드러내야 한다고 믿는다. 똑바로 서서 나의 정면이 드러나도록.
나는 카메라의 창에 눈을 갖다 대고 사각의 구도 속에서 여인의 모습을 살펴본다. 나의 시선은 포충망처럼 벌어지며 앞으로 향한다. 그 시선은 위로는 여인의 얼굴과 만나며, 아래쪽으로는 그녀의 발끝과 만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얼굴과 가슴, 허리, 다리, 발을 하나하나 짚어내며 여인을 살펴보고, 이어 나의 시선은 여인의 모든 것을 한눈에 포착해내는 전체적 조망의 시선을 갖춘다. 그러나 동시에 그 시선은 여인의 정면에서 곧장 멈추어 있다. 그 순간 시선의 끝에서 묻어나는 느낌은 답답함이다.
여인의 정면은 내게 있어 벽에 새겨진 부조이다. 그 앞에서 나는 그 부조의 윤곽이 보여주는 형상의 아름다움을 더듬기보다 오히려 그 부조가 새겨진 벽, 그러니까 정면의 각도에서 내가 느끼는 몸의 질감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 민감한 반응 앞에서 여인의 정면은 내게 무엇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를 보고자 하는 나의 시선을 가로막는 벽으로서의 느낌을 더욱 강하게 풍긴다. 그렇게 나의 시선은 그 벽앞에서 차단당하고 답답함은 바로 거기에서 온다. 그 벽을 넘어갈 수는 없는 것일까?
카메라의 뒤에서 주문해본다.
─다른 자세를 한번 취해 볼래요?
─어떻게요?
─그냥, 아무 거나 다른 거요. 옆으로 틀어보던지… 아니면 아예 누워보던지…
─그럼 한번 누워볼까요?
그녀가 눕는다. 팔을 허리 아래쪽으로 들이밀어 양팔로 대칭의 형상을 만들면서 반듯하게 눕는다.
다시 카메라의 창을 통하여 여인을 살펴본다. 시선은 이제 그녀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쪽으로 하강하며 그녀의 몸으로 내려앉는다. 그러나 아직은 그 하강의 각도가 급하여 그녀의 몸으로 내려앉은 시선이 그녀의 몸에 그대로 고착되어 버리고 만다. 그녀의 머리 뒤쪽으로 휑하니 뚫린 공간이 넓게 자리잡고 있지만 여인의 몸에 주저앉아 버린 시선은 비스듬한 각도에도 불구하고 그 빈 공간으로 튀어오르지 못한다.
나는 카메라의 위치 자체를 낮추어 본다. 카메라의 창에 눈을 붙이고 바닥에 누운 여인의 모습이 어떻게 바뀌는가를 계속 살펴가면서 높이를 낮추어간다. 어느 순간 나는 움직임을 멈춘다. 그 순간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상이 그곳에 있었다.
엄밀히 말하여 형상의 질감이 느낌을 달리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 여인의 모습을 자세히 기술해보면 가장 먼저 여인의 발이 눈에 들어온다. 발뒤꿈치의 자글자글한 주름이 선명할 정도로 그것은 크게 확대되어 있다. 시선은 이제 그녀의 발바닥에서 막히지 않고 그것을 타고 올라 엄지 발가락 쪽으로 이동한다. 아니, 발이 나의 시선을 안내하여 발의 너머로 이끈다. 그 곳을 넘어간 나의 시선은 그녀의 두 다리 사이로 가늘게 트여있는 공간을 따라 위로 올라간다. 그리하여 여인의 다리 사이에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수풀을 만나고, 잠시 그곳에서 머뭇거린다. 이어 수풀을 지나 봉긋하게 솟아 양쪽으로 대칭을 이룬 가슴 사이로 빠져나간 시선은 반달처럼 휘어진 턱을 지나고 그녀의 콧등과 만난다. 그리고 거기서 시선은 멀리 뒤쪽으로 트인 허공을 호흡하며 한참동안 그대로 머물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몸은 벽이 아니라 길이었다. 벽이었을 때 우리의 시선을 가로막았던 몸은 이제 길이 되었을 때 앞을 열어주며 그녀의 너머로 나의 시선을 터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나는 공간을 호흡할 수 있었다.
그 한장의 사진은 그렇게 하여 나에게 대상을 보여주는듯 하면서도 시선을 막는 각도가 있는가 하면, 대상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시선의 길을 여는 각도가 있음을 얘기하고 있었다. 현실 속의 우리는 대체로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정면으로 마주하는데 아주 익숙해져 있다. 그 익숙함은 때로 우리에게 대상을 보여주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시선의 길을 가로 막고 있어 대상의 너머에 또다른 길이 있음을 보여주지 않는다. 때문에 때로 우리는 길을 열기 위하여 여인을 눕히고 카메라의 각도를 낮추는 것과 같은 자세를 취해볼 필요가 있다. 그 자세는 일상적 자세는 아니지만 일상이 벽과 같이 느껴지는 순간, 그러한 자세가 우리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줄지 모른다.

2 세 가지의 예
나는 먼저 최문자가 안내하는 삽화 속으로 시선을 들이밀어 본다. 그 삽화 속에서 시인이 자신이 그려낼 삽화의 전제로 삼고 있는 것은

더, 더
참을 수 없는 것들은
쓰러지면서 덩어리가 된다.

는 것이다. 무엇을 참을 수 없는 것인지, 덩어리가 무엇인지는 아직 시작의 어구만으로는 짐작하기 어렵다. 그 다음의 삽화를 쫓아가 보면 우리는 덩어리가 ‘얼음덩어리’임을 알 수 있다. 그 얼음 덩어리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뜨거운 모래 벌판을 달리다가 자동차의 앞바퀴가 빠지는 사고로 숨져 시체로 귀국한 대림산업 현장소장의 알루미늄관 속에 넣어진 얼음덩어리이다. 시체의 부패를 막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시인이 말하는 참을 수 없는 것이란 그 남편을 잃은 아내의 슬픔이다. 소복 입은 그의 아내는 그 슬픔이 너무 커서 그 곁에서 또 하나의 큰 얼음덩어리로 서 있다. 그 순간 그의 아내를 정면으로 마주하면 우리의 시선엔 슬픔 이외엔 다른 것은 하나도 잡히지 않는다. 그것은 슬픔이라기 보다 슬픔의 벽이다. 슬픔의 벽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 앞에서 눈물로 서성이게 할 뿐 그 너머로 걸음을 떼지 못하게 하는, 정면의 각도에서 본 슬픔의 굳은 현실이다. 내가 시인에게서 기대하는 것은 바로 그 벽을 넘어서는 낮은 시의 각도이다.
그 순간 시인이 시의 각도를 바꾼다. 정면으로 서 있는 소복 입은 여인의 슬픔을 바닥으로 눕히고, 시선을 발끝으로 옮긴 것이리라. 그 순간 얼음 덩어리의 너머로 시선이 트인다. 놀랍게도 그 자리엔 눈부시게 흰 눈이 날리고 있다.

얼음도,
차가움의 근원은 저 눈부신 흰 눈이었는데

그리하여 시인은 아주 자명한 진리를 얻어낸다. “그 포근했던 기억의 가루”가 “북풍 앞에 쓰러지면 바로 덩어리가”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시선으로 전달받는 느낌과 달리 눈이 전혀 포근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눈으로부터 포근함을 읽어내는 순간, 우리들은 현실 속에 있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눈을 포근함으로 바라보는 순간 속에 계속 머물 수 없음을. ‘북풍’은 그것을 확연하게 깨닫게 해준다. 그것은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의 원리이다. 그 현실 앞에서 “포근했던 기억의 가루”는 ‘덩어리’로 굳어질 수밖에 없다.
이제 시인이 제시한 삽화에 따라 경계선을 그어보면 현실 속에 덩어리가 서 있고, 그 반대편에 가루가 날리고 있다. 우리는 그 경계선을 넘나들며 살고 있고, 그 경계선을 가운데 두고 덩어리와 가루의 세계는 서로 대립하고 있다. 그 둘이 대립할 때마다 번번히 이기는 것은 덩어리의 세계이다. 그 둘의 대립과 현실의 승리를 접할 때마다 시인은 “몹시 아프”다. 보통 그 아픔의 끝에서 우리들이 선택하는 길은 다시는 덩어리의 경계선 반대편으로 시선을 주지 않는 것이다. 아니, 시선을 주지 않는다기 보다 대상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현실적 시각에 포박되어 살아가는 일상적 존재를 이제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참나무’가 “나무로 치솟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숯덩이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시인은 그 가루의 세계를 잊을 수 없는 운명의 존재이다.

참나무를 자꾸 베어 숯을 구워내도
내 안의 아픈 산들은 나무로 울창하다.
저 포근했던 가루, 사랑의 기억 때문에
─최문자, 「가루를 향하여」(현대시, 2001년 4월호)

그러므로 최문자에게서 시의 각도는 현실의 벽 너머로 우리의 시선을 이끌어 ‘꿈’이나 ‘사랑’의 길을 보여주며, 그것을 잊지 않도록 작용한다. 그리고 현실의 하중 속에 짓눌려 사라지는 한편으로, 동시에 꿈과 사랑은 그 기억의 힘에 기대어 끊임없이 부활한다.
그러나 김인희의 현실에 대한 접근은 최문자와는 다르다. 시인은 시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는 잠실에서 미사리 가는 길을 모른다

잠실과 미사리 사이의 공간적인 거리는 매우 가깝다. 아마 시인이 차를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길을 잘알고 있을 경우, 30분 정도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에 미사리는 있다. 잠실이 완전히 개발된 아파트 촌이라면, 그래서 도시적 서정 이외에는 기대할 것이 없는 곳이라면, 미사리는 아직 들판이 여기저기 그대로 널려있는 개발되지 않은 땅이다. 그러면서도 서울이란 대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도시의 편리함을 향유하면서 아울러 자연의 낭만을 함께 취할 수 있는 곳이다. 미사리와 가까운 잠실에 살고 있고 또 “미사리 들어가는 입구에 예쁜 집을 지”은 시인의 친구가 있다는 말로 미루어 시인이 미사리 가는 길을 모를 리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도 시인은 미사리 가는 길을 모른다고 잡아떼고 있으며, 말미의 자리에서 다시 한번 그 얘기를 반복하여 못을 박는다.
시인은 시속에서 그 미사리 친구의 얘기를 듣고 있다. “잠실에서 미사리 들어가는 왼편 산중턱에서 남편과 딸 셋” 그리고 ‘아들 하나’와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얘기이다. 시인의 친구가 하는 얘기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일 것인가를 짐작하기는 어려울 것 같지 않다. 남편이 어떤 직장에 다니고, 수입은 얼마나 되며, 그 남편이 어떻게 해주고, 아이들이 공부는 어느 정도 잘하며, 집은 어떻게 꾸몄고, 아마, 그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을까.
그 친구의 얘기를 정면으로 마주하면 우리의 시선에 잡히는 것은 물론 그녀의 얘기이다. 우리는 당연히 그 얘기가 그녀를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상을 정면으로 마주할 때, 대상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선의 길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었듯이, 그녀의 얘기가 실제로는 그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녀에 대한 우리의 시선이 그녀의 뒤를 넘보지 못하도록 길을 가로막는 차단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녀의 뒤로 시선을 옮겨볼 수 있을까? 김인희가 시선의 각도를 낮추자 시인의 눈에

그녀는 우리와 만날 때 집을 거기에 두고 그녀만 온다
─김인희, 「미사리 가는 길」(현대시, 2001년 4월호)

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는 자명한 사실이지만 우리의 시선이 그녀의 얘기에 고착되어 있을 때 이 사실은 거의 포착되지 않는다. 이 구절은 그녀의 얘기를 들을 때 그녀와 전혀 구별없이 하나로 묶여있던 그녀의 집을 그녀로부터 분리해낸다. 이런 식으로 둘을 갈라놓으면 그녀의 얘기에 등장하는 예쁜 집과, 또 남편과, 아이들을 그녀로부터 모두 분리해낼 수 있다. 그녀에게서 이 모든 것을 갈라놓는 것이 그녀의 행복을 빼앗아 버리겠다는 불순한 의도로 보이진 않는다. 시인은 다만 그녀의 행복이 어디에 귀속되어 있는가를 확인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 결과에 따르면 불행히도 그녀의 행복은 다른 객체에 귀속되어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얘기는 그녀의 행복을 다른 객체들의 삶과 묶어버리는 마취력을 갖고 있다. 그녀의 얘기를 정면으로 들을 때 우리는 바로 그러한 마취력에 빨려든다. 얘기하는 그녀도 그 점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 마취력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바로 시선의 각도를 낮추어 그녀와 그녀의 집을 분리시키는 것이 그 방법이었다.
시인은 짓궂다. 그녀와 그녀의 집을 분리시키는데서 더 나아가 그녀가 말하는 삶에서 그녀의 집을 지워본다. 집을 지우고 나니 그녀의 남편과 아이들이 아무데서나 자게 된다. 그녀 또한 아무데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시인의 앞에 나타나지도 못하게 된다. 시인의 짓궂은 장난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행복이 집에 귀속되어 버린 우리 사는 세상의 모습과 자신의 행복이 남편과 아이들의 삶에 귀속되어 버린 이 땅 여자들의 삶을 보게 된다. 만약 그녀의 행복이 그녀의 것이었다면 시인이 그녀의 집을 지우고, 그녀의 남편, 아이들의 자리를 지운 끝에서도 그녀의 행복이 분명한 자기 자리를 확보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행복은 허상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시인이 미사리 가는 길을 모른다고 했을 때 그 길이 행복의 허상으로 연결된 길임을 알게 된다.
유종인의 관점은 시선의 각도를 낮추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거꾸로 뒤집고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진정한 자아가 무엇인가를 묻고, 그것의 구현을 주제로 삼아 입에 올렸다고 해보자. 그때 사람들의 도식적 대답 중 하나는 껍데기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종인은 깡통의 회고 형식을 빌어 그러한 일반적 도식성이 실제로는 답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우선 깡통은 ‘가슴에’ 무엇인가를 담아두었을 때는 깡통이 아니다. 깡통은 “단 한 번 나를 열어” 그 속을 쏟아냈을 때 비로소 깡통이 된다. 그런 점에서 보면 빈깡통이 내는 요란한 소리는 귀를 막아야 할 시끄러운 소음이 아니다. 깡통은 그 내면에 가득한 소리를 갖고 있었으나 자신을 닫고 침묵으로 일관해야 했다. 빗방울이 떨어지며 깡통을 두드릴 때 깡통은 자신의 내면에 있었던 그 소리를 찾아내며, 번지는 붉은 녹빛은 생명의 피빛이 된다. 따라서 빗방울이 빈깡통을 두드릴 때 나는 그 시끄러운 소리는 사실은 깡통이 자신의 자아를 찾아낸 순간에 발하는 희열의 소리이다.

나를 닫고 보냈던 시간들이
얼마나 소리 가득한 침묵이었는가
빗방울 하나둘 떨어질 때, 그 소리
붉게 번진다

깡통에 대한 일반적 시각 속에선 깡통의 이러한 모습은 포착되지 않는다. 각도를 낮추는 정도가 아니라, 정반대로 비틀었을 때 비로소 깡통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시선에 포착되어 들어온다. 사람들은 최문자나 김인희의 경우와 달리 깡통의 경우엔, 그 전도된 시각에 당황하면서 이런 시각으로부터 삶에 대한 일반적인 시사를 얻어낼 수는 없는 것 아니겠냐는 주장을 펼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삶이 실제로 무엇에 더 가까운가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우리의 삶이 깡통의 회고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는 나를 담고 있었다고 할 수가 없”는 삶이었다고 보면, 깡통에 대한 유종인의 시각은 곧 우리의 삶에 보다 적절한 시각으로 뒤바뀐다.
따라서 속을 버리고 껍데기를 찾으려는 깡통의 길은 껍데기에 대한 도식적 시각을 넘어섬과 동시에 현실의 하중과 외압에 시달리는 우리의 삶을 더 적절하게 보여주면서 그러한 삶의 우리들이 나를 찾기 위하여 걸어가야할 길을 새롭게 열어주게 된다.

쇠로 만든 껍데기, 갈 데까지 가야지
껍데기로 만든 속인 걸
찌그러지고 눌리고 납작해져
마지막 外壓이 내 안에서 속을 버릴 때까지
껍데기여, 갈 데까지 가야 한다
─유종인, 「깡통의 回顧錄」(현대시, 2001년 4월호)

3 작은 희망을 보면서
나는 각도를 낮춘다는 것이 단순히 또 하나의 관점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때로 각도의 이동은 대상에 대한 질감을 완전히 뒤바꾸어 버리면서, 대상의 세계를 그간의 각도에선 전혀 접할 수 없었던 길로 새롭게 열어준다. 물론 그렇다고 나는 시가 현실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가령 예를 들어 내가 집을 장만하는데 시가 도움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지만, 그러나 나는 세상의 현실이 시속에서 뒤집힐 때마다 그 작은 힘이 계속 축적되어 나가다 보면 내가 집을 장만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곧잘 사로잡히곤 한다. 시인이 열어보인 대상의 질감이 벽에서 길로 바뀌었을 때 더더욱 나의 그런 생각은 희망으로 부푼다. 나는 이 번에 최문자와 김인희, 유종인의 시에서 그런 희망의 순간을 만났다. 앞으로 그들의 길에 행운있기를.
(『현대시』, 2001년 5월호, 월평)

6 thoughts on “벽의 너머로

  1. 사람마다 역시 보는눈이 다른가보네요.
    제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제목 밑의 판권 정보에 있는 이메일 주소를 보면서,
    MIT의 누군가는 사진도 잘 찍나보네…란 것이있네요.

    즐거운 주말 보내셨나요?

    1. 전 사진에 영향을 받은게 세계적인 사진 작가들 보다 무명의 작가들한테 영향을 더 많이 받았어요. 그 중에는 이름은 기억 안나는데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던 한 젊은 사진작가도 있고… 누드 사진은 주로 이 사람 한테서 영향을 받았다는…

  2. 첨엔 조각작품인줄 알았어요.^^
    정말 발쪽에서 사진을 찍으면 정강이쪽이 저렇게 나오나 궁금하고..
    사람마다 체격이 다르니 조금씩 다르긴 하겠지만요.^^
    사진 팁에서 한자세로만 찍지말고 여러 각도로 움직여보며 찍어보라던 글도
    생각나네요.

    1. 누드 사진 공부할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진이예요.
      누드 사진은 참 의미를 읽어내기가 어려운데 이 사진은 의미로 읽히더라구요.
      요건 사진으로 봐선 그냥 표준 렌즈는 아닌 것 같고 광각 렌즈를 사용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
      한 16mm 정도의 렌즈로 찍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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