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끌고 시 속에 눕다 – 윤병무 시집 『5분의 추억』

윤병무 시집 『5분의 추억』
윤병무 시집 『5분의 추억』

1. 엽서 속으로 들어가다

오래된 기억 하나를 들추어보면 어느 날 나는 블루(블루는 나의 아내이다. 아내는 블루란 이메일 ID를 가진 뒤로 자신을 블루라 부르라고 고집이다. 나의 아내가 블루라는 말이 일으키는 그럴 듯한 분위기와는 상당한 거리에 놓여있음을 솔직하게 밝혀둔다)와 함께 동해로 향하고 있었다. 그냥 바다를 보고 싶다는 욕망에 밀려 우리는 차를 끌고 6번 국도를 따라가고 있었다.
“몇 번짼가의 말더듬 끝에 고백에 성공한” 사람처럼 항상 몇 번인가의 껌벅거림 뒤에 불이 들어오는 ‘형광등’을 켜고 ‘베란다 새시’ 앞의 ‘커튼’을 치는 순간 “육지로 달려온 파도 소리”(p.20)가 나는 그런 날이 있었다. 현실의 하중감이 깊어가다 보면 종종 바다에 대한 갈증은 그런 식으로 우리를 찾아오곤 했다. 그러면 우리는 밤새 몸을 뒤척이며 잠을 설쳤으며, 다음 날 아침 모든 것을 팽개치고 곧잘 차를 몰아 동해로 향하곤 했다. 그리고 그런 행로가 거듭되면서 우리는 6번 국도와 어느 정도 친숙하게 낯을 익혀놓고 있었다.
그러나 거듭된 행보가 익숙함을 낳으면서 우리는 그날 결국 따분함을 앓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도중에서 차의 방향을 무작정 다른 곳으로 돌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차는 이름도 기억못하는 어느 고개 속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고개의 중턱 쯤에 올랐을 때, 블루는 길의 한켠으로 조용히 차를 세웠다. 그리고 그녀는 창밖으로 시선을 둔 채 한동안 거둘 줄 모르고 있었다. 한참 뒤 블루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엽서 속으로 들어왔어.” 그녀의 말은 말 그대로였다. 그곳에선 우리의 시선에 잡히는 모든 풍경들이 마치 잘찍은 한장의 풍경 엽서처럼 안정된 구도 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곳에서 엽서 한장을 떠올리는 것은 거의 자동적인 반사 작용에 가까운 것이었으며, 그 순간 고개는 한장의 엽서로 축소되면서 우리를 그 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때문에 고개를 넘어가는 동안 내내, 우리에겐 엽서 속을 가고 있다는 황홀함과 함께 혹시 우리가 엽서 속에 갇힌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감이 가시질 않았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아름다운 풍경이 새겨진 엽서를 들여다볼 때의 느낌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그 차이의 한쪽 단면을 이해하려면 파도를 바라볼 때와 파도 속에 몸을 싣고 있을 때의 느낌을 염두에 두면 좋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설명 만으로는 그때의 느낌을 전하기에 부족함이 많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개 속에서 고개가 아니라 엽서 속의 느낌을 느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선 현실의 고개가 한장의 엽서로 전환이 되는 짧은 변이의 순간이 있었다. 그 순간부터 그 고개는 고개가 아니라 한장의 엽서였다. 그 변이의 순간이 어떻게 오는 것인지 나는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변이로 인하여 나는 풍경 속이 아닌, 바로 엽서 속을 들어갔을 때의 느낌이라는 아주 독특한 체험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서울로 돌아온 뒤로 그 때의 기억은 계속 나의 머리 속에 그 잔상을 남기고 있었다. 그 잔상을 들여다 볼 때마다 나는 우리의 일상이 한폭의 엽서로 돌변하면서 내가 엽서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는 순간이 혹 있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한 생각은 때로 나로 하여금 책방의 엽서 코너에서 이 그림 저 그림을 들춰보며, 우리의 일상적 풍경을 담고 있는 엽서들을 뒤적이게 만들곤 하였다. 그 엽서들 중에는 우리의 일상적 모습을 담은 것들도 있긴 했지만, 어느 것도 그 때의 고개가 한장의 엽서로 뒤바뀌듯 우리의 일상 또한 변이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실마리를 제공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엽서 속의 일상을 들여다 볼 때마다 번번히 내가 받았던 느낌은 우리의 일상이 우리마저 밀어내고 있다는 괴리감이었다. 마치 녹음된 목소리가 내 것이면서도 나의 것이 아닌 듯 생소했던 경험처럼 한장의 사진으로 찍혀 엽서 속에 붙박혀 있는 일상은 우리의 것이면서도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괴리감으로 인하여 나를 묻고 있는 일상이 한장의 엽서로 뒤바뀌는 변이의 순간은 그저 막연한 기대로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하루가 가고 있었다.

2. 시 속으로 들어가다

어제 술을 많이 마셨는가 보다. 머리가 아프고, 아직도 입안에서 역한 술냄새가 맴돌고 있는 듯하다. 출근 준비를 하고, 현관문을 나서려다가 무심히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은 손끝에서 무엇인가 만져진다. 꺼내보니 맥주 병뚜껑이다. 아니, 이게 왜 여기에 들어와 있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가

늦은 아침 호주머니에서 나온
병뚜껑 하나

구부린 엄지와 집게손가락 사이에서 반으로 접힌
알리바이를 갖고 있는
오비라거 병뚜껑 하나

어두운 호주머니 속에 갇혀 있다가
내 손가락에 잡혀 올라와선
죽은 조개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序詩」 전문

순간 나는 화들짝 놀라며 외친다. “아니, 내가 시 속에 들어와있어.” 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황홀했다.

3. 구속과 단절의 일상

윤병무의 시집 『5분의 추억』을 읽으며 나는, 어느 날 강원도의 한 고개 속에서 경험했던 변이의 순간을 또 다시 체험한다. 그 변이의 순간 나를 묻고 있던 일상의 한 순간은 곧 시였으며, 때문에 그 순간 나는 시 속에 서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한 가지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왜 그 순간 황홀했던 것일까? 일상 속에 서 있을 때 황홀함이라곤 전혀 없던 그 순간이 왜 시의 공간으로 뒤바뀌는 변이의 순간 뒤로는 내게 황홀함을 안겨주는 것일까? 그 황홀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윤병무에게서 그 답을 구해보기 위해 그가 말하는 현실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현실은 사실 황홀함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의 현실은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공간이면서도 그와 반대로 고착화되어 있고 굳어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고착화된 현실에 갇혀있다. 때문에 시인은 길을 걸으면서도 그러한 구속을 본다.

보도 블럭 그물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숱한 행인의 발걸음들
─「행인의 얼핏 비친 눈물」 부분

그렇게 현실 속에서 우리들은 “언 강물 위에 박힌 돌멩이들처럼/보도 블록 그물코에 매달”려 살아가는 구속의 존재들이다. 어찌보면 그 구속의 현실을 사는 우리들의 일상은 “지하철 환기구의 더운 바람이” “이리저리 몰아”대도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하는 “구겨진 비닐 스낵 봉지”(p.28)의 운명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구속의 현실 속에선 미래가 없다. “사직공원 담장 아래” 쪼그리고 앉아 구걸을 하는 “한 사내아이”에게서 우리는 그런 현실을 본다. 그 아이는 “단 한 번도, 미래의 자신에게 視線(시선)을 주지 않는”다. 아이에게 있어 일상은 ‘지루한’(p.90) 나날의 연속일 뿐이다.
그 막힌 공간을 부대끼며 살아가다 보면 사람들 사이의 친밀도가 높아질 것 같지만 오히려 현실은 그 반대이다. 막힌 공간에서 사람들의 사이는 오히려 단절된다. 우리는 “검은 유리창을 둘러놓아 거리를 지날 때마다/궁금했던 카페 안으로 들어”가 「낮술」을 한 잔 걸치고 있는 시인에게서 그런 단절을 여실하게 보게 된다. 그는 “아는 사람이 지나”가자 “그이를 보며 웃어 보”이지만 “그이는 웃지 않는다”(p.30). 그런 점에서 “어제의 낮 기온을 넘어”서며 “10년만에 기록”을 경신한 「섭씨 36.5도의 날」, “이제 바람과 사람”이 “주고받을 게 없”(p.48)어져 버린 것 또한 바람 한점 없는 무더운 날씨 때문이 아니라 말 그대로 단절된 현실이 우리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구속과 단절은 한편으로 탈출의 욕망을, 또 한편으로는 누군가를 만나보고픈 욕망을 낳는다. 그 일상적 공간 속의 사람들은 그래서 “끓는 주전자 뚜껑 밖으로 새어나온 물방울처럼/사라져버리고 싶”고 “푸른빛을 좇아가 살충용 전선에 타 죽은 모기들처럼/사라져버리고 싶”(p.16)다. 또 “계기판의 바늘이 부러”(p.18)질 정도로 어디론가 달려가고 싶다. 아울러 시인은 별똥별이 떨어질 때 누군가를 만나보고픈 절실한 염원을 본다. 때문에 시인의 눈에 별똥별은 지상의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일단 한번 내려가면,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p.12)는 길을 걸어 이 지상으로 내려온 하늘 나라 누군가의 전설이다. 그러나 아무도 현실을 탈출하지 못하며, 만남의 길 또한 번번히 어긋나고 만다. 우리는 어느새 그 일상에 적응하여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외우고 있는 전화번호부를 뒤적여보아도
모두 일로 만난 사람들의 것
어느새 나는 그렇게 살고 있다
─「잃어버린 명함」 부분

그러나 적응한 듯한 그 일상 속에서도 그는 “자꾸만 갈증”(p.89)을 앓는다.

4. 그의 무기, 가벼움

윤병무는 우리의 일상에서 구속과 단절을 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는 그의 시 곳곳에서 그런 빛깔로 채색되어 있는 우리의 일상을 만나게 되지만 시 속에선 그럴지 몰라도 실제의 현실로 눈을 돌려보면 대체로 일주일에 하루는 쉴 수 있고, 그 쉬는 날 일상을 탈출하여 하루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지 않은가. 또 단절을 말하고 있지만 사람들 만나는 일이야 성격에 따라 어울리기 나름이 아닐까. 그렇다면 혹 시인이 너무 예민한 것은 아닐까?
그 대답을 얻기 위해 시인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 바로 영화나 드라마를 시의 소재로 사용하는 방법에 한번 기대어보자. 현실 속에서 어떤 사람이 항상 한쪽 팔을 위로 치켜 들고 있었다고 해보자. 현실은 어떻게 반응할까? 대답은 그가 미친 놈이라거나 근육 경화증을 앓고 있다는 것 중의 하나이다. 영화 <패치 아담스>는 그 장면에서 그가 혹 질문이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묻는다. 아니면 그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예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천국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의 손끝이 대답한다. 새들은 어디로 날아다닐까? 대답을 구하려거든 그의 손끝을 보면 된다. 윤병무 시인이 일상의 구속과 단절을 얘기할 때, 그것은 우리들이 우리의 일상으로부터 한치도 벗어날 수 없다거나, 우리들이 철저하게 고립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시각이 그저 우리들의 일상이 요구하는 방향으로 굳어있다는 뜻이다.
이렇듯 우리들의 시각이 굳어지고, 그러면서 현실이 막히고 닫힌 공간이 되어버린 것은 살아가는 것의 힘겨움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만만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일주일에 하루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천만의 말씀이다. “겨울밤의 늦은 귀갓길에서/막차의 브레이크 등에 불이 꺼지는 것을 바라보며/달려가다가 보도 블록 위에 길게 넘어지는 것”이 우리의 ‘선택’(p.16)일 뿐인 일주일을 살다보면 그 끝에서 만나는 하루의 자유는 이미 숨을 멈춘 지 오래이다. 때문에 우리는 그 자유의 시간에도 일상적 시각을 버리지 못한다.
그렇게 막히고 단절된 공간 속에 놓여있을 때 우리의 일상은 무겁다. 그 하중감은 그대로 우리에게 전이된다. 그 순간 이제 우리가 무거워진다.

우리는 너무 무거워
─「질주」 부분

그 무거운 하중을 털어내기 위한 시인의 대처는 ‘변속’(p.18)을 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속도를 바꾼 시인은 ‘가벼움’(p.48)으로 현실에 맞선다.
그 가벼움에 몸을 실어보면 우리들은 길을 걸어갈 때 “리드하는 저녁 바람이 행인의/허리를 잡고 스텝을 밟”(p.32)고 있는 풍경을 보게 된다. 버스에 오를 때의 우리들은 “눈으로 앞사람의 뒤통수를 밀”(p.36)고 있다. ‘돌절구’속에서 기르던 ‘총각 은붕어’가 “물을 차고 밖으로 나”왔을 때 그 은붕어는 숨이 막혀 파닥거리는 것이 아니라 “땅바닥에서 맘보를”(p.44) 신나게 춘다. “혼자 보낸 휴일의 빈집을 청소”해 보시라. 그러면 “화장실의 파란 대야 안에서 세 차례나 하얀 똥을 눈 흐린 하늘색 걸레”가 “베란다 밖에서 어느 바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이상한 소리를 서너 번 내지르며 부르르 몸을” 터는 「風요일의 오후」(p.46)를 즐길 수 있다.
그 가벼움은 곧 즐거움이다. 때문에 하중감없이 그 뒤를 따라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즐거운 순간과 함께 하다 보면 우리들의 무거운 일상은 어느새 시의 공간으로 뒤바뀐다. 순간 우리는 일상 속에서 시의 공간으로 탈출한다. 때문에 그의 가벼움은 경박함이 아니라 우리들을 시의 공간으로 안내하는 신비로운 힘의 원천이다.
결국 대부분의 시간을 일상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 일상이 막히고 닫힌 공간이라고 할 때 그에 대응하는 가장 궁극적인 해답은 일상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윤병무는 그 방법의 하나를 일러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일상을 시로 뒤바꾸어놓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들은 그의 시를 통하여 일상 속에 서 있으면서 일상적 시각을 벗어나는 일상의 변이를 맛본다. 그 변이 앞에서 우리들이 갖게 되는 느낌이 바로 황홀함이다. 때문에 그 황홀함은 사실은 탈출의 느낌과 맥을 같이한다. 생각해보라. 막히고 닫힌 공간에서 탈출했을 때의 그 환희와 황홀함을.
내가 그의 시에서 맛본 황홀함은 바로 그러한 성격의 것이었다. 한장의 엽서 같았던 강원도의 그 고개에서 느꼈던 황홀함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는 그 고개에서 현실같지 않은, 그래서 현실을 완전히 벗어난 듯한 탈출의 환희를 느꼈을 것이며, 바로 그 느낌이 황홀함의 정체였을 것이다. 윤병무의 시에서 내가 느낀 황홀함 또한 그와 맥을 같이 한다. 그 고개에서와 마찬가지로 일상이 시로 전환되는 그 변이의 순간 나는 일상이 아니라 사실은 시의 나라로 몸을 옮겨놓고 있었다.
시인이 이렇듯 현실을 변주하여 시의 공간을 세우는 것은 “슬픔을 아는 사람의 슬픔은 그래도 견딜 만하다”(p.34)는 것이 그 이유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이유는 견디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죽어있는 일상에 숨을 불어넣어 일상의 삶을 일깨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돌은 돌이다. 그것은 죽어있는 돌이다. 하지만 그 돌이 살아있을 때 돌은 돌을 넘어 침묵의 다른 이름이 된다. 그때의 침묵은 죽어있는 자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은 모든 것을 고착화시켜 하나의 시각을 강요하지만 시인은 그것들이 살아있을 때 새롭고 경이적인 세상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일상의 공간이 시의 공간으로 뒤바뀌는 짧은 순간, 시인은 그 시의 공간에서 살아 움직이는 일상을 본다. 그에게선 그것을 옮겨놓은 것이 시이다.

5. 다시 시속으로 들어가다

잠시 쓰던 글을 멈추고 바깥을 내다본다. 창가에 어둠이 까맣게 밀려와 있다. 나는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피워문다.
아파트 9층의 베란다에서 멀리 고등학교 운동장이 내려다 보인다. 하늘엔 엷은 구름이 서려있고, 별 하나가 구름에 가려 보이다 말다를 반복하더니 결국은 사라지고 말았다. 피우던 담배불을 튕겨 떨어뜨리니 주홍색 불빛이 사그라들면서 아래로 떨어져 내려간다.

잠시, 텅 빈 고등학교 운동장을 내려다보는 사이
푸른 별 하나 아득한
어느 날의 귓속말 같은 엷은 구름에 가려져
그렁그렁하더니 사라졌다
9층 베란다 아래로, 손가락 끝에서 튕겨져나간 담뱃불

훔쳐보다 들켜버린 사춘기의 눈동자처럼
주홍빛 불빛 하나 밤바람을 타고
천천히 추락하면서 어둠에 갇힌다
재처럼, 생각이 마저 가벼이 떨어진다
─「5분의 추억」 전문

출근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또다시 화들짝 놀란다. “아니, 내가 또 시속에 들어와있어.”
(『현대시』, 2001년 3월호, 시집평)

**덧붙이는 말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며 아파트에 살지도 않는다. 또 출근도 하지 않는다. 글의 구성을 위한 설정임을 밝혀둔다.

*** 대상 시집
윤병무, 『5분의 추억』, 문학과지성사, 2000

12 thoughts on “일상을 끌고 시 속에 눕다 – 윤병무 시집 『5분의 추억』

  1. 엽서 속으로 들어 간 풍경에도 시간이 존재 하는지요
    문득 시 속에 들어 와 있는 나를 발견 한다는 일은 정말 가슴 뛰는 일일거에요
    마음을 모두어 이런 좋은 글을 읽는다는 기쁨은
    내가 살아 있다는 생생함으로 빛나지요
    혹 게으르고 싶을 때에 나를 채찍하는 장으로 동원님의 글을 읽으면 신선해지네요

    7월의 첫 날…
    아름다운 풍경이 우릴 손짓하고 있는데, 우리도 얼른 들어 가야 할 듯해요
    5분 동안에도 충만한 삶을 살고픈 욕심에요…^^*

    1. 의외로 시인들이 아주 평범한 일상적 풍경을 시의 세상으로 전환시켜 놓은 경우가 많은 거 같아요. 담배 한대 피우는 5분의 시간을 시로 엮어내 추억으로 만드는 재능은 정말 놀라워요. 언제 그런 시들을 모아 생활의 발견을 써야 하는데… 마음대로 안돼네요.
      소설가 구보씨도 나오고, 시인 구보씨도 나왔는데… 저는 평론가 구보씨의 하루를 써볼까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2. 나희덕 시인의 오분간도 생각 났어요…
      꽃그늘 아래서 버스를 기다리는 여인
      너무 멀리 나간 그의 썰물을 향해 떨어지는 꽃잎
      이 시가 참 멋있죠…!!!

      전 오분안에 스치는 사람의 인연도 생각이 드네요
      그냥 한 순간의 느낌으로 평생의 반려자도 되는걸요

  2. 시가 그려진 엽서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집니다.
    5분의 추억을 아직도 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다 일로 만났다고 핑계를 대며 삽니다.

    저는 7번 국도를 달려보고 싶어집니다.

    1. 오래 전에 7번 국도타고
      속초에서 부산까지 간다고 내려가다
      결국은 지쳐서 포항 조금 지난 다음에
      서울로 올라온 적이 있습니다.
      길은 지금 생각해도 참 아름다운 길입니다.

  3. 한계령을 넘어올 때 일부러 필례 약수 쪽으로 해서 돌아왔어요.
    그 끝트머리에 있는 부대가 남편 군생활한 곳이라서요.
    그때도 홍수로 온통 산사태가 났었어요.
    넘 졸려서, 전 다 못 읽었어요.
    순천만 글 읽고 나서, 겨울 순천만에 혼자 갔던 날 엮으려다 오블이 버걱거려서 실패했어요.

    1. 그 길은 언제 복구가 되려나 모르겠습니다.
      복구가 되어도 길옆의 숲이 다 망가져서 예전의 아름다움은 되찾기 어려울 듯 보였어요.
      자연 참 무섭더군요.

  4. 점점 모니터 속의 글 읽기가 편해지는 걸 보니, 인간은 역시 적응을 잘 하나봅니다.

    그리고 참 좋습니다.
    토플 때문에 모니터를 유심히 보는 버릇을 들이다가 이렇게 좋은 글을 만나니까요~
    전엔 막 멀미나고 그랬거든요. ^^;

    시적인 표현 하나하나를 가슴이 움켜쥡니다. ‘와, 이런 표현이 있었어…’
    참으로 감탄에 인색한 저는 시의 공간으로 가보는 경험을 못해본 것 같습니다.
    현실이라는 틀에서 변이를 한다는 부분에서는 흠짓흠짓,합니다.

    여태껏 긴 글을 프린트 해 놓지 않으면 집중해서 읽지못했던 일이 아쉽네요~
    조금씩 조금씩 뒤로 가면서 밀린 글들을 찾아봐야겠습니다.

    저로서는 김동원님의 글이 바로 일상에서의 탈출이자 신 세계로의 잠입입니다.

    1. 공부하는 사이에 잠깐씩 머리 식혀주는 정도가 되면 저로썬 큰 영광이지요.
      긴 글은 읽어주는 사람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예요.

  5. 시의 평을 읽어 내리다 보면 소설의 단편 같기도 하고, 언젠가 받은 엽서 한 장 같기도 하고, 시집 속의 한 페이지에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네요.
    매일 같은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저에게 ‘시’는 낯선 현실처럼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낯섬이 때로는 명량함과 활기를 주기도 하지요.
    오랜 꿈으로 남아 있는 ‘문학’이라는 낡은 기억 하나가 떠오르기도…

    1. 고개는 강원도 진부에 있는 운두령인데 처음 갔을 때만 그런 느낌을 받았고, 그 이후로는 받질 못했어요. 최근에는 길을 넓힌다고 파헤쳐 놓아서 오히려 실망만 했지요.
      이런 경험이 또 한번 있었는데 그건 한계령을 올라오다 필례 약수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였어요. 그 길도 홍수로 다 망가져서 두번째 갔을 때는 가슴만 아팠지요.
      시를 내 경험 속에서 계기를 잡아 이해하려고 하는 편이예요.
      오랜 꿈이 드디어 싹을 틔우며 고개를 내밀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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