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 소묘

Photo by Kim Dong Won
2006년 12월 17일 강원도 내촌에서

겨울
겨울에 그것은 온누리에 내리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보자기만큼 작았다. 뒤집어 쓰고 꽁꽁 오무려도 발끝이 삐죽이 나가고 등짝이 그대로 훤한 바깥이었다. 태양은 드러나는 맨살을 녹여주지 못했다. 바람 끝의 냉기 앞에서 태양의 따사함은 좁쌀만큼의 분량도 못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겨울에 발이 시렸고 손은 얼어 있었다. 등짝 또한 아무리 덮고 다녀도 그대로 바깥으로 열어놓고 다니는 느낌이었다. 어느 때보다 따사함이 그리웠지만 태양의 가슴은 여느 때나 다름없이 여전히 열려있는데도 항상 그 크기에 비해 왜소해 보였다.
아니 불러도 불러도 태양은 우리를 외면했다. 강도가 칼을 휘두르는 흉포한 폭력의 현장에서 제 한 목숨 아까운 우리들이 못본 척 가녀린 소녀를 내버려두고 지나치듯 태양도 결코 우리들의 추운 겨울을 돌아보지 않았다. 아까운 젊은 목숨들이 민주와 자유를 부르짖으며 독재와 맞서다가 최루탄에 머리가 깨지고 욕조에 생목숨 눌려 숨져갈 때 못본 척 외면했던 우리들의 가슴처럼 태양도 싸늘하기만 했다. 하루의 절반을 환희 밝혀주기에 결코 모자람이 없는 풍요로운 빛을 하루 종일 세상에 흩뿌리며 태양은 여전히 불덩어리로 끓고 있었지만 온기를 나누는 일엔 무척이나 인색했다.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걸음하며 겨우내내 움직이고 있었지만 우리는 태양의 걸음 속에서 삶의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
가끔 그 겨울엔 눈발이 날렸다. 자고 나면 밤새 세상을 덮친 눈발은 온통 주위를 백색의 설원으로 바꾸어놓곤 했다. 우리들은 모두 아이들처럼 좋아했다. 그 모습을 일러 사람들은 강아지처럼 좋아한다는 말로 비유를 삼아 빗대기도 했다. 저렇게 하얗게, 깨끗하게, 순수했으면… 모두 그렇게 마음 한구석에 손을 모아 빌며 눈덮인 백색의 왕국을 찬미했다. 그 하얀 백색의 제국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했다.
그러나 거짓된 약속이 세월이란 시간의 심판대 위에서 허위의 껍질을 벗듯 축복으로 온 그 단색의 독재는 시간이 조금 지나자 금새 허울을 벗었다. 우리들은 언덕길을 내려가다 엉덩방아를 찢어야 했으며, 폭설은 강원도에서 올라오는 열차길을 덮쳐 내일이면 서울의 큰댁으로 대처 구경을 간다고 한껏 부풀어 있던 복돌이의 꿈도 산산조각내었다. 자동차들이 엉금엉금 기다가 서로 이마를 찢기 일쑤였고, 꼬박 세 시간이 넘는 출근길에 시달리고서야 겨우 일터에 닿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눈(eye)에 보이는 눈(snow)의 느낌과 생활 속에서 직접 겪어야 하는 눈의 현장이 현저하게 다르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눈이 지닌 표정의 이중성! 앞으로 어루고 뒤로 뒤통수치는 세상사를 흔하게 겪으며 살아온 사람들의 눈에는 눈도 이중성을 가진 선물이었다. 알고보면 산다는 것이 그랬다. 살다보면 좋다가 발등찍히는 일은 너무도 흔했다. 눈이라고 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눈쌓인 마당을 내다보며 하염없는 감상에 젖어 있지 않았다. 두고두고 그것을 즐기리라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바삐바삐 그것을 치우고자 했다. 하얀 단색의 독재가 지배하는 세상은 아무래도 용납할 수 없었다. 내일, 모래, 글피까지 마냥 그것을 내버려둘 정도로 사람들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당의 눈을 쓸고 골목의 눈도 치웠다. 미끄러운 길에 모래를 뿌리고, 도로의 눈도 염화칼슘으로 녹여 없앴다.
그래도 저 멀리 산등성이, 그리고 골짜기에 몸을 숨긴 눈덩이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곳의 눈도 이중성을 가지긴 마찬가지이다. 멀리 알프스의 골짜기에서 길잃은 사람들을 싸늘한 체온으로 집어삼키고 온기를 모두 빼앗긴 그 육신을 한동안 찾을 수도 없게 겨울 속에 묻어두는 것이 바로 그 눈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 저 무심한 태양의 손이 그곳까지 미치리라는 것을. 멀고 그늘진 곳의 눈덩이들도 태양의 손끝에서 녹아 사라지리라는 것을. 조급하게 빗자루를 들고 쫓아나서지 못했지만 그러나 지금은 맥못추는 겨울의 태양에 분명한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래, 곧 저 냉소적인 태양의 가슴에 따뜻한 피가 흘러 온기가 돌고 우리의 손을 맞잡아 마디마디 맺혀있던 싸늘한 한의 옹이를 녹여주는 날이 오리라. 바로 그 날, 멀고 어두운 골짜기의 눈도 그 이중의 표정을 버리고 사라지게 되리라. 그것이 바로 계절의 겨울을 살아갈 때 눈내린 날 하늘을 올려보며 우리들이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인 귀엣말이었다.
겨울엔 또 바람도 많았다. 나무들은 그래서 시린 바람끝을 견디지 못해 언제나 신음에 가까운 소리로 고통스럽게 울었다. 어쩌면 햇볕이 따사함을 잃은 것도 칼바람에 쫓겨 도망다니기에 분분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앙상한 가지 사이로 하늘이 훤하고 내리는 빛은 언제나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항상 나뭇가지 사이가 비었다고 말했다. 채워져 있으면서도 비어있는, 그 허탈한 빛의 느낌은 결국 겨우내내 채워지지 못했다. 작은 바람에도 나무들의 온몸에선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나무들은 떨며 오그라들었고, 바람끝에 잘려 팔이 부러지기도 했다. 밤에 들으면 바람이 심하게 훑고가는 바깥은 온통 마지막 종언을 고하는 나무들의 비명으로 가득한 듯 했다. 영혼마저 뿌리채 잘려 깊고도 깊은 주검의 늪속으로 침몰하는 아득함만 같았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칼바람이 쓸고가는 암흑의 대지 그 한가운데서 공포에 질려 소리지르면서도 그래도 나무들은 겨울에 맞서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침에 일어나면 나무들은 기적처럼 쓰러지지 않고 모두들 제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가지를 모두어 기도하는 형상을 갖추고 하늘을 우러러 곧추 서 있었다. 그 아침에 우리들이 읽어내는 것은, 그리고 새삼 놀라게 되는 것은 나무들의 꼿꼿한 몸뚱이를 바쳐든 버팀목이 바로 하늘의 태양이란 사실이었다. 무심히 제 하늘만 지키며 지상으로 내려올 줄 모르는 태양이 바로 나무들의 버팀목이었다. 우리들은 그 버팀목을 종종 희망이라는 말로 부르곤 했다. 체념과 자학의 나약함으로 무릎꿇을 때 우리들의 의지를 일으켜 세우고, 그 겨울의 삭풍 앞에서 티끌만한 방패막으로 찬바람을 가려준 것은 바로 그 무심한 듯 하늘만 떠도는 태양이었다. 그렇지만 아침이 밝으면 그 태양이 뜨기에 우리는 밤을 견딜 수 있었다. 태양에게선 그래도 우리에게 희미하게 전해지는 봄의 메시지, 바로 희망이 있었다.
태양의 겨울은 힘없고 나약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희망의 실타래이기도 했다.


눈이 녹고 얼음이 풀린다. 대지가 꿈틀거린다. 딛는 발걸음에 그 생동감이 환상처럼 묻어난다. 빛이, 태양의 빛이 분명 따사하다. 옷을 벗어던져도 이미 속살로 스미는 햇살은 또 한 겹의 내의에 족하다. 고개를 돌려보면 어디에나 우리와 맞잡은 태양의 손길이다. 겨울엔 손닿을 수 없는 아득한 먼 곳에서 저 혼자 별처럼 반짝이고 있는 느낌이더니 이제는 가까이 내 곁에서 서로 포옹하고 체온을 부비면서 하나가 된 느낌이다. 달걀을 안은 어미닭의 품처럼 새순이 그 가슴 밑에서 연두빛 고개를 내밀려고 안간힘을 쓴다. 겨우내 누군가 고이 간직해 두었던 사랑의 마음이 진달래의 진홍빛 고운 색깔로 터질 때 그 사랑을 고이 받아드는 손길도 분명 봄의 태양이다. 잔디밭에 누우면 금새 스르르 눈이 감긴다. 누군가 곱게 누빈 포근한 이불 한 겹 살며시 덮어준다. 눈을 가늘게 열어 가만히 엿보면 빙긋이 웃고 있는 햇살의 미소가 바로 눈앞에 있다.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음을 높여 노래를 돋우고 새들도 장단을 맞춘다. 사람들의 얼굴에 즐거움이 완연하게 퍼지고 그 연한 미소는 연두로 치장한 나무들, 또 꽃과 어울려 봄을 말하는 또 하나의 색조가 된다.
봄의 태양은 해방을 알리는 서곡이다. 빛으로 쏟아지는 해방의 선율이다. 그 음악은 폭로의 열정으로 연주된다. 어둡던 시절 땅속 깊이 묻어두었던 진실이 어디 한두 가지랴. 귀 기울여 보라. 태양이 연주하는 해방 서곡의 전주는 숨죽이고 덮어두었던 모든 것들을 세상에 드러내 놓겠다는 폭로의 선언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일제의 간악한 폭정이 두려워 장롱깊이 넣어두었던 한글 말본을 꺼내고 가갸거겨 소리높여 읽어본다. 태극기도 문간에 내걸어 바람을 호흡하게 하고, 그 감격에 겨워 한동안 눈에서 눈물을 거두지 못한다. 농부는 곳간에서 잠자던 씨앗을 꺼내 논으로 밭으로 내간다. 그 알곡들은 결실의 가을을 꿈꾸며 대지에 뿌리내릴 터를 잡는다. 학자는 은폐되고 왜곡되었던 사상과 진리, 역사의 지면을 지우고 하얀 백지를 다시 마련한다. 그른 것은 그르고, 옳은 것은 옳다고 적기 위해 드디어 새로운 서장을 엮는 그의 손은 떨리고 가슴은 벅차다. 화가는 꽃과 산천만 채우던 화폭 위에 망치소리 높은 노동자를 옮기기 시작한다. 그들의 불끈대는 팔뚝을 옮겨 삶의 현장이 곧 아름다움이란 사실을 물감을 풀어 얘기한다. 순종의 미덕을 진실로 알았던 노동자들이 깨어나고 일어나 굴종의 노예 의식을 집어던지고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스스로 손잡고 뭉쳐 하나가 되고자 바쁘게 준비한다. 봄의 태양이 해방의 시대를 알렸을 때 자연은 자연대로, 인간은 인간대로 진실의 알곡을 뿌린다. 때로 죽고 말라 비틀어 사라지겠지만 그러나 봄에 뿌린 진실의 알곡이 없었다면 훗날 무엇하나 거둘 것이 있으랴.
그렇게 봄의 태양은 해방을 알리고 새벽을 전했다. 그것은 진실의 알곡들에게 환한 아침의 자리를 약속하는 환희의 서곡이었다.

여름
그리고 여름이 온다. 이제 하늘엔 태양이 범람한다. 태양이 쏟아내는 불볕의 범람이다. 그것은 탁한 황토색을 띄고 둑을 넘고 방파제를 건너 우리를 덮치는 열볕의 홍수 줄기이고 해일이다. 불볕의 더위는 거리를 쓸고 다니며 그 위용을 유감없이 과시한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드는 무력감으로 우리들은 더위 앞에서 맥을 잃고 무너져 내린다. 이제 검은 아스팔트 도로는 한갖되이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 아니다. 젊은 애들이 좋아하는 사람과 팔짱끼고 걸으며 얘기나눌 수 있는 한가한 길은 어디에도 없다. 길은 태양이 연주하는 폭염 광시곡의 반주를 맡아 끓는 열기를 더욱 격렬하게 토해낸다. 한걸음 떼어놓으면 등줄기에서 땀방울이 서너 걸음을 미끄러진다. 부채질 두 번이면 바람은 겨우 손바닥만큼 얼굴에 묻어나는데 태양이 쏟아붓는 불볕의 더위는 서너 동이로 쏟아진다. 열볕의 비수는 우리의 작은 몸뚱이에 빈틈없이 꽂히고도 남아 곳곳에 지천으로 널부러진다. 그 불볕 속에 하루를 쏘다니면 수없이 맞아서 생긴 피부의 피멍처럼 태양의 채찍이 휘감긴 곳에 검게 탄 색깔이 밴다. 우리의 육신을 탐하는 욕망의 손이 저 혼자 후끈 달아올라 등을 더듬고 옷섶을 파고든다. 끈적한 손끝에 화들짝 놀라 살펴보면 태양의 음흉한 미소가 무겁게 우리를 누르고 있으며, 그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쓸수록 우리의 몸에선 쉼없이 땀방울만 솟는다. 애욕에 넘친 태양의 혓바닥이 훑고 지나간 몸뚱이가 불쾌해 저녁이면 우리들은 몇번이고 몸을 씻어야 했으며 하루하루에 넌더리를 쳐야 했다.
사람들은 혹 갑자기 태양이 두서너 개 더 늘어난 것은 아닐까 덜컥 의심이 들어 하늘을 쳐다보기도 했지만 빛나는 것은 오직 하나의 태양 뿐이었다.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의 광염으로 끓어오르며 그 넓은 하늘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밤이 와도 식지 않는 불면의 더위를 뒤척일 땐 혹 밤에 오는 달님마저 태양의 불꽃에 물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물론 과학적 지식은 갖추고 있어 너나할 것 없이 고개를 저어 얼른 웃어넘길 정도는 되었지만 더위가 오죽했으면 이런 생각이 다 들까하는 마음이 내심 더 강했다.
여름날의 태양은 여전히 단 하나였지만, 그 하나의 힘이 그렇게도 막강했다. 아니,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듯 힘에 넘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만리장성을 쌓으며 수많은 목숨을 그곳에 매장시킨 진시황의 권력이 그와 같았으리라. 이집트의 왕들이 자신들을 태양신의 아들이라 칭한 것도 여름날의 태양이 보여주는 위용 때문에 그리한 것이리라. 곧잘 한 나라의 독재자가 태양으로 떠받들어지는 것도 이와 괘를 같이할 것이다. 그렇게 하나이기 때문에 여름의 태양은 더욱 더 기승을 부리고, 그 밑을 살아갈 때 우리들의 삶은 그야말로 수난의 연속이었다.
여름은 그렇게 수난의 계절이다. 그 계절의 왕국에선 태양이 제왕으로 군림한다. 오직 한 사람이 황제처럼 나라 전체를 독식한다. 바로 그래서 수난의 계절이다. 가수 김민기가 그렇게 노래하지 않았던가.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의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니”라고. 여름의 태양은 다른 이들을 죽이고 멸하고, 다른 이들의 죽은 듯 엎드린 삶 위에 군림한다. 그래서 이마를 흐르는 땀방울이 적어도 여름날만큼은 고귀한 노동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이 땅의 척박한 토양에서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어깨에 덧씌워진 굴레이고 힘겨움이다. 다섯 걸음을 옮기고도 다리가 떨리는 것은 육신의 허약함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이 함께 열 걸음을 가면 태양의 허위가 발각되기 때문에 진실을 목도할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 미리 뜨겁게 달군 대지로 그 걸음을 막아놓고 있기 때문이다. 한 컵의 물로 방금 축인 목의 갈증을 십 분 이상 버티기 힘든 것은 의지의 나약함 때문이 아니다. 오직 물과 바람, 그늘만으로 사람들의 머리를, 욕망을 그득 채워서 쉽게쉽게 통제하려는 태양의 고약한 계략 때문이다.
우리들이 가는 길을 막아서는 수난의 가시밭, 전제 왕국의 폭군, 여름날의 태양은 바로 그것이다. 겨울을 견뎌갈 때 우리들은 숨죽이고 엎드려 떨고 있었지만, 그러나 여름이 왔을 때 비록 무릎이 꺾이고 피흘릴지라도 태양 앞에 당당히 맞서 싸운다. 87년 유월, 이 땅의 민중들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88년의 여름, 그 싸움은 버마에서 독재 정권에 대한 항쟁으로 또다시 터졌다. 다시 손을 꼽으면 유럽의 동구권이 그 연장선상에서 이어지고 중국의 천안문 시위가 맞물린다. 최루탄의 메케함 속에서 눈이 따갑고 숨쉬기도 힘겨웠으나 여름날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주먹을 쥐고 구호를 무기삼아 태양에 맞서 싸운다.

가을
가을이 오면 우선 상큼한 사과의 속살부터 한입 깨물 일이다. 입안 가득 그 향이 퍼질 때 흔들의자에 몸을 묻고 앉아 두 눈을 지긋이 감고 시간을 보내도 좋다. 어디 도시를 떠나 절이라도 있음직한 산으로 나서는 것도 좋으리라. 산사의 마루턱에 앉아 고개를 들면 새파랗게 익은 하늘이 시리게 눈에 차리라. 하늘을 들판삼아 제맘껏 뛰놀며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는 구름의 천진난만한 요술 놀이를 지켜보는 것도 지겹지 않으리라. 나무들은 진초록의 무성함을 거두어 들이고 노랗게 혹은 붉게 물든 낙엽들을 대지로 날려보낸다. 그때면 운치있게 부서지는 낙엽 소리를 즐기며 한적하게 길을 걸어도 좋으리라. 길을 걷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를 들은 양 뒤를 돌아보고 거기 노란 휘장을 치고 까만 웃음을 가득 베어문 해바라기가 있거든 그냥 나를 짝사랑하다 죽은 누군가의 전설쯤으로 여기고 잠시 달콤한 환상에 취해도 욕하는 자 하나 없으리라.
가을은 여유롭고 하늘의 태양도 한가롭다. 수고를 말하며 어깨를 도닥이는 정겨움이 가을을 지키는 태양의 표정이다. 가늘고 맑게 흐르며 우리들의 머리를 씻어주고 난마와도 같이 뒤엉킨 과거를 잠시 가라앉혀 주는 조용한 선율의 음악이다. 바람이 한 줄금 여리게 지나간다면 가을의 태양은 조화가 극에 달한 실내악이 되리라. 또 가을은 막아놓았는데도 우유빛으로 새어드는 창호지문의 달밤이다. 허리가 유연한 갈대의 여유로운 흔들거림이다. 탈색된 잔디의 엷은 황토색 미소이다.
가을이 왔을 때 그리하여 우리들은 회상에 잠긴다. 뒤를 돌아보는 것이다. 태양의 뒤를 돌아보면 거기에도 회상의 자취가 있다. 즐겁고 기뻤던 순간의 기억이 태양의 자리에 있으며, 힘겹고 슬펐던 지난 한 때도 태양의 기억 속에 함께 담겨있다. 때로 태양이 남긴 기억들은 웃음으로 쏟아지기도 하고, 맞서 싸워야 했던 폭군의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암울했던 시절, 빛으로 우리들을 이끌어주었던 잔상도 있고, 그 시절의 태양은 참으로 나약했고 작아 보였었다. 태양의 회상과 더불어 우리들은 이 땅의 삶도 생각해보게 된다. 이 땅의 삶은 태양이 걸어온 길과 중첩되며 같은 얘기로 엮여지곤 한다. 자연의 계절처럼 그렇게 꼬박꼬박 달을 맞추진 않았으나 우리의 삶 속에서 이 땅은 태양처럼 모습을 바꾸어왔다. 우리들의 터전은 때로 희망의 다른 이름이었고, 때로는 포악한 독재 정권의 땅이었으며, 또 해방의 공간이었다. 그렇게 이 땅은 얼굴을 바꾸며 변화를 거듭해왔다. 때로 이 땅은 어머니의 젓가슴처럼 포근했지만 또 고난의 굴레를 뒤집어 쓴 가시밭이기도 했다.
언제고 또 어둠은 오리라. 아니, 지금이 바로 그 어둠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겨울도 다시 닥칠 것이며, 여름의 폭염도 어느 한해로 끝나는 것이 아니리라. 언제 어느 시대를 살아가거나 밝음을 노리는 어둠의 무리들이 있고, 따뜻함을 노리는 냉혈의 가슴들이 있는 것이니까. 그저 제 한 몸, 한 줌의 제 집안, 제 살붙이들 생각에만 여념이 없어 광활한 이 나라 땅덩이 이곳저곳에 저네들의 성지만 지으려는 무리들이 있는 법이니까. 춥고 어두운 음지에서 사는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그 성지의 불과 성찬을 마련하려는 자들이 있는 법이니까.
회상의 시간 속에 서서 가을의 태양이 수놓는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서 우리들은 잠시잠시 눈멀어 우리들이 생의 전부라고 쫓아갔던 것들이 얼마나 부끄럽고 죄스러운 일이었던가를 깨닫곤 한다. 지난 봄 태양이 해방의 서곡을 울렸을 때 몸사리고 게으름 피웠던 순간이 많을수록 후회도 커진다. 그러나 그 회상의 부끄러움 속에서 바로 인간이 성숙해 가는 것이리라. 그 부끄러움은 어둠과 차가움을 경계하는 작은 야광탄일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언제나 가을의 태양 밑에서 부끄러운 후회의 시간을 보내지만 그때마다 왠지 좀더 자라고 성숙해진 듯한 뿌듯함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리라.

그대
사랑할 때 그대는 나의 태양이다. 그대는 빛살로 나와 함께 한다. 겨울 공화국을 살아갈 때 나는 그대의 품에서 희망을 꿈꾸고 안식을 구한다. 봄이 왔을 때 내가 뿌리는 해방의 알곡들을 위하여 그대는 따뜻한 햇살로 내 곁에 함께 해 주었다. 그러나 그대는 또한 내가 맞서 싸워야할 굴레이기도 하다. 때로 나는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여름처럼 그대의 곁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간다. 그대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리하여 우리는 함께 살면서 서로를 겪어가는 한편으로 서로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운다. 그러다 가을이 온다. 가을이 오면 우리들의 사랑은 회상의 시간 속에서 부끄러운 기억들로 여기저기 후회스런 자취들을 남긴다. 씨앗을 뿌릴 때 꿈꾸었던 풍성한 사랑의 가을은 아득한 기억 속에 남아있을 뿐 손에는 볼품없이 작고 찌그러진 열매 하나가 쥐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태양과 함께 커오고 자라면서 가을마다 맞는 회상의 시간 속에서 태양의 지나간 날들을 돌아본 이들은 알고 있으리라. 바로 그 부끄러움 속에서 우리들의 사랑이 한층 더 깊이 성숙해져 간다는 것을.
그대를 사랑한다, 여전히.

8 thoughts on “태양 소묘

  1. 연애편지의 매력은 단어 하나를 놓고도 무슨 뜻으로 썼을까 하며 온갖 상상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하긴 편지를 보낸 사람도 밤새워 고민하며 썼으니 그럴만 합니다.

    그런데 연예편지는 연예할 때만 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연예하는 기분으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그건 일종의 립서비스이고요. 그러고 보니 요즘은 카드에 달랑 이름 석 자 쓰는 것 빼고는 자필로 편지라는 걸 써 본 기억이 없습니다. 봉함엽서 몇 장 사러 우체국에 들러야겠습니다.

  2. 태양의 사계를 따라 가 보았답니다.
    글이 유려 하면서도 기하학적으로 펼쳐지는 느낌이에요
    여전히 사랑하는 그대가 있음에 축복 받으신 거지요~^*^;;
    언제나 들어 와서 멋진 글을 읽을 수 있고,
    교감함에 감사 드립니다~!

  3. 태양과 함께 사계절을 두루두루 표현한 글, 잘 읽었습니다. 긴 글을 쓰기가 쉽지 않은데 글이 물처럼 유려하게 흘러가네요… ‘겨울공화국’ 그 언저리에서 손을 녹이며 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 쓴 제가 읽어봐도 참 길게도 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읽어주신거 고마워요. 봄을 부르는 긴 주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4. 매일 매일 글의 소재도 풍부하시고,
    표현도 다양하시고, 참 대단하시단 생각이 드네요.
    전 요즘 그냥 하루하루에 만족하느라
    아무 생각없이 사고 지내다보니,
    블로그도 잘 안하게 되네요.
    그냥 집사람이랑 같이 있으니까 좋네요.
    제가 너무 앵긴다고 집사람이 좀 안반겨주긴하지만..

    따님은 이제 일본으로 가셨나요?

    환율이 계속 올라서 걱정이네요. 그래도 마음 편한 주말 보내시길요.

    1. 이게 별로 안좋은 건데…
      돈벌이가 잘 안되다 보니
      자꾸만 글쓰는 시간만 늘어나고 있어요.
      일단은 먹고 살아야 하는데 말예요.
      어쨌거나 일은 며칠 안하고
      마치 글이 숙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쓰게 된다는…

      사랑할 때가 가장 행복할 때죠.
      그때 마음껏 사랑해야 하는 것 같아요.

      일본은 4월에 학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아직 저희 곁에서 놀고 있어요. 오늘은 영어는 해두어야 할 거라고 얘기는 했어요. 지금까지 스스로 알아서 했으니 앞으로 스스로 알아서 할거라고 믿고 있어요.

      오늘 오후 시간은 딸라미와 코엑스가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시간보냈는데 좋더군요. 새삼 딸라미 존재가 신비로운 하루였어요.

      좋은 소식 있기를 빕니다.
      음, 아니, 더 강력하게 말해야지.
      좋은 소식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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