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팔랑개비의 나라 – 대관령 삼양목장에서

사실 강원도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어릴 때는 거의 고향인 영월을 벗어나질 못했다.
진부나 횡계, 평창은 지명은 항상 익숙한 곳이었지만
친숙하게 낯을 익힌 것은 사진찍으러 다니면서부터 였다.
영월은 고향이라 내려가면 변한 오늘의 모습에서 옛모습을 겹쳐볼 수 있지만
근래에 얼굴을 익힌 곳들은 옛날을 겹쳐보진 못한다.
고향은 오늘 앞에서 어제를 겹쳐볼 수 있는 곳이고,
그게 고향의 남다른 면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진부나 횡계, 평창은 내게는 오늘만 있는 곳이지만
그래도 대관령엔 옛기억이 있다.
차를 산 뒤 그녀와 함께 처음으로 넘어간 동해로 가는 강원도 고개가
바로 대관령이었다.
아직 영동고속도로가 대관령을 구불구불 넘어가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대관령을 넘어갔다 와선
차의 뒷유리에 붙였던 ‘초보운전’의 딱지를 떼어버렸다.
손꼽아 보니 그녀와 함께 대관령에 내려 간 것이 네다섯 번은 되는 것 같다.
대관령에 가면 항상 선자령으로 올랐는데
이번에는 처음으로 대관령의 삼양목장을 구경했다.
양떼보러 갔다가 거대한 팔랑개비만 구경했다.
3월 14일 토요일 오후였다.

Photo by Kim Dong Won

선자령은 대관령에서 걸어서 오르는데
삼양목장은 횡계에서 들어와 산꼭대기 끝까지 차를 몰고 올라간다.
거의 비포장 도로의 연속이다.
입장료는 성인의 경우 7천원.
서울에서 횡계까지 가는 고속도로 통행료와 비슷하다.
그래도 차를 몰고 끝까지 갔더니 이런 눈풍경을 만났다.
평온해 보이지만 사실은 엄청난 바람이 불고 있다.
어떻게 좀 앞으로 가서 찍고 싶었지만 도저히 전진을 할 수가 없었다.
바람은 저 혼자 뒤로 가질 않고
나도 함께 가자고 자꾸만 내 옷소매를 잡아 당기고
내 온몸을 뒤로 밀었다.

Photo by Kim Dong Won

풍력 발전기.
내 눈엔 거대한 팔랑개비.
그러나 팔랑개비처럼 눈돌아갈 정도로 빨리 돌아가진 않는다.
왜 팔랑개비만큼 빨리 돌지를 못하는 거지.
그럼 너무 위험한가.
이거 돌아가는 거 내려다보고 있으면 하늘도 눈돌아가겠다.

Photo by Kim Dong Won

삼양목장 산꼭대기,
그러니까 전망대에서 바라본 강릉쪽 풍경.
동해바다가 눈앞이지만
구불구불 고갯길을 넘어가야 바다에 이를 수 있다.
대관령에는 옛길이 많다.
걸어서 넘던 옛길이 있고,
예전 영동고속도로의 옛길이 있고,
또 그 전의 도로로 쓰였던 옛길도 있다.
옛길은 모두 구불거리는 산길이지만
이제 동해로 가는 길은 터널로 쑥쑥 빠져나가는 곧은 길이 되었다.
산위에서 보니 산의 허리를 따라 휘어지고 있는 옛길 하나가 보인다.

Photo by Kim Dong Won

선자령 쪽으로 오를 때는 풍력 발전기가
그렇게 많다는 생각은 못했는데
삼양목장 쪽으로 왔더니 상당히 많다.
마치 춤추는 것 같기도 하다.
풍력 발전기는 이렇게 말하겠지.
바람부는 날엔 압구정동에 가지말고,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춤을 추어야 한다고.

Photo by Kim Dong Won

크기로 따지면 서울의 남산 타워가 훨씬 크겠지만
가까이 같을 때의 위압감으로 따지면 풍력 발전기의 느낌이 훨씬 강하다.
아마도 날개가 빙빙 돌아가며 소리를 내기 때문인 듯하다.
멀리서 볼 때는 팔랑개비인데
가까이 가면 공포스럽기까지한 거인이 된다.
안개낀 날 곁을 지나면
아무 것도 보이질 않는데 날개 돌아가는 소리만 난다.
그 때는 더 무섭다.
물론 그게 또 재미이긴 하지만.
날개에 붙은 얼음 조각이 떨어지면 사람이 다칠 수 있다고
가까이 가지 말라고 되어 있다.

Photo by Kim Dong Won

푸른 바다 못지 않게 순백의 눈밭도 유혹이 심하다.
눈밭에선 그냥 그곳에 한번 누워보고 싶어진다.
그 흰 눈밭의 아래쪽이 목초지라는 것이 믿기지 않기도 하다.
푸른 목초지가 펼쳐지는 여름 풍경도 볼만할 것 같다.

Photo by Kim Dong Won

멀리 선자령이 마주보인다.
선자령 꼭대기에는 그곳이 선자령임을 말해주는
커다란 표지석이 하나 서 있는데
산 위에 볼록 솟아있는 표지석으로 미루어 선자령이 분명하다.
항상 저곳에서 이곳을 바라보곤 했었는데
오늘은 이곳에서 저곳을 바라본다.
선자령 꼭대기에서도 강릉이 내려다 보인다.
사실 난 걸어서 오르는 선자령 길을 더 좋아한다.
선자령의 등산로는 산의 능선 너머로 있다.
산을 오를 때는 그 길에서 이 곳이 잘 보이질 않는다.

Photo by Kim Dong Won

이야아, 거인을 향하여 돌진하는 거야.
하지만 무엇인가가 거인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
바로 바람이다.
부드러울 때는 여인의 얼굴을 했다가
거칠 때는 남자의 완력으로 다가서는 바람.
그 바람에 막혀 거인의 앞까지 가지는 못했다.

Photo by Kim Dong Won

바람도 발자국이 있다.
눈위엔 그 자국이 남는다.
바람은 발을 질질 끌면서 간다.
어지럽기 이를데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결이 고운 발자국이다.

Photo by Kim Dong Won

다시 또 선자령 쪽 풍경.
선자령에선 거의 정상에 다 가서야
풍력 발전기를 코앞에서 만난다.

Photo by Kim Dong Won

목초지라서 봄이나 여름에는 들어가면 안된다고 한다.
그러나 겨울에 눈이 왔을 때는 온통 눈밭이라 아무 곳으로나 갈 수 있다.
언젠가 눈이 갓 내렸을 때는 발이 푹푹 빠졌는데
눈이 내리고 얼어붙어 발이 빠지지는 않았다.

Photo by Kim Dong Won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해진 곳.
드라마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동해로 가다가 이곳에 들르지만
사실 선자령이라면 몰라도
동해로 가는 길에 여기에 들를 일은 거의 없을 듯 싶다.
그림 좋은 곳을 찾아내다 보니 드라마는 종종 현실과 어긋나곤 한다.
동해로 가려면 횡계에서 대관령으로 가서
옛길을 따라 강릉으로 넘어가야지
거의 10km에 달하는 이곳으로 뭐하러 들어왔다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뒤로 재고 따지면 드라마는 곧바로 비현실적이 되어 버린다.
그렇지만 드라마 덕분에 사람들은 이곳에서
낭만적인 한 순간의 주인공이 된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비현실적인 드라마의 한 순간을
그들의 추억 속에 사랑의 순간으로 담아가며 현실로 만든다.
사람들에겐 드라마의 비현실을 현실로 바꾸는 힘이 있다.
드라마의 덕목이라면 바로 그런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드라마의 비현실을
자신들 속에서 하나의 현실로 소화하는 사람들이 더 대단해 보인다.
드라마 없이도 그런 추억을 직접 그려낼 수 있다면 더 좋긴 하겠지만.

10 thoughts on “거대한 팔랑개비의 나라 – 대관령 삼양목장에서

  1. 며칠전에 동원님 블로그에 접속이 안되었었는데..
    서버가 꺼져있었는지..

    그나저나, 대관령에도 저런 풍력발전기가 있군요.
    크기가 어마어마하지 않나요? 영국에 있는건
    매우 큰 것 같단데. 대관령은 한 20년전에 가보고 안가봤는데,
    눈쌓인 모습이 운치있네요.

    따님은 잘 적응중인가요?
    전 제 집사람 적응하는 거 도와주는데, 꼭 제 딸 같네요. =)

    1. 웹호스팅 서버라 제가 운영하는게 아닌데…
      제가 운영하는 건 그동안 맥으로 하다가
      이제 우분투로 새로 구축하고 있어요.
      딸이 맥북 장만하면서 그동안 쓰던 컴퓨터를 제게 넘겼거든요.
      며칠 동안 이런저런 리눅스로 깔면서 실험하다가
      결국 우분투로 낙찰을 봤어요.
      우분투가 상당히 괜찮네요.

      풍력발전기 크기 어마어마하지요.
      옆에 가면 공포스러워요.

      딸은 월요일날 출국이예요.
      일본은 학기가 우리보다 한달 늦게 시작하더라구요.
      비행기표를 편도로 끝는 것을 보니 정말 가긴 가는가봐요.
      기분이 묘합니다.
      한동안 마음이 많이 허할 듯.

      집사람을 딸처럼 돌봐주면 아무 갈등이 없을 듯 싶어요.
      딸하고 아내는 대하는데 좀 차별이 있거든요.

    2. 저는 96년에 형, 누나, 저랑 셋이 같이 유학을 갔는데,
      엄마가 저희를 기숙사에 이틀에 한 명씩
      들여보냈죠. 그리고 혼자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셨고. 처음으로 엄마가 셋을 동시에 밖에 내놔서
      많이 울시던 모습이 생각나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많은 날들을 우시면서 보내셨을듯
      하네요. 제가 제일 어려서 걱정을 제일 많이했는데,
      그래도 제가 제일 적응을 잘했네요. 어려서였는지 모르지만.
      빨리 성공해서 효도해야하는데..

      따님 보내시고 나시면 걱정도 많이 느시고,
      외롭겠지만, 많이 성장해서 돌아올거에요.

    3. 고마워요.
      체구가 작아서 들고가는 짐이나 제대로 갖고 갈까 그것도 걱정이예요. 아이 엄마가 따라가고 싶어하는데 아이는 유학가는게 자기 혼자가 아니라고 말을 하더군요. 학교 기숙사를 배정받지 못했는데 한참 동안 인터넷 뒤져서 싼데를 찾아내더군요. 이 무슨 고생인가 싶기도 하고… 그래도 고생한만큼 좋은 경험이 될테지하는 기대도 들고 그래요.
      96년이면 해외 생활한지가 10년도 넘었네요. 저는 해외라곤 한번도 못나가 봤어요. 한번 미국으로 갈 기회가 있었는데 촉박하게 나가야 하는데 여권을 마련해 놓지 않아 못갔었던 적이 있었죠. 지난 해인가는 중국에 가서 사진을 찍어와 달라는 부탁이 들어왔다가 불발이 되고 말았구요. 이래저래 해외랑은 인연이 없는지 한번도 못나가 봤어요.
      항상 달콤한 신혼되시길 빌께요.

  2. 27살 시절 삼양목장에서 한달간 목초를 트럭에 실었던 일을 했습니다,
    여름이었고 8월달 방학을 하고 잠깐 아르바이트로 일을 했기에 강원도에서 대학을
    다니거나 전국을 떠돌며 막노동을 하고 다닌분들과 일을 했습니다.

    대관령의 날씨는 왜그렇게 변덕스러웠는지,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몇번이고 비가 오다가 멈추다 늘 반복하면서 비에 젖은 목초더미는 어찌나 무거워지는지 어지간한 힘으로는 무거운 목초더미를 차에 실기가 쉽지않았던 기억으로 남습니다.

    여름철 복날 하루 쉬었으면 하는 바램은 삼양축산의 바쁜일정에 그만 쉬지도 않고 그렇다고 특식이 마련되지도 않아 그만 노동자들을 폭발하게 만들어 흥분한 노동자들이 일을 멈추고 모두 그만두겠다며 모두 일손을 놓았죠,

    삼양축산 관계자들은 다시는 대학생아르바이트는 쓰지않겟다고 했고,
    그 이야기가 그렇게 듣기싫어 결국 내가 너서서 협상을 끌어내어 다시 일을 하고 불합리한 조건들을 걔선해주어 일을 마칠 수 있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한 여름에도 방에 불을 지피지않으면 추워서 잠을 잘 수 없었기에 불을 지핀 방에서 하루 왼종일 힘든 노동에 지친 노동자의 노곤함을 쉬게 했죠,

    그러나 나와는 달리 노동으로 몸이 단련된 노동자들은 고된일과를 끝내고 대관령 횡계까지 한 밤중에 걸어서 약 5-6Km의 밤길을 오가며 술을 먹고 돌아왔습니다.

    댓글이 너무 길어졌네요,
    내 추억속에 삼양축산은 너무나 깊게 자리하기에 이렇게 글을 남겼습니다.
    이제 꽃피고 새도 울고 있으니,

    이곳 전남 장흥까지 번개모임으로 초청하고자 하니 동원님도 꼭 참석하시어 표준랜즈가 장착된 카메라에 멋진 풍경과 사람들 담아 가세요,
    감사합니다.

    1.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삼양목장의 느낌이 남다르실 거 같습니다.
      지금은 거의 모두 기계로 처리를 해서
      사람의 힘을 빌리는 일은 거의 없는 듯 했습니다.
      거의 모든 곳에 찻길이 나 있더라구요.
      시간이 되면 내려가겠습니다.
      그냥 어디나 카메라를 대면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그 옆의 보성하고 완도는 가본 적이 있는데 장흥은 한번도 못가봤습니다.
      장흥에 가면 마량이란 곳에 까막섬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곳에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3. 은백색의 설경이 멋지고 낭만적이군요.
    바람의 존재를 실감나게 느낄수있는
    풍력기와 눈자욱이 더욱 현실감이 있군요.

  4. 바람이 걸어 간 눈길에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아, 바람의 흔적이 저런 것이구나…
    바람만이 알고 있는 세상의 비밀이 숨어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멀리 보이는 선자령의 아득함이 마음으로 들어 옵니다.

    1. 생각해보니 바람이 달려간 눈길이예요.
      아마도 이젠 선자령에 오르면
      이번에 갔던 곳을 여기저기 짚어보지 않을까 싶어요.
      멀어서 그렇지 대관령은 가면 참 좋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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