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여행 4 –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여행 셋째날의 아침이 밝았다.
한라산의 후유증으로 다들 아구구, 아구구를 연발하며 몸을 일으켜야 했다.
걸음을 크게 뗄 수가 없었고,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은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어제는 아침을 직접 해먹었는데
오늘은 리조트내 부페에서 네 명은 공짜로, 두 명은 사먹기로 했다.
하루에 두 장씩 공짜로 식사권이 나오고 있었다.
9월 6일의 오전 일정인 김영갑 갤러리로 가는 길이 시작되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9월 6일
제주 한화 리조트에서

나는 어제보다 30분 정도 늦게,
6시 30분쯤 일어나 바깥으로 나간 뒤,
주변의 산책로를 어슬렁거리며 사진을 찍었다.
3일내내 날이 좋다.
산이 제 모습을 연못 속에 비추며 아침 단장이었고,
햇님도 제 모습을 연못 속에 비추어보며 단장을 하고 있었다.
산은 진한 초록 단장이었고, 햇님은 하얀 분단장이었다.
햇님의 분단장은 눈이 부셨다.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9월 6일
제주 한화 리조트에서

1시간 정도 사진을 찍다가
산책나온 편태범, 신선애 부부를 만났다.
오호, 그래도 걸어다닐 수 있는 것을 보니 싱싱하신 걸.
나중에 서울 돌아와서 알았는데
한라산 후유증은 그 다음 날이 아니라
그 다음다음 날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9월 6일
제주에서

아침 먹은 뒤 짐을 꾸려 김영갑 갤러리로 향했다.
하지만 제주에서 곧장 길을 갈 수 있는 경우는 없다.
그림같은 목장이 나타나서 곧바로 차를 세웠다.
원래 기대는 멋진 말들을 기대한 것이었는데 멀리 소들이 보였다.
그것도 가까이 가니 소잔등만 보였다.
그렇지만 풍경은 그림이다.
그런 측면에서 제주에서 자연은 곧바로 그림 감상이 된다.
우리는 너른 화폭에 담긴 좋은 그림을 잠깐 감상했다.
그림 감상 뒤에는 소란이 있었다.
너무 일찍 차를 세운 통에 앞자리를 꿰찬 영옥씨가
이렇게 짧은 경우는 가위바위보가 없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편태범씨도 거들었다.
택시도 기본 요금이란 것이 있는데
우리도 기본 거리란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난 이게 택시면 기본 요금이 있는데
택시가 아니어서 기본 요금이 없다고 우기면서 가위바위보를 해야 한다고 했다.
앞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이 다수라
결국은 동조자들을 규합하여 다시 가위바위보에 나설 수 있었다.
웃기는 건, 결국 영옥씨가 이겨서 그대로 앞자리를 꿰찬 것.
다들 배꼽잡고 웃었다.
역시 무리한 욕심은 하늘이 막는 구나.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9월 6일
제주에서

소 목장에 이어 이번에는 말 목장에서 멈추었다.
말들이 멀리 있다가 우리를 보자 슬슬 다가왔다.
이거 당근이라도 사가지고 왔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이미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어서 그냥 잘생겼다느니 하면서 말로만 떼웠다.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9월 6일
제주에서

잠시 말들의 사랑도 구경하고,
우리도 그 사랑의 분위기에 물들었다.
어머, 쟤네들 봐.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가 봐.
동물들은 대놓고 사랑한다.
우리는 사랑할 때 동물이 되는 것도 마다않는다.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9월 6일
제주에서

이 말목장이 아무래도 옛날에는
물오름 승마장이었던 듯 싶다.
푸른 페인트로 덮여 희미해지긴 했지만 글자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사용하지 않고 있는 듯 보이는 건물에선
덩굴 식물이 창으로 기어올라가 안을 살피고 있었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9월 6일
제주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서

그렇게 계속 풍경을 곁눈질해가며
우리는 김영갑 갤러리에 도착했다.
주차장 옆 전봇대 아래서 기념사진 한 장 찍었다.
사진을 찍으면 우리 세대는 모두 표정이 굳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우리 세대의 아이콘으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모두 차렷 자세로 뻣뻣모드가 되어 사진을 찍었다.
자세가 굳는다면 차라리 더 굳혀서 찍으라.
그게 의외로 재미나다.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9월 6일
제주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서

들어가는 정문에서 다시 또 기념 사진 한장 남겼다.
이번 모드는 이곳이 예전에 학교였다는 것을 이유로
한 명은 벌서고 다른 사람은 모른 척하기 모드로 정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9월 6일
제주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서

갤러리의 앞 마당,
예전의 운동장 자리에는 돌을 쌓아놓았고,
그 돌 위를 잎 몇 개가 빨간 식물이 뒤덮고 있다.
이름을 물어보았더니 마삭줄이라고 했다.
빨간 것은 단풍이 들었기 때문이란다.
열매는 콩처럼 생겼다.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9월 6일
제주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서

가슴을 다 드러내놓고
햇볕을 등에진 한 여인이 내게 말한다.
김영갑의 제주 사진을 보면 생각이 많아 질거야, 나처럼.
그녀의 말대로 김영갑의 제주 사진은
그냥 아름다운 제주 풍경이 아니라 생각이 깊어지는 사진이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9월 6일
제주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서

원래는 이곳이 초등학교였다고 한다.
폐교가 갤러리로 탈바꿈한 것이다.
나는 일단 이 학교에 들어오면
세 달은 다녀야 어디로 전학갈 수 있는 학교였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또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9월 6일
제주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서

김영갑 갤러리의 화장실.
남자는 역삼각형, 여자는 삼각형의 몸을 가졌다는 것을 알았다.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9월 6일
제주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서

창도 작품이 되어 있는 곳.
철마다 날마다 시간마다 풍경이 달리 담기는 사진이다.
창을 들어온 햇볕 몇 개가 창 아래쪽의 자갈 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9월 6일
제주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서

뒤뜰에서 만난 꽃.
꽃 이름은 부추란이 아닐까 싶다.
제주에는 여기저기 이 꽃이 많았다.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9월 6일
제주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서

김영갑의 사진은 도판으로는 몇번 본 적이 있다.
대형 판화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느낌은 대단했다.
사진에 담긴 풍경이 아름답기도 했지만
그것만이라면 그의 사진이 그렇게 대접받을 이유는 사라진다.
그에겐 그 이상의 것이 있었다.
보통 바닷가에 서면 파도가 밀려온다는 느낌을 받는데
그는 파도가 밀려가는 듯한 느낌으로 바다를 담아내고 있었다.
그의 사진 속에서 파도는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바다를 향하여 밀려나가고 있었다.
들판도 그의 사진 속에선 어디 먼 곳에 대한 동경이었다.
들판은 들판의 끝, 저 먼 곳으로 가고자 했다.
제주는 밀려오는 느낌이 지배적인 곳이다.
섬이기 때문이다.
그 밀려오는 느낌은 제주를 파도와 바다에 가두어 놓는다.
그의 사진은 안으로 갇히는 그 제주의 의식을 정반대의 느낌으로 뒤집어놓는다.
그의 사진 속에서 제주는 바다에 갇힌 섬이 아니라
바다로 끝없이 뻗어나가는 곳이었다.
그의 사진이 내게 준 가장 놀라운 느낌이었다.
또 하나, 밀밭인가 보리밭 사진인가도 놀라웠다.
바람이 불 때 밀이나 보리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밀이나 보리가 물고기가 되어 그 초록의 바다를 마음대로 헤엄치고 있었다.
보리밭이나 밀밭도 물고기로 가득찬 풍어의 바다였다.
대단한 작가였군.
사진은 제주에 가시면 한번들 들러서 구경하시길.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9월 6일
제주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서

갤러리로 들어오는 입구.
김영갑의 사진을 보는 것도 값진 시간이지만
여기저기 사진찍을 것이 많다는 것 또한 이곳의 매력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9월 6일
제주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서

영옥씨와 그녀.
저러고 놀고 있는 것을 보니 아직 늙지는 않은 것 같다.
신혼 부부들이 놀러와서 촬영을 많이 하는 곳라고 한다.
제주 여행 마지막 날의 오전이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서 흘러가고 있었다.
모두가 여유롭게 시간을 따라 천천히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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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oughts on “제주 여행 4 –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1. 이번에 제주에 오랫만에 가는데….
    꼭 들러보고 싶은곳이네요.
    김영갑씨의 사진이 너무나 보고 싶어집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1. 사진이나 그림이나 모두 원화와 인화된 원본 사진을 봐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책으로 나온 도판은 느낌을 전하지 못하는 거 같아요.
      가서 보시면 들릴만한 가치가 있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되실 거예요.
      좋은 시간되시길 빌께요.

  2. 6×17 파노라마 사진만 찍었다는 김영갑 선생 사진을
    보고 오셨군요. 얼마 전에 이 분의 책 <그 섬에 내가 있었네>
    양장본을 알라딘에서 반값에 팔길래 선뜻 주문하면서도,
    좋은 책을 싸게 사는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책 뒤에 갤러리 할인권까지 붙어 있더군요.

    사진가로서 갤러리에서 사진을 직접 보는 감회가 표현하신 것 이상으로
    남다르셨을 것 같습니다.

    1. 일행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결혼을 안했으니 저런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 거야라는 얘기가 나왔죠.
      그 얘기끝에 결혼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궁금증이 생겼는데
      일행중 하나가 아마도 제주에 내려온 신혼부부들
      사진을 찍어주며 살지 않았을까 하는 얘기가 나와서
      그 말이 정답이네 하면서 웃었습니다.
      제주까지 직접가서 볼만한 사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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