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근교의 산이 좋은 점 가운데 하나는
높이가 그다지 높지 않고 등산로가 무수히 많다는 점이다.
올라가다 힘들면 얼마든지 옆으로 샐 수가 있다.
길게 갈 사람은 길게 가고, 짧게 끝낼 사람은 짧게 끝낼 수 있다.
설악산에 처음 갔을 때 느낀 점 가운데 하나가
일단 등산로에 들어서면 정상까지 가는 도중에
가던 길을 돌아나오지 않는 이상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없다는 점이었다.
두 시간쯤 걷고 나면 돌아가는 것도 막막하게 느껴진다.
그때부터는 그냥 앞으로 계속 갈 수밖에 없다.
9월 5일 한라산에 올랐을 때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정상에서부터 내려가는 길이다.
내려가는 길은 관음사 코스로 내려갔다.
산에 갈 때 별로 정보를 챙기지 않는다.
설악산 갈 때 사람들에게 물어본 것은
가장 쉬운 코스가 어느 곳인가 하는 것이었다.
한계령 코스가 가장 쉽다고 했다.
한라산은 한번 가봤던 기억 때문에 더더욱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느 코스나 다 영실 코스보다 조금 길려니 생각했다.
두 배쯤 된다고 해도 그렇게 어려울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한라산 정상에 올라 여러가지를 알게 되었다.
한라산엔 성판악, 관음사, 영실, 어리목 코스가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영실 코스는 길이가 3.7km로 가장 짧다.
영실 코스와 이어지는 어리목 코스는 길이가 4.7km이다.
두 코스 모두 정상으로 가는 길은 개방하지 않고 있다.
둘을 다 합쳐도 이번에 하산 코스로 잡은 관음사 코스의 8.7km보다 짧다.
정상에서의 하산 시간은 오후 두 시로 제한되어 있었지만
그 시간을 50분 정도 넘기고 난 뒤
한라의 정상 백록담의 오른쪽 능선에서 안녕을 고했다.
설악산도 두번째 갈 때는 내가 준비를 단단히 했었으니
한라산도 다시 올 때는 준비를 단단히 해 가지고 오리라.
그때 다시 보자.
정상에서 내려서자 마자
관음사쪽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나왔다.
그녀가 팔을 펼치고 사진 한 장 찍었다.
아, 날아가고 싶어.
괜찮은 생각같기는 한데 그렇게 하려면 몸무게를 많이 빼야 할 것 같은데.
하도 허덕거려서 가방을 모두 달라고 했더니
카메라 가방은 자신이 들고 갈 수 있다며 고집이다.
그녀의 등산 가방만 내가 둘러메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아래쪽 풍경 중의 하나.
산 위에 평지가 펼쳐져 있다.
1시간 정도 내려오니 여기저기 고사목들이 보였다.
정상에서도 고사목이 있었지만 다소 크기가 작았는데
여기선 어느 정도 크기를 갖추고 있다.
이렇게 초록이 무성한 것을 보면
물은 부족함이 없는 듯 보이는데
어찌하다 말라 죽었는지 모르겠다.
내려오다 위를 올려다보니
비행기 한 대가 한라산 꼭대기 위로 날아간다.
지금 저 비행기에서 이 한라산이 다 내려다 보이겠지?
그래도 산은 역시 내려다 보기 보다 그 품에 들어야 제 맛이다.
벌써 200m를 더 내려와 우리는 해발 1700m의 아래쪽에 서 있었다.
우리는 점점 더 내려가고자 하는데 비행기는 점점더 고도를 높인다.
내가 조금 앞에 서고
그녀가 뒤따라 오도록 했다.
앞서서 가다 넘어진 적이 두 번 있었다.
설악산에서 한번 그랬고 대관령에 있는 선자령에 갔을 때도 그랬다.
꼭 올라갈 때 넘어졌다.
그래도 절뚝이면서 정상까지 갔었다.
그 뒤로는 항상 내 뒤로 세운다.
이상하게 뒤에 서면 넘어지질 않는다.
하긴 앞에 가면서 계속 정보를 주긴 한다.
앞서갈 때는 미끄럽네, 험하네 하면서 뒤를 챙길 수 있다.
올라갈 때는 버리고 갔지만 내려갈 때는 단단히 챙겨서 내려간다.
홀로 내려가는 것과 둘이 내려가는 것은 크게 다르다.
내가 나를 책임지는 것은 수월한데
그녀를 책임지는 것은 그리 수월하지가 않다.
그녀 뒤의 하늘에 좀전에 말한 비행기가 보인다.
사실 나에겐 비밀이 하나 있는데
내려갈 때는 비행기처럼 날아서 내려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올라가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내려가는 것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런데 그게 아는 사람이 있을 때는 날지를 못하고
또 등에 사람을 태우지도 못한다는 것이 흠이다.
그녀와 함께 내려가는 길이라 날아서 내려갈 수가 없었다.
그냥 천천히 같이 내려가는 수밖에.
앞산의 중턱쯤에서 초록에 묻혀 있는 바위가
마치 부처님 모습처럼 보인다.
부처님의 옷자락은 한참 아래쪽에서 바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녁 햇볕이 강했다.
탐라 계곡을 보니
한창 물이 나갈 때는 그 규모가 엄청난 것 같다.
계곡의 한가운데서 그 물살을 온몸으로 감내했을 나무들이
초록섬을 이루어 모여살고 있었다.
초록섬의 나무는 인생이 참 그렇다.
물이 마르면 목이 타도록 그리울 것이고,
물이 많으면 그것을 온몸으로 막으며 버텨야 할 것이다.
부디 절묘하게 그 중간으로 줄을 타고 좀 편하게 살 수 있기를.
내려오다 사슴을 만났다.
사람이 뜸해지자 나왔나 보다.
처음엔 엉덩이만 보이고 있었지만
포즈좀 취해달라고 한마디 했더니
휙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바라본다.
백록담에선 사슴 구경을 못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다 내려간 한가한 길을 꼴찌로 내려간 덕에
한라산에서 사슴도 보았다.
처음 만난 계곡의 다리.
이 다리의 너머에 기적같은 즐거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리 가운데서 올려다 본 한라산.
계곡에 물은 없었다.
물이 떨어져 서서히 목이 타고 있었다.
다리를 다 건너와 바라본 모습.
우리가 꼴찌인 줄 알았는데 우리 뒤로 쳐진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었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왔다는 그 사람은
결국 일행으로부터 뒤쳐져 낙오되고 말았다.
날보고 그 무거운 삼각대와 카메라 가방을 메고 어떻게 산을 오르내리냐고 했다.
나는 삼각대 없이 카메라와 렌즈 하나만 들고 산을 올랐다가
후회한 적이 생긴 뒤로는 무거워도 항상 들쳐메고 산을 오르고 있다고 답했다.
다리 건너로 보이는 봉우리는 왕관능이라 불린다.
우리를 눈물겹도록 만든 기적의 즐거움은 바로 이것이었다.
다리를 건너자 그곳에 물이 콸콸 쏟아지는 약수터가 있었다.
빈병에 물을 채우고 신발을 벗은 뒤 후끈 달아오른 발도 식혔다.
물론 그 전에 “야, 물이다”를 감격적으로 외쳤다.
시간이 벌써 오후 4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길이 다시 오르막으로 변했다.
정상에서 만난 젊은 사람에게 관음사 길을 물었더니
길이 오르락내리락하는데 풍경은 좋다고 답했었다.
두 번을 그렇게 오르락 내리락 거렸다.
바위 하나가 하늘로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다.
바람을 앙 물어버릴 심사인가.
왕관능과 한라산 정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엇비슷한 높이로 보이지만 실제 높이는 상당히 차이가 난다.
산 위로 흰구름이 푸른 하늘을 천천히 헤엄쳐 가고 있었다.
꼭 말대가리 형상과 비슷하게 보인 바위이다.
내려가면서 바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정상에서 안내인이 일단 쉬지 말고
중간의 휴게소까지 가라고 했다.
바로 그 용진각 휴게소에 도착했다.
휴게소 바로 앞으로 삼각봉이 보인다.
지금은 빛이 지천으로 쏟아지고 있지만 이제 곧 해가 저물게 된다.
용진각 휴게소의 안내인이 우리가 마지막이냐고 물었다.
우리는 뒤에 한 사람이 더 있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에서 자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 내려가면 그것을 확인하고 퇴근하는 것 같았다.
그의 늦은 퇴근이 우리 탓인 것 같아 조금 미안했다.
그러나 어쩌랴, 그녀를 챙기면서 내려가야 하는 것을.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고,
다시 길이 성판악 코스처럼 나무들이 길옆으로 늘어서면서 시야를 막기 시작했다.
카메라 렌즈를 바꾸고 주로 꽃을 찍으면서 내려갔다.
엉겅퀴가 많았고 예뻤다.
한창 때는 아니었고 이제 막 지고 있었다.
이쯤에서 사진찍겠다는 일념으로 정상까지 가느라고 먹지 못했던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다보니 우리 뒤에 쳐졌던 아저씨가 우리를 앞질러 내려갔다.
산수국으로 보이는데 색깔이 다양했다.
파란 색의 꽃도 있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용진각 휴게소의 안내인이 우리를 지나쳐 내려가며
서둘러야 해지기 전에 내려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안내인은 전등은 있냐고 했다.
나는 전등은 없는데 카메라 보조등으로 내려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녀가 중간에 다시 가방을 달라고 했다.
하지만 결국은 그녀의 짐을 모두 내가 짊어지고
그녀는 맨몸으로 따라오도록 해야 했다.
그녀가 짐을 모두 내게 준 뒤 날아갈 것 같다고 했다.
내려가다 보니 우리를 앞질러 갔던 아저씨가
길에 앉아 하염없이 쉬고 있었다.
아저씨에게 전등이 있냐고 했더니 없다고 했다.
그럼 이제부터는 우리를 떨어지면 안된다고 했다.
몇번의 야간 산행 경험으로
밤에 불이 없으면 도저히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은 전등을 챙겨오지 못했지만
언젠가 월악산에 갔을 때 유용하게 사용했던 카메라 보조광이 있어
그게 마음이 든든했다.
마지막 500m 정도를 남겨놓았을 때
길은 칠흑의 어둠으로 변했다.
아저씨는 앞에 세우고,
그녀는 내 옆에서 나를 붙들고 따라오게 하면서
카메라 보조광으로 길을 밝히며 걸음을 떼어놓았다.
카메라 보조광은 계속 켜있질 않는다.
초점을 잡는 동안만 켜진다.
카메라를 흔들어 초점이 잡히지 않도록 하면서 셋이 함께 길을 갔다.
월악산에 이어 이번에도 니콘의 그 유용한 카메라 보조광 덕택에
무사히 한라산을 내려왔다.
내 체력에 내 스스로도 놀랐다.
내가 상당히 믿을만한 사람처럼 느껴져 무지막지하게 뿌듯했다.
게다가 조난당할지도 모를 사람까지 하나 구제했다.
산을 다 내려오자 일행이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피곤도 있고 서귀포로 가 회를 곁들여 술 한잔씩들 했다.
숙소로 돌아온 뒤에는 어제에 이어 또다시 클라우드 베이를 찾았다.
생맥주 곁들여 공연 구경하고 오늘의 일정을 마감했다.
평생 잊지 못할 한라산 산행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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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thoughts on “제주 여행 3 – 관음사 코스로 한라산을 내려오다”
아름다운 산에 아름다운 사진이네여. 정말 멋있어여
높고 아름답고.. 아 제주가 고향인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은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살고 있어요. 갑자기 소식이 궁금해 지네요.
아니 뭐야~~~
난 걱정을 무지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려오는데 너무 힘도들고 시간도 늦어지는지라
한라의 풍경들을 눈에 담을 여유가 별로 없었는데..
내려오는데 자꾸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거 같기는 했지
영옥아~~ 종명아~~ 나 좀 봐~~
언제 또 만날수 있겠어~ 하며 한라가 부르더라고..
꼴찌가 다 나쁘기만 한건 아니였어
사슴까지 이리 배웅나왔으니..
털보님과 기옥이 무사히 하산해 주어서 감사^^~
우리는 항상 산에 가면 꼴지로 내려와서 익숙해 있었는데 한라산은 규제가 심하더군요. 세계 자연 문화 유산이라 그런지… 함께 해서 좋았어요.
니들 염려 덕분에 나는 올라가고 내려왔지.
하여간 니들은 학교 때부터 모범생이었어.
난 꼴찌가 젤로 맘이 편하더라구.ㅋㅋ
니들이 수시로 전화해주는 바람에 오르고 내렸지.
사진 들여다 보면서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슬며시 웃음이 나.
너도 얼른 사진 정리해서 올려줘. 귀경가게~^^
두 양반의 사진과 글을 보니
초짜가 올리기가 부끄럽사와요~
와우. 녹음이 짙은 한라산의 저 모습이. 따뜻하네요.
정말 한라산은 뭔지모를 로망을 주는 것같아요
뜰기님을 위한 아주 중요한 사실 한 가지.
모기는 한마리도 없었어요. ㅋㅋ
우리에게 저 물이 없었다면 아마 내려오지도 못했을거야.
산 위에서 물을 달라는 청년에게 아주 잠시 0.1초정도 머뭇거리다
물을 줬는데 저렇게 콸콸 흐르는 물을 만날 줄 어찌 알았겠어.
잠시지만 내가 뿌듯하기까지 했다니까.
흐흐, 난 그대를 짊어지고 내려오는 기분이었슈.
근데 짊어지고 내려올만 하더라. ㅋㅋ
사슴의 선한눈망울이 또다른 감동을 주고있군요
참으로 길고지루한 하산코스였지요.
하지만 어려운 등반코스를 완주했다는 자부심은 큽니다 ㅎㅎ
한라는 저희에게 한라가 아니라
제주의 에베레스트였지요.
당연히 자부심을 가져야지요.
기옥이 생각하면서 어미를 잘라먹었네요.
죄송^^
그나마 500미터에서 어두워져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곳부터는 돌길이지만 그래도 평지였지요
아래에서는 다들 한 걱정 하고 있었답니다 ^^
별말씀을요.
기옥이가 댓글달텐데요, 뭐.
카메라한테 두번 덕 봤지요.
여기서 내가 짠~하고 나타나야 되는거지?^^
먼저 내려가서 기다린 사람들한테는 미안하지만
줄서서 올라가다가 내려올 때 호젓하게 내려오니까
기분은 좋더라.
담엔 가방을 좀더 가볍게 하고
체력도 길러서 지리산 천왕봉을 완주해야겠다.
김포들판으로 갔어도 좋은 추억이 되었을 텐데
제주의 유혹이 좀더 심해서 결국 제주로 가고 말았지요.
어서 제주를 사랑으로 물들이시기 바랍니다.
ㅋ 이렇게 여유있게 내려왔단 말야?
션하게 발까지 씻구…
우린 줄서서 물 한병씩 받아 내려왔거던
근데 바로 내리막길 계단과 무지막지 높은 오르막 계단이 연달아 있었지
그때의 황당함이란… ㅋㅋ
예쁜 한라 꽃들과 순한 눈망울의 사슴…
정말 좋은 선물 받아왔네
제주를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절로…^^
내가 가본 곳 가운데서 정상에서 시간 내에 내려가라고 한 곳은 치악산과 한라산 이곳 두 곳이었어요. 치악산은 사다리 병창이란 코스가 있는데 그곳은 밤에 내려오면 목숨 날리기 딱 좋겠다는 생각은 들더군요. 한라산은 위험하긴 했어요. 불만 있었다면 더 여유있게 내려왔을 텐데 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