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의 미학

Photo by Kim Dong Won

저녁이 완연히 저물고 바깥엔 어둠이 몰려와 있었다. 이제 하루가 거의 마무리된 시간이었다. 잠시 카메라 가방을 뒤적거리며 아무래도 방수가 되는 좋은 카메라 가방을 하나 사야겠다고 말하자 그녀가 갑자기 내게 이렇게 말했다.
-뭐, 방수되는 카메라 가방? 아니,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기나 알어?
아니, 오늘이 도대체 무슨 날이길레, 하루 종일 참았다가 드디어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저렇게 말꼬리를 올리는 거지.
-오늘이 바로 우리 결혼기념일이야!!
아니, 오늘이 그런 날이야.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말끝을 올리며 사람을 긴장시킬 것까지야. 결혼은 뭐 나 혼자 했나. 둘이 같이한 결혼을 갖고 무슨 난리야.
-오늘 그냥 지나갈 거야? 아직 시간도 남았는데.
그럼 뭐, 같이 묵념이라도 하지뭐.
하지만 그 얘기는 꿀꺽 삼키고 말았다. 아무래도 반지라도 하나 손에 쥐어줘야 할 것 같았다. 급한대로 반지의 미학을 내밀었다.

반지의 미학
결혼식에는 반지가 빠질 수 없다. 아니 사랑할 때도 우리는 그것을 마련해주고 싶다. 그것이 굳이 이름있고 값비싼 보석이 아니라도 좋다. 초록으로 빛나는 풀잎 반지인들 어떠랴. 서로의 손가락 위에서 주는 이의 마음을 사랑으로 싣고 빛나면 그만인 것을.
그렇게 반지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사랑의 징표라는 아름다운 의미를. 그래서 반지를 끼워준다는 것이 무슨 절실하고도 명확한 사랑의 표시로 사람들에게 인식된다.
왜 우리는 결혼식 때면 반지를 마련하는 것일까. 사랑할 때 왜 우리는 상대의 손가락 위에 둥근 고리가 예쁜 반지를 끼워주고 싶은 것일까. 그것이 그냥 관례적인 예물로서의 의미 이외에는 아무 뜻이 없는 것일까. 그것이 그냥 상대를 기쁘게 해주고 싶은 한갖된 사랑의 선물일 뿐일까.
아니다. 거기에는 분명 그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다.

금반지에는 구멍이 있다. 이 구멍은 금과 마찬가지로 금반지에게는 본질적인 것이다. 금이 없다면 구멍은 반지가 아니다. 그러나 구멍이 없다면 금 또한 반지가 아니다.
-알렉상드르 코제브

그러나 사람들은 어떠했던가. 금반지에서 금밖에 더 무엇을 보았던가.
반지를 끼워준다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사고와 시선을 경계함이리라. 반지에는 금과 구멍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려 함이리라.
우리의 삶이 이와 무엇이 다르랴. 두 사람이 행복하게 그러면서 의미있게 살기 위해서는 사랑에 집착하면서도 또한 현실을 배제할 수 없다. 두 사람은 사랑과 현실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취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결국 사랑할 때 인간의 삶은 금반지와 같이 조형된다. 두 사람의 삶은 사랑에만 의존하는 것도 아니며, 또 현실쪽으로만 완연히 기울어 있는 것도 아니다. 마치 금반지가 구멍이나 금의 그 어느 한쪽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이.
반지의 금은 두 사람의 현실이다. 반지의 구멍은 그 현실이 두 사람 속에 아름답고 고귀한 의미로 설 수 있도록 해준 사랑이다. 그래서 반지는 언제나 구멍을 남긴다. 우리의 사랑이 들어설 자리로. 그리고 반지가 금만으로, 우리의 삶이 현실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하여. 또 우리의 삶에서 현실과 아울러 사랑도 언제나 함께 하라는 희망으로.
손을 내밀라, 그대여.
내 여기 그대를 위하여 반지의 의미를 세웠음이니.

나의 원래 계산은 반지의 미학을 내민 뒤 그녀의 손을 슬쩍 잡아주고, 그녀의 눈가에 번진 감동을 확인하면서 오늘을 넘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초리가 여전히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한 나는 곧바로 그녀와 함께 동네의 반지 가게를 찾았으며, 그녀의 손에 장식이 예쁜 반지를 골라주었다. 그녀가 아주 행복해 했다. 사랑은 풍성한데 너무 현실을 배제했었나 보다. 결혼식 때도 안해준 반지를 결혼하고 16년이 지난 오늘에야 해주었다. 역시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균형 감각이 중요한 것인가 보다.

20 thoughts on “반지의 미학

  1. 아~사진을 찍으면서도 그 점이 궁금 했거든요
    뭔가 있을 듯 했는데요…
    빛을 조절 못하겠더라구요…그 spot 측광~~~!!!
    봄비 속에선 처음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제가 욕심이 많은 듯 하네요…ㅎㅎ

    올 봄엔 동원님 덕분에~진달래..개나리…에 취해 봅니다
    동원님의 글 속에서의 이미지로
    진달래 사진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 해요
    저도 꽃멀미 속에 어지러운 봄을 맞고 싶네요

    아름다운 봄에 더 많은 것들 사랑하시면서 살아 가시길요~^^*

    1. 예, 고맙습니다.

      카메라는 빛을 조절하는 많은 장치들이 있어요. 셔터 스피드, 조리개, 노출 바이어스, 측광 방법 등이죠. 카메라가 지시하는 적정 노출이 있지만 그게 꼭 사진이 잘 나오는 건 아니예요. 그것보다 좀 밝게, 또는 좀 어둡게 찍는게 더 잘나올 때도 많지요. 심지어 약간 흔든 사진이 아주 독특하게 나오는 경우도 있어요. 그걸 많이 실험해 보시면 좋은 사진을 찍으시게 될 거예요. 카메라와 함께 즐거운 시간이 되시길 빌어요.

  2. 가르쳐 주신대로, 접사 사진을 여러 장 찍어 보았어요
    조팝꽃과 벚꽃들을요
    봄비 속에도 찍어 보고요.

    초보인데도…
    동원님의 사진들이 참고가 되어서
    날로 발전 하는 것 같아요
    좋은 글과 사진들…늘~감사 드려요…^^*

    1. 사진 구경하고 왔습니다.
      벚꽃 사진이 아주 예쁘게 찍혔네요.
      물기를 머금은 푸른 잎들도 아주 좋구요.

      한가지 도움을 드리자면 카메라는 빛을 측정하는 장치가 있어요. 그때 빛을 찍는 대상 주변으로 전부 참고를 해서 측정하는 경우가 있고, 찍는 대상만 측정해서 대상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있답니다. 마지막 사진의 경우 전체 측광을 해서 꽃의 흰색이 약간 어둡게 나왔어요. 뒤쪽이 아주 밝았다는 얘기가 되는 거죠. 이런 경우엔 spot 측광이라고 부르는, 대상에만 초점을 맞추는 측광을 하면 꽃이 아주 밝고 선명하게 나온 답니다. 자주 찍다 보면 요령이 생기실 거예요.
      좋은 사진 잘 봤습니다.

  3. 동원님의 이 글 읽고서..주저없이 니콘으로 샀어요…ㅋ
    잘 구입한건지요?
    니콘에서 토요 강좌도 있던데요…
    접사가 정말 촛점 맞추기가 어렵더라구요
    여러 장 찍는데…찰칵거리는 소리가 신비롭던데요
    망원렌즈로 호랑이 사진 찍다가 눈이 마주쳐서 그 안광에 놀랬어요..ㅎㅎ
    호랑이의 무게감이 그대로 전해져 오더라구요
    야외에 많이 다니면서 들꽃들도 찍고 싶네요

    방수된 카메라 가방은 사셨나요?
    눈부신 봄날이 열리네요…
    좋은 하루 되시길요~!

    1. 처음 카메라에 발을 들여놓을 때는 니콘이 좋아요.
      초점을 잘 맞춰 주고, 어느 상황에서나 무난하거든요.

      방수 가방은 거의 필수지요.
      어느 해 비오는 날 소백산에 올랐는데 비를 쫄딱 다 맞았지만 카메라 가방은 뽀송뽀송했다는…
      그냥 방수되는 것만으론 부족하고 비를 막아주는 레인커버를 함께 주는 제품을 고르시는게 좋아요.

      지금부터 두세 달 정도가 사진찍기에 가장 좋은 시기예요.
      꽃들이 많이 피거든요.
      좋은 사진 찍으시길 빌께요.

  4. 결혼기념일에 사진기 선물 받고…처음으로 접사 사진 찍는데…남편이 촛점 못 맞춘다고 어찌 화를 내는지요…남편은 설명서 읽고, 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사진기 파는 아저씨가 눈을 맞추면 된다고 했는데, 튜울립이 눈이 있어야지요..ㅋ
    접사사진으로 인물을 찍으니..주변이 흐릿하게 나와서 멋지네요..
    보통 디카 사진은 제가 훨씬 낫게 찍는데…남편 우쭐대게 제가 좀 참았어요…
    사실 반지 알이 있는데..이번 결혼기념일에 세팅해서 낄려고 했는데, 저는 카메라가 더 좋던데요…아, 벚꽃도 찍을 거에요…넘 신나요..ㅎㅎ
    두 분의 결혼기념일 날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들어 오네요…
    현실과 사랑~~~반지를 보면 언제나 상기 될 듯해요…!

    1. 축하드립니다.
      접사는 사진 중에서 제일로 어려워요.
      조금만 흔들려도 초점이 잘 맞질 않거든요.
      접사는 자동으로는 좋은 사진을 얻기가 어렵고 거의 수동으로 찍는게 좋아요.
      한번에 한장만 찍지 마시고 여러 장을 계속 찍어보세요.
      그러면 그 중에 하나는 초점이 맞거든요.
      저는 그렇게 하고 있어요.

  5. 핑백: Tree House
  6. 음… 니콘용으로 개조하는 비용과 MF, ME의 불편함을 생각하신다면 그냥 새로 구입하시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요?

  7. 아니, 지금 절호의 렌즈 구입 찬스에 초칠 거예요?
    혹시 안쓰는 캐논 렌즈 없나요.
    니콘용으로 개조해서 쓴다는 사람들도 있던데 말예요.

  8. 제가 보기에는 형수님의 미모는 몇 년안에 사라질 성격의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내면과 골격에서 오는 아름다움이기 때문이지요. 마운트라도 같으면 렌즈를 빌려드릴 텐데… 안타깝습니다. ㅎㅎ

  9. 야, 너 손가락 무겁지 않냐. 그 반지가 토키나 렌즈 하나 값이야. 810g 짜리 렌즈 무게에 달하는 가격의 반지라니. 나는 반지 대신 그 가격으로 렌즈 무게를 느껴보고 싶다.

  10. 요즘 토키나 렌즈가 아주 좋더라. 가격도 싸고. 일단 아무렇게나 찍어도 사진이 잘 나오더라. 이번 기회에 그거나 하나 장면 하면 안될까.

  11. 원래의 계획은 토요교실에 갔다 오는 것이었다. 그곳에 가면 신비하게도 마음의 끈이 툭 놓이면서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 때문이다. 아무런 욕심없이, 아니 욕심이 저절로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소리를 듣게 되는 그 곳… 거기에 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곳에 가지 못했다. 2층 청소하면서 너무 많을 시간을 보냈나보다.

    맛있는 카레로 식구들을 배불리 먹이고 설겆이를 막 끝낸 손의 물기도 채 마르기 전에 카메라 가방을 사고 싶다고 하는 나의 남자… 요즘 카메라와 렌즈가 아니면 대화가 되질 않는 나의 남자… 언제쯤이면 사고 싶은 렌즈를 장만할까가 주관심사이며 올여름 억수로 퍼부을 비에도 끄떡하지 않을 카메라가방하나 사서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닐 생각으로 가득찬 나의 남자…
    아주 절묘한 타이밍에 카메라가방 얘기를 하는 나의 남자… 그날이 하필 결혼기념일인 것을 새까맣게 모르고 카메라에 온통 정신이 팔려있는 나의 남자…

    그 남자에게서 나는 준비되지 않은 반지를 받았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반지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을 주고 싶었던 나의 남자, 그리고 더 큰 것을 주고 있는 나의 남자라는 것을 알기에 목걸이도 사고 귀걸이도 사라고 부추기는 반지가게 주인아저씨의 말을 무시하고 반지 하나만 끼고 나의 딸과 나의 남자를 대동하고 당당하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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